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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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장강명 작가가 <댓글부대>로 수상했던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이번에는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가 수상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만년 인턴'을 하고 있는 1988년생, 서른 살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8090세대 젋은이들의 아픈 현실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2 <82년생 김지영>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사하게도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었는데, 표지가 얼마나 예쁜지 요즘은 가제본도 퀄리티가 굉장한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988년생, 서른 살 여성으로 당시 88올림픽을 즈음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이다. 학창시절 언제나 주변에 지혜가 산적해 있었기에,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등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시절을 거쳐, 현재는 수많은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자신의 삶에는, 무수한 익명 속에 숨을 수 있는 그 평범한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그녀가 일하는 곳은 문화센터와는 달리 '수준 높은 교양'을 차별점으로 두고 있는 아카데미이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각종 복사와 강의실 의자 정리, 강사들의 잡다한 심부름 등등 정직원이 아닌 인턴이기에, 거의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들뿐이다. 반지하 방에 월세로 살면서 아카데미에 인턴으로 온 지도 아홉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위해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없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없는 사람이다. 늘 소리치고 있는데도 없는 사람이다. 수면 위에 올라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다. 반지하방에 살면 없는 사람이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고, 인생과의 게임에서 지면 없는 사람이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 동안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들과 어울리는 내내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발버둥쳤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아카데미의 새로운 인턴으로 들어온 규옥의 등장부터였다. 그는 아카데미의 인기 강사였던 교수에게 대학원을 다니던 당시 책을 다 써주고 나서 원고만 뺐기고 알바비도 못 받았던 남자였다. 그가 커피숍에서 그 교수에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면 언젠가 인생 전체가 창피해질 날이 온다'고 사람들 앞에 그를 창피 주던 순간, 하필 같은 장소에 있던 지혜가 그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던 과거가 있다. 지혜는 규옥과 함께 아카데미 직원에게 제공되는 공짜 강의로 우쿨렐레 강좌를 함께 듣게 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에 남은 사람들과 뜻밖에 모임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지만 공모전에서 대기업에 의해 작품만 뺏긴 문화 백수에, 식당 일을 하다 모종의 억울한 이유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던 아저씨 등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규옥은 말한다.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경범죄로 보기엔 약하고 명예훼손이라 칭하기엔 너무 짧고 애매한 장난스러운 반격들을 시작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경직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바꿀 용기도 꿈도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통쾌했고,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그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동질감과 위로를 느끼지만,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는 달리 위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학력 백수, 편의점 알바생, 한국이 너무 싫은 회사원까지. 이 시대 청춘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그 동안에도 있어 왔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이 세상을 향해 '반격'을 시도한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 전체를 바꾸거나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만한 반격은 아닐지라도, 통쾌하고 짜릿했다. 아마도 살면서 억울하고 화나도 참고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 들 것이다. 이들의 반격이 비장하거나 영웅적이거나, 거창하고 원론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마치 가벼운 놀이처럼,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싱그럽고 유쾌하게 이들이 벌이는 반격의 한방들이 너무도 시원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들의 고민도 너무 공감이 되었고, 그들이 벌이는 저항의 몸짓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으니 말이다. 우리, 약자일지언정 세상에 '없는 사람'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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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박단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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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에게 왜 열심히 일하느냐고 질문하면, 바캉스를 떠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바캉스는 프랑스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문화입니다. '일 중독'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였으면 하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어릴 때 레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 <나쁜 피>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일 것이다.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프랑스는 여행지에 대한 로망이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자금이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여유가 있을 때는 돈이 부족하지 않나. 유럽은 이삼일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다 좌절되고, 꿈만 꾸기를 반복하며 결국 현재까지 프랑스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프랑스는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꿈의 여행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그곳에 대한 이미지란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등의 아름다운 관광지와 와인, 마카롱 등의 근사한 음식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끔 뉴스를 통해 만나게 되는 테러 사건과 정치에 관련된 이슈들은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그것이었으니, 언젠가 그곳에 갈 거라면 제대로 알고 가고 싶었다.

