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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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착실한 남자란 신화 속 인물이나 다름없어. 생물학적으로 남자들은 포식 동물이야."
"그 얘기 좀 더 해봐." 앨리슨이 재촉한다.
˝여자들은 자기 남자가 실제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거든.˝ 조디가 덧붙인다. ˝남자들을 위해 대신 변명해주지. 큰 그림을 못 봐. 한 번에 조금씩만 볼 뿐. 그래서 남자들이 실제만큼 나빠 보이질 않는 거야.˝    p.122~123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조디 브렛과 건축 사업을 하는 토드 길버트는 이십 년간 부부 생활을 이어 왔다. 하지만 토드는 습관적으로 외도를 해왔고, 그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며,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그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의 관계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였다. '사실이 공공연히 선언되지 않는 한, 토드가 완곡어법과 우회적 표현으로 말하는 한,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토드는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왔고, 조디는 언제나 용서했다. 참 이상하기 그지없는 부부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아내와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아내에게 그다지 불만도 없고, 그녀를 떠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남편, 대체 어떻게 이십 년 동안이나 부부로 살아온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쩌면 바로 그게 현실 부부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완전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무한히 계속되리라 여기면서, 그저 평범한 일상사에 집중하며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 여자', '그 남자'라는 챕터로 조디와 토드의 시각으로 교차 진행된다. 가정이 주는 안정감과 불륜이 주는 짜릿함이 모두 필요한 남자와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현재의 평온한 삶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디는 아들러 연구자로서 다양한 성향을 가진 내담자들과 오랜 시간 심리상담을 해왔다. 덕분에 그녀는 남편의 거짓말을 눈치챘고, 그의 사고방식까지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 침묵을 선택했던 그녀,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는 어떻게 살인자로 돌변하게 되는 것일까. 대체 이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십 년 동안이나 자신의 생활 방식이 안전하다 믿고 살았는데, 지금 알고 보니 그동안 줄곧 실 한 오라기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토드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로 그녀는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밖에 다르게 생각할 길은 없다. 그녀는 거짓된 전제, 소망이 만들어낸 생각 위헤 자신의 삶을 쌓아왔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p.272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한다. 무려 이십 년 동안 함께 살았던 남편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조디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름으로 인해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토드 역시 짐작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분명 두 사람도 처음에는 설레이는 감정을 느꼈고, 서로 사랑했고, 함께 있으면서 안정감과 평온을 안겨주는 상대라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토드는 조디가 자신에게 갖는 기대에 맞추어 살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했다. 조디는 그의 성공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약속을 실천하고 꿈의 영역을 걸어가는 모습에 감탄했었다. 그녀에게 그는 사랑과 헌신이 아깝지 않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고, 그는 그녀를 한 남자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마음이, 사랑이, 감정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왜 토드는 딸 같은 어린 여자를 임신시키고 조디를 떠나려고 했을까. 왜 조디는 그의 수많은 잘못을 용서해왔음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걸까.

 

이 작품은 배신과 복수에 대한 서사보다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그 배경에 더 집중하고 있다. 아내와 남편 각자의 일상과 어린 시절, 대학시절 등 전반적인 삶에 대해 그리며 내면 속으로 점차 깊이 있게 파고든다. 이 작품은 캐나다 작가 A.S.A. 해리슨의 데뷔작이자 유고작으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작가가 '등장인물이 자기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주변 환경에 대한 서술을 통해 인물의 감정적 변화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쓴 가정 스릴러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동안 만나왔던 가정 스릴러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서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조용한 아내'라는 제목처럼 전반적으로 흐름이 잔잔하게 고여 있는 호수처럼 가만 가만하게 진행된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급격한 변화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단계적으로 몇 날 몇 주에 거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니 말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수면 밑에서 조용하게, 차곡차곡 쌓여온 감정들이 파도가 되어 페이지 바깥으로 밀려 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이 작품의 진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제대로 발휘된다.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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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 단순한 삶이 불러온 극적인 변화
에리카 라인 지음, 이미숙 옮김 / 갤리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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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앞에서 망설여질 때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떠올리자. 명확하게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 유용한 방법이다. 이를테면 어떤 선택의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고 좋은 선택, 더 좋은 선택, 그리고 가장 좋은 선택이 있는 경우에 특히 쓸 만하다... 당신의 가치관을 고려한다면 이 가운데 한 가지는 분명히 당신에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더 좋은 것, 다시 말해 마음속 깊숙이 간직한 자신의 가치와 꼭 맞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겉으로 보기에 매력적인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감이 쌓일 것이다.    p.59~60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대는 스마트폰 알림, SNS계정에 쌓이는 쪽지들, 집안 곳곳 쌓여 있는 책들, 각종 물건으로 꽉 차 있는 수납 공간들.. 매일 같이 꼭 해야 할 일들, 챙겨야 할 것들이 있고,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 정신 없이 보내다 보면 어느 새 하루가 다 버리는 게 다반사이다. 이러한 풍경은 비단 나의 하루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점점 복잡해지고, 빨라지고 우리는 그만큼 '미니멀 라이프'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로만 채워진 집에서 잘 정리 정돈된 인간관계와 여유 있는 라이프를 즐기는 것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 같은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에리카 라인 역시 과거에 누구보다 복잡하고 정신 없는 인생에 끌려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세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인 일들에 완전히 지쳤을 무렵 미니멀리즘을 만났고, 미니멀 라이프의 핵심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 책에서 한 가지 기준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가장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쏟고, 덜 중요한 것은 그냥 지워버려라.'라고 말이다. 미니멀 라이프라고 해서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원하는 삶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내게 필요한 모든 시간을 가지고 있다."
1년이 넘도록 곱씹고 있는 문장이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한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상황은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며 온전히 내 것이다... 늘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면, 자신에게 이미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믿어 보자.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을 접으면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확장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203~204

