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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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을 당장,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며 떠올렸다. 죽은 사람이 이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겠느냐고 속으로 되뇌었다. 호러 만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한들 나는 콕 집어서 케니가 죽길 바란 적은 없고 그저 날 건드리지 말아주길 바랐을 뿐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장례식 다음 날 우리 모두에게 유산을 남기다니 해리건 씨는 좋은 분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그러곤 부인이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 '글쎄다. 올곧은 분이긴 했지만 눈 밖에 나면 난처해졌거든.'       -'해리건 씨의 전화기' 중에서, p.102

 

한 중학교에 소포가 하나 배달된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자매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배달된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사실 폭발물이었다. 폭탄은 1.5킬로미터 멀리 있는 건물의 유리창을 박살 낼 정도로 위력적이었고, 그 폭발로 인해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사망자는 학생들을 포함해 31명, 부상자는 73명이었고, 9명이 중상이었다. 탐정사무소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고 있는 홀리 기브니는 뉴스 특보를 통해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연속해서 현장 소식을 전하던 체트 온도스키라는 기자를 보면서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고 생각한다. 뭘까? 피곤해 보였던 얼굴? 양손에 남은 긁힌 자국과 벽돌 가루? 찢어진 주머니? 뭔가 알 수 없는 그 위화감의 정체는 이전 작품에서도 본 적 있던 바로 그 '이방인'의 존재와 연결되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 책은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4편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나 표제작인 <피가 흐르는 곳에>는 <아웃사이더>의 후속편으로 홀리 기브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빌 호지스가 세상을 떠난 후 파인더스 키퍼스를 맡아서 운영하고 있는 홀리 기브니의 근황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반가웠다. 역시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며 오컬트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는데, 굉장히 오싹하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야기라 숨 죽이고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수집한 살인이나 참사 영상이 수백 편이 더 있어요. 어쩌면 수천 편일지도 몰라요. 뉴스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죠.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 사람들이 끔찍한 뉴스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에요. 살인. 폭파. 교통사고. 지진. 해일. 사람들은 그런 걸 좋아하고 요즘은 휴대전화로 촬영한 동영상이 있기 때문에 더 열렬한 반응을 보여요. 오마르 마틴이 광란극을 벌이고 있었을 때 펄스 내부를 촬영한 보안카메라 영상 있죠? 조회수가 수백만이에요. 수백만."     -'피가 흐르는 곳에' 중에서, p.352

 

작가인 드류 라슨은 단편 소설만 여러 편 발표했는데, 언젠가는 장편소설에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장편을 두 번 시도한 적은 있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를 걱정시켰을 만큼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있기에 사실상 포기한 상태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편 소설을 위한 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까지 생각난 것들을 통틀어 제일 훌륭한 아이디어가 생각난 것이다. 그는 소설 집필을 위해 몇 주간 한적한 시골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가서 혼자 작업을 하기로 한다. 처음 며칠 동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오후 두 시까지 글을 쓰는 루틴을 정확히 지켰다. 자리에 앉으면 단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동안과는 다르게 원고가 술술 써졌다. 그러다 슬슬 감기 기운이 생겼고, 갑작스레 닥친 태풍으로 인해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고, 원고를 쓰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러던 중 우연히 쥐를 한 마리 구해주게 되고, 자고 일어났더니 그 쥐가 사람처럼 그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스티븐 킹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마치 '사악한 동화'처럼 느껴지지만, 소설가로서 '상상력이라는 수수께끼와 그걸 지면으로 옮기는 방법'에 대해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묘지에서 죽은 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는 이야기 등 수록된 작품들 모두 다양한 스타일로 스티븐 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의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수록작 모두 영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하니, 명실공히 '이야기의 제왕'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2020년 여름, 미국에서 출간된 작품이니 스티븐 킹의 가장 최신작이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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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자 Run with me 노래를 그리다 1
선우정아 노래, 곽수진 그림 / 언제나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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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살다 보면 누구나 감당하기 어렵고, 버거운 일을 마주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거나, 바닥까지 추락한 것 같은 심정일 때 그 막막함 속에서 망연자실했을 때, 곁에 있던 누군가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주면 우리는 그 힘으로 다시 용기를 낼 수 있게 된다.

 

그림책이 주는 특별한 위로가 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 가면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휴식이 되고, 위안을 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 있다. 특별한 이야기, 긴 설명 없이 그림 자체로 나에게 말을 건네주는 것만 같은 순간, 받게 되는 감동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번에 만난 책도 그런 기분이었다.

