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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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전체를 사유하는 데 헌신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가운데 하나만을 독점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부상시키는 전문가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자의 초연한 태도는 보통 사람들의 공통감에는 "죽은 사람을 모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소멸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나 현상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세계 안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희망하지 않고도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신중하게 선택한 사람들은 적어도 파르메니데스 이후 언제나 존재해왔다.    p.30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평생에 걸쳐 사유에 관해 탐구한 내용을 생의 말년에 집필한 책으로, 아렌트가 자신의 저작물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마지막 저서다. 1977년과 197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유> <의지>가 모두 수록되어 있는 통합본으로, 당시 출간되지 못한 <판단>은 발췌본으로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다. 사유와 의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판단을 부분적으로 소개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그는 '판단' 집필을 시작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기에, 아쉽게도 그의 강의 자료를 정리해 출간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 '판단'으로 대신해 읽어야 한다.

묵직한 그 배경처럼 분량부터 칠백 페이지가 넘는데, 그 압도적인 페이지만큼이나 내용도 만만치가 않은 책이다.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 사유 자체를 탐구하는 이 책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 활동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세 가지의 정신 활동으로 분류해 조명한다.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아렌트는 독자들이 '정신의 삶' 3부작을 많이 읽기를 기대했다. 그의 이전 저서들은 '정신의 삶' 집필을 위한 준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저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동인들 가운데 하나인 가능태를 선행해야 한다는 견해는 확실한 시제로서 미래를 암묵적으로 부정한다. 미래는 단지 과거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적 사물과 인위적 사물 사이의 차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필연적으로 발전하는 것들과 실재화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들 사이의 단순한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기억이 과거를 위한 기관이듯이 미래를 위한 기관으로서 의지라는 개념도 전적으로 부차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지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p.345

우리는 매일 생각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며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사유, 의지, 판단은 어떤 활동인가? 정신의 삶은 일상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등의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특히나 아렌트는 철학을 구름 위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더 실질적인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물론 생각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최소 서너 번은 완독해야 아주 조금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겨우 한번 읽어 본 걸로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2016~2017년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시민불복종운동과 혁명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규정해 낸 한나 아렌트의 개념들이 신문 등 보도 매체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현재 왜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의 여러 사상과 개념들은 그 외 정치 보도에서도 숱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통해 인간 활동의 다양한 의미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의 정치철학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이 책의 후반부에는 역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많은 옮긴이 주를 달았고, 해제논문도 수록해 전반적 구도와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역자의 말처럼 '난해한 내용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읽기를 시도하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특별한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물론 읽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고달프고, 읽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거나 어렵고, 읽고 나서도 내가 대체 뭘 읽은 건가 싶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재독이다. 이 책은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읽을 수록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곧바로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치고 재독에 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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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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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거짓말을 해버린 시점에 당신은 이미 이 게임에서 이긴 거였어요."

“네, 당신의 범행은 완벽했어요. 쓸데없는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거짓말을 줄이려고 연구했지요. 우리는 아무리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어도 결정타가 없으면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약점을 찌른 거예요.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딱 한 개만 더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p.53

얼마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나오코에게 가가 형사가 찾아온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사진 속에는 나오코 부부의 집을 담당했던 건축사 나카세의 얼굴이 있었다. 실은 일주일 전부터 그가 행방불명이어서 수사 중이라는 얘기였다. 나오코는 그저 단순한 고객이었을 뿐 개인적으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지만, 어쩐 일인지 가가 형사는 나카세의 행방불명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게 있지는 않은지 연락이 온 적은 없는지를 묻는다. 자신은 전혀 모르겠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나오코는 가가 형사가 집을 떠나자 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만다. 죽은 남편과 남겨진 아내, 그리고 행방불명된 한 남자. 이들 세 사람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작품은 '가가 형사 시리즈'의 유일한 단편집으로 표제작을 비롯해서 <차가운 작열>, <두 번째 꿈>, <어그러진 계산>, <친구의 조언> 이렇게 다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짚어 내고 있으며, 짧은 분량 속에서도 반전과 트릭 등 추리소설적인 재미는 놓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단편이라는 특성 상 가가 형사와 범인과의 심리전이 주요 플롯이 되는데, 사건 자체의 미스터리보다 속이고, 감추고, 그 거짓말을 드러나게 만드는 가가 형사만의 번뜩이는 재치와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나오코는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아직 아이도 없고 삶의 보람이랄 것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자기 멋대로 구는 어린아이가 그대로 어른이 된 듯한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하루하루였다. 2년 전에 다카마사가 오래도록 염원하던 단독 주택을 마련했을 때조차도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신축 건물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집에 첫발을 들였을 때, 처음으로 그녀가 생각한 것은 이곳이 내가 죽을 자리인가, 라는 것이었다.   p.194~195