 

보통 미니멀 라이프라 하면 잡다한 물건들을 정리하는, 물리적 잡동사니에 집중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 뿐만 아니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정신적 잡동사니와 눈에 뛰진 않지만 행복과 안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감정적 잡동사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나만의 기준을 찾게 된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 좋아하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때, 그러니까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고수할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핵심 가치를 선택한다. 그러한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가족, 집, 일, 인간관계, 건강 등 삶의 영역마다 각각의 가치를 떠올려 가치 나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집에서, 인간관계에서, 업무에서 잡동사니를 걷어낼 수 있게 되고 진짜 중요한 것을 위한 자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정리와 수납, 물건 버리기 등에 대한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하는 책은 많이 있어 왔지만, 일과 시간에 대해서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책은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는 물리적 환경을 정비하는 데에서 그치면 안 되고, 돈과 시간과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 결국은 중요하지 않을 물건을 사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 중요한 것만 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기만 한데 말이다. 그 동안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복잡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단순함의 힘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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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영화 공식 원작 소설·오리지널 커버)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강미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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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베스를 살려주신다면 평생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겠어."
조가 메그 못지않게 진심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차라리 심장이 없었으면 좋겠어, 너무너무 아파."
메그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삶이 이렇게 힘든 거라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의 동생이 힘없이 덧붙였다.    p.387

 

<작은 아씨들>이야 이미 여러 판본으로 읽었고,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나온 이 버전이 가장 아름다운 버전인 것 같다. 1868년 초판본과 같은 표지이고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 속 ‘조의 책’을 그대로 재현한 오리지널 커버 특별판이다. 영화 속 ‘조’의 꿈이 이뤄지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표지라서 고전이 150년의 시간을 건너 현재의 독자들에게 읽히듯, 영화의 그것과 현실을 연결시켜주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은 금박으로 반짝이는 표지도 예쁘고, 영화 스틸컷이 무려 33컷이나 수록되어 있어 976페이지라는 엄청난 페이지를 지루할 틈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게다가 초판 한정으로 무비 포토카드도 5장 별도로 수록되어 있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더욱 특별한 소장판이 될 것 같다. 작가가 한 권으로 생각하여 작업했던 1부와 2부를 합친 완역판이라 묵직한 페이지를 자랑하는데, 그에 비해 가격은 상당히 착하게 나왔다. 그러니 더더욱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책이다.

 

<작은 아씨들>은 1868년 처음 발표된 이래, 수차례 영화로 리메이크되며 오래도록 사랑 받고 있는 작품이다. 올해 개봉했던 그레타 거윅 감독의 버전이 무려 여덟 번째 스크린 각색작이니 말이다.

