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부분의 인간이 백 살을 넘겨 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계속 살아 나갈 의지가 없기 때문에, 지겹게 반복되는 생각과 인생에 지쳐 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언젠가는 살아오면서 숱하게 봐 온 미소나 몸짓에 진저리를 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영영 깨지지 않는 사이클 안에 갇혀 버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여기, 현재와 과거 사이를 오가며 사는 남자가 있다. 그에게 순간은 언제나 지금과 그때 사이에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그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흘러간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펜을 똑딱거린다. 한 번의 똑딱거림은 한 순간이다. 한 번,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또 한 번. 오래 살수록 점점 힘들어진다. 순간을 붙잡는 것. 각 순간들이 도착하는 즉시. 과거와 미래가 아닌 무언가에 갇혀 사는 것.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역사 교사인 톰 해저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시에 살았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 셰익스피어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톰은 그가 우리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업가이기도 했고, 연극 제작도 했었고, 우리와 똑같이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또 화장실도 들락거렸으며, 입냄새를 심하게 풍기기도 했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입 냄새를 심하게 풍겼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마치 그 시절에 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톰은 동료 교사인 카미유와 대화를 나누다 그녀가 읽고 있었던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는 책을 본다. 그녀가 이 책을 읽어 봤냐고,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그는 머릿속 무수한 기억들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 런던 학교의 교무실에 앉아 있지만, 그와 동시에 파리의 호텔 바에도 들어와 있었다. 두 세기, 두 곳의 장소와 두 개의 시간 사이에 갇혀 버린 것이다.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40대로 보이는 톰은 세월이 흘러도 외모가 변하지 않는 독특한 병에 걸린 사람이다. 애너제리아라는 명칭의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노화의 속도가 정상인들에 비해 15배쯤 느리다. 그리고 면역 체계가 강화되어 거의 모든 바이러스성 감염과 세균성 감염으로부터도 안전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만 시간이 멈춰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슈퍼히어로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 이들이 죽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구백오십 살쯤 돼서 자다가 죽거나, 아니면 폭력에 의해 심장이나 뇌가 손상되어 죽거나. 주인공 톰 해저드는 4백여 년 전에 태어났다. 중세 시대였기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늙지 않는 외모 덕분에 마녀로 몰려 익사했다. 게다가 평생 유일하게 그가 사랑한 여인 로즈는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모든 세월을 거쳐 홀로 남은 그는 현재 439살이다. 자신의 변하지 않는 외모를 주변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8년마다 계속 신분을 바꾸며 평생을 떠돌아 다니며 외롭게 사는 그에게 유일한 삶의 목표는 로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매리언을 찾는 것이다. 그의 딸 역시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에 걸려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2초 만에 벌어진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세기만에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제스처 하나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눈 깜빡할 새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파악될 때가 있다. 모래알만 보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듯이. 한순간에 빠진 사랑은 첫눈에 반한 사랑과는 또 다른 것이다.

무려 사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녀사냥과 전염병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중세 시대를 거쳐,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엘리자베스 시대, 재즈가 흘러 넘치던 19세기 초의 파리를 지나 피츠제럴드와 찰리 채플린이 살던 뉴욕을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그 긴 시간의 여정이라니. 이야기는 끊임없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가 살았던 과거 속 각각의 시대상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셰익스피어와 피츠제럴드가 등장하는 장면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1599년의 런던,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할 때 필요한 류트 연주자로 톰을 캐스팅하게 된다. 톰은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작가가 아닌 배우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바라보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셰익스피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1928년의 파리,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외로웠던 톰은 우연히 화려한 커플 옆자리에 앉게 된다. 톰에게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을 추천한 바로 그 남자는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아내와 함께였다. 사백 년 이상 살다 보면 세상 그 누구를 만나도 흥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톰이지만, 침대 옆에 놓아 둔 책을 쓴 작가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그날의 사건은 그에게도 무척 특별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독자인 나에게도 이런 순간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  피츠제럴드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고 싶다. 그런 바람을 품어온 지 꽤 되었다. 한 사백 년쯤.

