멜론은 어쩌다
아밀(김지현)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멜론은 자신이 좋았다.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멜론에게 멜론이 아닌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여자라느니 남자라느니 나누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돈이 많고 적고나 사는 집이 넓고 좁고를 따지지 않았으며, 어른이 되면 거짓임을 알게 되는 가짜 지식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런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때리거나 혼내지도 않았다. 그 상태는 너무나 당연해서 멜론은 지상의 아이들이 그토록 불합리한 일들을 견딘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놀랐다.               - '노 어덜트 헤븐' 중에서, p.113


면허 없이, 또는 면허가 있으면서도 사악한 저주를 행하는 불법 흑마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흑마법 사용을 꺼리는 마녀가 있다. 마녀 학교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따고,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정식으로 장사하는 백마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하느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산다. 친구들은 그런 마녀에게 고지식하다고 핀잔하지만, 스스로는 남들보다 특별히 양심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겁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그저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날도 인형에 눈알을 붙이고 있었다. 요즘 아이돌들은 VIP 팬클럽 특전이나 팬 사인회 특전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배포하곤 했다. 머리카락이나 눈물이 가장 흔하고, 가끔은 손톱이나 타액도 잇었다. 이 특별한 선물을 둘러싸고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팬들은 거금을 주고 아이돌의 신체 부위를 양도받거나, 그 신체 부위를 마녀에게 맡겨서 아이돌에게 축복이나 저주를 걸곤 했다. 마녀가 지금 붙이는 인형의 눈알 또한 그런 종류였다. 인형에 진짜 아이돌의 영혼을 살짝 덧입히면서 팬들이 자신의 스타와 함께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의뢰인이 들어온다. 데뷔한 지 이년 차인 솔로 남자 아이돌 인형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문제는 그 아이돌이 신체 부위를 배포하지 않았고, 의뢰인은 어디선가 그의 피를 구해온 것이다. 피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마력이 깃든 지료로, 이걸 이용하면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거나,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차원이 다른 재료였던 것이다. 과연 마녀는 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정말이지 모든 게 피곤해요. 너무 오래 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일찍 늙어버린 것만 같아요. 이래저래 헤프게 웃고는 다니는데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한 것 같아요. 밤이면 밤마다 뭔가가 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것같이 무거워요. 항상 아주 무거운 철로 만들어진 상자를 이고 사는 것 같아요. 끊임없이 싸워대는 것 같아요. 지겨워 죽겠어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가난하게 자란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걸 못 한 것도 아니고, 어디 크게 아픈 데도 없이, 잘 먹고 잘 자랐잖아요. 그건 나도 안다고요. 그런데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남들은 다 갖고 있는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요.              - '야간 산책' 중에서, p.319


<로드킬>에 이은 아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 마리사 마이어의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 마이클 로보텀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 등 많은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였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첫 산문집이었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는 작품을 참 좋아했는데, 다정하고 따뜻한 글이었다. 그에 비해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쓰는 소설들은 굉장히 다른 분위기이다. 소설을 쓸 때 굳이 필명을 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것이, 번역가일 때와 소설가일 때 두 자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아밀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기성문단 바깥 플랫폼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오며, 이제는 점점 더 자신만의 색채를 뚜렷하게 보여주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으니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인형 눈알 붙이기> 등 여덟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와 이성애자 여성의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쯤을 보여주는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자가 어려웠던 부치가 섹스 로봇을 집에 들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선망의 대상이자 경멸과 타도의 대상인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아이돌의 이야기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손가락이 짧다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힌 소녀가 '차원의 마녀'라는 점쟁이와 하게 되는 아주 특별한 거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선하고 적법한 마법만 행하느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 사는 마녀에게 들어온 거부할 수 없는 솔깃한 의뢰 <인형 눈알 붙이기> 등 유머러스하고 경쾌하지만, 예리한 시선으로 현실을 살짝 뛰어넘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아밀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는 인간보다 인간을 더 이해하는 로봇이 있고,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로 차별당하는 일이 예사로우며,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간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마법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40년 크리스마스는 기묘하게 평화로웠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포로들은 전쟁 상황을 조금도 몰랐다. 고향에서 오는 편지도 없고, 최고 사령부의 지시도 없고, 미래에 대한 감도 없었다. 중세의 성벽 안에 갇힌 그들은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은 내일 끝날 수도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전투의 흥분, 포로가 된 충격, 다른 수용소에서 이곳으로 이송되며 느낀 불안감을 겪고 나서 만난 콜디츠는 동떨어진 장소, 거의 비현실적인 장소처럼 보였다. <도시 위에 높이 떠 있는 동화 속의 성.>                 p.40~41


