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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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십칠 년 넘게 기자로 일하면서 쓴 기사들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기사이다. 당신의 아빠가 죽을 것이고, 당신의 오빠나 남동생이 죽을 것이고, 당신의 아들이 죽을 것이고, 당신의 아들이 죽을 것이고, 당신의 남편이 죽을 것이고, 당신이 사랑했고 같이 잤던 모든 남자가 죽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 모든 것은 2025년 11월 초에 시작됐다. 독자 대부분은, 특히 미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은 몰랐을 테지만 영국 전역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불안과 공포로 떠들썩했다. 나는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p.82~83

 

영국 글래스고 11월, 이십 년차 의사인 어맨더는 응급실에서 환자들을 보는 중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독감 증세의 환자가 어느 순간 갑자기 호흡을 힘겨워하며 죽어가고 있다. 체온이 급속도로 치솟고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환자는 곳 사망한다. 건강한 젊은 남성이 한 시간도 못 되는 시간 동안 정상에서 빈사 상태로 넘어간 것이다.  어맨더는 진료 기록을 점검하고, 비슷한 시기에 내원했던 다른 환자들을 살펴보고는 이것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전염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영국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글래스고,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서부 연안에서 두루 관찰되는, 오직 남자만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고, 치료가 불가능한 이 병을 사람들은 ‘남성대역병(Great Male Plague)’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오직 남자들만 걸리는 변종 독감의 초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WHO는 결국 팬데믹을 선언한다. 그들이 발표한 공식 성명들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말이 전혀 없었다. 유일한 권고는 집에 머물라는 것이었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남자들은 집에 머물다가 죽을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역병은 얼마나 더 심각해질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죽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 가족은 무사할 수 있을까. 남자만 병에 걸리는 이유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아무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고, 이러다가는 남자들 태반이 죽을 것이 뻔했다. 이것은 세계의 종말인 것일까. 남자들이 사라지면 폐허가 된 세상을 재건하는 것은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된다. 이는 삶이 산산조각 난 채로 남겨진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연 여성들은 백신을 개발하고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며 무너진 경제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인류 멸망의 위기에 맞서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파격적인 상상력과 현실적인 묘사로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발화되는 방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남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오직 남성만이 역병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정중히 그 견해에 반대한다. 여성들은 대부분 남겨진 사람들이다. 삶이 산산조각 난 채로 남겨진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여성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을 하고,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며, 사별의 고통을 짊어진 채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방식 역시 변화했다.      p.460~461

 

감염에서 죽음까지 단 이틀, 치사율 90%, 오직 남자들만 걸리는 역병이 도래한다. 사상 초유의 ‘남성대역병’ 바이러스와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남자가 없는 세상은 어떨까, 여성이 주도하는 정부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팬데믹 이전에 집필했고, 출판 계약이 된 이듬해 코로나가 전세계를 덮쳤다고 하니 극중 전염병의 공포와 혼란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남성만을 공격하는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 그리고 폐허가 된 세상을 재건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파격적인 상상력만큼이나 손에 잡힐 듯 생생한 팬데믹의 공포로 인해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 작품이 되고 있다. 등장 인물이 많고, 각각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대대적인 공포와 혼란이 공감되고,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 부서지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삶들의 파편들이 쌓여서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남자들의 끝 (The End of Men)인가, 인류의 종말인가. 삶이 산산조각 난 채로 남겨진 여성들이 세계를 어떻게 다시 구축하는 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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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권일영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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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하지만 말이야, 조직이라는 게 나 혼자 아등바등해봐야 어쩔 수 없는 때도 있거든."
"그건 거짓말이야." 에리코가 일축했다.
"어떤 조직도 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모든 사람이 '나 혼자 애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체념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자기가 나서야 하지 않겠어?"     p.129

 

도로를 달리던 트레일러에서 타이어가 빠져 날아가는 바람에 인도를 걷고 있던 사람의 등에 부딪치고 만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안타깝게도 즉사였고, 운전자는 법정속도를 아슬아슬하게 지켰고 속도위반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에도 운전자는 아무런 이상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타이어가 왜 갑자기 빠진 것일까. 사고는 언론의 주목을 받아 보도되었고, 사고 차량을 운행하던 아카마쓰운송은 누가 보더라도 '가해자'였다. 운전기사에게 과실이 없다면, 정비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 밖에 없었고, 경찰 역시 정비 불량으로 결론을 내린다.