애너제리아를 앓는 사람들의 모임인 '소사이어티'는 평생을 떠돌아 살아야 하는 톰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는 대신,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어야 하고, 그들이 의뢰하는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톰은 평범한 사람들인 하루살이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자신과 같은 증상을 앓는 이들을 찾아 모임에 가입하도록 권유한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부득이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찾아 헤매고 있는 딸 매리언을 소사이어티가 찾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딸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4세기만에 처음으로 마음을 흔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절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소사이어티의 규칙을 지킬 수 있을까.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처럼 진행되다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로맨틱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수세기의 시간을 넘나들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탄탄한 구성과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페이지 위의 글들이 영상화되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영화화는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매트 헤이그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스펙터클한 스토리에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치 그림 그리듯이 장면들을 그려내고 있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과거라는 것이 조용히 쌓이고 쌓여 현재를 만들고, 그 시간의 축적이란 모든 물체와 단어 사이에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너무도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1950년대였다가 이내 1920년대로 바뀌기도 하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근사한 작품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란 없다. 아마 이 책을 읽게 되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he Coffee Dictionary - 커피에 대한 모든 것 The Dictionary
맥스웰 콜로나-대시우드 지음, 김유라 옮김, (사)한국커피협회 감수 / BOOKERS(북커스) / 201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커피를 블렌딩하는 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우리 가게만의 특별한 마스터 블렌드/하우스 블렌드를 맛보세요"라는 상술의 타깃이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로스팅 전문가들이 블렌딩을 하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서로 다른 향미 특성을 섞기 위해서고, 둘째로는 비용 절감과 커피()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다. 블렌딩을 함으로써 로스터는 커피 공급에 있어 계절 변동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일관적인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밥은 어쩌다 한 두 끼를 안 먹더라도 상관없지만,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책이 나왔다. 그야말로 커피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든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커피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커피 사전이다. 이 책은 영국바리스타챔피언십에서 세 번 우승한 세계적인 바리스타 맥스웰 콜로나 대시우드의 [Coffee Dictionary] 한국어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약 200개의 키워드들은 커피콩이 한 잔의 커피가 되기까지, 커피의 여정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A부터 Z까지 담고 있다. 커피를 만드는 다양한 기구들, 커피의 맛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단어와 로스팅 및 추출의 원리, 그리고 커피의 역사와 종류, 재배 방법과 커피를 둘러싼 문화에 이르기까지 가볍고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전문적인 지식들까지 풍성하다. 게다가 다소 딱딱한 정보성 지식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예쁜 일러스트들 덕분에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향기, 소리, 커피콩이 요동치는 모습, 열기..... 로스팅 과정은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특히 커피 입문자에게 있어 인상적인 첫 경험은 1차 크랙 소리를 듣는 것일 테다. 팝콘 튀기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팡 터지는 소리보다는 탁탁 부딪치는 소리에 가깝다. 크랙이라는 명칭은 원두에 가해지는 물리적 과정에서 기인했다.

커피가 맛있다는 곳을 일부러 찾아가서 마실 만큼 나도 커피 성애자이다. 아주 어린 시절 꼭 식사 후에 커피를 타서 마시는 엄마를 보며 쓰기만 한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너도 어른이 되면 커피 맛을 알 거라는 식으로 말을 했었는데, 나 역시 이제는 커피가 없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카페에서 파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외에도, 집에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커피를 즐겨 왔다. 커피포트, 핸드드립, 프렌치프레스, 더치커피, 캡슐커피를 거쳐 요즘은 모카 포트를 애용하고 있다. 커피는 원두의 종류에 따라, 로스팅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맛을 내는 음료이다. 그래서 알아 갈수록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먹어보고 싶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살린 자그마한 커피숍들이 더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스페셜티 커피 문화에 열광하는 나라이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큐그레이더 자격 보유자가 있다고 한다. 덕분에 소규모 로스터 분야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니, 커피를 둘러싼 전 세계적인 흐름은 물론 커피와 관련된 기본적인 용어와 테크닉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세계적인 바리스타가 들려주는 커피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나보게 된다면, 아마도 커피를 더욱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커피와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주는 완벽한 선물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상곡(夜想曲) 2018-06-1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녹차파 커피비추요!!!!!!!!!
 
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하다 퇴사했다는 직원은 소진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이 조용히 덮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진도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물론 소진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에서 촉발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얼마 전 대학로에서 있었다. "울지마 지워 줄게, 죽지마 지켜 줄게, 우리가 싸워 줄게."라는 플래카드의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여성들을 향한 지긋지긋한 편파와 차별에 마냥 입 닫고 있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는 점이 작은 위로가 된다.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자료로 이루어진 '목소리 소설'을 통해 보여줬었다. 그녀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아홉 살부터 일흔아홉 살까지 60여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삶을 더 많이 드러내고 기록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경향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로 연재되었고, 저마다의 인생은 소설로 다시 쓰이고 28편의 이야기로 묶여 소설집으로 출간되었다.