 

 

"당신이 가난해서 다행인걸요. 난 부자 남편은 감당 못 해요!"
조는 딱 잘라 말하고 나서 다시 부드럽게 덧붙였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난 오랫동안 겪어봐서 가난이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한 한걸요. 그리고 스스로를 늙었다고 말하지도 말아요. 마흔은 인생의 황금기예요. 당신이 일흔 살이었대도 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p.950

 

자매들에겐 의지가 되는 큰언니이자 엄마에겐 믿음직한 큰딸인 메그,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경으로 자매들 중 가장 개성이 강한 작가 지망생 조, 몸은 허약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넓은 셋째딸 베스, 그리고 아름답고 귀여운 용모에 다소 엉뚱한 면도 가지고 있는 사랑스런 막내 에이미. 마치 가문의 사랑스런 네 자매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재미를 안겨 준다.

 

 

배우가 되고 싶은 메그 역에 엠마 왓슨, 작가가 되고 싶은 조 역에 시얼샤 로넌, 음악가가 되고 싶은 베스 역에 엘리자 스캔런, 화가가 되고 싶은 에이미 역에 플로렌스 퓨, 그리고 이웃집 소년 로리 역의 티모시 샬라메와 마치 고모 역의 메릴 스트립까지...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 또한 캐릭터와 하나가 되어 영화 버전 중에서도 가장 호평을 받지 않았나 싶다. 메그는 배우가 되고 싶은 욕망 대신에 사랑하는 이와의 가정을 선택하고, 조는 여성들이 쓰는 소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편집장과 사사건건 맞서야 했고, 베스는 피아노를 잘 치지만 몸이 약해 건강에 문제가 있고, 에이미는 파리에서 미술을 배우며 꿈을 좇는다. 성격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고, 각자의 꿈도 다르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함께 성장하는 네 자매의 이야기는 어릴 때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도 여전히 따뜻하고, 뭉클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영화 <작은 아씨들>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혹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이미 읽었고, 다른 판본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책은 정말 너무 예뻐서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있으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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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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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이라는, 각각의 가짜 현실은 NSC 전함 선원들을 망쳐놓는다. 그 가짜 현실을 토대로 쌓인 믿음이, 그 모래성과도 같은 믿음이 선원들이 진짜 현실에서 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아득한 시간을 목격한 선원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어쩌면 영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겁먹었다. 또한, 아득한 공간을 목격한 선원들은 대체로 의기소침한 상태로 돌아왔다. 우주의 광대함에 주눅이 들고 만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친들 우주에 견주어 보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p.219~220

 

일가족이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사망자는 세 명, 실종된 여성이 한 명, 용의자는 해군우주사령부 소속 대원 패트릭 머설트로 공식적인 기록 상으로는 전투 중에 실종된 것으로 되어있는 인물이었다. 사회로부터 공식적인 연을 끊고 살아가던 선원이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을 수사하게 된 FBI는 '시간 여행 관련 범죄'를 전담하는 NCIS(해군범죄수사국) 특별수사관인 새넌 모스에게 연락한다. 용의자가 미래를 조사하던 전함의 선원으로, 당시 그가 탔던 전함 자체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모스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미래 세계로 간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면 현재 수사가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은 역사가 되었을 테고, 운이 좋다면 머설트네 가족을 살해한 범인도 잡혔을 것이다.

 

문제는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단순히 미래 세계에 도착해서 모든 질문의 답이 적힌 서류를 건네받고 오는 걸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극비리에 운영되고 있는 해군우주사령부는 '아득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탐험하고 있었다. NCIS 수사관이 여행하는 미래 세계는 '인정되지 않는 미래 궤적'이라 명명되어 IFT라 불린다. '인정되지 않는'이라 함은 그들이 목격하는 미래 세계란 현재 조건에 기인하는 가능세계로, 사실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 여행자들이 도착하는 미래 세계는 여행자가 존재할 때만 존재하는, 여행자가 현재 세계로 돌아갈 경우 ‘사라지는’ 세계이다. 양자역학의 다중우주 해석론을 토대로 구축되어 있는 이 작품의 세계관은 대단히 매혹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시간 여행자가 겪게 되는 미래 세계가 다시 돌아가면 존재하지 않을 세계라고 해서,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마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모든 인간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 자신이 실재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는 거네. 자신이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그렇게 믿지. 우리가 보는 모든 것,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하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진짜라고 떠들어대는 걱야. 하지만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야. 우리는 그저 환상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뿐이야.     p.446

 