1943년 9월의 어느 따뜻한 밤 자정 직전에 구스타프 로텐베르거 원사가 소총을 둘러멘 병사 두 명과 테라스에 나타났다. 포로들은 두 시간 전 이미 숙소에 들어갔고, 숙소 출입문도 잠겼다. 콜디츠는 조용했다. 로텐베르거는 첫 번째 경비병에게 다가가 서쪽에 탈출 시도가 있으니 즉시 경비실에 보고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두 번째 경비병과 세 번째 경비병에게 다가가 근무가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근무 시간은 아직 두 시간 더 남아 있었다. 오늘 근무는 일찍 끝내라는 로텐베르거가 유난히 성마르게 구는 것 같았다. 사실 로텐베르거는 가짜였다. 그의 정체는 스물다섯 살의 영국군 중위 마이클 싱클레어였다. 이미 콜디츠에서 두 번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온 경험이 있는 그는 재능 있는 아마추어 배우이자 망상가였다. 


머릿속에 온통 탈출 생각뿐이었던 그의 계획은 단순했다.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보낸 뒤, 먼저 스무 명이 침대보를 찢어 만든 끈을 이용해 건물 바깥쪽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그렇게 인근의 숲으로 들어가면, 남은 일행이 그들의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당시 콜디츠에 갇힌 포로들 중에는 거의 3년이나 된 사람이 많았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탈출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감시받는 자와 감시하는 자 사이의 전쟁이 수용소에서 점점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콜디츠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탈주가 될 터였다. 과연 그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몹시 굶주린 포로들이 더 많이 도착하자, 에거스는 각자에게 빵 한 조각과 잼을 나눠 주면서 그들이 서로의 빈약한 음식을 훔치지 못하게 권총을 겨누었다. 공습 사이렌이 밤낮으로 울렸다. <모두가 밀치고, 소란스럽고, 사과하고, 냄새가 난다.> 플랫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마침내 연료마저 떨어지자, 독일군은 소수의 포로들을 밖으로 보내 티어가르텐에서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오게 했다. 그렇게 나간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마당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데, 감옥 냄새가 우리를 강타했다.> 콜디츠는 얼어붙을 듯이 찹고, 악취 나고, 굶주리는 연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p.294


독일의 물데강에서 45미터 높이로 솟은 산꼭ㄷ기에 위치한 콜디츠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독일은 1043년경 지어진 이후 1천 년 동안 강대한 왕조들이 권력과 명성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동안 증축과 개조,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던 고딕 양식의 성을 개조해 콜디츠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성의 목적은 처음부터 한결 같았다. 신민들에게 짓눌릴 듯한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 통치자의 힘을 보여 주는 것, 적에게 겁을 주고 포로를 감금하는 것. 그곳은 구제불능의 포로들을 모아 놓은 수용소였고, 수많은 탈출 시도가 있었다. 포로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간수들은 강력한 통제와 긴장 속에서 이를 감시했다. 콜디츠성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었으나 부조리할 때가 많았고, 고통의 장소였으나 고급스러운 희극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책은 철조망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채 엄중한 감시를 받는 이 새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콜디츠는 높이 27m의 담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외부로 이어지는 2개의 통로를 제외하면 주변이 가파른 낭떠러지 혹은 해자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 기관총 감시초소가 설치돼 삼엄한 경비 태세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책에는 생생한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콜디츠성은 겉에서 보기에는 단단하고 틈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숨겨진 방, 버려진 다락방, 중세식 잠금장치로 단단히 잠긴 문, 오래전에 기억에서 사라진 틈새 등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래서 탈출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콜디츠에는 전쟁 전의 사회가 축소판으로 구현되어 있었는데, 다만 실제 사회보다 더 기괴할 뿐이었다. 저자는 기밀 해제된 공문서, 생존자 인터뷰 기록, 포로 및 독일군의 저서 등을 토대로 콜디츠에서의 일상과 인물들을 재구성했다. 이 책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의 포로수용소 역사를 정밀하게 복원한 놀라운 논픽션이다. <나치에 맞선 저항>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공간으로 회자되어 온 콜디츠의 진실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웬만한 영화보다 더 극적인 탈출과 생존의 기록이 궁금하다면, 극한에 처한 인간의 면면을 통해 그 어떤 전쟁 서사보다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윈 - 제3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대상 수상작 텍스트T 16
유진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도 된다고. 그 세계로.'