 

창비의  이만큼 가까운시리즈는 각국을 오랫동안 연구한 저명한 학자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다채로운 면모를 생생하게 소개하는 교양서이다.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프랑스는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사회, 역사, 지리, 정치·경제, 문화, 한불 관계 등 여섯 개의 주제를 통해 프랑스라는 나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나처럼 여행지로서의 프랑스가 궁금한 이들에게도, 혼란스러운 프랑스 사회 자체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책인 셈이다.

프랑스인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 한 편의 연극을 연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미각을 통해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충전할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유대감을 만드는 과정이니까요. 프랑스인에게 식사란 오감을 충족하는 활동입니다.

 

프랑스는 나라 안에 다양한 소수 세력의 공존을 지향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화주의 아래에 하나의 나라를 지향하는 사회적 공화국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적 문제로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일상적이며, 적극적인 사회 보장 제도를 지지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또한 프랑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근대 페미니즘의 출발점이라고도 이야기되는 프랑스 혁명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최근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 총기 난사와 자살 폭탄 공격 등의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가장 최근인 올해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순찰 중인 경찰관을 총으로 살해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의 테러는 대부분 자국민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데, 외부인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테러에 적극 개입하는 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과 68혁명 등 빛나는 성취는 물론, 현재 벌어지고 있는 테러와 선거와 정당 등 지금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이렇게 묵직한 주제들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인들의 특별한 바캉스 문화와 축구 사랑, 축제와 공연 이야기와 종교 문제와 박물관에 관한 정보까지 담고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음식 문화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한국사람들은 절대 하지 못하는 '느리게 먹기' '대화하면서 먹기'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오죽하면 그들은 길에서 아무렇게나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우는 것을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프랑스의 거의 모든 식당에서는 저녁 시간 내내 한 테이블당 손님을 한 팀만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식당이 문을 여는 저녁 7시경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계속 대화를 나누며 문을 닫는 시간까지 있어도 전혀 눈치를 주지 않는 다는 거다. 음식을 먹는 것을 하루 일과 중에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나아가 인생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기는 그들의 가치관이 부럽기도 했다.

‘이만큼 가까운시리즈를 통해서 프랑스가 어떤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는지 이야기를 알게 되니, 오히려 멀리 있어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가벼운 가이드나 관광지 위주의 정보만 있는 여행서들 과는 달리, 이 책은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도 흥미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늘의 프랑스가 궁금한 모든 이들을 만족시켜 줄만한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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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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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고아가 되어 홀로 떠 있었다. 몸은 노에 매달려 있고, 앞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있고,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몸 위로 쏟아졌다. 이성적으로 이런 상황을 보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기 전에 물에 빠져 죽기를 바라리라. 하지만 노를 방수포에 끼우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밀려든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동이 트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힘껏 노에 매달렸다. 그냥 매달렸다. 왜 그랬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시겠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던 건 십 년도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오 년 전에 리안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개봉하면서 스크린으로도 만나보고, 원작도 한번 더 읽었던 기억이 난다. 리안 감독의 영화도 원작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이 작품은 여러 차례 시간을 두고 읽고, 만나왔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매번 감동을 주었던 멋진 작품이다. 소년과 벵골 호랑이가 단 둘이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다는 설정만으로 작품의 전체 줄거리 요약이 가능한 이 특별한 작품을 이번에는 일러스트 버전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러스트 버전은 기존에 양장본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이번 특별판은 양장본의 가격 부담을 덜고, 콤팩트한 판형으로 재단장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 실린 일러스트는일러스트레이트 파이 이야기국제 공모전에서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수상을 한 화가의 작품으로, 올컬러로 40여점이 수록되어 있다.

