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의 경제학 - 넘치는 데이터 속에서 진짜 의미를 찾아내는 법
나카무로 마키코.쓰가와 유스케 지음, 윤지나 옮김 / 리더스북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것보다 받는 것이 낫고, 오랜 시간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적당히 보는 것이 나으며, 입학 점수가 낮은 대학보다는 높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상당한 돈과 시간이 든다. 그런데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통설을 믿고 행동했다가 기대했던 효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돈과 시간까지 버리게 된다면?    p.19

 

건강검진을 받으면 장수할 수 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많이 보면 성적은 떨어진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면 연봉이 높다? 대부분 그렇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과관계' '상관관계'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들은 모두 틀린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한다. '두 개의 사실 중 한쪽이 원인이고 다른 한쪽이 결과'인 상태를 '인과관계가 있다'라고 한다. 한편 '두 사실이 서로 관계는 있지만,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지 않은 것'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과 추론의 근본 개념을 철저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완전 초보자를 위한 입문서이기 때문에 경제학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려운 수식 등도 전혀 사용하지 않아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초콜릿 섭취와 노벨상, 건강검진과 장수, 지구온난화와 해적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사실' 인지, '진실'인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실전에서 써먹으면 한층 똑똑해 보이는수 읽는 센스를 알려주고 있다. 꽤 많은 도표들과 경제학적 통계와 여러 데이터의 수치들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어렵지 않다.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에서 우리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고 반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사실만 보고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해 무조건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거나 무턱대고 건강검진을 받는다면 기대했던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당신의 소중한 돈과 시간만 낭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p.47

 

우리는 디지털 환경에서 생성되는 데이터의 규모가 점점 더 방대해지고 생성 주기도 짧아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방대한 양의 데이터, 즉 빅데이터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데이터는 어디에나 있지만, 그것이 가치 있는 데이터가 되려면 그 정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통계학자 발터 크래머는많은 사람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으로 통계를 들먹인다고 말했다. 엄청난 속도로 방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더라도,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남성 의사가 여성 의사보다 뛰어나다? 공부 잘하는 친구와 사귀면 성적이 오를까? 어린이집을 늘리면 여성 취업률이 올라갈까? 명문대를 졸업하면 연봉이 높을까? 저자는 말한다. 보이는 숫자에 속지 마라. 겉으로 드러난 정보에 속지 마라.

 

 

세계은행 출신의 교육경제학자가 알려주는 숫자만으론 읽을 수 없는 경제학의 진실은 빅테이더 시대 최소한의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미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이 빅데이터로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바꾸었고 이제 데이터 분석의 다양한 기법은 비즈니스와 정책 모델에 적극 활용되며 그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 미국 대선 당시 빅데이터가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해내며 판도를 뒤집는 전략으로서 진화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빅데이터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수년이 흘렀어도, 일반인에게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일본 출간 당시 2017 베스트 경제서 1위 및 아마존 재팬 경제경영 1위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큼 대중적인 책이기도 해서 빅데이터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파악해보면 어떨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이를 원했는지조차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저도 모르겠어요." 라고 했다가, 문득 알 것 같았어.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게 더 슬프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갖지 못한 것들은 상상으로만 존재하고, 상상 속에선 모든 게 완벽하니까." 이게 바로 내가 마리아노 도나텔로를 생각할 때 드는 느낌이거든.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루비. 넌 무척 현명하구나."   p.195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성추문을 일으킨 전직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가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엄청난 권력남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해 전 분야로 확산된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 운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자신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당시 클린턴은 르윈스키보다 27살이나 연상이었고,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상사였다. 르윈스키는 마흔 네살이 되어서야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이라는 엄청난 권력 차이의 함의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와 클린턴과의 섹스 스캔들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불렸고, 2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 뒤에 따라다닌다.

개브리엘 제빈의 신작 <비바, 제인>은 여러 모로 르윈스키 스캔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실제 이 작품은 '미투(Me too) 열풍'이 거세게 불던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당시 언론에서는 "르윈스키 다시 쓰기"라며 주목했다. 개브리엘 제빈은 "20대 때는 별생각 없이 르윈스키를 '젊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비난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둘 사이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이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라고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유명 정치인과 젊은 여성 인턴의 불륜이라니 뉴스 거리로 딱 좋은 소재 아닌가. 하지만 그 인턴이 당신의 딸이라면 어떨까. 이야기는 하원 의원과의 스캔들 이후 딸에 대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견뎌야 하는 엄마 레이철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나쁜 결말에 도달하고도 남을 만큼, 형편없는 선택을 이미 잔뜩 해버렸다. 그것을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인데, 당신의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당신은 인간이지 <끝없는 게임>의 등장인물이 아니니까.