고유한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적의에 가득 차 그 애를 노려보았다. 나는 내 삶을 지켜야 했다. 고유한은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검은색이던 눈동자가 햇빛에 희석되어 갈색으로 변하자 조금은 다정하게 보였다. 고유한이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어. 그걸 모르고는 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p.123


중학생 유주는 걱정많고, 숫기없는 성격에 자신감도 없어 친구를 사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당연히 일 년 중 가장 싫어하는 기간은 새 학기. 이미 무리가 형성된 아이들 틈에서 겉돌며 눈치만 보느라 매일이 힘겹다. 이 년 전 대입에 실패한 뒤로 스스로 방에 갇힌 언니를 살피느라 집에 가도 부모들은 유주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유주는 매일 밤 생각한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딴 인생은 싫다고, 새로운 인생을 갖고 싶다고. 잠들면 내일이 올 거라는 생각으로, 소리 없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삶이라니 얼마나 지옥같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밤마다 텅 빈 방에 혼자 앉아서 '내일 또 학교에 가야 돼'를 고민하던 유주에게 변화가 생긴다. 어느 날 머리가 아파서 진통제라고 생각하고 초록색 캡슐형 알약을 먹게 되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주는 약을 먹은 뒤 현실과 비슷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완벽한 세계에서 깨어난다. 집에는 다정한 부모님의 따뜻한 관심을 받고, 학교에서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중심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꿈인 걸 알지만 절대 깨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그렇게 유주는 트윈이라는 초록색 알약을 통해 꿈과 현실을 오가기 시작하는데, 꿈속이 풍요로워질수록 현실은 점점 더 암담해졌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알약을 먹고 잠들면 그곳에 자신만의 세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꿈 속 세계가 영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과연 완벽한 행복일까? 




"너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잖아."

"알아.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거잖아."

나는 기계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언니가 말했다.

"그게 잘못됐어?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한 게 잘못됐냐고."

"그건 현실이 아니니까."

"현실인지 꿈인지가 뭐가 중요해? 네가 말하는 현실이 뭔데?"            p.206


아이돌 연습생처럼 잘생긴 전학생이 짝꿍이 되어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반장이 되어 교실의 중심이 되고, 시험을 치면 전과목 올백에 미술 실력도 뛰어난, 그야말로 완벽한 자신의 모습에 유주는 점점 익숙해져 간다. 하루하루 눈을 뜨는 것이 지옥이었기에, 자정이 되기 전 알약을 하나씩 먹고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런데 보통은 잠을 자고 나면 현실로 돌아왔는데, 잠을 잤는데도 다른 세계에서 다음 날을 맞이하게 된다. 약을 먹지 않고도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다니,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니 유주는 들뜬 마음이다. 하지만 꿈속은 현실과 거울같이 닮았다. 십 대가 며칠씩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고 있었고, 현실의 유주 역시 병원 침대에 누워서 깨지 않고 있을 터였다. 아이들은 암거래 사이트를 통해 약을 거래하고 있었고, 그렇게 현실과 꿈의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었다. 점점 더 약에 의존하게 된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은 청소년 심사위원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제3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너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뜻하지 않게 외톨이가 되거나 고립된 생활을 견뎌야 했던 경험이 있다면 극중 유주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고민을 정말 현실적으로 담아 내면서 놀라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청소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마음 아프지만 훅 빠져들어 읽게 되고, 마치 내 이야기 같아 공감되고, 너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청소년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구석 삼국지 기행 : 위나라, 촉나라 편 - 기행장군 양양이의 다시 보는 삼국지 이야기
기행장군 양양이(박창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보통 유명인의 생가나 역사 유적지는 관광지로 화려하게 조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누상촌은 달랐다. 입구는 소박하고 조용해서 초라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곳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비가 자랐던 땅은 인위적 개발 없이 자연스럽게 변하며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덕분에 유비의 삶이 단순히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p.198