발레 공연을 앞두고 있는 공연장에 찾아온 가가 형사는 의문의 추락사건을 수사 중이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니고 살아온 발레리나에게 그가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이유는 뭘까. 욕실에서 발견된 아내의 시체, 그리고 돌이 된 아들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작품은 파친코 도박에 빠져서 아이를 자동차 안에 방치해 죽게 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쓰였다고 한다. 두 모녀가 사는 집에서 엄마의 애인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실현하려는 엄마와 딸이 등장하는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사회적 명성이라는 허상, 붕괴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 무감성의 젊은 세대 등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번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가 국내 출간 1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개정판에서는 10여 년 전 자신의 번역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한글어문규정을 적용하고 기존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권 별로 문장 전체를 3,000군데 이상 다듬어 읽는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아울러 각 권에 대한 기발한 해석이 빛나는 그림작가 최환욱의 표지화로 시리즈로서의 통일성을 더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이 작품을 정말 오랜 만에 다시 읽었는데, 곧 가가 형사 시리즈 열 번째 작품이 출간되려는 시점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전체 열 편이고, 이번에 개정판으로 출시된 '가가 형사 시리즈'가가 형사의 대학 시절부터 네리마 경찰서 소속 형사 시기까지를 다룬 일곱 편의 작품들이다. 가가 형사는 시리즈 캐릭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히가시노가 이례적으로 30년 가까이 애정을 쏟으면서 성장시킨 인물로, 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이자 그의 페르소나라고 불리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이 시리즈를 다시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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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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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머묾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선배는 그렇게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누군가 오래 쓴 문장을 알아보고 그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둘레에 자기 이야기를 입혀 설명한다. 어떤 단어를 눈으로 본 뒤 다음 사람에게 그걸 몸짓으로 설명하는 개그맨처럼 능청을 떨며 그런다. 그러니까 이 책에 묶인 모든 글은 작가가 두 번 쓴 독후감이다. 한 번은 눈과 마음으로 다른 한 번은 몸과 시간으로.    p.141~142

김애란 작가의 첫 산문집이다. 그녀가 2002년 등단한 이후 17년 여 동안 기록해온 원고들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작가가 되어 동료 문인들과의 이야기와 그녀의 일상들이 모두 담겨 있어 소설가로서의 삶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를 만나는 듯한 기분도 드는 책이다. 세상에 잊어야 한다거나 잊어도 되는, '잊기 좋은' 이름은 없지만,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잊어 버리고 산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유독 잊을 수밖에 없었던 이름, 결국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장소에서 살았지만, 그 공간들이 순전히 이야기의 형태로 내 몸에 남아 있다,라고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부터 아스라히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았던 '맛나당', 그리고 그 국숫집에서 그들 가족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았다고 한다. 당연히 구매도 학습도 불가능한 유년의 정서가, 그곳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장사한 돈으로 세 딸의 학비와 방세, 생활비를 모두 댔다고 한다. 글을 읽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의 장소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임대 아파트에 살다가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던 순간, 모델하우스라는 곳에서 세련된 인테리어들을 보며 설레었던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내게도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러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 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p.252

처음으로 등단 소식을 들었던 대학교 컴퓨터실의 기억, 고려대학교 근처 헌책방에서 구했던 '언어학사'라는 책에 대한 단상, 동료 작가들과의 에피소드, 겉보기와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편혜영 작가에 대한 이야기,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었던 서른다섯의 어느 날 등등... 담백하지만 뭉클하고, 따스하지만 예리하게 현실을 짚어 내는 김애란다운 글들 속에서 나는 문득문득 나를 발견하고, 내 시간을 돌아보았다.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와는 그 어떤 교집합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나는 그녀의 글들 속에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뜨겁게, 현재와 과거를,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잇는 선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중이다.

