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그 섬에서
다이애나 마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렇긴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게 뭘 바라나 싶어서요. 저한테 뭘 기대하는 거 같아요?"

"누구나 바라는 걸 바라겠죠. 자기들 이야기를 알아줄 사람을 바랄 거예요. , 그리고, 그 이야기라는 게 당신 이야기의 일부가 될지도 모르죠."

그는 내가 놓친 걸 콕 집어줬다. 내 이야기라니.     p.53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신비한 아홉 개의 섬, 아조레스 제도. 한여름 투우와 축제가 끊임없이 열리고, 연보랏빛 수국 덤불과 푸른 초원,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조레스 제도'라는 이름 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곳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에 이미지 검색을 해봤더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자연이 줄 수 있는 극강의 아름다움과 그 속의 사람들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가끔 모든 걸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 바로 그런 순간 달려가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저자인 다이애나 마컴은 취재차 캘리포니아 외곽에 정착한 아조레스 이민자들을 만나면서 아조레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취재기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로 아조레스와 그곳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폭풍 같은 한 주를 보내며 온갖 일을 겪어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피곤할 때, 잠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에 위로가 되어주고, 삶을 돌아보며 휴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방장은 나처럼 아조레스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 이곳에 이렇게 매료되었다면, 거기에는 분명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주변을 좀 보세요. 화산이며, 바다며, 꼭 잃어버린 시간 속에 들어온 것 같잖아요. 누군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걸 꾹꾹 참으며, 입을 앙다물고 초 치는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름 받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였다.    p.144

이 책을 읽으면서 '열 번째 섬'이라는 개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조레스 이민자 중 한 사람인 알베르투는 이렇게 말했다. "열 번째 섬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오. 모든 게 떨어져 나간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죠." 라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 떠난 적 없는 장소'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나만의 비밀 공간, 내 영혼이 머무는 곳, 그리고 깊은 그리움이 되는 그런 곳 말이다. 저자에게 아조레스 역시 점점 그런 장소가 되어 갔을 것이다. 직업적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뜻하지 않게 아조레스에서 세 번의 여름을 보내면서, 자기 안의 상실과 갈망을 마주하고 스스로 바라던 많은 것들을 찾아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긍정적인 섬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기억하고 슬픔을 간직하되 오늘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앨리스의 거울, 나니아의 옷장, 해리포터의 9 4분의 3번 승강장, 또는 무엇이 됐든 소설 속 주인공을 원래의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주는 통로를 통해 '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여지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곳에서 경험했던 모든 순간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본 기억이 우리의 발목을 움켜잡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의 냄새를 맡고 바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첫 번째 행선지이자 화산 폭발의 자연재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며, 독재와 냉전시대를 겪어낸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섬. 나도 언젠가 꼭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호의 죄 - 범죄적 예술과 살인의 동기들
리처드 바인 지음, 박지선 옮김 / 서울셀렉션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작고 행복한 공동체였다.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랬다. 젊은 남녀가 어울려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일하고 20블록 떨어진 가장 가까운 식료품점까지 떼 지어 갔다가 누군가의 로프트에서 맥주를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파티를 벌였다. 그 뒤 머드 클럽이나 터널로 가서 밤늦게까지 유흥을 즐겼다.   p.53

뉴욕의 소호, 몇 블록에 걸쳐 프라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비롯한 명품 브랜드의 매장이 밀집해 있어 흔히 뉴욕 패션의 메카라 부르는 곳이다. 하지만 본래 소호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예술의 거리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대공황 이후 도산과 폐업으로 황폐해진 소호 거리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아틀리에를 만들기 시작했고, 감각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갤러리와 개성 넘치는 숍이 속속 생겨나 예술의 거리로 거듭났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소호가 세계 예술계의 중심이었던 시절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호의 이름난 미술품 컬렉터 어맨다 올리버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녀의 남편 필립 올리버는 거실 의자에서 피범벅이 돼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하자마자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얼빠진 상태로 자수한다. "제가 아내를 죽였어요." 끔찍한 살인 사건의 최초 발견자가 배우자일 경우, 자연스레 용의자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범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울프심 증후군이라는 치매성 뇌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립의 개인 변호사는 사립 탐정 호건을 고용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부부의 지인이자 탐정의 친구인 미술품 딜러 잭이 함께 용의자들을 추적해나간다. 