삼국지 역사 현장을 찾아다니는 유튜브 채널 '기행장군 양양이'는 2019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약 80여 곳의 유적지를 누비며 기록해왔다.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임과 소설을 통해 삼국지에 푹 빠져 있었던 '삼국지 덕후'이다. 언젠가 꼭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장과 영웅들이 머물렀던 도시들을 직접 가보겠다는 다짐은 자연스럽게 한문과 중국어 공부로 이어졌고, 결국 <삼국지>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는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유튜브 영상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상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이야기와 부족했던 설명을 보완했고, 새롭게 알게 된 최신 정보들도 수록한 것이다. 그러니 영상을 재미있게 보아왔던 구독자들에게도, 삼국지를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도 훌륭한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위나라와 촉나라의 이야기를 1, 2부로 나누어 구성하고 있다. 1부 위나라 이야기에서는 조조의 고향부터 시작해 그의 정치적 야망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실현되었는지를 만날 수 있다. 2부 촉나라 이야기에서는 유비의 고향에서 시작해 그가 다스렸던 지역과 적벽대전이 벌어진 실제 무대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기대를 품고 찾은 장소가 예상과 조금 다르기도 하고, 치열했던 전투 현장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장소도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장소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으며, 그저 발을 디디는 순간 왜 수많은 세력이 그곳을 차지하고자 했는지 그 절실함이 체감되는 곳도 있었다. 현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 한때는 <삼국지>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하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새삼 부러워지기도 했고, 후대의 문학과 전설 속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 장소를 목격하기도 한다.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야말로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역사 기행이 펼쳐졌다. 




이 장면은 소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다. 하지만 소화고성의 서문인 임청문 아래에서 만난 한 노점 주인은 "바로 앞에 보이는 이 임청문 아래가 마초와 장비가 싸운 그 자리요!"라며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고, 소설의 장면이 실제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현재를 지탱해 주리라는 생각에, 굳이 진실을 바로잡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허구든 아니든 아직도 이곳에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p.309


삼국지는 정말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되어 있는데, 나도 아주 오래 전에 열 권짜리 시리즈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등장 인물만도 무려 1,000명이 넘게 나오는데다 중국의 지명들 또한 헷갈리고, 그 분량도 만만치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은 제대로 내용도 생각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삼국지의 그 현장들을 실제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하나둘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삼국지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도 말이다. 100년의 역사가 펼쳐진 바로 그 현장을 직접 밟고,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이기에 뭉클한 부분도 있었다. 사진 자료들도 아주 많이 수록되어 있어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 책은 단순히 유적지를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공간적으로 재구성해 위나라와 촉나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장의 서두에 배경지식과 함께 보면 좋은 기행 영상이 QR코드로 수록되어 있고, 기행 루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지도가 첨부되어 있어 삼국지를 잘 모르는 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장비가 오랫동안 다스렸던 도시 낭중에서 장비소고기와를 맛보고 수제 맥주 장비정양을 곁들이고, 모진도의 가파르고 험한 절벽에서 헌제의 드라마틱한 탈출 과정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조조가 시를 읊던 장소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현장을 비롯해서 백마전투의 평야, 적벽대전의 장강 하구 등 삼국지의 결정적 장면들이 실제 어떤 공간에서 이루어졌는지 만날 수 있어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방구석에서 편하게 <삼국지>의 무대를 만나보고 싶다면, 쉽고 재미있게 <삼국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봐도, 수학 문제를 풀어도, 몰래 연습장에 축구 필드를 그리며 딴짓을 해도 소용없었다. 어떤 순간은 끊임없이 파고든다. 모든 상상과 감성, 논리와 태도를 허물고 보호 구역을 침입해 속을 난장판으로 뒤집는다.