이 시리즈의 문제점은, 몇 번쯤 나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엄청나게 지루하다는 점이다. 항상 착하게 살고 언제나 올바른 선택만 하면, 이야기가 무척 짧아진다.    p.360

레이철의 딸 아비바 그로스먼은 하원의원 에런 레빈의 인턴으로 일하던 중에 그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은 아비바가 하원의원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혹했고,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달려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여자라고 수군거렸다. 에런의 아내인 엠베스는 그를 용서했고, 티비 뉴스 인터뷰에서 불화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발표했다. 하원의원의 정치 생명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고 그의 일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바는 롤리타 인턴으로, 르윈스키 따라쟁이로, 난잡함의 다양한 유의어로 낙인찍혔다. 학교 측에서는 그녀에게 휴학을 강권했고, 레이철은 학교 교장 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이후 아비바는 졸업 후에 그 어느 곳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아비바게이트는 다른 사건의 이슈에 묻혔지만, 그녀가 이력서를 내는 곳에서는 여전히 구글 검색만으로 그 과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어느 회사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다. ‘선정적 보도’ ‘관음증적 관심’ ‘신상 털기’ ‘낙인찍기’ ‘모욕 주기’ ‘배척’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 운운등으로 이어지는 성추문 문제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섯 개의 장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섯 명의 여성 화자들이 풀어 나간다. 딸 아비바를 지키고 싶었던 엄마 레이철, 홀로 딸을 키우며 웨딩플래닝 사업을 하는 제인, 그녀의 여덟 살짜리 조숙한 딸 루비, 하원 의원의 아내로 남편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며 살았던 엠베스, 그리고 한때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아비바. 5명의 여성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스캔들 이후에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스캔들 자체보다는 그 후 여성이 겪어야 하는 편견과 차별에 집중하고 있어 자칫 신파로 흘러가거나,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시종일관 유쾌한 톤으로 유머를 잃지 않는다.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이러한 사건 이후로 다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쉽사리 주지 않는다. 과연 성추문에 휩쓸린 여자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가능할까. 세대와 처지가 다른 다섯 여자, 그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여성에게는 좌절의 상황에서재탄생이 결코 쉽지는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바꿔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당신을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작은 도서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2
다니엘라 자글렌카 테라치니 지음, 홍연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웅진 모두의 그림책 12권은 나만의 미니어처 서재를 만들 수 있는 <나의 작은 도서관>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서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원하는 대로 모두 구입할 수 없어서, 혹은 그 많은 책들을 정리할 공간을 마련할 수 없어서 서재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여기, 그런 이들의 로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 있다.

 

고풍스러운 패턴의 아름다운 상자를 열면 아담한 방이 나타난다. 고운 햇살이 드는 창, 고풍스러운 비취색 벽지, 맨발로 걷고 싶어지는 결 좋은 나뭇바닥으로 꾸며진 그곳은 바로 '작은 도서관'이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내가 직접 만들고 꾸미는 대로 나만의 도서관이 된다.

손끝으로 오리고, 접고, 붙이고, 꾸며 완성될 30권의 작은 책 만들기는 여느 DIY들과는 다르게 너무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다. 가위랑 풀만 있으면 되고, 너무 단순한 방법이라 어른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쉽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만 시간은 꽤 걸린다. 무려 30권이나 되는 책을 일일이 자르고, 접고, 붙여서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만드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

 

30권의 책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샤를 페로의 <빨간 모자>,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 에드워드 리어의 <올빼미와 고양이>, 루이스 캐럴의 <재버워키> 등 명작 동화와 <식물 도감>, <열두 별자리>, <세계지도>, <상상의 동물 사전>, <조류 도감> 등의 흥미로운 정보들이 담겨 있는 책, 그리고 열 권의 나만의 책이다. 

 

<내가 쓴 이기한 이야기>, <작고 소중한 나의 보물들>, <내가 쓴 모험 이야기>, <나의 일주일>, <나만의 무늬 그리기 책>, <우리 가족 앨범> 등 내용이 비어 있어서 직접 이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재미있는 사진을 잘라 붙여서 완성할 수 있는 나만의 책들이 있어 더욱 흥미로운 서재가 완성된다.

완성된 미니어처 책들은 생각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게다가 미니어처라고 해서 내지를 대충 만들지 않고, 각각 표지에 맞는 고급스러운 패턴의 속지와 본문의 내용들 또한 실제로 읽을 수 있는 크기의 글자와 내용에 맞는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세계지도 이미지도 멋졌고,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린 일러스트도 굉장히 멋지다.

