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장미 인형들
수잔 영 지음, 이재경 옮김 / 꿈의지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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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자애들은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아." 펜션트 교수가 훈계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영화관에 가고, 지저분한 머리로 슈퍼마켓에 가고." 그는 그런 부류의 여자애들이 역겹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하지만 너희는 자나 깨나 외모를 뽐내야 해. 어떠한 예외도 없이. 왜 그렇지?"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니까요." 우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적절한 대답이라는 것을 아니까. 우리가 그걸로 점수 매겨진다는 것을 아니까.    P.52~53

 

외딴곳에 고립되어 있는 사립 여학교 이노베이션스 아카데미에는 장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들이 있다. 소녀들은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고 일 년 내내 교정에 갇혀 집중 교육을 받으며, 학교로부터 과한 보호를 받고 있다. 최근에 아카데미는 과목 수와 훈련 양을 늘리며 교육과정의 강도를 높였고, 그 상향 조정된 기준에 따라 선발된 열두 명의 소녀들은 최고의 재색을 갖추고 있었다. 필로미나는 현장학습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들른 주유소의 매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사감에게 폭력적 훈계를 듣고, 밸런타인은 그에게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충동억제치료를 받게 된다. 충동억제치료는 계도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될 때 받는 벌로, 보통 울면서 들어갔다가 24시간 후에 좋아져서 나오게 되는데 치료가 끝나면 기억이 알아서 지워져 어떤 치료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두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하는 과정이라 소녀들은 그저 학교와 관리자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레논로즈가 사라지고 필로미나는 그녀의 방에서 작은 가죽 장정 책을 발견한다. '가장 날카로운 가시들'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폭력적이고 분노가 어려있었다. 소녀들이 상황을 바꾸고, 자유를 얻고, 주도권을 잡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읽어본 필로미나에게 그 책은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모든 가치관을 뒤흔들리게 할 만큼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매일 먹던 비타민이라는 이름의 캡슐에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알리고, 함께 책을 읽으며 학교의 의심스러운 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그들이 교육받고, 갇혀 있고, 훈련 받는 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착하고 상냥하던 소녀들이 스스로 깨어나 학교의 엄청난 비밀을 파헤치기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너는 시키는 대로 한다." 그가 읊조린다. "너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에 감사한다.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몇 달 후 학교와 부모가 너의 미래에 대해 내리는 결정에 무조건 따른다. 너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해. 너는 거기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가 말을 멈추고 허리를 굽힌다. 그의 얼굴이 보인다.
"너는 아름다운 장미야, 필로미나." 그가 말한다. 마치 그게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것처럼. "우리가 완벽하게 가꾼 장미. 너는 모든 남자가 꿈꾸는 트로피가 될 거야."      P.267

 

사교 에티켓의 폭넓은 훈련을 통해 엘리트를 양성하는, 전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예비신부학교라는 설정부터 수상하기 그지 없는데, 이런 곳에 자녀들을 보내는 재력가 집안의 부모들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소녀들은 매일 밤 사감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타민이라 불리는 약을 먹고 잠을 자고, 마치 화원 속의 장미처럼 남자들에 의해 배양되고 있다. '오직 아름다운 것들만이 가치 있다'고 부르짓는 교수들, 언제나 남자들이 기대하는 최고의 품행을 보여야 하고, 그들에게 상냥함과 정숙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공손하고, 순종적인 신붓감이 되는 것이 소녀들의 당연한 목표였다. 그녀들에게는 아카데미의 투자자들과 후원자들에게 '아름답고 순종적인 소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주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응은 매력적인 자질이야. 사람들은 너희 의견을 반기지 않아. 입 다물고 듣기만 해. 이것이 모든 젊은 여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이야.”라는 극중 교장의 말도 이상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나 반항 없이 그저 순종하는 소녀들의 모습 또한 어딘가 비정상적이다. 그랬던 소녀들이 질문하기 시작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그 모든 거짓과 기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저자인 수잔 영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특별한 헌사를 담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고통당하며 투쟁해온 소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녀들을 믿고, 함께 싸우겠다고 말이다. <시녀 이야기>의 계보를 이을 젊은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 만큼의 서사를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이 오늘날 가장 논쟁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름답고 비범한 소녀들이 세상을 향해 펼치게 될 반격을 만나 보자.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게 장미의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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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지음 / 놀(다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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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과 소중한 것은 다르다. 우리의 가족, 친구, 연인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여서 소중한 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주어 소중해지는 것처럼,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존감은 채워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종종 자존감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이라 착각하곤 하지만, 자존감은 특별하지 않더라도 그런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현실을 잊게 하는 마취제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딛게 하는 안전장치인 것이다.     p.44

