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업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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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행과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릴 텐데..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속 주인공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로 그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곤 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가 없을 만큼.. 정말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주인공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그렇게 생이란 경기장에서 강 펀치를 연속으로 맞는 그들에게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한다' 는 것을 알려주려는 그의 노력은 그 동안 매우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편집이다. 복잡한 플롯과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기막힌 반전과 화려한 구성까지, 장편을 너무 잘 쓰는 작가의 유일한 단편소설집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은 평생 자유를 꿈꾸지. 그러다가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 재판을 다시 받고 교도소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거야. 그러자 무기수는 간수에게 말하지.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워 떠날 수 없습니다."

자유를 갖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넌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맘껏 누리도록 해.

아니, 못해.

지금 네가 맞이한 순간을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꿈꾸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달라.

-'전화' 중에서

                                                                                                   

<픽업>에선 횡령과 금융사기로 유명한 고학력 사기꾼이 등장한다. 그는 유령 회사를 차려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지만, 그는 단 한번도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기까지 하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자신이 벌이는 횡령과 사기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일종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일생 일대의 위기가 닥쳐오지만, 배심원을 매수해 결국 무죄로 풀려나고 승리에 고무되어 자축의 술을 마신다. 하지만 뜻밖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전화>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는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그 동안 애써 이루어놓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로 한다. 고객과의 약속을 무례하게 취소해버리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의 비밀에 대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폭로해버리고, 길거리에서 술을 먹다 경찰에게 쫓기기도 하고, 5년 동안 함께 해온 아내와 아이에게도 무책임한 발언을 해버린다. 그가 저지른 짓들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절대로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누군가를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놈에게 쓴 소리를 해주고, 권위를 앞세우는 이들을 면전에서 망신 주고, 성공지상주의와 알량한 책임감도 집어 던지고 말이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한 통의 전화, 그리고 결국 그의 삶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실수>에서 촉망 받는 변호사인 그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어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하지만,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다 결국 아홉 살이 된 딸을 두고 떨어져 지내기로 한다. 이후에 그는 또 변호사인 다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매 순간마다 그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뒤돌아보면 너무도 뚜렷이 보이는 명백한 순간들 조차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살다가 별안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을 목도하고도 스스로 애써 외면하려 해 왔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흔한 명제가 얼마나 끔찍하게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각성>에서는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촉망 받는 젊은 소설가였던 남자가 결혼을 하고 생활에 치이면서 점점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희대의 작품을 완성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딸들과 놀아주고, 저녁을 먹은 뒤 밤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소설을 써나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내리막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점점 더 작품에 집착하고, 급기야 약물에 의지해 잠을 자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하는데... 처음 약을 두 알 먹었을 때만 해도 31페이지를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원고는 448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바로 그의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누구나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가 스스로 가두어버린 굴레에서 벗어나 단지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디디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두려워 옴짝달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술집에서 우연히 어느 여자를 본다. 가능성을 본다. 우리가 마땅히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삶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하지만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그 자리를 보면 그 여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가능성' 중에서

 

이렇게 짧지만 다양한 12편의 단편들은 더글라스 케네디 특유의 장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만나왔던 그의 장편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중에 겨우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별도로 다른 소설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를 이끌어가던 그의 능력이 단편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에서도 여지없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주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고 있다.

다들 매일 순간을 살아내기 바빠서 고민조차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더글라스 케네디는 삶의 순간들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모멘트' '리빙 더 월드', '파리5구의 여인'이나 '비트레이얼'에서처럼 스펙타클한 모험과 화려한 플롯은 없었지만, 오직 단편이라서 느낄 수 있는 예리한 순간 포착과 반짝거리는 매력이 가득해서 특유의 이야기로서의 즐거움은 여전히 가득 안겨주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는 딱 질색인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 작품집이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꿈만 꾸는 것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르다. 소문으로만 짐작하는 것과 직접 체험해보는 것 역시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 동안 더글라스 케네디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을 당신, 이번에야말로 그 실체를 직접 경험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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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홈즈 Miss 모리어티
헤더 W. 페티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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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동안 수많은 셜록 홈즈 이야기를 만나왔고, 그를 소재로 변주된 또 많은 이야기를 봐왔지만 셜록 홈즈 최고의 숙적인 모리어티가 여자라는 설정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토리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 시리즈만큼이나 색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셜로키언은 커녕 셜록 홈즈 시리즈의 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어정쩡한 셜록을 그렸을 리도 없고, 모리어티라는 이름을 이렇게 황당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시도는 신선했으나, 원작에서 너무 멀어진 두 캐릭터는 다소 아쉬웠다