잊으려고 해도, 외면하려 해도 순식간에 생생하게 복원되는 기억.

너무 강제적이어서 불편한 기억.

그런 건 장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경험이라고 부른다.                p.97


그야말로 올해 여름을 휩쓸었던 이야기를 가을의 문턱에서 만나보았다. 작가가 직접 겪었던 사건들을 토대로 쓰인 소설이라 그런지 감정 표현이 굉장히 디테일하고, 섬세한 작품이다. 누구든지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는 천국이라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작품 속 제니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제니는 열 살에 갑작스럽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한 뒤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영어를 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잘한다고 모든 고민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제니는 경계에서 서성이는 존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다. 얼마 뒤 같은 한국인 이민자 '한나'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뒤, 제니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한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도 윽박지르듯이 자기 이름을 표명하고 다녔다. '잇츠 낫 해나. 잇츠 한나'를 로봇처럼 반복하는 한나는 금방 고집스러운 아이, 유별난 아이로 알려졌다. 한나는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제니는 한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한심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한나 엄마는 제니의 엄마와는 달리 자주 학교에 나타났다. 한나를 데리러 오는 일 말고도 지도 선생님과 수차례 면담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예민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곤 했고, 달래면 또 금방 그쳤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한나는 매일 조금씩 귀찮은 아이가 되어갔고, 규칙을 지키지 않고, 숙제를 제출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제니는 그런 한나를 지켜보며 자신이 몹시 미워했던 백인 아이들과 점점 비슷해져간다. 아이들에게 미움받는 한나와 가까워지는 것은 곧 무리에서 다시 한번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니는 한나가 당하는 것을 방관했고,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으면서 자꾸만 신경쓰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있잖아, 제니."

어느새 물소리가 멈추고 한나가 나를 불렀다. 그 애는 먼저 불러놓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을 틀었다. 유리에 귀를 박고 있던 나는 말보다는 진동으로, 그 안에서 요동치는 울림으로 한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

그 순간 내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타일 바닥으로 똑 떨어졌다. 

동그랗게 고인 물방울이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고 구르는 것을 보다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p.159~160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한나는 우연히 제니가 한국어로 통화하는 것을 보고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네가 한국어를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다고. 그 동안은 하나도 못 알아 들어서 공지 사항이든, 숙제든 알 수 없었다고. 영어 유치원까지 다녔다는 한나가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제니는 한나가 통역을 요구하거나, 숙제를 도와달라고 할 때 마지못한 기분으로 도와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억울함과 분노, 자격지심과 콤플렉스, 질투와 동경, 천국과 지옥....의 감정을 오가며 제니와 한나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나름의 우정을 쌓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 번째 여름,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인 여자아이들이 초대한 호숫가 모임에 가게 된다. 그날은 제니의 생일이었고, 그 호수에서 단 한 사람만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우리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대해,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이민자들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이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새라가 한나의 머리끈을 잡아당기고 뜯어내듯 풀어내리는 장면이나, 테일러가 한나를 모욕하는 장면, 여자아이들이 빠르고 어려운 영어로 말하며 한나를 놀리는 장면도 작가가 겪은 것이라고. 그렇게 작가는 한나에서 제니로 자랐다고 말한다. 구조게 적응했고, 로렌처럼 부역했고, 어느 순간부터 자기방어, 합리화, 변명 등의 악순환에 갇혀 스스로에게,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많인 이들에게 와 닿았던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머릿속으로만 쓰는 이야기라 직접 몸으로 체화한 이야기는 분명 다른 지점이 있을 테니 말이다. '여름은 고작 계절'이지만, 마음에 커다란 멍이 새파랗게 드는 시간일 수도, 터무니없는 기쁨과 괴물 같은 고통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구나 친구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미숙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