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장소
나희덕 지음 / 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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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즐겨 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케 세라 세라'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다. 마음이 무겁거나 우울할 때 그곳에 앉아 도리스 데이의 그 노래를 혼자 읊조리다보면, 마음 한끝에서 밝은 기운이 생겨나곤 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잘될 거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라고,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놀랍지 않은가,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런 위로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p.14


나희덕 시인은 산책과 여행이 삶을 견디게 하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가며 풍경을 받아들이고, 그러다 마음의 장소를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른다고. 이 책은 바로 그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2017년에 나왔던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를 전체적으로 손보고 글을 보태어 나온 개정판이다. 글과 사진의 배치도 달라졌고, 표지도 아름다워져서 새책처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희덕 시인의 시집만 만나온 터라, 이번 산문집을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시인은 한 해 동안 런던에서 즐겨 걸었던 템스 강변에 있는 벤치 등판에는 누군가를 기리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고,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에 시인은 위로를 받는다. 보통 그 벤치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기리기 위한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시인이 즐겨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케 세라 세라'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은 기분에 자신이 죽은 뒤에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달라고 자식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인상깊은 장소였다. 또 영국 바스에 있는 생긴 지 삼백 년도 더 된 빵집에서 빵에 깃든 역사와 기억을 맛보았던 경험과 어제의 친구와 오늘의 친구가 만나 내일의 친구가 되었던 순간에 나누어 가진 스페인의 수제품가게에서 골라온 반지의 추억, 아일랜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책을 읽던 노인을 통해 떠올린 소설에 대한 이야기 등 시인이 만난 장소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디 딱 적당한 온도로 마음을 데워 주었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마음의 장소라는 게 있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듯 몸과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곳.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남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다. 그곳과의 인연은 꽤 긴 편이다. 십여 년 전 지인의 안내로 월출산 아래 멋진 동백숲이 있는 집터를 가보게 되었다. 그 후로 낮은 돌담과 작은 오두막이 있는 그곳에 이따금 혼자 찾아가 앉아 있곤 했다. 집터를 구입할 사정은 안 되지만, 마음으로는 그곳에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p.190


영국과 미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 해외 여러 도시들부터 한국의 회산 백련지, 전주 한옥마을, 전남 백운동 별서정원 등 곳곳의 글과 사진으로 만나면서 함께 그곳들을 걷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야말로 방구석에서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자주 들르던 자선가게에 있던 장애로 심하게 일그러진 손가락을 가진 남자, 사람이 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된 집 정원에 있던 낡은 초록색 소파,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데려온 백 년이 넘은 괴종시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는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주는 다리, 세계에서 가장 큰 분화구를 지닌 포아스화산이 잘 보이는 공터에 둘러앉아 했던 시 낭독회 등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은 시인의 시선들이 우리를 그 각자의 순간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시적 언어로 재해석된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색깔과 사연을 가지고 있어 짧은 이야기 속에도 그들만의 드라마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 뻗어 닿는 곳에 놓아두고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마다 한번씩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사람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찾아가는 자신만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이 걸으며 만난 그리운 장소들을 통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장소'를 떠올리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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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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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이들은 달력에 빨갛게 표시된 날을 조바심 내며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실제 닥치면 기대했던 것보다 즐거움음 훨씬 못 미치기 마련이니까. 애타는 기대감이 내심 실망감으로 바뀌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자체보다 기대감 자체가 진정한 보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이런 실망의 순환을 수없이 경험해야 한다. 숨죽인 기다림이 보상의 전주곡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환상은 무너지고 마법은 깨진다.              p.57