딱히 문 뒤에서 무엇을 보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셜록의 침실이 너무나 정상적이라 놀라고 말았다. 프레디가 살고 있었을 것 같기도 했고, 쇼니도 몇 년은 살았을 것만 같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옷들이 널려 있었고 벽에는 포스터까지 몇 장 있었다. 셜록 홈즈는 특이하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셜록도 결국 런던에 사는 남자애일 뿐이라는 것을 이상하고도 생생하게 상기하게 된 기분이었다. 그 허탈한 느낌에 내가 직면해야 할 현실성이 되돌아왔다.

여고생 제임스 모리어티는 6개월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경찰 아빠 대신 세 남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다. 죽은 엄마에게 집착하는 아빠는 술만 마시면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특히나 엄마를 쏙 빼 닮은 모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모리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는 공간이었고, 그녀는 언제나 집에 들어가길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화재 대피 훈련이 있던 날 선생님의 부탁으로 반에서 가장 괴이하기로 악명 높은 홈즈를 데려오기 위해 극장 지하에 있는 그의 비밀 연구실에 가게 된다. 화학 실험실 자체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마치 거품과 연기를 지휘하는 미친 교향악단 지휘자처럼 묘하게 격정적으로 우아하게 실험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셜록은 그렇지 않았다. 너저분한 교복과 앞으로 뻗친 대걸레 같은 웃기는 머리카락에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자신의 추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린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막아서고 동생을 잘 토닥이고 난 뒤 모리는 집에서 나와 자신만의 아지트인 리젠트 파크 공원에 가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셜록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함께 해결해보자고 게임을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화학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셜록과 수학 천재 모리어티가 함께 살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라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안하무인에 거들먹거리고, 관찰력과 추론이 뛰어난 셜록과 계산에 밝고 영리한 모리어티가 함께라면, 비록 그들이 고등학생일지라도 무능한 경찰이 찾지 못하고 있는 어떤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가 허리를 쭉 펴자, 나를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여전히 내 눈에는 그가 너무나 어리게만 보였다. 스스로를 진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를 찾고 있는 그냥 또 하나의 어린아이가.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지. 이건 공원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거고, 나의 세계는 100만 덩어리 무쇠로 박살이 나서는 전부 내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내가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게 이 일의 의미야, . 이건 온전히 혼자서 산사태와 싸우는 나에 대한 거라고. 그리고 네 규칙에 맞춰 주지 못하고 이번에 너의 게임을 섞여 들게 한 것은 미안해."

이 작품의 화자가 셜록이 아니라 모리어티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원작에서도 셜록이 주체로 등장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모리는 '왓슨'의 역할도 아니고 (심지어 그녀가 대역을 맡고 있는 배우의 남자친구가 왓슨으로 등장한다) '모리어티'라는 역할로 보기에도 상당히 애매하다. 그저 수학 천재에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만 모리어티스럽다고 할까. 애초에 셜록과 사랑에 빠지는 모리어티라는 설정이 시작이었으니 뭐 할 수 없지만. 사실 왜 이들 캐릭터를 셜록과 모리어티라고 설정했는지 조차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아해진다. 이 설정을 빼고 보자면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지 않다. 베리 리가의 '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의 느낌도 나고, 극중 모리와 그의 아버지 관계, 그리고 그녀가 사건을 파헤쳐가는 스토리 자체는 흥미로우니 말이다.

