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책 교유서가 시집 4
기혁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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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쩌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의미의 자리에 위로와 이해가 놓이는 날이면 귀하게 여긴 자들이 몰려와 읽고 말하고 울었다 한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으며 혼잣말로도 상처 주는 일이 없었다... 한겨울 취객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죽었으나 그것조차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었다 한 장씩 찢겨 아무렇게나 뭉쳐진 후 다시 기분의 화로에 던져지곤 했다 오랫동안 그뿐이었다 겨울은 망각의 계절이었다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p.36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다.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는 연두색,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는 빨간색,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는 핑크색인데, 기혁 시인의 <소설책>은 하얀색이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그라데이션을 준 내지가 특히 예쁜데, 이번에는 오렌지빛깔로 내지를 만들었다. 


시인은 '12.3 내란을 비롯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소설보다 더 진짜처럼 버티고 있는 세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시를 쓸 순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시집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집인데 제목이 '소설책'이라 읽기도 전부터 궁금했다. 시집의 제목이 '소설책'인 것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 시집에는 더 놀라운 시가 숨어 있다. 시 한편이 무려 32페이지짜리다. 이렇게 긴 시를 만난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시였다. 또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로서의 '소설'에 대한 탐구와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장르에 대한 사색도 담고 있다. 현대시작법, 신파 소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작가주의, 보던 소설 타임스, 문학 연구자, 액자식 구성, 멜로드라마, 독자와 목차, 서평가 등 시의 제목부터 흥미진진한 시집이었다. 




나무로 만든 종이 위에/나무라는 글자를 쓰면 슬프다/소설이 되지 못한 나무가 실패한 문장을 접고/접힌 기억이 모여 종이비행기가 되어 날아갈 때/나무의 고향에선 나무끼리 사랑하고/두 발로 걸어가 연인의 어깨를 감싸고/밤마다 초록색 외계인이 찾아오는 꿈을 꾼다는데/이상하지? 씨앗의 자유로움을 기억할 때 잎새는/주어가 되었다가 푸름을 지닌 결말이 되었다가 아슬아슬한/서술어가 되지              -'비소설' 중에서, p.73


'소설책의 쓰임'이라는 시도 너무 재미있었는데, 각종 받침, 표절 연구, 범죄의 모방과 예방, 촬영용 소품, 1인당 독서량이 시력 감퇴에 미치는 원인, 주고 싶지만 받기 싫은 선물, 대중교통 활성화 등 시인의 번뜩이는 재치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시집은 글보다 여백이 더 많기에 금방 읽어 버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은유와 상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면, 이 시집은 서사를 가지고 있는 소설처럼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시들로 가득해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더딘 편이다. 천천히 곱씹으면서, 오랜 시간을 들여 아껴 읽고 싶은 시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페이지로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단 몇 줄로 축약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시'라면, 그렇게 함축된 문장과 문장 사이, 쓰여지지 않은 더 많은 말들이 들려오는 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시집처럼 말이다. 


다른 맥락에 놓인 문장, 주객이 전도된 상상력, 근거를 잃어가는 소설, 쓰이지 않는 이야기의 결말, 이미지의 비좁은 틈새로 파고드는 텍스트, 소설이 되지 못한 나무... 낱낱의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호흡과 리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가슴을 통과해서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소설이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시는 금이 간 현실을 미화하는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여러번 읽었던 시집이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읽을 수록 행간에 숨어 있는 진실이 보이는 그런 시집이었기 때문이다. 시집에 소설을 불러들인 이유가 궁금하다면,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시집을 만나보고 싶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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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란 무엇인가?
디르크 회르더 외 지음, 이용일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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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들어오는 이주와 나가는 이주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은 이러한 이주의 복합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이것은 "고국"에서 타국의 "새로운 세계" ─ 많은 신화들이 가정하듯,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더 나아진다 ─ 로의 일방적인 이주 경로만을 제시한다. 이주는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의 소수민족 집단촌으로의 이동이나 제약이 있는 구세계에서 무한한 새 기회의 땅으로의 이동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주"라는 개념은 다양한 선택들을 함의하고 있다.             p.30~31


인류의 역사는 곧 이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를 가로질렀던 호모 사피엔스의 이주부터 시작해 초기 농경시대의 이주들을 비롯한 선사시대 이후로도 도시화 과정 동안, 상호문화적 접촉과 순환 무역, 식민 정복 사회를 거쳐 19세기에는 이주 체계들이 전 지구적으로 작동했고, 20세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난민 발생, 순혈주의, 강제 노동 이주로 계속 되어 왔다. 


