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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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헤로인과 같다. 한번 맛보면, 행복이란 게 있는 줄 알면 다시 행복해지지 않고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행복은 소박한 만족 이상의 무엇이므로. 행복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행복은 전율하는, 예외적인 상태다. 지속하지 않을 게 분명한, 초, 분, 날이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의 슬픔은 나중에, 행복에 이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온다.       p.80

 

요 네스뵈의 해리홀레 시리즈 열두 번째 이야기 <칼>이 출간되었다. 요 네스뵈는 데뷔작 <박쥐> 이후 22년 만에 이 작품으로 두 번째 리버트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은 해리 홀레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충격적인 포문을 연다. 물론 전작인 <목마름>을 읽었다면, 행복한 해리 홀레의 모습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고 막연하게 느꼈겠지만 말이다. 가족과의 평온한 일상이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을 정도로 해리에게 행복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고, 그는 자신이 겨우 찾은 행복을 지켜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이번 작품에서 요 네스뵈는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차갑고도 무자비하게, 한치의 자비도 없이 날카롭게 해리의 행복을 난도질해버리는 것으로.

 

<칼>에서 해리는 라켈의 집에서 쫓겨난 상태로 등장한다. 행복의 한가운데에서도 라켈을 잃어버릴까 무서웠던 그였는데, 이미 그녀를 잃어버린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알코올의존자가 되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게다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잠에서 깨어난다. 전작에서 만났던 해리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경찰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해리는 다시 강력반으로 돌아와 서류나 정리하고, 미제 사건을 검토하는 업무를 맡았다. 다시 술 취하고 불안정한 수사관이 된 해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일생일대의 비극이다. 전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고되었던 스베인 핀네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시작했고, 해리는 홀로 외로운 수사를 펼쳐 나가야 한다.

 

 

할아버지는 주머니 시계를 꺼내고 우리가 물가로 돌아가면 우리의 여정을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하나의 연속선으로 보일 거라고 말했다. 목적과 방향이 있는 이야기. 우리는 그 이야기가 여기에, 다른 어디도 아닌 여기에 있는 것처럼 기억하고, 배가 물가에 닿게 하려고 의도한다. 하지만 도착점과 처음 의도한 목적지는 전혀 다르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 현재 위치에 이르러서 여기가 우리가 가려던 곳이거나 적어도 가려는 길 위에 있다고 믿으면 그런대로 위안이 될 수 있다.    p.660~661

 

<팬텀>에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졌던 해리는 <폴리스>에서 경찰서를 떠나 경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오랜 연인 라켈과 마침내 결혼을 했다. 그리고 3년 뒤, <목마름>에서 뱀파이어 살인마가 등장하며, 외부의 압박에 의해 다시 살인 현장으로 컴백했었다. 가족과의 평온한 일상이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을 정도로 해리에게 행복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지켜내야 하는 존재가 생겼고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운 마음과 범인을 잡고 싶다는 갈망과 뼛속까지 경찰인 해리의 내면에 있는 목마름 사이에서 고뇌하며 강박적으로 살인자를 쫓는 일에 매달렸다. 피를 갈망하는 범인의 목마름만큼이나 범죄에 끌리는 해리의 목마름도 강렬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행복한 해리 홀레의 모습은 자신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낯설었다. 그동안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해리는 언제나 소중한 뭔가를 잃어 왔고, 그러면서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왔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해리 홀레의 모습은 독자로서 마주하기가 쉽지 않다. 이건 아니야, 꿈이라고 말해.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순간마다 페이지를 멈추고 작가를 원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해리 홀레 시리즈 열 두 번째 작품을 읽어 나가는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시작부터 작가로부터 엄청난 펀치를 맞고 거의 기절 상태로 질질 끌려 가는 기분인데다, 해리의 모든 것들이 너무도 먹먹하고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의 깊이와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주 초반에 벌어지는데, 그 긴장감을 거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읽게 된다. 게다가 거듭되는 반전 역시 탄탄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플롯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 해리 홀레에게 사상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시리즈 전체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해리 홀레 시리즈는 13권 <블러드문>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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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6-09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책 표지들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할듯 하네요^^