 

 

얀 마텔은강렬한 색채와 뛰어난 화면 구성, 소용돌이치는 듯한 그림, 그리고 모든 것을 파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은 완전한 일인칭 시점이고, 나는 소설에서 한 번도 파이에 대해 묘사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2차 창작물 같은 느낌마저 드는 책이다. 글을 통해 빚어내는 묘사가 아무리 세밀하고 뛰어나더라도, 직접적으로 강렬하고 리얼하게 다가오는 시각언어의 힘이란 전혀 다른 차원의 파워를 발휘하는 것이니 말이다.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 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여섯 살 인도 소년 파이는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함께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해지자 아버지는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들이 탄 배는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가라앉아버리고, 구명보트에 오른 생존자는 파이와 동물들,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였다.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 하이에나를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잡아먹자, 이제 남은 것은 소년과 호랑이뿐이었다. 리처드 파커는 몸무게가 250킬로그램이나 되는 사나운 맹수였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망망대해였다. 다른 구명보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어디에서도 가족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 배가 고파지면 호랑이가 소년을 잡아 먹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바다 위에서 무려 227일을 버텨낸다. 무시무시한 뱅골 호랑이와 단 둘이서 말이다.

 

과연 그 오랜 시간 동안 파이는 어떻게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지 않고, 또 어떻게 물과 식량을 준비해서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과연 그들은 무사히 누군가에게 구조될 수 있을까

이미 여러 차례 읽어온 작품이기에 내용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전히 읽는 내내 집중력을 갖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어 주었다. 이 작품은 한 소년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고,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험 소설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신념과 희망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의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지만, 마치 고전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혹시 아직도 <파이이야기>를 읽어 보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기왕이면 일러스트 버전으로 만나보시길. 마치 얀 마텔이 직접 그림에 참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작품과 일체화된 원색의 강렬한 색감들이 당신을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는 구명보트 위로 안내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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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트릭스 -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스티커북 세계
잭 클루카스.조니 마르크스 지음 / 이봄S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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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컬러링 북들을 경험해봤지만, 이런 건 정말 난생 처음이다. 컬러링에 퍼즐을 더한 스티커북인데, 작품의 난이도에 비해 완성된 결과물이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사실 컬러링북은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안이라도, 색채 감각이 떨어지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림처럼 예쁜 완성품을 만날 수는 없게 만든다. 배색에 실패해서 좌절하거나, 몰입해서 한참 채색했는데 상상했던 그 느낌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저 하나씩 스티커를 붙이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3차원의 입체적인 동물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이거 정말 내가 완성한 거 맞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결과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힐링'을 추구하며 컬러링북을 펼쳤다 오히려 더 스트레스만 받았다면, 이제는 스티커북의 세계에 빠져 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애니메트릭스>는 1,400개의 정교한 스티커로 열두 마리의 입체적인 동물 그림을 완성하는 스티커북이다. 먼저 각 동물 별로 이렇게 도안이 그려져 있다. 사실 조각이 너무 많고, 정교해서 대체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부터 들었다. 하지만 이 놀이는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세계적으로는 어엿한 힐링 취미로 자리잡았을 만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난이도라고 한다.

동물 도안들이 끝나면 그 뒤로 이렇게 스티커 조각들이 모여 있다. 각 동물 마다 바탕 색깔이 다른데, 각 동물에 맞는 스티커는 같은 바탕색으로 찾으면 된다. 사자의 바탕색이 핑크라면, 스티커의 바탕색도 핑크, 늑대의 바탕색이 주황이면 스티커의 바탕색도 주황인 식이다. 스티커 안쪽의 점선을 따라 뜯어 쓰면 훨씬 쉽게 스티커 붙이기를 시작할 수 있다.

 

떼어낸 스티커 페이지를 동물 도안 옆에 두고, 각 스티커의 숫자에 맞춰 붙이기만 하면 된다. 스티커의 조각들이 마구 흩어져 있기 때문에, 스티커의 숫자 찾기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흥미로운 작업이다. 3차원의 동물을 표현하기 위해 대부분의 스티커들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넓은 부분과 직각의 선을 따라 먼저 붙이면 훨씬 쉽게 완성할 수 있다.