언젠가 미등록 장기체류 이주아동을 다룬 책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다. 이주민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 중 부모의 체류자격 상실, 난민 신청 실패 등 다양한 이유로 체류자격이 없는 아이들을 미등록 이주아동이라고 한다. 국내에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0~30만명, 미등록 이주아동은 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니 생각보다 꽤 많은 수이다. 부모가 유효한 체류자격이 없으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법을 어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주민(외국인)등록번호가 없기 때문에 본인 명의의 핸드폰 개통이 어렵고, 보험 가입이 필요한 수학여행을 가거나 QR 체크인을 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도 할 수가 없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거해 교육받을 권리는 갖지만,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 살아갈 자격은 없는 모순된 현실에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이주자의 삶과 정체성을 그린 디아스포라 문학들도 꽤 많이 읽었는데, '이주'라는 개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이 정도였다. 




이동하는 남성과 여성의 관점과 삶들을 진지하게 고려함으로써 인종과 젠더의 중요성과 민족국가들의 상당한 권력이 주목을 끌게 되었고, 학계는 지난 20년간 이러한 각각의 쟁점들을 더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스스로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지를 결정할 때 글로벌하게 생각하는 이주민들은 거의 없는 반면, 이주민들 이 맞닥뜨리는 권력을 가진 국가들은 그렇게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사실 다양한 시점에서 서로 연결된 사회들 또는 국가들을 넘나들며 느슨하게 공유되는 이주 체제들의 일련의 변화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p.250~251


문학, 영화, 혹은 뉴스를 통해 난민과 이주노동자, 디아스포라 등 '이주'라는 단어는 위기나 갈등의 언어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 정도의 개념으로만 생각해왔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이 책은 인류가 살아온 긴 시간 속에서 인류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있어 놀라웠다. 이주사 연구의 선구자인 회르더와 하르치의 역작인 이 책은 이주를 특정 시대의 문제나 정책적 대응 대상으로 축소해 온 기존의 시각을 재검토하고, 학제간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실 '이주사'라고 하면 굉장히 어렵고 우리와 먼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주'란 본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꼭 국가간, 민족별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님 집에서 본인의 대학으로 이동했거나, 출신지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긴 것도 모두 이주에 해당하니 말이다. 그렇게 수 세기와 수천 년에 걸친 이주의 형태들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주사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주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 삶의 본질적 조건이라면, '이동'을 인류 역사의 상수로 놓고 세계사를 다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흔히 이주민을 ‘뿌리 뽑힌 자’ 혹은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문제적 존재’로 인식해왔다면, 이 책이 그러한 선입견을 완전히 바꿔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의 각 단계에서 보이는 이주의 특징과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 나가는 구성이라, 역사와 세계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호모 사피엔스부터 21세기 난민까지, 장기적 관점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내는 역사 이야기가 이주사에 대한 입문서로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으로 이주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역사 속 이주라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현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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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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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들보다 먼저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고, 이후 연쇄적으로 이어진 사건들이 나머지를 해결해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생에서 운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행운과 불운이 결국 서로 상쇄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운이 세 번만 연달아 작용해도 당신의 커리어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당신의 인생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한 피드백 루트가 만들어 낸 결과는 얼마나 될까?              p.70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이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는 내가 이전에 시청한 작품을 토대로 취향이 비슷한 이용자들의 데이터와 비교분석해 추천 작품 목록을 보여주고, 아이폰의 시리에게 말을 걸면 척척 알아듣고 답변을 해주며, 구글번역은 외국어 텍스트를 수준급으로 번역해낸다. 이러한 인공지능 또는 기계학습은 모두 수학과 통계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고, 발전해왔다. AI의 발달 또한 모두 확률을 바탕으로 한 수학 덕분이며 다양한 경쟁 상황 속에서 최상의 전략을 알려주는 이론도 역시 수학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데이터가 새로운 언어가 된 시대에 숫자와 통계를 어떻게 읽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과잉 정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데이터 안의 정보를 이해하여 활용하는 능력인 '데이터 리터러시'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각종 데이터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엘카노 왕립 연구소 과학 자문위원이자 2024 스페인 저널리즘 혁신상 수상 작가인 키코 야네라스는 이 책에서 동물의 생태부터 스포츠, 정치,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례를 넘나들며 데이터 리터러시의 실제를 풀어낸다. 자연은 이상할 정도로 직관에 반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가는데 그에 대한 사례로 유럽 뱀장어의 사례를 들어 설명해준다. 유럽 뱀장어는 수십 년을 살 수 있고, 짝짓기를 위해 수천 km를 이동하며, 생애 동안 세 번의 변태를 겪는다. 저자는 수세기 동안 미스터리의 생물이었던 뱀장어의 생애를 통해 세상이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앨깨워준다. 이것을 시작으로 세계사, 정치, 스포츠, 게임 등 광범위한 사례를 통해 직관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데, 매우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를 간과한다. 가령 정원이 딸린 집을 살 때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잔디 관리나 지방세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도 부담은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정원에 잡초가 무성해질 즈음이면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후회할 것이다. 그런데도 다음 날이면 또다시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이는 우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추론할 때 저지르는 실수에 해당한다.                p.294