피오나 2022-06-10 13:21   좋아요 1 | URL
그죠? ㅎㅎ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성의 시리즈랍니다 ㅋㅋ
 
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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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은 미국 전역에 있는 클럽이란 클럽에는 모조리 특별 회원으로 가입한 듯했다. "돈이 썩 많이 드는 취미지." 조너선이 빈센트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장소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빈센트가 진작 눈치챘어야 할 또 하나의 힌트였다. 조너선은 대체 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를 바랐을까? 누구나 다 아는 생명의 유한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 피할 수 없는 사태가 몰려오고 있음을 예감했기 때문은 아닐까?)           p.99

 

이야기는 캐나다 밴쿠버섬 최북단에 위치한 오성급 호텔 카이에트에서 시작된다. 초대형 판유리와 삼나무로 장식된 궁전 같은 호텔은 앞에는 바다, 그리고 그림자 진 숲이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호텔의 북쪽은 완전히 황무지였고, 외진 장소에 위치한 탓에 호텔에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뜻밖의 장소에 있는 최고급 호텔이라는 점이 그곳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곳은 잠시나마 현대문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큰돈을 지불할 수 있는 고객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폴과 빈센트 남매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마약 문제로 여러 번 재활원을 드나들었던 대학생 폴은 사고를 치고 도망치듯 호텔에 와서 청소 관리인 일을 하는 중이었고, 어머니를 잃은 뒤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했던 빈센트는 생계 유지를 위해 호텔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중이다.

 

어느 날 밤, 로비의 유리 벽에 '깨진 유리 조각을 삼켜라'라는 섬뜩한 낙서가 발견되어 호텔 손님들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놀란 사건이 발생했는데, 폴이 그 일의 범인으로 의심받아 결국 호텔에서 해고가 된다. 마침 그곳에는 호텔의 소유주인 조너선 알카이티스가 와 있었고, 그는 빈센트에게 한 눈에 반한다. 빈센트는 호텔을 그만두고 그와 함께 떠나고, 그의 트로피 와이프가 된다. 엄청난 규모의 투자 사업을 하며 부를 영위하던 알카이더스의 삶 속으로 들어간 빈센트는 대저택에 살면서, 개인 제트기를 타고 다니는, 넘치는 재력을 마음껏 누린다. 하지만 거대한 '돈의 왕국'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고, 위태로운 유리의 성은 무너지고 만다. 초대형 폰지사기 범죄로 체포된 알카이더스는 무려 17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나라가 무너지지 않은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들의 유령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둠의 나라에 사는 시민들이었다. 전생에서도 그런 나라가 있다는 걸, 심연의 가장자리에 걸쳐진 나라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기는 했었다. 영원히 그늘이 걷히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외딴곳에 가면 그 나라가 한층 또렷이 보였다.... 어둠의 나라에 사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막연히 알고 있었다. 그 나라의 시민들은 단 한 번 삐끗하는 바람에 사회라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안락하지 않은 땅으로,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땅으로 밀려났다.         p.311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인상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 만났던 에밀리 세인트존 멘델의 신작이다. 전작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종말을 다루는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른 분위기였는데,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들 대신, 평화롭고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고, 20년 후 종말 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었음에도 종말 후의 풍경이 이럴 수도 있다니,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읽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잔잔한 감동이 여운처럼 남았던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은 2008년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사상 최대 폰지사기 사건을 다루고 있다.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던 작가가 사기극을 소재로 이야기를 썼다고 하니 어쩐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는데, 역시나 평범한 미스터리 작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주요 플롯인 사기극에 대해 그 전모라던가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데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이 정도로 큰 규모의 범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면 단계별로 어떻게 사람들을 속여서 사기 행각을 벌이게 되었는지, 엄청난 규모의 금융 사업 자체에 대한 설명이 주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막대한 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왕국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질거라고 기대했다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 당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부분이 이 작품을 낯설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매혹적이고 독창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외딴 섬에 위치한 초대형 판유리와 삼나무로 장식된 궁전 같은 호텔에서 시작된 거대한 비극이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놀랍도록 우아하고 정교한 이야기를 지금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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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내를 위한 레시피
카르마 브라운 지음, 김현수 옮김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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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와 2020년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섬세하고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이 작품은 요리책과 레시피라는 비밀스러운 소재를 통해 은밀하고, 매혹적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실체를 밝혀낸다. 유능한 아내란 무엇인가, 완벽한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명적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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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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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십칠 년 넘게 기자로 일하면서 쓴 기사들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기사이다. 당신의 아빠가 죽을 것이고, 당신의 오빠나 남동생이 죽을 것이고, 당신의 아들이 죽을 것이고, 당신의 아들이 죽을 것이고, 당신의 남편이 죽을 것이고, 당신이 사랑했고 같이 잤던 모든 남자가 죽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 모든 것은 2025년 11월 초에 시작됐다. 독자 대부분은, 특히 미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은 몰랐을 테지만 영국 전역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불안과 공포로 떠들썩했다. 나는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p.82~83