 

40년간 아카마쓰운송을 이끌어온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뒤를 이어 10년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 아카마쓰 도쿠로는 정비 불량이라는 결론에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다. 정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어가 빠졌고, 경찰 역시 그에 대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체포를 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조사인 대기업 호프자동차는 사고 원인이 아카마쓰운송의 정비 불량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에 대한 보고서와 부품을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사고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던 아카마쓰는 이전에도 비슷한 사고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비 불량이라 망가졌는지, 구조적 결함이라 망가졌는지에 따라 책임 소재는 전혀 달라진다. 하지만 과연 영세한 중소기업이 매출액 2조 엔을 자랑하는 대기업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싸우지 않을 건가요, 그 회사하고?"
"절대로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할 일도 없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죠. 그렇다면 미래를 바꿀 수밖에 없어요. 전 더는 그 호프자동차라는 회사에 삶을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계속 싸우면 다에코가 남긴 즐거운 추억까지 일그러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제겐 다른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애를 위해, 아내도 틀림없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거예요."
운명은 왜 이리 잔혹한 걸까. 왜 이리 슬픈 걸까.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은 다들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슬픔을 넘어서서.         p.784~785

 

이 작품은 2020년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작품으로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소설 이전에 영화나 드라마로도 유명했던 작품이라, 영상화된 버전으로 먼저 만나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픽션이긴 하지만, 사실 2000년대에 실제로 벌어졌던 미쓰비시자동차의 대형 트럭 타이어 분리에 의한 사상 사고와 미쓰비시의 리콜 은폐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특히나 이케이도 준 작가 자신이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미쓰시비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 더욱 실감나는 현실성이 장점이다. 극중 아카마쓰운송은 이 사고로 인해서 큰 거래처를 잃고, 은행으로부터 융자도 거절당하고, 용의자 취급받으며 경찰 수사를 당했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아들 또한 학교에서 왕따와 괴롭힘을 받았으며, 부품 반환을 둘러싸고 호프자동차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애초에 누가 보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대기업의 수법은 비열했지만 그렇다고 재판을 걸어 법적 수단에 호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자금 조달도 어려워 회사를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마쓰는 멈추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이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는 무려 네 권짜리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이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소설이었고, 이후에 나온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등 출간된 모든 작품들이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완벽한 재미를 선사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하늘을 나는 타이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에 등장인물만 70명에 달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난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고의 진상 규명이라는 하나의 플롯을 중소기업의 사장과 대기업의 직원, 은행원과 주간지 기자, 경찰 그리고 사건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인물의 시점으로도 바라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조직과 그 속의 개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문제 제기를 묵직하게 해내고 있다. 소설적 재미에 의한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사회의 어둠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케이도 준이 있게 한 그의 모든 작품의 근간이자 원점이라 할 수 있기에, 이 작품은 놓치지 말고 챙겨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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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너의 집, 우리의 집 - 2016 볼로냐 라가치상 스페셜 멘션 수상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45
루카 토르톨리니 지음,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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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번화가, 몬티 지구에 있는 자코모네 집에는 물건이 많아 빈틈이 없다. 창 밖으로 콜로세움이 보이고, 벽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마테오 네 집은 아주 좁은데, 식구들이 무려 열한 명이나 된다. 엄마, 아빠, 누나와 누나의 남자 친구,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고모부, 고모부의 아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멀리 떨어져 살던 먼 친척까지 함께 살고 있는 중이다.

 

 

로레나네 집은 수백 년 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이고, 신델네 집은 나무외 쇠붙이로 만든 오두막처럼 생겼다. 하루 종일 바이올린 음악이 흐르는 밈모네 집은 넓고 아름답고, 오타비오네 집은 영화관 위에 있어 방에서도 영화가 상영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닷가에 있는 집도 있고, 엄마 아빠가 운영하는 호텔에 사는 아이도 있다.

 

 

이 책에는 열 명의 아이가 사는 열 개의 집이 등장한다. 집들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 장소와 모양과 크기만 다른 게 아니라 그러한 집들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과 삶의 흔적들 또한 각기 다르다. 각자의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공부를 하고, 꿈을 꾸며 아이들은 그렇게 성장해 나간다. 사는 환경은 생활 습관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함께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 역시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지 그 과정을 형성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집이란 세상 그 자체와도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사회와 부딪치게 될 일이 아직은 적고,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니 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는 자신만의 공간, 자신이 안정을 느끼는 집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10명의 아이들이 사는 집들을 통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꿈을 꾸며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탈리아의 그림책 작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와 루카 토르톨리니는 이 작품으로 볼로냐 라가치상 스페셜 멘션상을 수상했다. 특히나 이번 한국어판에는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작가가 한국어판만을 위해 새롭게 작업한 본문 그림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작품 속 호텔을 묘사한 그림에서 호텔을 찾은 여러 손님들의 모습을 통해 다양한 삶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잘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표지와 한국어판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림을 통해서 세계 유일 버전의 <나의 집, 너의 집, 우리의 집>이 탄생했다.