아이스크림 판매를 금지하면 범죄 근절에 도움이 될까?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현상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걸까? 실제로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증가할 때 살인 사건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살인을 유발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살인 아이스크림'은 '상관관계는 인과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통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말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상승할 때, 살인 사건도 덩달아 증가한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이 살인을 유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더라도,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단순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는 크나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과잉 정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인터넷에 넘쳐나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정확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사실 검증을 위해 통계 자료를 제시하는 이른바 '팩트 지상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검색 한 번으로 우리는 무한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한 양이 질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습득한 정보에서 신뢰해야 할 내용과 경계해야 할 부분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인과성과 우연, 불확실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데이터가 과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과학, 심리학의 문제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과학과 인문학의 간극을 메워줘서 통합적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수식이나 도표를 제시하지 않고, 통계학적, 심리학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데이터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다. 숫자와 데이터의 세상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면, 데이터 리터러시 능력을 키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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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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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게 상상력의 힘이야, 그는 속으로 말한다. 아니, 그냥 간단하게, 꿈의 힘. 사람이 허구의 작품에서 전개되는 가상의 사건으로 인해 변화를 겪을 수 있듯이 바움가트너는 꿈에서 자신에게 스스로 해준 이야기로 인해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이제 창 없던 방에 창이 생겼다면, 누가 알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창살도 사라져 마침내 바깥공기 속으로 기어 나갈 수 있는 날이 올지.              p.80


폴 오스터 생애 마지막 작품인 <바움가트너>가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책을 가제본으로 읽었기에 아름다운 본책을 소장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더 예쁜 버전으로 만날 수 있어 리커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기존 버전의 표지도 함께 판매되고 있는데, 주인공 바움가트너와 그의 아내 애나 버전으로 두 버전을 함께 두면 마치 세트처럼 느껴지니 둘다 소장해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나온 특별판에는 김연수 작가의 헌정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20대 중반에 처음 읽었던 <뉴욕 3부작>부터 폴 오스터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사적이고도 각별한 애도가 담긴 글이라 너무 좋았다. 


10년 전 전혀 예상치 못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노교수 바움가트너는 그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30년 이상 함깨 했던 애나는 그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남겨진 이는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아주 좋은 봄날 아침이었다. 바움가트너는 서재에서 글을 쓰다 필요한 책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엌에서 나는 냄새에 가보니 아침으로 먹을 달걀을 삶던 냄비가 타버렸고, 그걸 들어올리려다 손을 데고 만다.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던 플로레스 부인의 딸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다쳐 어머니가 일을 못가게 되었다고 울먹이고, 바움가트너는 어린 소녀를 달래주느라 10분이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전기 회사의 계량기 검침원을 지하실로 안내하다 헛딛는 바람에 무릎과 팔꿈치를 다친다. 이상한 사건 사고로 얼룩진 그날, 통증과 피로로 인한 안개 속에서 시커메진 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에게 <그때>라는 사라진 세계가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이제 세부적인 것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 어딘가에서 차를 세우고 피크닉 점심을 먹었던 일, 모래가 많은 땅에 담요를 펼치고 애나의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건너다보았던 일은 떠오른다. 그때 그는 강렬한 행복감이 큰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p.242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수도, 예상치 못했던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삶이지만, 우리가 그 모든 일에 미리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맞이하게 되는 기쁨과 생각지도 못했던 비극에 망치로 두들겨 맞아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절망이 공존하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상실'과 기억' 또한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온다. 냄비가 그을리고, 그가 층계에서 굴러 떨어지던 날 견고하게 묻어 두었던 과거에 금이 가고 쪼개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대학원 1학년생이던 때부터,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되고 이후 함께한 40년간의 세월,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양장점 주인이자 실패한 혁명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 이르기까지.... 한 인물의 내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아내가 평생 써왔으나 한 번도 발표한 적 없던 글들과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들이 그의 내적인 여정과 긴밀하고도 자연스럽게 뒤얽히면서 그는 비로소 과거를 두려움 없이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은 〈정원사〉라는 뜻을 가진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10년 째 그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30년 이상 함께 했던 애나는 그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남겨진 이는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허구와 환상을 넘나들며 한 사람의 삶을 차곡차곡 그려나간다. 삶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이 70년이 넘는 인생 가운데 마지막 2년 정도라는 기간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읽다 보면 생애 전체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삶은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헤어지고,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며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바움가트너는 기억의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얽혀 있는 삶의 조각들을 그러 모은다. 특히나 이 작품은 폴 오스터가 죽음을 앞두고 써낸 그의 유작이기에 더욱 절실하고도 감동적이다.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밀도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상실과 기억에 관한 아름다운 사유를 보여준다. 폴 오스터의 빛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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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3부작 세트 - 전3권 머묾 세계문학 사랑 3부작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외 지음, 승주연 외 옮김 / 머묾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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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들이 무슨 사건을 갈망하고, 변화가 주는 기쁨을 목말라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계절 내내 한곳에 머무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그렇게 가을, 겨울이 많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조차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첫눈, 고백> 중에서, p.73