 

영국 글래스고 11월, 이십 년차 의사인 어맨더는 응급실에서 환자들을 보는 중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독감 증세의 환자가 어느 순간 갑자기 호흡을 힘겨워하며 죽어가고 있다. 체온이 급속도로 치솟고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환자는 곳 사망한다. 건강한 젊은 남성이 한 시간도 못 되는 시간 동안 정상에서 빈사 상태로 넘어간 것이다.  어맨더는 진료 기록을 점검하고, 비슷한 시기에 내원했던 다른 환자들을 살펴보고는 이것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전염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영국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글래스고,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서부 연안에서 두루 관찰되는, 오직 남자만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고, 치료가 불가능한 이 병을 사람들은 ‘남성대역병(Great Male Plague)’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오직 남자들만 걸리는 변종 독감의 초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한 WHO는 결국 팬데믹을 선언한다. 그들이 발표한 공식 성명들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말이 전혀 없었다. 유일한 권고는 집에 머물라는 것이었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남자들은 집에 머물다가 죽을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역병은 얼마나 더 심각해질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죽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 가족은 무사할 수 있을까. 남자만 병에 걸리는 이유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아무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고, 이러다가는 남자들 태반이 죽을 것이 뻔했다. 이것은 세계의 종말인 것일까. 남자들이 사라지면 폐허가 된 세상을 재건하는 것은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된다. 이는 삶이 산산조각 난 채로 남겨진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연 여성들은 백신을 개발하고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며 무너진 경제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인류 멸망의 위기에 맞서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파격적인 상상력과 현실적인 묘사로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발화되는 방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남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오직 남성만이 역병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정중히 그 견해에 반대한다. 여성들은 대부분 남겨진 사람들이다. 삶이 산산조각 난 채로 남겨진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여성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을 하고,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며, 사별의 고통을 짊어진 채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한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방식 역시 변화했다.      p.460~461

 

감염에서 죽음까지 단 이틀, 치사율 90%, 오직 남자들만 걸리는 역병이 도래한다. 사상 초유의 ‘남성대역병’ 바이러스와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남자가 없는 세상은 어떨까, 여성이 주도하는 정부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팬데믹 이전에 집필했고, 출판 계약이 된 이듬해 코로나가 전세계를 덮쳤다고 하니 극중 전염병의 공포와 혼란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남성만을 공격하는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 그리고 폐허가 된 세상을 재건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파격적인 상상력만큼이나 손에 잡힐 듯 생생한 팬데믹의 공포로 인해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 작품이 되고 있다. 등장 인물이 많고, 각각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대대적인 공포와 혼란이 공감되고,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 부서지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삶들의 파편들이 쌓여서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남자들의 끝 (The End of Men)인가, 인류의 종말인가. 삶이 산산조각 난 채로 남겨진 여성들이 세계를 어떻게 다시 구축하는 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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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권일영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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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하지만 말이야, 조직이라는 게 나 혼자 아등바등해봐야 어쩔 수 없는 때도 있거든."
"그건 거짓말이야." 에리코가 일축했다.
"어떤 조직도 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모든 사람이 '나 혼자 애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체념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자기가 나서야 하지 않겠어?"     p.129