 

"퍽이나 감동적이군요. 하지만 너무 뻔해요." 호건은 지루하고 짜증 난 표정이었다. "난 주로 아내가 버스에 치이는 상상을 하죠."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를 떠도는 듯했다. "다들 배우자의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덫에서 멋있고 깔끔하게 빠져나오는 상상을 하는 거죠. 그런데 결혼에는 교묘한 데가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p.107

이 작품의 작가는 세계적 미술 매거진 《아트 인 아메리카》 편집장으로 일평생 예술계에 몸담아 온 리처드 바인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데뷔작에서 일평생 예술계를 누비며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소호의 전성기를 구가한 예술가들과 그 주변인들의 삶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를 추적하는 것이 주요 플롯이지만 일반적인 범죄 소설의 분위기와는 꽤 다르다. '광기와 공허함에 사로잡힌 예술'이라는 것은 직접 그것을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체험해보지 않는 한 머릿속 상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리처드 바인은 실제 그 바닥에 수십 년을 있었던 경험으로 매우 색다른 범죄 소설을 탄생시켰다. 뉴욕 미술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본격 예술 스릴러'라는 칭호가 다소 이상하면서도 그럴듯 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왜 그녀를 죽였는가? 용의자는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남편의 젊은 내연녀와 이혼 당한 전 부인, 그리고 의문의 남자와 자백한 남편까지...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의 작품만큼 세련되고 화려해 보이는 예술가 집단의 어둡고 은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소호의 갤러리와 미술관, 뉴욕의 힙한 레스토랑과 바, 아트페어와 페스티벌, 페티시로 점철된 퍼포먼스 등 뉴욕의 내로라하는 명소와 현장을 누비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 고급 문화로 인식되어온 현대 미술의 저급하면서도 경박한 단면을 통렬하게 꼬집고, 그 추악한 이면을 보여주는 것도 이 작품 만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물론 펄프픽션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정한 느낌이고, 후반부의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다소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긴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뉴욕 미술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색다른 범죄 소설이 궁금하다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권에 환상을 갖지 마요. 인권이라는 게 사실 나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거든요? 완전 쓰레기 같은 놈들, 사회악들이 살맛 나는 인권세상을 만들어온 거 몰라요?"

간이벽으로 구역을 나눈 옆 회의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고음에 잔뜩 뻐기는 목소리였다. 호응해주는 몇몇 청중과 함께 있는 모양인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한바탕 들렸다.   p.77

국내 자동차업계 연매출 1위 기업인 오성자동차노조 간부가 여자 조합원을 성희롱했다는 보도가 인터넷에 쫙 깔린다. 오성자동차노조는 파업을 예고한 채, 사측과 단체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인 파문만큼 도덕성에 직격탄을 날리는 이슈는 없을 것이다. 선정적이고, 눈길을 끌고, 싸잡아 비난하기 좋으니 말이다. 그리고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가 하는 수많은 업무 중 하나에 속했다. 그렇다면 인권증진위원회, 줄여서 인권위란 무엇인가.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을 접수하고 조사하여 구제조치를 권고하는 독립적인 국가기관이다. 그 자체가 국가기관이면서 다른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조사하는 독립기관으로 유엔 같은 국제인권기구와 개별 국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조직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인권증진위원회 조사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경찰도, 탐정도 아닌, 다소 생소한 직업이지만,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를 다루는 준사법기관의 공무원들이라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주요 멤버는 이렇다. 매사에 너무 신중한 나머지 누가 봐도 뻔한 사건의 사실관계를 계속 곱씹는 우유부단함에 강단도 배짱도 없는 소심쟁이지만, 경찰사건 조사관으로 일한 지 겨우 1년 남짓 만에 '베테랑' 이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뛰어난 조사관 윤서, 남의 일도 내 일처럼 여기며 감정 이입하는 열혈 아줌마 조사관 달숙,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단과 정의 사이를 오가는 다혈질 성격의 홍태, 사법고시 출신으로 변호사 특채 사무관으로 인권위에 입사했지만 조사관들 사이에선 영 푸대접을 받고 있는 지훈. 이 작품은 이렇게 성격도, 사고방식도, 조사 스타일도 너무 다른 이들 네 명의 성실하고 공정한 다섯 건의 사건 기록을 담고 있다.

 

사실 인권 조사관이라는 역할이 윤서는 늘 두려웠다. 빨리 다른 일을 찾고 싶었다. 이 일은 지금 옆에 있는 배홍태 같은 사람이 더 잘 맞았다. 국가가 너무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남용해왔던 시절부터 쌓인 힘과 관행 때문에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거라면,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힘의 의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이왕이면 약자의 편, 국민의 편을 들어주는 독단과 배짱이 인권위에 필요한 균형 감각이 아닐까. 중립을 표방하는 소심한 논리는 기울어진 미끄럼틀의 가운데에 안전하게 머물겠다는 비겁한 태도가 아닐까.    p.179~180