 

짜잔. 그렇게 해서 완성된 나만의 작은 도서관이다. 핑크색 상자를 열고 바닥에 세우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도서관이 나타난다. 게다가 대부분의 미니어처들이 만들때는 재미있고, 완성하면 뿌듯하지만, 막상 보관이 애매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보관 방법도 훌륭하다. 독서가 끝나면 상자를 다시 눕혀서 만든 책과 책꽂이를 넣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태 그대로 상자 채로 책처럼 책꽂이에 세워서 보관도 가능하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언제든 펼쳐서 볼 수 있는 나만의 도서관이라는 비밀 공간이 생긴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책을 수집하게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란 얘기다. 나 역시 나날이 늘어나 네 벽을 완전히 둘러 방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책꽂이들의 틈새에서 매일 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은 책들이 자가증식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들이 늘어나고 있어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나의 서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물론 책등의 컬러 별로, 시리즈 별로, 출판사 별로.. 보기 좋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완벽한 서재의 모습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뒤죽박죽 바닥까지 쌓여 있는 책들의 숲이지만 말이다.

 

<나의 작은 도서관>은 책 한 권이 주는 수만 가지의 즐거움을 감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처럼 책을 수집하고, 읽고, 책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만의 비밀 서재를 만들어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추천한다. 내 손으로 직접 책을 짓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이 체험은 읽기의 대상을 넘어 감각의 대상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확장시켜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맨틱, 파리
데이비드 다우니 지음, 김수진 옮김 / 올댓북스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이곳이 바로 살롱입니다." 관장이 설명했다. "그리고 노디에가 기대어 서 있었던 벽난로가 바로 저기지요."

그 순간, 밖에서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귀에서 멀어져 갔다. 잠시 시간의 흐름이 멈추었다. 나는 노디에가 살았던 시절 그와 함께 했던 그림과 책, 물건들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기억과 먼지가 켜켜이 쌓인 비옥한 흙냄새가 나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랬더니 어느 날 저녁 살롱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한 뒤마의 글이 떠올랐다.    p.59

파리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와 이야기들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이다. 약혼녀과 함께 파리로 여행을 온 할리우드의 작가인 주인공이 어느 밤 자정에 파리의 골목길을 헤매다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그 영화는 그야말로 파리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설레이는 작품이었다. 불꺼진 상점들 너머 길을 잃은 자정이 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통로를 발견한다는 낭만적인 설정도, 위대한 작가들이 쉼쉬는 공간에서 그들과 함께 한다는 호사스러운 공상도 너무 매혹적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가 여는 파티에 참석하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헤밍웨이가 불쑥당신은 어떤 소설을 쓰지? 문장은 간결해야 해하고 조언해주며, 거트루드 스타인이 내가 쓴 글을 평가해준준다니,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 꿈꿀 달콤한 상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리라는 도시는 이 영화에서처럼 '매일 밤 12시가 되면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1920년대행 자동차'가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설레이는 판타지가 진짜 벌어질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다우니는 파리라는 도시가 지닌 매력의 원천에는 물리적 아름다움이나 고급스러운 삶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역사와 여행과 회고록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저자가 파리로 건너와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파리와 파리의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탐색에 나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말은 잊기 바란다. 그리고 한밤중 대신 새벽에 몽마르트르를 가로질러 산책해보기 바란다. 마녀가 출몰할 것 같은 이 시간이면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장소들은 텅텅 비어 있다. 이제 저속하고 시대착오적인 것들 대신 마법처럼 역사 속 인물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장밋빛 불빛 속에서 마르스 신은 모딜리아니가 긴 목을 지닌 한 연인과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거투르드스타인은 전신으로 받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바토 라부아르에 있는 파블로 피카소의 정신 없는 작업실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p.421