수사관들이 19년을 건너뛰려면 양자거품 속을 석 달간 여행하게 된다. 각각의 웜홀은 별개의 미래 세계로 향하는 다중우주로 이어지는 터널이었고, 그 중 하나의 웜홈을 항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동안, 현재의 현실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 동안 미래 세계를 일곱 차례나 여행해 온 모스의 몸은 계속해서 나이를 먹었기에, 실제 출생연도와 상관없이 생물학적인 나이는 어머니와 몇 년 차이 나지 않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 여동생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다. 미래 세계에서 보낸 세월이 몸에 고스란히 새겨지기 때문에 IFT 여행은 몸에 무리를 주었고, 모스는 지난번 여행을 다녀와서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소중한 관계까지 잃고 말았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SF 장르의 작품은 많지만, 이 작품은 대단히 특별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주인공인 여성 수사관 캐릭터를 유능하지만 다리 절단 장애를 가진 인물로 설정하고 있어, '장애인'과 '여성'이라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작가인 톰 스웨터리치는 장애인 전용 도서관에서 12년 간 일하면서 그들의 삶과 애환을 겪어온 이력이 있다. 덕분에 섀넌 모스라는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구축하며, 수사관으로서, 시간 여행자로서, 그리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디테일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시간 여행자로서 겪게 되는 실질적인 고민들과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적들과 맞서 싸워 무고한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수사관으로서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섀넌 모스라는 캐릭터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시간 여행과 다중 우주에 관한 아이러니를 눈부신 통찰로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살인 사건 수사라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시작해서 SF 장르를 다소 어렵게 느끼는 독자들의 벽도 없애 주었고, 그것이 세계 종말로 연결되는 묵직한 SF 장르로 이어지고 있어 하드 SF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기대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 읽었던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작품 중에 단연코 손꼽히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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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 오직 ‘나’다운 답들이 쌓여 있는 곳, 그 유일한 공간을 찾아서
앤디 퍼디컴 지음, 안진환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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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그 무엇에도 방해받거나 정신이 팔리지 않은 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앉아 있어 보았는가? TV,음악, 책, 잡지, 음식, 술, 전화, 컴퓨터, 친구, 가족이 옆에 없는 상태에서 머릿속으로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고민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명상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을 해봤을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대개는, 하다 못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조차 우리는 여전히 사고의 흐름에 빠져 들기 때문이다.    p.42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느라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 그저 마음을 쉬게 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느껴본 적이 없다.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보면서도 눈으로는 무언가를 응시해도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어떤 일이나 상상, 몇 분 혹은 몇 시간 후에 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삶에 익숙한 내게 이 책은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영미권 명상분야 최고권위자로 인정받는 파란 눈의 스님 앤디 퍼디컴은 인생의 모든 해답이 나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걸 아는 이들, 즉 명상법을 배우려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마음 수행 3단계(명상에 접근하기, 명상 연습, 명상과 삶과 통합)를 제시하면서 하루 10분, 나를 “알아차리는 명상 기법”을 활용해 어떻게 마음을 고요하게 잠재우는지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명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히말라야의 어느 산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요가 수행자부터 떠올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주 쉽고 간단하게 현대적인 방법으로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이다.

 

 

명상은 하나의 과정이다. 매일 잠깐씩 앉아 명상을 한다고 해서 즉시 마음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오래된 악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때로 '번뜩이는' 자각의 순간, 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순간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과정은 통상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빠지던 구덩이가 하루하루 조금씩 더 일찍, 조금씩 더 명료하게 보인다. 그런 과정을 밟는 가운데 스트레스를 유발하던 수많은 습관적인 반응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p.146~147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챙김'이라는 단어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마음챙김'이란 주의를 집중해 오직 현재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챙김은 끝없이 생각하고, 감정에 사로잡히고, 뭔가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완전히 대치선 상에 놓여있는 단어인 셈이다. 이러한 마음챙김이 거의 모든 명상 기법의 핵심 요소라는 점이 나로 하여금 '명상'이라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특히나 이 책에는 실제로 명상 연습을 해볼 수 있도록 열 가지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신체 감각 중 하나에 부드럽게 집중하기, 유쾌한 감정이나 불쾌한 감정에 집중하기, 몸에 대한 의식적 관찰 등등 가볍게 단 몇 분만 시간을 들여도 해볼 수 있는 명상 연습이라 흥미로웠다.

 

명상에 도전하고 싶다면, 이보다 더 쉽게 시작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빌 게이츠와 정말 천재적인 책이라고 말한 엠마 왓슨의 추천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마지막으로 1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때를 기억할 수 없다면, 스트레스로 인해 질식할 것 같다면, 너무 바쁘게 사느라 내 주변에서 펼쳐지는 진짜 삶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이 자신을 찾게 해주는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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