 

2016년에 출간되어 100만 부를 돌파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김수현의 신작이다. 당당하게 "나로 살기로 했다"고 외치던 저자는 4년 만에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지키는 관계 맺기"를 이야기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고민거리가 없었던 저자는 어느 날 깨닫게 된다. 내가 완벽하게 신뢰했던 관계를 상대는 전혀 다르게 여기고 있었고, 상대의 마음을 잘 다루는 줄 알았던 자신의 실체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뭘 놓친 건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점차 관계가 어려워졌다. 이 책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는지 오랜 고민의 결과를 담고 있다. 자존감을 지키며 나답게 사는 법, 타인과 조화롭게 지내면서 당당하게 사는 법, 마음을 표현하는 법, 그리고 사랑을 배우는 과정을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풀어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인싸'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타인의 관심을 목말라 하는 현대인의 특성상 누군가가 인싸가 되면 또 누군가는 아싸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꼭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에 따르면 삶에 필요한 인간관계의 양은 사람마다 다른데, 소속감이나 친밀감에 대한 욕구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니 무'조건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욕구를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관계의 양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거다. 저자는 어릴 때 어른들에게 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왔지만, 이제는 '가끔은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인간관계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 만큼 중요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 자신보다 중요한 관계란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인싸가 아니라도 괜찮다. 인싸고 나발이고, 일단 나부터 행복하고 볼 일이다.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지 않았을지라도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힘겨웠던 순간들과 버거웠던 감정들은 이미 온 힘을 다해 삶을 지켜낸 증거다. 그래서 나는 수고했다는 그 평범한 인사가 그렇게도 좋았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애써온 당신에게 내가 담을 수 있는 모든 무게를 담아, 한 번쯤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나온 모든 순간은 그대의 최선이자 성취다. 사느라 너무나도 애썼다. 그리고 잘 버텼다. 정말, 수고했다.    p.90~91

 

저자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당시에, 작업물의 가격을 책정하는 게 워낙 업체마다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규정이 따로 없다 보니 가끔 최저 시급의 절반에도 못 미칠 금액으로 의뢰가 들어오기도 하고, 무제한 이용권이라 생각하는지 추가 작업을 계속해서 요구 받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라도 해서 돈을 버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결국에는 거절하곤 했는데 무리한 요구라고 '당당하지만 정중하게' 말했다고.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면, 상대는 다른 사람에게도 당당히 부당한 요구를 하게 된다는 거다. 그건 결국 시장 전체를 망치게 되고, 피해를 다른 사람과 나눠 갖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내가 한 번 참고 넘어가 버려서 모두가 참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때론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게 최선의 선의이자, 연대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개인의 선의가 꼭 전체의 정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선의는 신중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공감하게 되었다. 나만 참으면 끝나는 일은 없다는 것, 세상의 수많은 '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수많은 사람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지금처럼 사회적 함의나 개인의 상식이 천차만별인 세상이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타인에게는 상식이 나에게는 무례일 때도 있고, 나에게는 선의가 타인에게는 오지랍'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느냐고'가 아니라 '그걸 꼭 말로 해야 압니다'인 것이고,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지?'라고 묻기 전에 '내가 제대로 표현을 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해야 나답게, 편안하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다. 따뜻한 공감과 시원한 솔루션이 담긴 글과 그림을 통해 ‘나를 지키는 관계 맺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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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5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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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얘기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해미시가 말했다. 그는 토미가 신도였던 것 같은 해돋이 교회를 찾아갔던 일부터 휴가를 내고 그 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샌더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왜 블레어 경감이 당신을 경찰의 제일가는 골칫거리라고 하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요. 아니, 혹시 누가 당신을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런 위험 정도는 감수하는 거죠."     p.101

 