 

아무래도 조각 수가 적고, 크기가 큰 동물부터 도전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조각 수가 많을 수록 더욱 정교한 작업과 집중을 요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 동물이다. 덩치가 큰 동물 답게 조각 수도 크고, 피스도 많지 않아 처음 시도로 딱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스티커북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색연필, 가위, 칼, 받침대 등등의 준비물이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것! 물론 정교한 작업을 할 때는 사은품으로 주는 핀셋이 유용하게 활용되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냥 맨 손으로 붙여도 잘만 붙으니 너무 간편하다.

 

코끼리 한 마리를 완성하는데 정말 시간이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집중하게 된 것이다. 머리 부분이나 코 부분등은 조각이 작았지만, 사실 몇 번만 붙이다보면 요령이 생겨서 스티커 붙이기가 생각만큼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완성된 코끼리의 모습이라니!!! 아 진짜 이걸 내가 만들었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말 코끼리가 듬직하게 걸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의 3차원 이미지가 완성되었으니 말이다.

코끼리 외에도 올빼미, 늑대, 암사슴, 사자, 곰, 얼룩말, 울새, 코끼리, 공작새, 도마뱀붙이, 여우, 코뿔새.. 열두 마리 동물들이 모두 다채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어서 빨리 다음 동물에 도전하고 싶어 졌다. 화려한 보랏빛 갈퀴의 멋진 사자, 듬직한 브라운 컬러의 곰, 크리스탈처럼 정교해보이는 암사슴, 날렵하고 우아한 붉은 여우, 그리고 가장 많은 조각수를 자랑하는 올빼미 등등... 너무 다양한 색깔과 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느껴질 듯한 3차원의 구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완성된 결과물은 예쁘게 컷팅해서 액자에 그림처럼 넣어두어도 멋진 인테리어 소품이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이 도전하기에도 참 좋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아이들도 쉽게 호기심을 느낄 만한 동물 그림이고, 산만하기 쉬운 아이들의 집중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스티커의 번호를 찾고, 도형의 위치를 찾아 칸에서 벗어나지 않게 선을 맞춰 붙여가다보면 어느 덧 그림 속으로 푹 빠져 들게 된다. 이런 몰입의 시간이야말로 스트레스 가득한 일상을 잠시 놓아둘 수 있는, 잠들어 있는 내 상상력을 깨우고 완벽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무엇보다 미적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초보자도 누구나 쉽게 멋진 예술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이 작품 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열흘이라는 기나긴 추석 연휴가 거짓말처럼 다 지나가버리고, 이제 겨우 하루가 남았다. 직장인들은 이제 내일만 지나면 또 지긋지긋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할테고, 학생들이나 주부나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비슷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전투 태새에 돌입해야 하는 우리에게, 아주 잠깐의 휴식 시간과 힐링을 선물하고 싶다면 <애니메트릭스>를 만나보자. 아주 짧은 시간만 투자해도 머리가 맑아지고,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나는 기분이 들테니 말이다.

손으로 뭔가를 만들거나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머리가 복잡할 때 최고의 도피처가 되어 준다. 게다가 이 스티커북은 과정도 재미있고, 결과물은 재미를 넘어 놀라움까지 선사해준다. 힐링이라는 것이 사실 거창한 게 아니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뭔가 계획을 세우기엔 지쳤고, 누군가와 함께 하기엔 귀찮을 때, 그런 당신에게 <애니메트릭스>를 추천한다. 저렴한 비용과 잠깐의 시간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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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마술사
데이비드 피셔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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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걸 위장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바커스가 그를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네들이 그 장소를 숨겨서, 심지어 나룻배를 타고 가는 파루크왕도 항구가 어딘지 찾을 수 없게 해줬으면 좋겠네.”