 

김애란 작가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지나온 내 시간 속을 잠시 들여다 본다. 나를 스쳐 지나온 사람들, 내가 잊어 버린 이름들과 그 속에서도 나에게 남아 있는 기억들을 가만히 응시해본다. 바람이 부는 창문의 표지 이미지처럼, 내 속에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 그녀처럼 이 책 속 문장들을 읽으면서 그 문장 안에서 잠시 살다 온 듯한 기분이다. 그녀가 쓴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속에서 내 이야기를 통과시켜 읽어 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던 그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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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마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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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선생은 벽에 식탁 하나와 기둥 몇 개만 달랑 그려놓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선생 주변에는 심부름꾼들이 여럿 부지런을 떨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물감을 탄다, '요리'를 나른다, 포도주통을 나른다 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선생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것들을 이리저리 놓아보고는 한 장면을 그리고 나면 얼른 먹어치웠다. 수도원장은 애초부터 이런 식이었다고 성질을 부렸다. 레오나르도 선생은 오로지 상 위에 올린 '요리'에 관심을 보였지 상을 둘러앉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p.58

올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그의 삶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책들이 꽤 많이 나왔는데, 이번에 만난 책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요리 노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9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코덱스 로마노프'라는 노트가 발견되었다. 이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에 대한 단상을 적어놓은 유일한 노트로, 천재의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노트였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레시피 노트나 요리에 관련된 팁을 적어 둔 노트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만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라는 작품일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당시의 상황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몇 세기에 걸쳐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걸작의 탄생 배경에 그의 요리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굉장히 놀랐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상상력과 창의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그저 '천재'라는 수식어에 걸 맞는 매우 진지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는 매우 인간적인 식도락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요리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나 주방, 조리기구, 요리법, 식이요법 등에 관한 그의 세심한 관찰과 기존의 조리기구를 개선하고 새로운 장치를 발명하는 점은 굉장히 탁월했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공학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등으로 활약했던 천재답게, 주방에서도 그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스 왕은 식도락가로서의 레오나르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느라 레오나르도는 '스파게티'를 발명했다. 그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200년도 전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스파게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가져왔다. 바로 국수였다. 마르코 폴로는 국수가 먹거리라는 사실을 빼먹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수를 식탁 장식용으로 사용해오던 중이었다. 우리가 지금 파스타로 알고 있는 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나폴리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요즘처럼 국숫발이 가는 것이 아니라 빈대떡처럼 넓적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단지 모양새를 조금 바꾼 것이다.   p.65

이 책은 분명 요리 레시피들을 기록한 노트인데, 실제로 그걸 토대로 요리를 해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500년 전에 만들어 먹던 음식들이라 현대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나고, 그 중에는 정말 엽기적인 재료들도 꽤 많았다. 초에 담근 새 요리, 구멍 뚫린 돼지 귀때기 요리, 꿀과 크림을 곁들인 새끼 양 불알 요리, 빵가루 입힌 닭 볏 요리, 온갖 발가락 모둠 요리, 양 머리 케이크, 뱀 등심 요리 등 이름만 들어도 그다지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엽기 발랄한 요리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조리기구가 오늘날처럼 다양하지 않았기에, 각각의 요리에 필요한 기상천외한 조리기구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부분 뛰어난 창의력과 세심한 집념으로 발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리기구들 또한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다소 난해하거나, 괜히 더 손이 많이 가게 만들게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는 많은 기구를 도안해 삽화로 남겼고, 시제품을 만들어 사용해보기도 하는 등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넘쳐 흘러 주체를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소 한 마리의 발가락을 모두 잘라내어 후추와 올리브유를 섞은 레몬즙에 하루 동안 재어두었다가 만드는 '온갖 발가락 모둠 요리'. 양 머리를 세로로 둘로 쪼개어 당근, 파슬리, 가지와 함께 삶고 국물과 푸른색 소스를 곁들여 먹는 '양 머리 케이크'. .. 뭔가 설명만 들어도 그다지 보기 좋은 비주얼은 떠오르지 않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요리들이지만... 세심한 관찰과 창의성만큼은 전문 요리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에는 그의 요리들을 사람들이 즐겨 먹었을 지 궁금해진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실제로 기록한 요리 노트의 메모들과 그가 발명했던 다양한 조리 기구들의 삽화들로 인해 매우 생생하게 당시의 요리들을 만나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나만의 엽기발랄 레시피'를 기재할 수 있는 노트도 마련되어 있으니, 요리를 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메모를 해둘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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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문의 비극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5
고사카이 후보쿠 외 지음, 엄인경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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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면 자네도 대답하기 망설여질 텐데, 요즘 민중의 힘이라는 것이 자주 주장되지만, 적어도 과학 영역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몇 만 명 있은들 한 사람의 천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자네는 인정할 걸세"

"인정합니다."