 

내가 어렸을 때 자라온 집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했을 것이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누구나 꿈꾸는 자신 만의 집이 있을 것이다. 수영장이 있는 집, 근사한 정원을 꾸밀 수 있는 집, 복층으로 된 집,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집, 뷰가 좋은 고층 아파트 집 등등 상상하는 데는 한계가 없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집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그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도 생각해 본다. 집이란 나의 매일매일이 쌓이고 있는 공간, 어린이들의 매 순간이 기록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니, '사람이 추위나 더위를 막고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훌쩍 넘어 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작가인 클라우디아가 어린 시절 꿈꿨던 상상의 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두들 자신이 어린 시절 바랬던 집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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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어 -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
임진아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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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먹고, 정성 들여 쉬고, 하루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매일이 모여 만들어진 책이다. 책 속에 쓰인 언어가 내 몸 어딘가에 딱 들어맞아 지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훌훌 넘겨 가며 가볍게 읽는 것만으로 좋은 곳에서 근사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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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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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는 건 언제든 비참한 법이야. 지금도, 옛날도. 지금은 전쟁 중인 세상하고는 전혀 달라도 너희에게는 너희만의 힘든 일이 있겠지. 하지만 난 그 사람이 보여준 아름다움을 마음에 쭉 간직하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시게루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인생은 고생스러운 법이란다. 그러기에 더더욱 단것이 필요하지.”
그러면서 스즈네의 눈앞에 팥 찐빵 접시를 내밀었다.         p.212

 

스즈네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잔호텔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동경하던 애프터눈티 기획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원래 애프터눈티를 담당하던 선배가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인데, 꿈에 그리던 부서에 왔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고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보지만 파티시에 다쓰야에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마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여전히 노력 중이다.

 

 

오잔호텔은 애프터눈 티 붐의 선구라고 할 만한 존재로, 매체에도 여러 번 소개가 되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최근에는 혼자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도 늘었는데, 새로운 애프터눈 티가 나올 때마다 혼자 라운지를 찾는 단골들이 있다. 회사원 스타일의 중년 남성과 역시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이들은 라운지 직원들 사이에서 '솔로 애프터눈 티의 달인'이라고 은밀히 불리는데, 한 입 먹을 때마다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곤 해서 지켜보던 스즈네까지 기뻐하게 만드는 손님들이다.

 

 

원래 애프터눈 티의 유래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한 귀부인의 배고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 귀족의 식사는 하루에 두 번뿐이었고, 아침 식사 후 밤 8시부터 시작되는 저녁 만찬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나 종일 코르셋을 입고 있어야 하는 여성은 가볍게 간식을 먹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홍차와 과자로 티타임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침실의 '은밀한 다괴회'는 순식간에 여성 귀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점차 화려하고 호화로운 차 모임이 되어간 것이다. 그러니 애프터눈 티는 사교 목적뿐만 아니라,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것 또한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과자는 결코 필요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즐겁고 아름답다. 앞으로도 향기로운 차와 보석 같은 과자를 즐기는 애프터눈 티의 시간은 힘겨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에 색채를 더해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겉모양이 예쁜 가토나 귀여운 프티 푸르의 단맛을 돋보이게 하려면 짜디짠 소금 약간이나 씁쓸한 술이 소량 필요하다니, 세상은 이 얼마나 만만치 않단 말인가.       p.330

 

애프터눈 티, 은색으로 빛나는 3단 트레이에 담긴 귀여운 마카롱과 타르틀레트 등의 프티 푸르, 갓 구운 스콘, 손가락 크기의 고급스러운 샌드위치까지.. 향기로운 홍차와 함께 대접받는 우아하고 화려한 궁극의 간식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애프터눈 티세트를 종종 즐기러 가곤 했다. 웬만한 식사 비용보다 더 비싼 가격의 디저트이지만, 눈으로 보는 것도 즐겁고, 맛은 더 훌륭하고, 천천히 다양한 디저트를 맛보며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애프터눈 티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을 연출해내는 화려한 판타지라는 점도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 파는 애프터눈 티세트는 대부분 2인 이상을 기준으로 판매되고 있어서, 한 번도 혼자서 즐길 생각을 못해본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사실 애프터눈 티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굉장히 놀라웠다.

 

 

이 작품은 호텔의 애프터눈티팀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그곳을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계절에 걸쳐 아름답게 변하는 호텔 정원 묘사도 근사하고, 호텔의 명물인 애프터눈 티에 대한 묘사는 그 향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다. 평소에 선뜻 낼 만한 가격은 아닌 사치스러운 간식이지만, 그러기에 열심히 애쓴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너무도 공감되었고, 그 속에서 신 메뉴를 개발하고, 각자의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뭉클한 작품이었다. 계약직 직원과 정직원의 관계, 일과 육아 사이에서의 고민, 보이지 않는 차별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세심하게 그려내면서도 힘든 일상을 위로해주는 크고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는 따뜻한 작품이기도 했다. '단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보는 시간과 여유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휴식 같은 힐링을 안겨줄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덧.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즐겼던 애프터눈 티 사진들을 찾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2019년 11월30일이었으니, 코로나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거리두기 중에도 가려고 마음먹었다면 갈 수 있었겠지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거리두기도 끝이 났고, 차츰 일상이 회복되고 있으니.. 조만간 나를 위한 근사한 선물로 애프터눈 티를 즐기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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