스코틀랜드 북부의 험준한 산자락에 자리한 평화롭고 한적한 로흐두 마을, 그저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이나 주워듣고 밀렵이나 하고 공짜 차나 얻어먹으며 살고 싶은 순경이 있다. 해미시는 그 날도 여기 농장에서 차 한잔, 저기 회반죽을 칠한 농가에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면서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이 마을에서 순찰은 단순한 사교 방문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흐두 인근 글레넌스테이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약 과다 투여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악의 소굴과도 같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 고지도 더 이상 마약 청정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미시는 약물 소지죄로 체포된 이력이 있던 그 청년을 직접 만났었고, 지금은 약물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약물 과용으로 숨졌다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사망자의 유족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고 그를 찾아 오자, 본부 몰래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해미시는 청년이 신도였던 것 같은 교회를 찾아갔다 수상스러운 정황을 발견하고, 휴가를 내고 신분을 감춘 채 교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위장 취업은 시작에 불과했고, 마약 밀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책도 없이 허세를 떨다가 마약 카르텔 수뇌부를 만날 지경에 처하게 되는데, 뒤늦게 이 일을 보고받은 경찰 본부가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함정 수사를 계획하게 되면서 일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러다 졸지에 글래스고에서 파견 온 올리비아 체이터 경감과 부부로 위장해 거물 마약상 행세를 하게 되는데, 해미시의 예측 불허한 종횡무진 수사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왜 당신처럼 총명한 인재가 시골 마을 순경으로 썩고 있답니까?" 각자 술잔을 들고 자리에 앉자 배리가 입을 열었다.
해미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설명하기도 지겹군요. 나는 순경 일이 좋습니다. 로흐두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그러면 인생은 어쩝니까? 재미는 어디서 보고요?"
"한순간의 재미 따위, 인생의 행복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서요." 그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p.195~196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그 열 다섯 번째 작품이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초 고전들의 유산을 계승한 정통 코지 미스터리이다. 1985년 <험담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4권의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작가인 M. C. 비턴이 작년 12월 말에 돌아가셨으므로, 이 시리즈는 34권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무사태평, 유유자적, 행방은 늘 ‘오리무중’인 로흐두 마을의 유일 공권력인, 야망 없는 시골 순경을 주인공으로 말이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천재적인 수사 실력과 비인간적인 외모의 경찰들은 사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게 마련인데, 대부분의 유명한 시리즈 캐릭터들이 다 그렇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너무도 평범해서 고개를 돌리면 어느 거리에서나 만날 법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스토리라 그런지 어딘가 친근함으로 무장한 매력으로 중독성있는 재미를 보장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해미시가 난생처음으로 해외에 나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층 더 스펙터클한 모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만의 특별한 점이 바로 '할리퀸 로맨스와 정통 문학 작품의 경계에 서 있다'는 건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전작까지는 야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자와 상류사회의 우아한 여인이 만들어 내는 로맨스가 있었다면, 이번 작품은 그녀와 파혼한 이후 다시 솔로가 된 해미시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시리즈물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통해 캐릭터가 설계되고 발전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캐릭터이길래, 무려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수십 년 전에 쓰였던 아늑한 고전 추리물이 현대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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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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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아주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에 겪었던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뿐이다. 옷차림, 국적, 색깔이 달라졌어도 모두 똑같다. 모든 것은 과거의 메아리이자 반복이다. 슬픔도 없다. 순전히 죽음을 앞둔 아주 작고 마른 고양이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 외로움, 배신감 속에서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던 오래전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경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34

 

수 세기 동안 미술가, 작가, 과학자, 철학자 등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서재와 스튜디오를 고양이들과 공유해왔다. 찰스 디킨스, T.S.엘리엇, 레이먼드 챈들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라카미 하루키 등 고양이에 매혹된 작가들의 명단만 해도 꽤 많다. 이들의 고양이에 대한 무한 애정 공세는 그들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해 특별한 감동을 안겨 주는데, 공통점은 바로 고양이가 인간의 진정한 친구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반려 동물들은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무슨 일인지 귀찮게 물어보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짜증나게 몰아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동물들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양이와 사람이 어울려 사는 당연한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보여주는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의 풍경은 조금 더 치열하고, 거칠다.