 

도로를 달리던 트레일러에서 타이어가 빠져 날아가는 바람에 인도를 걷고 있던 사람의 등에 부딪치고 만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안타깝게도 즉사였고, 운전자는 법정속도를 아슬아슬하게 지켰고 속도위반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에도 운전자는 아무런 이상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타이어가 왜 갑자기 빠진 것일까. 사고는 언론의 주목을 받아 보도되었고, 사고 차량을 운행하던 아카마쓰운송은 누가 보더라도 '가해자'였다. 운전기사에게 과실이 없다면, 정비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 밖에 없었고, 경찰 역시 정비 불량으로 결론을 내린다.

 

40년간 아카마쓰운송을 이끌어온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뒤를 이어 10년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 아카마쓰 도쿠로는 정비 불량이라는 결론에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다. 정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어가 빠졌고, 경찰 역시 그에 대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체포를 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조사인 대기업 호프자동차는 사고 원인이 아카마쓰운송의 정비 불량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에 대한 보고서와 부품을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사고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던 아카마쓰는 이전에도 비슷한 사고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비 불량이라 망가졌는지, 구조적 결함이라 망가졌는지에 따라 책임 소재는 전혀 달라진다. 하지만 과연 영세한 중소기업이 매출액 2조 엔을 자랑하는 대기업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싸우지 않을 건가요, 그 회사하고?"
"절대로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할 일도 없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죠. 그렇다면 미래를 바꿀 수밖에 없어요. 전 더는 그 호프자동차라는 회사에 삶을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계속 싸우면 다에코가 남긴 즐거운 추억까지 일그러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제겐 다른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애를 위해, 아내도 틀림없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거예요."
운명은 왜 이리 잔혹한 걸까. 왜 이리 슬픈 걸까.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은 다들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슬픔을 넘어서서.         p.784~785

 

이 작품은 2020년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작품으로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소설 이전에 영화나 드라마로도 유명했던 작품이라, 영상화된 버전으로 먼저 만나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픽션이긴 하지만, 사실 2000년대에 실제로 벌어졌던 미쓰비시자동차의 대형 트럭 타이어 분리에 의한 사상 사고와 미쓰비시의 리콜 은폐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특히나 이케이도 준 작가 자신이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미쓰시비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 더욱 실감나는 현실성이 장점이다. 극중 아카마쓰운송은 이 사고로 인해서 큰 거래처를 잃고, 은행으로부터 융자도 거절당하고, 용의자 취급받으며 경찰 수사를 당했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아들 또한 학교에서 왕따와 괴롭힘을 받았으며, 부품 반환을 둘러싸고 호프자동차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애초에 누가 보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대기업의 수법은 비열했지만 그렇다고 재판을 걸어 법적 수단에 호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자금 조달도 어려워 회사를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마쓰는 멈추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이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는 무려 네 권짜리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이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소설이었고, 이후에 나온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등 출간된 모든 작품들이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완벽한 재미를 선사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하늘을 나는 타이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에 등장인물만 70명에 달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난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고의 진상 규명이라는 하나의 플롯을 중소기업의 사장과 대기업의 직원, 은행원과 주간지 기자, 경찰 그리고 사건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인물의 시점으로도 바라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조직과 그 속의 개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문제 제기를 묵직하게 해내고 있다. 소설적 재미에 의한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사회의 어둠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케이도 준이 있게 한 그의 모든 작품의 근간이자 원점이라 할 수 있기에, 이 작품은 놓치지 말고 챙겨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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