열한 살 다윈은 학교에서 친구에게 멍청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정학 수준의 학칙 위반이라는 소릴 듣는다. 피어슨은 아들을 데리러 학교로 가서 교감에게 퇴학 처분도 각오해야 하니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는다. 이 모든 소동은 정신평등주의 운동때문이다. ‘정의로운 시대’의 가면을 쓴 가짜 공평은 모든 교육 기관의 시험을 없애고, 차별적인 표현을 쓸 수 없으며, 숙제를 하지 않아도, 수업 시간에 잡담을 해도 야단을 칠 수 없게 만든다. 분열과 편견을 조장하는 환경을 만든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금지되고, 지능 같은 개념도,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도 판단할 수 없고, 만들어지는 모든 콘텐츠가 검열되는 세상이 되었다. 대학의 영문과 교수인 피어슨은 무시험 입학제를 비롯해서 정신평등운동에 광적인 학생들로 인해 일이 점점 힘들어 지고 있었다. 


피어슨과 에머리는 십대 때부터 단짝 친구로 40년 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에머리는 지역 방송국 진행자로 피어슨의 집에 식사를 하러 오면서 남자친구를 데려온다. 에머리는 아름다운 외모 만큼이나 연애를 자주 했는데, 이번 남자친구인 로저는 극작가였다. 그들은 식사 중에 인지 불평등이 금지된 현재 세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날카롭게 대립을 하게 된다. 공적인 자리에서 자칫 실수했다가 경력을 구렁텅이에 빠드릴까봐 조심 중이라는 에머리, 자꾸 선을 넘나들며 현재 세태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피어슨의 남편 웨이드, 그러다 로저와 피어슨이 대립하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피어슨에게 로저가 '얼간이'라는 말을 했다고 혐오 발언은 삼가해달라고 한 것이다. 정신평등주의에 대해 대놓고 반감을 가지고 있는 피어슨과 사회적 위치때문에 조심하는 에머리, 그리고 이 운동이 대체 해로울 게 뭐가 있느냐며 그것에 동의하는 로저... 급기야 그 상황은 에머리와 로저가 문을 닫고 나가버리기에 이르는데... 피어슨은 오랜 친구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 국민이 명백한 거짓말을 통째로 수용하는 현실로 인해 필연적으로 다른 거짓말이 통용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는 진실로 향하는 통로를 끊어버렸고, 그로 인해 진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즉, 우리의 대표자는 어떤 말을 해도 되고 어떤 주장을 옹호해도 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은 아름답다. 이 주장 하나만 있으면 사실이 된다. 실제로 참인 것이 아니라 참이기를 바라는 것을 옹호할 때, 우리는 모든 선진 경제가 번영을 일구게 해준 과학적 방법론과 결별한다.                 p.345


<케빈에 대하여>에서 모성의 금기를 부쉈던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이번 작품에서 평등이라는 사회적 금기와 현대의 성역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여호와의 증인 광신도였던 부모로 인해 신앙이라는 이름의 복종에서 탈출하고 저항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녀의 딸 루시는 평등의 이상이 종교적 광신 수준의 열풍을 일으키는 사유의 결핍 속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다. 십대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절친과의 사상 대립, 소통이 단절된 모녀 관계 등을 통해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개인의 기질이 사회와 충돌할 때 겪게 되는 고통과 우정의 붕괴를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평등하게 똑똑하다면, 그 사회는 이상적인 걸까? 평등의 기준은 누가 정할 수 있을까? 평등은 언제나 선한 걸까? 


가장 친밀했던 존재가 가장 정확한 적이 된다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너무도 친밀한 사이였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슴 아픈 아이러니다. 에머리의 가족이 열여섯 피어슨의 삶을 구해줬기에, 그 고마움을 수십 년 동안의 우정이 쌓여 오는 동안 내내 간직하고 있었던 피어슨이기에 두 사람의 우정이 무너지는 상황은 엄청난 타격이 된다. 또한 엄마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딸이 사회복지국이 피어슨을 고발하게 되는데... 적개심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딸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작품은 사회가 집단적으로 거짓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친구 사이와 모녀 관계라는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통해 풀어내고 있어 더 파격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서사가 만들어 졌다. 여전히 가장 섬뜩하고 불편한 영역을 정면으로 거침없이 파고드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신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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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즈
무라야마 유카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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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종이책이 자신을 구해주었던가. 책을 읽다가 주인공과 동화해서 분노로 부들거린 적도 있다. 눈물로 페이지가 얼룩진 날도, 다 읽은 책을 끌어안고 잠든 밤도 있다. 전자책으로는 그럴 수 없다. 은은하게 단내가 나는 낡은 종이 냄새를 맡을 수 없고, 꺼끌꺼끌한 촉감이나 두툼한 무게에 용기를 얻지도 못한다. 그때그때 자신이 품에 그러안았던 것은, 페이지 안에서 펼쳐지는 끝없는 이야기 세계인 동시에 '책'이라는 실체 있는 보물이었다.              p.90~91