검은숲 독서클럽 3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작품은 곧 드라마로 방송될 예정인 송시우 작가의 <달리는 조사관> 이다. 이 작품은 추리 소설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찰도 탐정도 아니고, 변호사나 법 관련 종사자도 아닌, 다소 생소한 직업인인권증진위원회 조사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지는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일테니 말이다. 송시우 작가의 첫 작품 <라일락 붉게 피는 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황금가지, 2012)에서 선보인 바 있는 단편소설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를 개작, 이야기를 확장한 소설집인데, 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과 현실성 있는 이야기들로 시리즈로서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선 냉정하리만큼 중립을 유지하는 캐릭터 한윤서 역을 이요원 배우가 한다고 하는데, 이미지만으로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궁금해진다. 그녀와 정반대 성격으로 등장하는 다혈질 배홍태 역의 최귀화 배우도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려주실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가 침해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 인권위의 조사관들은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하거나, 범인을 단죄하지 않고, 그저 그 과정에서 절차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었는지 만을 살펴본 뒤 보고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다.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숨겨진 진실을 밝혀 낼 수도 있고,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 앞서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는 딜레마와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이 작품의 재미를 더해주고, 바로 그러한 부분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정의의 실현 방식과 그 본질에 대해서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서 다음 주부터 OCN에서 방송될 드라마도 챙겨 볼까 한다. 드라마는 16부작이니 소설에서 만났던 이야기 외에 다른 스토리는 어떨지, 인물들은 어떤 모습으로 화면을 채워줄 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천재일 수 있다 - 당신의 재능을 10퍼센트 높이는 신경과학의 기술
데이비드 애덤 지음, 김광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능의 본질은 철학적 정의나 학문적 고민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능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향상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능력과 잠재력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더구나 지능은 변하지 않는 수치이므로 높아질 수 없다고 믿는다면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방치할 수도 있고, 학생들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p.77

그는 아침 8시에 약간의 시리얼과 토스트를 먹은 다음 하얀색 십자무늬의 마름모형 알약을 복용한다. 그리고 두 시간 뒤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중이다. 무언가 다른 느낌을 기대하면서. 한층 집중해서 글을 쓰는 듯한 기분이었고, 규칙적으로 들리는 음악도,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작업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문장을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노트북에 입력했으며, 쓰고 있는 글과 노트북 화면서 자신이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가 먹은 약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인지 능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약물 모다피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감각이 예민해지고 인지 능력이 높아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약물이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추적하기는 무척 어렵다. 다른 신체기관들과 달리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혈액 샘플 검사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모다피닐이 신경전달물질의 활동을 촉진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직접 스마트 약물을 복용해보고 그것이 뇌의 작동 방식을 어떻게 개선하는 지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뇌는 약 860억 개의 세포들로 뒤엉켜 있다고 한다. 이들 세포가 서로 결합하고 연결되는 방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두뇌는 수많은 세포들의 연결과 배열을 통해 작동한다. 그러니 지능이란 누구나 인식하고 있지만 구체화하기는 까다로운 모호한 개념이다. 우리는 점수, 수치, 백분율, 등급, 반사작용, 반응, 대응, 말과 행동 등과 같은 정신 능력을 지능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인간의 지능을 높이고 인지 능력을 강화하는 획기적인 신경과학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자신의 뇌에 직접 전기 자극을 시행하기도 하고, IQ 최상위 2퍼센트만이 등록할 수 있는 멘사에 가입하는 과정도 직접 경험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멘사 시험을 다시 치르는 날까지 아직 몇 개월이 남았을 때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내 정신 능력을 강화하기에 앞서 뇌 자극으로 신체 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지 직접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일단 뇌 전기 자극기부터 구입했다. 컴퓨터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장비는 매진되었다. 하지만 자체 제작하는 다른 회사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저렴한 제품을 샀다. 가격은 55달러였고, 미국에서 우편으로 2주 만에 도착했다.    p.218

저자의 말에 따르면 어느 세대든 그 시대의 과학 혁명을 누리는데, 지금은 바로 '신경과학'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유전학이었고, 더 이전에는 물리학이었으며,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화학, 의학, 해부학이었다. 20세기 말부터 뇌를 스캔하는 기술이 일상화되었고, 지금은 신경과학의 혁명이 '뇌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것, 즉 뇌의 신경강화'에 대한 것이 우리의 시대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지능을 강화하는 과학 기술이라는 것이 가당찮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그 가능성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연구와 결과로서 인간의 지능 자체를 향상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서 보여주고 있다. 스포츠 선수들의 약물 복용처럼 인지강화를 위한 스마트 약물은 좋은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는 모다피닐로 대중화가 되어 있어 생각보다 머나먼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보다 더 똑똑해질 수 있다면, 지금보다 내 능력을 더 발휘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일에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마도 누구나 바라는 것 아닐까.