 

겉모습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 속에 영역과 서열을 다투고 짝 하나를 두고 경쟁하며, 때론 돌볼 여력이 없는 새끼를 미련 없이 버리는 모습들 또한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고양이들을 지켜보는 레싱의 다정함은 단순히 동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대등한 존재처럼 보여서 더욱 놀라웠다. 이미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던 상태에서, 길에서 데려온 한 마리까지 세 식구가 되어 살아온 시간을 그리고 있는 '살아남은 자 루퍼스'라는 글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고양이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루퍼스는 생존자의 지능을, 찰스는 과학적인 지능을, 장군은 직관적인 지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충격 때문에 데려온 지 사 년이 지나서야 레싱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루퍼스,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기계들에 관심을 가지는 찰스, 그리고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할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장군까지.. 나는 이 고양이들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싱의 고양이들에 대한 애정과 다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충격적이고 놀라운 즐거움을 맛보고,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는 삶.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털, 추운 밤에 자다가 깼을 때 느껴지는 온기,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양이조차 갖고 있는 우아함과 매력. 고양이가 혼자 방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고독한 걸음에서 표범을 본다. 심지어 퓨마를 연상할 때도 있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사람을 볼 때 노랗게 이글거리는 그 눈은 녀석이 얼마나 이국적인 손님인지를 알려준다.    p.264

 

이 책은 도리스 레싱이 1967년, 1989년, 2000년에 발표한 글을 한 권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불행하게 보낸 유년 시절을 함께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작가로서 성공한 후, 당시 곁에 있었던 다리 하나를 잃은 늙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곁에 있어준 고양이들을 바라보는 레싱의 시선은 여타의 고양이 에세이에서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사랑의 그것만은 아니다. 특히나 그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야생 고양이들에 대한 기억은 치열하고, 날 것 그대로의 생존 투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놀라웠다. 야생 고양이들의 수가 마흔 마리를 넘기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직접 살처분을 해서 개체 수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던 야만스럽고, 끔찍한 기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참혹했다. 이렇듯 그 어떤 고양이를 다루고 있는 에세이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어 그들의 진짜 삶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고양이들의 발정, 출산, 육아 등의 모습들 역시 사랑스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특별히 싫어하는 편도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거의 매일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을 피해 훌쩍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곤 한다. 길고양이들은 잘못된 속설 탓에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쓰레기봉투를 뜯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잡혀가 안락사를 당하거나 텃밭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무심히 지나쳤던 길고양이들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인간이나 고양이나 살아간다는 건 혹독하고 냉엄한 국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 그 둘 사이에 놓인 벽을 넘으려 애쓰는 레싱의 따뜻한 글을 통해서 사람과 고양이가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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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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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아이들이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하는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이탤리언델리에 가서 갓 구운 롤빵과 커피를 사 마셨다. 집안일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창가의 의자나 보도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와 기쁨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외로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쐐기풀' 중에서, p.260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 <런어웨이>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이지만,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먼저 읽게 된 것은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을 정도로 공감이 되곤 했었다. 특히나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꾸는 걸로 그려져서 여성 독자로서 더 인물에 동화되고, 그들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법한 여자들을 화자로 삼는다. 그녀들의 서사는 흔하디 흔한 일상에 대한 것이지만, 삶 전체를 껴안듯 복잡한 무늬들이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담겨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결혼이 큰 변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마지막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포스트앤드빔' 중에서, p.330

 

대부분이 작품이 여성 캐릭터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남편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피오나와 그랜트는 오십 년간이나 함께한 부부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랜트는 아내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피오나는 남편에게 자신을 요양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그랜트는 결코 장기 입원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냥 한번 시험 삼아 쉬면서 치료할 겸 가보자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입소자가 처음 삼십 일 동안 어떤 방문도 받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고, 그랜트는 아내를 만날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긴 한 달을 홀로 보내고, 마침내 아내를 만나러 갔지만 피오나는 그랜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요양원에 잠깐 머물렀던 거라 곧 떠나버리고, 피오나는 상실감으로 심하게 앓기 시작한다. 그랜트는 그녀를 위해 그 남자의 아내를 찾아가 그를 다시 요양원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집에 가서 그의 아내에게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는 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아이러니, 갈등과 상처, 그리고 관계와 회한 등이 섬세하지만 담담한 문장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내일 당장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감동을 주고, 위안을 안겨준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을 통해 먼로의 작품이 가진 힘을 만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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