아모 카인은 끊이지 않고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키면서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된 작품도 다수인 인기 작가이다. 초판 5만 부, 출간도 하기 전에 증쇄 3만 부를 찍을 정도로 단단한 팬층이 있고, 전국 서점 직원이 뽑는 서점 대상에는 매년 후보로 오를 만큼 단골인데, 이상하게도 프로 작가가 심사하는 유명 문학상은 매번 코앞에서 미끄러졌다. 나오키상에도 두 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받지 못했다. 판매 부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인데, 대체 왜 상을 받지 못하는 걸까. 아모 카인은 자기 작품의 어디가 문제인지, 문학상을 받기에 뭐가 부족한 지 알 수 없어 더 억울하고 분했다. 그리고 그만큼 간절하게 나오키 상을 받고 싶었다. 프로 작가에게 주어지는 문학상은 스무 개가 넘었고, 제각각 심사 과정이 다르다. 그 중에서도 나오키상의 심사 과정은 아주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다른 상과 비교해도 대중의 주목도나 인지도의 차원이 다르다. 


한편 아모 카인은 내년에 출간되는 장편소설의 초교 교정지를 받아 보고 화가 난다. 교정 담당자가 요소요소 적어놓은 연필 흔적에 짜증이 치솟고 심란해졌다. 지적이 하나하나 초점을 벗어났던 것이다. 담당자는 큰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것만 소상하게 찔러대고 있었다. 멍청한 소리들을 읽다 보니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왔다. 교열이라는 업무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 상성이 최악이면 교정지를 살피는 내내 성질이 가라앉지 않았는데, 이번 교정이 딱 그랬다. 이런 교정지를 보낸 담당 편집자에게도 분노가 치솟아서, 원고를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다시 담당자에게 돌려 보냈다. 결국 글을 연재했던 출판사가 아니라 다른 출판사와 책을 내기로 한다. 이번 편집자는 자신의 글을 믿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선생님 편이 되겠다고 말할 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사이가 가까워지는데... 과연 두 사람이 만들어낸 신작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까. 아모 카인은 이번 신작으로 염원하던 나오키 상을 수상할 수 있을까.




"인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저요, 이번 <테세우스>가 정말 좋아요. 지금까지 작품과 확연하게 달라요. 이것도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수준이 다른 깊이가 있어서, 지금까지 가지 못한 곳에 도달한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그 두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진정한 악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 왜 이토록 잘 풀리지 않을까, 왜 다들 이런 상처를 받아야 할까, 하지만 인생이란, 산다는 건 분명 그런 거다...... 싶어요. 왠지 저 자신을 투영하는 마음으로 읽게 돼요.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깊어져요. 대단한 작품이에요."               p.350~351