이십 대 후반의 소진은 사수인 과장의 성폭력을 팀장에게 알렸지만, 법적 조치는커녕 회사 차원의 징계도 없었다. 과장은 대놓고 소진을 나무라기 시작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를 많이 주고, 화를 내고 괴롭히기 시작한다.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인사팀에서는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 화해하라고 설득하며 일을 대충 마무리하려고 한다.  소진에 대한 있지도 않은 소문들이 만들어져 사내에 돌기 시작하고, 그녀가 노동청에 직장 내 성폭력으로 진정을 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거라곤 따돌림과사회부적응자, 또라이, 사이코패스라는 폭언이었다. 이 이야기는 미투가 당사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소진 역시 폭로와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자신의 선택을 매일, 매 순간 후회하면서도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기든 지든 이 싸움을 마무리 해야겠다 라고 다짐한다. 제도, 규범, 상식 중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녀도 이런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사는 업무량이 너무 많고 어린아이 키우는 직원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남편은 당연히 육아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사회는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을 '극성'이라 매도한다. 그럼에도 엄마들은 직장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서로 도우며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혜는 달라져야 하는 것은 엄마들이 아니라 남편과 학교와 회사와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SNS에서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Metoo(나도 당했다)라는 말은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할리우드 거물 영화 제작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배우들의 폭로가 이어지며, 봇물 터지듯 너도나도 피해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다. 미투 운동은 영화계를 넘어 정치계, 스포츠계, 교육계 등으로 확산됐고, 국내의 정치계와 연예계, 교육계 등 사회 곳곳에서 미투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랬던 터라 이 소설집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 졌다. 성폭력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방송작가 이야기, 어린 여자 혼자서 저층에 살 수 없는 이유,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가사와 노동 두 영역에서 소진되어 버린 중년의 여성, 제도 속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는 동성 커플의 불안, 그리고 올해로 12년째 해결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는 KTX 해고 승무원의 이야기까지.. 이 작품 속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겪어오는 삶의 형태들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조남주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녀는 이제 마흔이 되었고,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을, 더 넓게는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는 말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덕성의 기준이 끝도 없이 추락한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름 뒤로 숨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을 살아내고 있는 그녀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
제프리 클루거 지음, 제효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NASA의 분위기도 이에 못지않게 절망적이었다. 1967년은 대 실패의 해, 최소한 미국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발사대를 떠나는 것으로는 대대적으로 실패한 해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유독 허세가 대단하기로 유명했던 NASA에도 스멀스멀 의구심이 흘러 들어왔다.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달 탐사 계획은 우주선에 성패가 달려 있는데 그 우주선이 죽음의 덫이 됐고 새턴 V 로켓으로 궤도에 진입한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는 데다 달 착륙선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1969 7, 3명의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고 닐 암스트롱은 달에 기념비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인간이 달에 착륙한 이후 거의 50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뒤로 우주기술은 더 크게 발전하고 있다. 미항공우주국은 2030년대에 '화성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2020년에 달 궤도선을 보내고 2030년까지 달에 착륙선을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첫번째 우주탐사이니만큼 어려운 도전이 되겠지만, 그만큼 기대도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우리의 달 탐사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폴로 11호와 닐 암스트롱은 알지만, 그 성공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제작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문제와 정치적 갈등도 있었고, 아폴로 1호는 발사 테스트 중에 화재로 우주인이 사망했고, 아폴로 5호는 로켓이 추락했고, 아폴로 6호의 로켓도 엔진 이상을 보였다. 아폴로 8호는 달 궤도를 돌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대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고, 인간의 달 착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러한 아폴로 8호가 탄생한 과정과 계획, 임무를 완수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폴로 8호가 어떻게 임무를 성공했고 그 배경에 어떤 난관이 있었는지 NASA의 방대한 기록을 20년 차 「타임」 수석 편집자인 저자의 눈으로 날카롭게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멋진 이유는, 우주 탐사를 다루고 있는 과학 도서이지만, 마치 소설처럼 쉽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달을 찾아온 이 세 명의 우주 비행사는 경이로운 광경에 온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 감정을 조용히 속에만 간직했다. 그럼에도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어조나 대화 사이에 머무는 긴 침묵에서 당시의 감정이 명확히 전해졌다.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달을 찾아온 이유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상황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대신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원래 아폴로 시리즈 중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7호와 8호의 비행은 우주 비행사를 태우고 지상을 벗어났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몰표로, 아폴로 7호부터 9호까지는 지구 궤도를 벗어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폴로 9호의 발사가 대략 9개월 남은 그 시점, 보먼과 동료 비행사들은 막바지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상관의 호출로 불려간 보먼은 지금까지 준비하던 계획을 취소하고, 당장 16주 뒤에 아폴로 8호로 달의 궤도로 가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죽음의 가능성은 비행에 늘 따라다녔고, 이 임무 역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까지 터무니없는 계획이라며 비난을 했던 이 프로젝트는 어떤 우여곡절 끝에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까.