'머묾'의 세계문학 시리즈, 그 첫 번째 <사랑 3부작> 세트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순정, 19세기 프랑스의 욕망, 20세기 미국의 상실을 담은 세 권의 작품이 아름다운 장정으로 만들어 졌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번역과 감각적인 표지 이미지, 그리고 감정의 흐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매거진형 에디션이라는 점이 특징인데, 덕분에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사랑의 첫 떨림은 언제나 슬픔의 첫 예감이다."


기 드 모파상 『첫눈, 고백』

"사랑은 이기적이고, 욕망은 솔직하다"


F.스콧 피츠제럴드 『사랑에 관한 짧은 이야기』

"사랑은 사라져도, 그 잔향은 영원하다"




고전 문학이야 여러 다양한 판본으로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책이라 수집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너무 좋을 것 같다. 특히나 내지 구성이 아주 돋보이는데, 첫 페이지를 펼쳐 보자 마자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해에 고전 문학을 읽어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보길 권해주고 싶다. 책이 예쁘면 더 잘 읽힐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같은 작품인데도 읽을 때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 문학들이 그러하다. 학창시절 읽었던 책을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다시 읽었을 때, 여전히 그 작품이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란 거의 없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학창시절에는 어렵게 느껴지거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고 보니, 쉽고도 보편적인 이야기로 바뀌어 읽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축축하고 무거운 밤공기는 달아오른 내 얼굴을 덮쳤고, 곧 뇌우가 몰아칠 듯했는데, 시커먼 먹구름이 점점 많아지더니 연기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가며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시커먼 나무들이 불안하게 흔들렸고, 어딘가 지평선 너머에서는 천둥소리가 화난 듯 둔탁하게 울렸다.                <첫사랑> 중에서, p.71


세 권 중에 뭘 먼저 읽어 볼까 고민하다, 표지가 가장 마음에 든 투르게네프의 작품부터 만나보았다. 


한 열여섯 소년이 우연히 만난 스물한 살 여인에게 첫 눈에 반한다. 그는 '무언가 매력적이고, 강압적이며, 다정하고, 조롱하는 듯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아직 미성숙한 소년을 압도한다. 첫사랑이란 감정은 순수하고 미숙한 만큼 더욱 속절없이 상대에게 몰입하게 만드는데, 그 달콤하고도 황홀한 기쁨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생각지도 못했던 연적의 등장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그로인해 첫사랑의 열병도 끝이 난다. <첫사랑>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투르게네프가 스스로 '가장 자전적인 작품'이라고 밝혔으며 자신의 감정과 가족사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누구나 다 알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한번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읽어본 적은 없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세계 문학 읽기, 그 중에서도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고전 문학 읽기란 사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보통은 페이지가 두툼하고,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는 졸리기만 하고,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과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가득해 어렵고 읽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읽기를 한 번쯤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아름다운 장정의 고전을 고르는 게 좋다. 책이 예쁘면 그만큼 더 읽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계속 시도하다보면 언젠가는 읽게 될테니 말이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잠시 쉼이 필요할 때,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을 때, 순수함을 잃어 버린 나에게 특별한 처방이 필요할 때, 고전 문학을 읽어 보자. 수많은 고전 중에서 선택이 어렵다면, <사랑 3부작> 세트를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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