나오키상과 아쿠타가와상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상반기와 하반기 연 2회 진행되고, 그 결과는 국내 출판계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늘 화제가 되곤 했다. 작년 7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선정 위원회는 두 상 모두 '해당 작품 없음'을 발표했다.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아쿠타가와상은 14년 만에 수상작을 배출하지 못했다. 두 문학상이 동시에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한 것은 무려 27년 만이다. 일본 출판계의 축제라 불리는 두 상의 선정 불발 후, 전국 서점 직원들이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 할 때!”라며 수상작을 대신해 꺼내 든 책이 바로 이 작품 <프라이즈>이다. 무라야마 유카는 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사랑받는 일본의 3대 여성 작가이자 제12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화제가 되어, 올해 서점 대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은 출판사 편집자와 작가의 교정 과정부터 문학계 안팎의 리얼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본 최고 문학상을 차지하기 위해 혼신을 바치고, 최선을 다하는 편집자의 열정과 작가의 욕망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독자 입장에서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작가는 목숨을 걸고 쓰고, 편집자는 몸을 갈아 넣어 만든다. 온 마음을 다 쏟아붓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세계가 얼마나 치열하고 진지한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출판계라는 특수한 업계의 현실을 엿본다는 설레임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에 대한 공감이 어우러져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나오키상을 비롯해 일본의 문학상들은 우리 나라에 번역 소개되는 작품들에도 꽤나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푹 빠져서 읽을 만한 작품이다. 자, 하이퍼 리얼리즘 출판 서스펜스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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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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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동물로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생명과 얽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를 고찰할 때는 항상 또한 생태학적으로(곧 다른 생물들, 우리가 공유한 보금자리, 지구라는 행성과 관련지어) 고찰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이고자 하는가를 알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마땅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마땅한지도 알 수 있다. 인간의 자기 인식에서 존재와 당위가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p.26


인간은 동물이다. 까마득한 과거부터 잘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인간의 정의 중 하나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과 언어를 갖춘 동물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유한한 생물로서 신체화되어 있으며, 자연에 속한다. 근대 물리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물질적인 것을 지배하는 힘과 자연법칙이 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연에 들어맞지 않고 어긋난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은 동물>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자연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경험 사이에서 끊임없이 해답을 찾기 위해 질문한다. 최신 과학적 논의와 철학적 사유를 넘나들며 <인간이란 누구 혹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해 파고든다. 책의 제목인 <인간은 동물이다>와 부제인 <왜 우리는 자연과 어긋나는가>를 오가며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가 변주되는데, 철학적 탐구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웠다. 물론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사유는 더 까다로워지고,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저자가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는 무지의 윤리학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많은 것을 모름을 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화두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혜에 이를 능력이 있다. 그래서 칼 폰 린네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명명했다. 우리가 지혜에 이를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학문과 기술을 통해 우리의 생존 조건을 통제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도덕적 통찰과 분리된 자연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근대에 지구의 황폐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유한성과 한계를 염두에 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다.              p.388~389


대다수 사람은 동물과 인간이 한줄기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진화생물학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만, 많은 이는 여전히 자신은 동물이 전혀 아니라고, 자신의 이성이나 지성, 정신, 기타 인간을 특징짓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실은 동물계에 아예 속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이 동물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면 과연 <무엇을 통해 구별되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과 기타 생물들에 대해 특별한 책임이 있다. 사자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침팬지는 여성주의의 정당한 요구에 제도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성평등을 이룩하려 애쓰지 않는 반면, 우리 인간은 그런 근본적인 수정을 실행할 능력이 있고 따라서 도덕적 진보를 이뤄 낼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를 유발하는 문제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다른 생물은 자신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거나 소비 욕망을 변화시키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인간은 대표적인 동물이다. 동물임에 관한 우리의 앎은 우리의 자기 탐구에서 나온다. 기후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코로나 19 역시 성공적으로 예방되지 않았다. 이 두 재난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처는 거의 예외 없이 수습책이며 선제적이지 않다. 이는 자신의 생태 보금자리를 기술적으로 통제하기는커녕 절대로 완전히 꿰뚫어 보지 못하는 동물로서 우리가 난관에 부닥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와 재난의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자연과학과 기술과 정치의 조합만으로 해결하겠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더없이 낯선 자연을 지배할 수 없으며 또한 지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자연을 완전히 해독하여 우리의 통제 아래 둘 수 없다. 자연에 관한 우리의 앎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의 무지는 더 크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게 잘 읽히고, 술술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책이었다. 그럼에도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조금씩 이해해보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인간은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자, 이 책을 통해 삶의 의미와 무지를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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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고 말해주면 좋겠어 - 상처 입은 동물들을 구조하며 써내려간 간절함의 기록
김정호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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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는 동물이 죽고 사는 것보다는 사는 동안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몸의 고통을 빨리 발견하여 해결해주는 것이 수의사로서 동물 복지를 실천하는 길이라 믿는다. 동물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가만히 말해본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주면 좋겠어. 그러면 좀 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p.104