재스퍼는 검지로 장난스럽게 모래를 저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지금까지 그 어느 마술사도 공연해본 적이 없는 엄청 큰 무대였다. 마술사 경력 내내, 그는 오토바이, 여성, 상자, 심지어 가끔은 코끼리까지 사라지게 했지만, 항구 전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총알이 퍼붓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적군의 폭격으로부터 항구를 보이지 않게 숨기고, 정찰대가 탱크를 평범한 트럭으로 보도록 만들고, 철도 차량을 모조 잠수함으로, 폐선박을 대형 전함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면 어떨까.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적군의 총 공습으로부터 항구를 지켜야 하는데, 누군가 항구를 감쪽같이 없애 준다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을 것이다. , 이 마법과도 같은 일을 해낸 당사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갇히게 된다면, 도망갈 계획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날아 가거나, 땅굴을 파거나,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간단히 투명인간이 돼버리는 거라고. 바로 이것이 마술로 만들어낼 수 있는 정말 믿기지 않는 실화의 한 장면이다.

이 책은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 마술사 재스퍼 마스켈린의 활약상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를 오가는, 사소한 실수조차 죽음으로 직결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대체 마술사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인지 궁금했다. 전쟁 마술사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재스퍼 마스켈린은 대대로 마술사 집안에서 태어난 유명한 마술사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쇼 비즈니스를 잠시 접어두고 무대 위의 마술 기법을 전쟁에 이용할 만한 수단이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상상력과 지식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으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점이 군에 입대하려는 그의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사실 군대에선 서른 여덟 살이나 먹은 마술사가 아니라 전장에 나가 싸울 젊은 청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스켈린은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들을 설득해 군에 입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적군이 알지 못하게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위장술 조직에 배치되어 활약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황당한 임무야.” 바커스가 말했다.

재스퍼도 동의했다. 왜 몽고메리 장군이 홍해를 반으로 가르거나 전염병을 일으키는 등의 합리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재스퍼는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번에는 실패의 두려움에 기인한 증세가 아니었다. 기회가 왔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것이 온 것이다. 위대한 마술의 기회!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릴 만한 매우 중요한 마술. 전장에서 지금껏 시도되었던 그 어떤 마술보다 더, 엄청나게 큰 규모의 마술.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수행했던 그 어떤 마술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마술. 마침내 그는 3년 전에 시작했던 그 일, 정확히 그 일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을.

 

 

이 작품은 2018년 개봉을 목표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며 [닥터 스트레인지], [셜록], [이미테이션 게임]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마스켈린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극중 마스켈린의 외모에 대한 설명으로 '키가 190센티미터를 넘었고, 당시의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절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미남'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기교의 화려한 마술사 역할에 그만큼 또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싶다. 사실 전쟁 소설인 만큼 이 두툼한 페이지 내내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과 그 뒤의 수많은 전략 등이 전쟁 용어와 함께 난무하는 이야기라, 술술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재스퍼 마스켈린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마력에 푹 빠지게 된다면, 적을 속이기 위한 온갖 속임수의 마술에 현혹된다면 아마도 굉장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소재였고, 그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보여주는 드라마란 실화라는 것을 알고 읽어도 쉽사리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마술의 힘을 활용한 수많은 위장술들은 모두 굉장히 기발하고, 훌륭했다. 마스켈린은 말한다. 인간의 본성과 기초적인 과학 원리를 이용한다면, 그 무시무시한 전쟁 기계 나치도 속일 수 있다고. 덕분에 그는 실제 히틀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가 활약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그것이 나치 독일군을 제대로 농락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마스켈린의 상상력은 기상천외한 전술로 영국군의 위장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마술이라는 것이 대부분 보조 장치가 필요한 속임수쯤이라고 치부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환상이 실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치밀한 과학적 원리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쟁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그 어떤 작품도 흥미롭게 읽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 작품만은 재스퍼 마스켈린이라는 매력적인 인물 덕분에 전쟁이라는 서사 자체를 다르게 보도록 만들어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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