 

지구에서 달까지, 37 6114킬로미터. 그렇게 먼 곳까지 인간이 날아가서, 거기서 바라보는 지구의 풍경은 어떨까. 끝내주게 멋진 광경 아닐까. 그리고 평생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던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 달의 중력권에 들어가게 되면 그 기분은 어떨까. 달의 중력은 지구의 6분의 1잉라는데 말이다. 게다가 아폴로 8호의 비행사들은 달의 뒷면을 육안으로는 최초로 보았다. 달과 지구의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같으므로, 지구에서는 영원히 달의 뒷면을 볼 수 없었다. 아폴로 8호의 비행사들이 달의 뒷면을 관찰하고, 달의 궤도를 돌면서 꼼꼼히 기록한 달의 지도와 비행 방법들은 이후에 이어지는 아폴로 프로젝트의 초석이 된다. 이 책에는 우주 비행 동안 비행사들이 식사하는 방법이나 잠자는 방법, 우주 비행사들이 입는 옷부터 어떤 원리로 로켓이 이륙하고 우주에서 우주선이 작동하는 지까지 아폴로 프로젝트와 관련한 모든 과학적 정보가 담겨 있어 우주 비행에 관해 궁금했던 많은 것들을 시원하게 알려주는 재미도 있다. 지구 궤도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던 우주 비행 연구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던 아폴로 8호와 누구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던 임무에 과감히 도전했던 세 우주 비행사들, 프랭크 보먼, 제임스 러벨, 윌리엄 앤더슨 덕분에 이제 인류는 달을 넘어 더 먼 곳으로 탐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아폴로 8호를 비롯해 이들을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십 채의 집이 모여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아파트는 나의 감정과 연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택은 마당에서 여러 가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과하지 않은 크기의 건물이기에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학교 건물은 보통 한 사람 몸 크기의 580배 정도 된다. 이런 건물은 너무 커서 우리 아이들이 정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건물은 일종의시설로 느껴진다. 대부분의 인격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기의 아이들이 이런 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점점 높아지는 집값과 청약당첨의 어려움 등으로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아마도 내 집 마련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수십 년 동안 월급을 아끼고 모아서 겨우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다는 게 뭔가 허무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여생과 노후를 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겠다는 유현준 교수의 이 책을 내가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알뜰신잡을 비롯해서 여러 매체에서 자주 보아왔지만 그의 저서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건축이라는 것을 이렇게나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놀랍다고 말이다. 사실 실생활과 너무도 밀접한 분야가 바로 건축과 공간인데, 전문적으로 들어가자면 또 이것만큼 어렵고, 복잡한 것이 없다. 저자의 책이 쉽고,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건축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거시적으로, 인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이 실려 있지만, 시작부터 파격적이다. 그는 말한다. '한교 건축은 교도소'라고. 무슨 소리일까. 한국에서 담장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을 꼽자면 바로 학교와 교도소가 있다. 두 곳 모두 운동장 하나에 4~5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 크기를 빼고는 공간 구성상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에,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우리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가 집을 떠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회가 학교라는 공간임을 떠올려 볼 때 안타깝기 그지 없는 현실이다. 저자는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며, 아이들에게 자연을 돌려주자는 콘셉트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사례를 들려 준다. 그의 말처럼 정말 '스머프 마을 같은 학교'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 건물이 저층화되고 분절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나 같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이런 학교가 만들어지길 고대해본다.

도시는 유기체에 비유된다. 따라서 궁합이 안 맞는 요소들이 만나면 문제를 일으키고 잘 만나면 상승 효과를 얻게 되어 전체 도시에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인 예가 도심 속 자연의 대명사인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고급 상권의 대명사인 5번가의 만남이다. 5번가는 센트럴 파크의 동측 면에 위치하고 있다. 공원과 접한 면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인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고 그 길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고급 상권가로가 된다. 센트럴 파크와 5번가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며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있다. 서울에도 이와 비슷한 두 개의 요소가 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화두가 많다. 그는 왜 우리나라에는 창의적인 천재들이 자주 나오지 않을까를 건축가 입장에서 고민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내의 일반적인 회사 형태인 고층형 사옥이 아니라 '밥상머리 사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밥상에 둘러앉아 마주 보며 밥을 먹는 식구가 더 돈독한 가족애를 갖고 있는 것처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대형 공간이 조직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형 쇼핑몰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 힙합 가수가 후드 티를 입는 이유, 뉴요커가 좁은 집에 살아도 되는 이유, 사람 중심의 공간인 골목길을 지켜야 하는 이유 등... 실제 사례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밀접한 건축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로마의 벽돌 이야기와 피라미드, 조선 시대 사람들의 헤어스타일과 권력, 그리스 민주 사회를 만든 극장의 구조를 비롯해 왜 정치 집회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가, 현대인이 SNS를 많이 하는 이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건축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공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어떤 공간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가, 우리는 과연 이 도시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의생활건축도시를 종횡 무진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질문들이다. 다채로운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가 사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어떤 곳일까? 내 아이가 자라서 살게 되는 곳은 어떤 공간일까. 술술 너무도 쉽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