 

 

가수 선우정아의 정규 3집 앨범 수록곡인 <도망가자>의 노랫말에 그림을 얹은 책이다. 선우정아의 노래와 일러스트레이터 곽수진의 그림이 만나서 너무도 근사한 그림책이 만들어졌다.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가끔은 억지로 버티고 서는 것보다, 훌쩍 도망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고민은 잠시 버려두고, 답답한 일상 속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져보는 거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덕분에 다시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이 곡은 선우정아가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주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나 곁에서 자기 자신보다 나의 안위를 살펴주는 이를 위한 마음을 노래에 담아서인지, 노랫말이, 음악이 더 진심으로 느껴진다. 음악을 틀어 놓고 이 그림책을 읽으면 더 좋다. 노랫말에서 전해지는 위로가 곽수진 작가의 따스한 그림과 만나서 배가 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곽수진 작가는 지금은 자신의 곁을 떠난 반려동물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그림으로 담담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개와의 일상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적의 노랫말을 그림책으로 만들어낸 <당연한 것들>이라는 책도 흥미로웠는데, 이번에 만난 작품도 역시나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랫말에 그림을 입혀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도 재미있었고, 이적과 선우정아라는 싱어송라이터의 노랫말이 워낙 시처럼 아름다워서 그림들과 정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시원한 바다 풍경과 함께 개와 해변을 산책하는 모습의 표지 이미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제대로 휴가를 가지 못하는 요즘이기에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지치고 힘든 현실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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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재능이 무기가 되는 순간 - 어설픔조차 능력이 되는 시대가 왔다
윤상훈 지음 / 와이즈베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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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애매하다고 생각되는 그 재능, 그 분야가 당사자에게는 가장 편하고, 잘하고, 또 부담 없이 즐기며 오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애매함을 고민하는 이유는 재능의 수준이 결과의 수준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정말 그럴까? 아니다. 그건 착각이다. 지금은 재능의 수준, 재능의 탁월함이 결과를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다. 애매함이 나의 무기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가진 애매함을 괴로워하지 말자. 애매함으로도 충분하다. 탁월하지 않아도 된다.    p.13

 

평범한 50대 가정 주부가 간단하고 따라 하기 쉬운 요리 레시피로 한 달에 700만 원의 수익을 올리며 남편보다 월급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유튜브는 대한민국 직장인 4명 중 1명이 부업으로 할 정도로 대유행 중인데, 그저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가지고 만들어낸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유튜브에 올라오는 대다수의 콘텐츠들은 한 분야의 탁월한 재능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애매하고 어설픈 재주에서 출발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 또한 그러한 콘텐츠를 매일 소비하고 있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단 한 번도 미술을 배운 적 없는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에서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국내 유명 갤러리에서 설치 미술 개인전을 열고 해외에서까지 전시회를 펼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사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이유가 뭘까. 오늘날 재능은 결과값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존재에서 '부분적인' 요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일류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능, 분야, 관심을 사람들이 반응하고 궁금해하는 상품 또는 콘텐츠로 변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 대단히 흥미로웠다.  

 

 

 

앞선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대충' 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됐다. 대충 하기 위해서는 힘을 빼고 작게 시작해야 한다.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매한 재능을 부담 없이 꾸준히 유지해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쉽게 오해를 한다. 대충 한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볍게 시작하는 대신 끝까지 완수하는 것, 꾸준히 하는 것이라는 설명에서 '꾸준히' 한다는 의미를 '끊임없이'로 이해한다. 그런데 꾸준히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뭘까?     p.150

 

그렇다면 애매한 재능이란 게 정확히 뭔가. 애매한 재능이란 자랑하거나 내세우기는 애매하지만 누군가가 물어봤을 때 조금 더 잘 알려줄 수 있는 것, 꾸준하진 않아도 흥미를 느끼며 즐긴 경험,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떠나 누구보다 먼저 경험한 사건과 상황이다. 만약 자신의 경험이 이 세 가지 중에서 두 개 이상 겹친다면 바로 그게 애매한 재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더 잘하는지 못하는지가 기준이 아니다. 재능이 얼마나 탁월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궁금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애매함이야말로 호기심을 탄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이니 말이다. 그래도 자신의 애매한 재능을 모르겠다면, 평소에 시청하는 유튜브 영상 채널들을 통해 찾아볼 수도 있다. 이 책에는 유튜브에 있는 시청 기록, 구독, 좋아요 기능을 통해 데이터를 만들고 정제 과정을 거치는 것을 알아보기 쉽게 도표로 싹 정리가 되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애매함을 1%의 특별함으로 바꾸는 법'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알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나의 애매한 재능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지점이 온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단념하고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도 역시나 공감을 불러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심심풀이로 여기던 취미, 관심, 재능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뤄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니, 얼마나 설레는 상상인가.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꿈같은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에 묻어두고 모른 체했던 그것들을 이제 끄집어 낼 때가 된 것이다. 자, 이제 이 책을 다 읽었다면, 책장을 덮고 나서 움직일 순간이다. 지금이 바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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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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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녀의 호기심과 망설임을 알고 있다는 듯, 클레어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있잖아, 르네. 난 늘 궁금했어. 더 많은 흑인 여자애들, 너나 마거릿 해머, 에스터 도슨과 같은 애들이 왜 절대로 백인 행세를 안 하는지 말이야. 그건 정말 엄청나게 쉬운 일이거든. 그럴 수 있는 유형에 속할 경우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되거든.”
"배경은 어떻게 하고? 내 말은, 가족 말이야. 네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 치고 다른 사람들이 두 팔을 벌려 널 받아들이기만 바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p.47