"그러면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인 이상 과학적 천재가 벌인 일이 비인도적일지라도 자네는 그것을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p.60

2천 평도 더 되는 넓은 정원을 소유하고, 한눈에도 돈을 상당히 들인 것임을 알 수 있는 서양식 저택에서 거액 자산가가 권총으로 피격되었다. 이 저택에는 피해자인 주인 고헤이,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온 여동생 아오시마 가쓰에, 그리고 들어온 지 반년 정도 되는 하녀 야마시로 유코, 일한 지 겨우 4일째인 이토 쿄코, 이렇게 딱 네 명이 살았다. 다카기 가문의 자산은 대략 천만 정도, 원래 자작 신분을 내세웠는데, 고헤이의 아버지 대 그 작위를 박탈당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고헤이는 자신의 방에는 사치를 부려 놓았으면서 여동생과 하녀들의 방은 마치 거지의 집처럼 초라하게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고헤이의 아내는 8년 전에 미쳐서 자살했고, 그것도 고헤이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서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권총이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타살임이 분명했는데, 유력한 용의자이자 그의 유산 상속인인 네 명에게는 범행시각인 3시에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다.

 

여동생, 사촌 동생, 조카, 아들.. 네 사람 모두 고헤이를 미워했다고 한다. 그들 모두 기회만 있었다면 그를 죽였을 거라고 하니, 동기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고헤이 자신도 이들 네 사람을 증오했고, 네 명 중 누군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은 뒤 막대한 유산을 그들 넷에게 분할 양도할 것을 유언장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묘한 단서를 달았다. '나를 살해하고, 또는 살해하려고 계획하거나 혹은 그러한 혐의가 인정되는 자는 다음의 권리를 상실한다' 라고. 이 무슨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일족이란 말이다. 마치 미치광이와 범죄자 집합과도 같았다. 가가미 과장은 사건의 핵심이 다카기 가문의 역사 안에 있는 비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수사를 해 나간다. 이 작품은 본격 추리물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쓰노다 기쿠오의 <어느 가문의 비극>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무슨 이상한 분위기인지. 가가미는 이 건물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은 순간에 이미 그것을 알아차렸는데, 그것은 살인 현장이라는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그 전에 이미 이 건물 안에 배어 있는 듯한 이상함이었다.

여기 살고 있는 인간의 광기 어린 기묘한 무언가 어느새 건물벽이나 가구에 배어들어 버린 - 만약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 저택이야말로 분명 그런 사례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가가미는 복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p.251

얼마 전에 <유리병 속 지옥>이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시리즈가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는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시리즈이다. 이번에 만난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은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무대로 쇼와 시대 초기에 창작분야에서 활발히 활약한 추리소설 작가 네 명의 여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인 고사카이 후보쿠, 란포와 더불어 당시 탐정문단의 3대 거성으로 일컬어진 고가 사부로와 오시타 우다루, 그리고 일본 쇼와 시대의 매력적인 명탐정 '가가미 게이스케'를 창조한 쓰노다 기쿠오, 이렇게 네 명의 작가들이 저마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사카이 후보쿠의 두 작품이 분량을 짧았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작가가 의학부 출신이고 생리학자이자 법의학자로 명망이 높았기에 과학적 이성의 냉철함과 작가로서의 분방한 상상력이 만난 작품을 그려낸 게 아닐까 싶다. 과학자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한다는 설정과 연애라는 감정의 극치를 심장의 혈류를 통해 연애 곡선으로 만들어 보인다는 정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놀라웠다. 게다가 실연의 비통함이 극에 달한 과학자가 선택한 마지막 실험이란 매우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져 인상적인 여운을 남겨 준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아마도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밖에 몰랐다면, 그들의 작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학과 추리가 절묘하게 만나고, 본격과 변격이 투쟁하는 추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통해 그 기발한 내용과 독특한 형식에 놀라고, 현대의 익숙한 추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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