어린 시절에 다들 동물원에 대한 기억이 한두 번쯤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동물들을 보며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어른이 되면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 동물원에 굳이 가지는 않게 되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뭘까. 아마도 갇혀 있는 동물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야생 동물들을 위한 환경이 열악하기에 우리 속에 있는 동물들의 상태는 건강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가끔 탈출한 동물들이 거리를 질주하다가 사살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면 마음이 아프다. 야생을 경험해 보지 못한 동물들의 최후가 비극이 되지 않도록, 야생 동물들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그런 고민에 대한 일종의 답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실내 동물원에서 굶주린 채 방치돼 갈비뼈만 남은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샀던 '갈비 사자' 바람이의 사연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시 동물원장을 설득한 끝에 구조한 것이 바로 김정호 수의사다. 바람이는 청주동물원으로 옮긴 지 한두 달 만에 갈비뼈가 보이지 않는 건강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 사연은 유퀴즈에 나오며 더 많이 알려졌다. 이 책은 25년 차 동물원 수의사가 들려주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어서야 나올 수 있는 케이지를 살아서 나온 국내 최초의 곰 네 마리 반, 달, 곰, 들, 7년 동안 좁은 공간에 갇혀 무기력하게 지내다 구조된 사자 바람이, 짧은 목줄에 묶인 채 뙤약볕에서 숨을 헐떡이던 래브라도리트리버 수박이 등 동물들의 이야기는 그들 각자에게도 삶이 있고, 그것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돌봄과 책임,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의미도 되새겨보게 만들어 주었다. 




동물원이 있어야 한다면 사람이 아니라 야생동물에게 필요한 장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가 있거나 노령인 야생동물이 여생을 보내는 곳, 다친 야생동물이 치료를 받고 자연으로 복귀하기 전 적응훈련을 받는 곳, 방문객들이 이러한 야생동물을 경험하고 같이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보는 곳이면 좋겠다. 동물원이 야생동물을 소유하지 않고, 잠시 머무는 존재들이 안식처가 되면 어떨까? 갖지 않기로 하면 더 많은 것을 향유할 수 있다.             p.142 


야생돌물은 자신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숨긴다고 한다. 질병과 부상이 야생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맹수들은 자신의 아픔을 쉽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폐사한 동물들을 부검하다 보면 이런 몸 상태로 어떻게 고통을 참고 있었는지 놀라웠을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동물원에 동물병원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플 때 잘 치료해주기 위함도 있지만, 아프다고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야생동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의 이상을 미리 발견하고자 하기 위해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필수인 것이다. 자연에서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야생동물이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외상은 비교적 잘 아문다고 한다. 관심을 갖고 미리 살펴봐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동물의 안부를 매일 묻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청주동물원의 동물들을 비롯해 각종 전시장에서 늙고 아픈 동물들의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귀엽지 않고 늙고 장애가 있는 동물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저자의 간절한 진심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물원이 희귀한 동물을 물건처럼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갈 곳 없는 동물의 보호소이자 자연 복귀를 준비하는 야생동물들의 재활치료소이길 바란다'는 저자의 말이 너무도 와 닿았던 책이다. '사람 살기도 힘든데 무슨 동물까지 챙기느냐?'는 의문에 '동물이 살 만하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대답을 돌려줄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책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동물을 살리는 일이 결국은 사람을 살게 하는 일이 되기를, 소외된 동물의 보호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 확장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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