 

백인 피부를 지닌 흑인 여성 아이린과 클레어는 어린 시절 친구로 우연히 십이 년 만에 뉴욕의 백인 전용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흑인 남성과 결혼해 흑인복지연맹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 비해, 클레어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클레어는 타인의 욕망과 편의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던 아이였다. 그 단호하고 집요한 면이 결국에는 가난한 고아 신분에서 상류층에 편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백인 남편이 극심한 인종주의자라는 것이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백인 행세를 하면서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의 완벽하게 평화로운 삶에 침입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적극적인 연락으로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갔고, 어느 날 아이린은 클레어의 남편 잭을 만나게 된다. 그는 아내의 친구들 앞에서 검둥이들을 싫어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고, 아이린은 끓어오르는 노여움과 분노를 감당하려고 애써야 했다. 아이린은 자신의 균형잡힌 일상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클레어는 자신의 원래 소속인 흑인 지역 할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점점 더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불안하다. 흑인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남편과 살면서 혹시라도 태어나는 아이에게 검은 피부가 나타날까 걱정하고,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살아남아서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지."
"말도 안 돼! 생물학적 일반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는 없어요."     p.110

 

이 작품은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 대표 작가, 넬라 라슨의 작품으로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동명의 영화로 개봉했고, 넷플릭스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제목인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당신이 흑인이라면,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피부색이 밝다면 어떨까. 그래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백인 행세를 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흑과 백이라는 인종 간의 경계에 서 있다면, 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여기, 익숙하고 정다운 것들과 모두 단절한 채 위태로운 승부를 거는 여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가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는 여성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백인 피부를 지닌 흑인 여성이다.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이용할 때, 그저 상대가 자신을 백인이라 착각하고 보여주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정도의 방식으로 패싱을 하는 것과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흑인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숨이 막혔던 여성은 어느 날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되고, 다시 흑인 지역 할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두 여성의 욕망과 불안이 점차 쌓여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파국으로 치닫게 될 때 짧은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아름답고 섬세하며 매혹적인 작품이다. 경계를 넘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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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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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그리운 부석사' 중에서

 

1973년부터 2021년까지, 정호승의 시인의 50년을 담고 있는 275편의 대표작을 한 권에 담은 시선집이다. 데뷔작인 <첨성대>를 비롯해 널리 사랑받은 <수선화에게>, <산산조각>, 오늘의 시인을 보여주는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당신을 찾아서>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시집을 전혀 읽지 않는 이들도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로 시작되는 <수선화에게>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는 국민 시인이기도 한 그는 그 동안 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해왔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쉽게 읽히는 시들을 써온 시인이라, 50년이라는 긴 시간의 의미가 더 남다르게 느껴진다.

 

특히나 이 시선집은 275편의 시들을 발표 순서대로 배열해 두었기 때문에, 한 편씩 읽는 것만으로 정호승 시인의 시 세계를 한눈에 만날 수 있다. 혹시 시집이 아직 어렵게 느껴진다면 권말에 실린 김승희 시인과 이숭원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 출간된 동명의 시집의 개정증보판이지만, 130편 이상의 시가 교체되거나 새로 수록되었다. 그러니 정호승 시인의 시들을 좋아했던 독자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의미있는 시선집이다.

 

 

 

문 없는 문을 연다
이제 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문 안에 있을 때는 늘 열려 있던 문이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쾅 닫히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문 없는 문의 문고리를 당긴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 없는 문' 중에서

 

정호승 시인의 작품을 절절한 사랑에 대해,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서정시들로 기억했는데, 이번에 만난 시집에서는 조금 더 시간의 폭이 넓어서 그런지 무게감이 느끼지는 묵직한 시들도 많았다. 암울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거나, 정치적 억압 등 시대상을 그리고 있는 시들이 인상적이었다. 시인은 서두에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시가 가득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쓸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아직도 시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시를 조금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시는 쉽게 읽어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초대장처럼 들렸다. 난해성과 다의성으로 다소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여타의 시들에 비해 그의 작품들이 친근하게 읽히는 이유도 바로 이런데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바닥은 보이지 않지만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바닥까지 걸어가야만/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로 시작되는 <바닥에 대하여>라는 마음에 남았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 뭉클했기 때문이다.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면 되는데, 그 마음 먹기가 참 쉽지 않다. 바닥의 바닥까지 가보고 다시 굳세게 일어선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을 것이다. 누구나 절망의 끝에서, 암담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 이 시를 읽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가 담담하지만 뚝심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줄테니 말이다.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당신에게, 별을 바라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정호승의 시들을 추천한다. 맑고, 깊고, 단단한 시인의 목소리가 희망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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