이 책은 흔히 똑똑해지는 약이라고 부르는 스마트 약물과 뇌 전기 자극의 실체, 지능검사의 어두운 역사와 함께 서번트와 뇌 해커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인지강화의 미개척 영역을 탐구하는 책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고, 우리에게 숨겨진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획기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신경과학 혁명의 최일선에서 나온 보고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가 직접 인지강화 기법으로 자신의 지능을 향상시켰고 그 과정과 결과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으니 그 효과를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엄청난 노력과 기나긴 연습 없이 간단한 처방만으로 뇌의 숨은 능력을 일깨우는 방법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걸 선택하지 않을까. 당신의 뇌 어딘가에 해방되기만을 바라는 천재가 숨어 있다면 말이다. 그저 우리가 사용하지 않던 90퍼센트의 뇌를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대부분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신체적 능력에 비해 사람의 지능은 후천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을 보기 좋게 벗어나는 획기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남자가 죽였을까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7
하마오 시로.기기 다카타로 지음, 조찬희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지만 이는 모두 소설가의 공상입니다. 아하하하. 꽤 재미있지 않나요? ? 어디 안 좋으십니까?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백작 호소야마 히로시는 휘청취청 일어서서 간신이 문에 손을 대고 말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니. 그 녀석 참 괘씸하군. 자살이야! 자살이라고!"     p.132

 

평소 도쿄 근교 피서지로 인기가 있는 K 마을의 어느 별장에서 무시무시한 참극이 일어났다. 오다 세이조라는 젊은 실업가와 그의 아내 미치코가 별장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것이다. K 마을은 해수욕과 피서지로 유명했고, 최근 들어 중상류층의 주거지까지 들어서게 되면서 매우 번화한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느닷없이 참극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오다 가문은 선대가 무역상을 해서 상당한 자산가였는데, 세이조는 선천적으로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사건 당시에는 별장에서 요양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아내인 미치코는 유명한 대학교수의 딸로 총명하고, 상당한 미인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젊은 남자들이 끊이질 않았었는데, 이들 부부의 결혼이 연애가 아니라 중매였다는 사실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하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 오던 참이었고, 세이조가 아내를 학대한다는 소문과 미치코가 젊은 학생들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는 품행이 방정하다는 소문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서 흉기를 손에 쥔 채로 하인들에게 발견되어 바로 체포된다. 고데라 이치로라는 대학생으로 미치코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대학의 학생으로 오래 전에 큰 신세를 졌던 적이 있다. 그는 미치코와 같은 나이로 이들 부부와도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고, 사건 당일에도 다른 지인과 함께 넷이서 늦은 시간까지 마작을 하다 별장 1층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이들 부부를 살해하게 되었는지, 그 방법과 동기에 관해서는 체포된 후 계속 묵비권을 행사해 알 수 없다가 결국 자신이 범인임을 인정하고, 사형 판결을 받게 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고데라의 변호사였는데 중반쯤 이야기가 진행되면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피고가 공소를 포기해 그대로 사형이 집행되어 버린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나서 옥중에서 기록한 수기를 손에 넣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마오 시로의 첫 번째 단편소설 '그 남자가 죽였을까'이다.

 

"신경증이라는 녀석은 평소에는 알 수 없는 인간의 심오한 마음을 감지하지. 이런 사례는 우리 정신과 의사에게 매우 적절한 연구 대상이네."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과연 이 날 밤,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매우 기묘한 사건이었다. 어쩐지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신경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어떤 부분이 관련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p.240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그 일곱 번째 작품이다.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에 맞게 이번 작품 역시 처음 만나는 작가이다. 하마오 시로는 일본 탐정소설 문단의 제2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에 활약한 작가이고, 기기 다카타로는 '일본탐정작가클럽' 회장을 역임하며 문단을 이끌어온 작가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작가가 소설가가 되기 전 법조계와 의료계라는 전문 분야에서 활동했고, 소설에 자신의 전문 지식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하마오 시로는 변호사 겸 추리소설가로 검사로 재직 당시 범죄 에세이를 여럿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자신의 법률 지식을 활용한 본격 추리물을 발표했다고 한다. 기기 다카타로는 대뇌 생리학자이자 추리소설가로 생리학을 전공했고, 러시아 유학 당시 조건 반사학을 연구했으며, 의학 평론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가의 작품들은 일본 법정 추리소설과 의학 추리소설의 고전에 해당하게 되는데, 오래 전에 쓰였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매력이지만, 그냥 작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시리즈이다. 현대의 익숙한 추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고,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만난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밖에 몰랐다면, 그들의 작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도 우리가 이 시리즈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