푸치니의 오페라, 플로베르와 빅토르 위고의 소설, 할리우드 영화 그리고 나다르와 브라사이, 드와즈노,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속에는 낭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들이 파리를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파리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낭만의 토대이자 뿌리가 되는 것들, 정말로 중요하지만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거대하고도 어둡고 비밀스런 것들, 파리와 파리지앵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선과 다름없는 것들에 대해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센 강변과 생 마르탱 운하, 중세풍의 거리, 멋지고 오래된 건물들 모두 하룻밤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노래와 와인, 장미로 생기가 도는 완벽한 도시의 밤 풍경은 섬세하고도 세심하게 계획해서 만들어낸 환영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미국에서 태어나 파리의 매력에 빠져 이주해온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가 읽어내는 빅토리 위고, 조르주 상드, 샤를 보들레르, 오노레 드 발자크, 펠릭스 나다르 등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의 삶과 사랑은 대단히 흥미롭게 들려진다. 파리라는 도시의 세속적이고 낭만적인 곳을 찾아 순례를 하며 세계적인 문학가, 예술가들이 깃들어 있던 곳들을 직접 찾아가보고 감상하고 탐구하고 그들의 사랑과 인생, 해프닝,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여정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100여 컷의 역사적이거나 현대적인 사진이나 스케치, 그림들은 우리가 파리의 과거와 현재를 읽어 내는데 더 생동감을 부여한다.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파리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면 이 책으로 인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0세 사망법안, 가결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이 나라 국적을 지닌 자는 누구나 70세가 되는 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예외는 왕족뿐이다. 더불어 정부는 안락사 방법을 몇 종류 준비할 방침이다. 대상자가 그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한다.   p.9

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에다 버렸다고 하는 장례 풍습으로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다.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리는 풍습을  풍습과 관련된 설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다. 일본에도 '우바스테야마'라는 이름으로 전해졌고 말이다. 굳이 인간의 도리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내 상식으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싶지만, 어이없게도 '고려장'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노부모를 해외 여행지에 버리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며 매년 증가하는 노인 학대에 대한 뉴스가 실제로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나 싶어 씁쓸했지만, 나의 부모도 점점 나이가 들테고, 나 역시 언젠가는 노인이 될테니 오싹해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은 '70세 사망법안'이라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시작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인한 문제는 많은 작품에서도 다루어온 소재이지만, 이 작품 만큼 파격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적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극중 정부는 고령 인구에 대한 의료와 복지로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고, 저출산으로 인해 생산 인구는 충당되지 않는 사회적 악순환의 고리를 일거에 끊기 위한 대체 요법으로 '70세 사망법안'을 내놓았다. 이 법안이 시행되면 고령화에 부수되는 국가 재정의 파탄이 일시에 해소된다고는 하지만, 명백한 인권친해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전 세계를 경악시킨 이 법안은 2년 후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러니까 법안이 시행되는 2년 후면, 70세 이상이 되는 노인들은 전원 죽어야 한다는 건데... 그게 현실이라면 너무도 잔인한 일이지 않을까. 가키야 미우는 이러한 사회 문제를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냐. 아빠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으니 좀 편해지고 싶다. 내 시간도 필요하고."

"아빠, 그거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 세대는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그러니까 아빠도 죽을 때까지 일해요."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는 아버지를 보고 이번에야말로 개과천선했나 보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사람이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듯하다.    p.350

 

침대에 누워 운신하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수발을 든 지 이미 십삼 년째,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며느리 도요코에게 70세 사망법안은 한 줄기 희망이 된다. 도요코가 쉰다섯이니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15, 남편은 쉰여덟이니 앞으로 12, 시어머니는 여든넷이니 법안이 시행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2. 시어머니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앞으로 2년 후를 상상만 해도 해방감에 도요코는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늘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은 주말에도 전혀 집안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좋은 대학에 멋진 직장을 다녔지만 인간관계로 인해 회사를 그만둔 지 삼 년째 백수로 지내고 있는 아들은 방에만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었다. 집을 나가 혼자 살고 있는 딸 역시 엄마를 도와 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보살폈지만 아무도 그녀의 수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늘 그녀에게 고약하게 굴고, 남편은 집에 있는 날에도 피곤하다며 늦잠만 자고, 딸은 집을 떠나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아들은 2층에서 좀처럼 내려 오지 않고, 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들의 이해와 도움이 없는 가운데 홀로 수발에 지쳐가는 노인 돌봄 문제는 실제 현실에서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극중 도요코는 급기야 집을 나가기에 이른다. 그녀를 가출에 이르게 한 그 모든 상황들이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안타깝고, 공감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도요코의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그리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어 흥미로웠다. 시어머니 기쿠노는 혹시 자신이 부르지 않으면 며느리가 영원히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자신이 여기 누워 있다 죽어도 모르지 않을까. 불안했고, 아들인 마사키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다가도 이름 있는 회사가 아니라면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딸인 모모카는 어쩌다 노인 요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노인들을 돌보면서 비로소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70세 사망법안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반가운 소식으로, 누군가에게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로,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 자체를 무시당한다는 처사로 다가오게 된다.

사람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실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야 찾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다 같이 조금 더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작가의 시선 또한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