, 이 모든 과정에서 셜록의 역할이 거의 없다. 그는 가끔씩 등장해 그녀에게 키스를 하거나,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거나, 위험한 순간에 그녀를 구해주는 게 전부다. 그냥 모리어티의 남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역할. 나의 셜록을 이렇게 평범하고 존재감 없게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모리가 셜록을 ''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오글거린다. '셜록'도 아니고, '홈즈'도 아니고 ''이라니...... 만약 이 작품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 번째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 번째 작품부터 셜록이 제대로 활약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프리퀄 같은 거였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 반해서 생기는 반발심이니,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스터리가 섞인 가벼운 로맨스로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지루할 틈 없이 시작하면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작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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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정 오페라 밀키 홈즈>라는 일본 만화가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가 탐정으로 나오는데 이름이 ‘셜록 셰린포드’입니다. 심지어 이 캐릭터의 할아버지가 홈즈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

피오나 2016-09-07 19:46   좋아요 0 | URL
오..그런 작품도 있군요ㅋ 홈즈는 정말 많이 변주되었던터라...제가 모르는 작품들도 많더라고요. 그러니 완성도보다는 아무래도 다양성을 인정해야겠죠? ^^;;;
 
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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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였으면 좋겠군요." 개빈 삼촌이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쪽이, 이미 일어난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어떻게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일 수 있죠? " 보안관이 말했다. "그가 마음먹었던 일을 어떻게 끝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감옥에 갇혀 있는 데다, 그를 자유로이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주민은 본인이 죽였다고 자백한 아내의 아버지인데?"

                                                                       -윌리엄 포크너 '설탕 한 스푼'

한 남자가 보안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를 한다. "나는 내 아내를 죽였습니다" 이 한마디에 상황은 종료되고 그는 구치소에 갇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마치 감옥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거였다. 아내를 죽였으니까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감시 받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는 곧 감옥에서 감쪽같이 탈옥해버린다. 그럴 거였으면 대체 왜 들어갔던 걸까. 탈출하기 위해서? 굳이 전화를 걸어 살인을 자백해놓고 붙잡혔다가 다시 탈옥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미스터리는 의외의 순간에 밝혀진다. 사람이란 잘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습관과 버릇처럼 아주 사소한 부분이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며 진상이 드러나는 이 이야기는 짧지만 날카로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들이 결국 잡히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버릇을 못 끊기 때문이라는 건 수많은 범죄 소설에서 이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던 잡지를 보고, 먹던 음식을 먹고, 마시던 맥주를 마시고, 같은 여자한테 전화를 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탄생한 거장들의 미스터리 모음집은 이렇게 한편, 한편이 모두 하나의 문학작품 과도 같다.

"아니오, 피터스." 지방 검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살인을 저지른 동기 말고는 모든 것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여성에 관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기만 하면... 뭔가 내세울 물건이 말이죠.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 이렇게 어설픈 살인사건과 일맥상통하는 증거가 필요해요."

헤일 부인은 은밀한 눈길로 피터스 부인을 바라봤다. 피터스 부인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급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전 글래스펠 '여성 배심원단'

엄청난 거금을 도둑맞았고, 그 도둑을 잡았지만 세상에 드러낼 수 없어 그 돈을 되찾을 수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아서 밀러의 '도둑이 필요해', 흉악범과 경찰들과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맥킨레이 캔터의 '헤밍웨이 죽이기',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여인을 같은 여성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간파하는 수전 글래스펠의 '여성 배심원단, 그리고 반전이 돋보이는 마크 코널리의 '사인 심문'과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기밀 고객' 등등... 12편의 단편들은 범죄라는 행위가 발생하지만 오로지 그것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기에 기존의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조금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존 코널리는 '죽이는 책'에서 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는 몇몇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장르란, 아름다움처럼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미스터리 소설은 형식이자 메커니즘이므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위대한 소설들은 흥미롭게도 장르를 불문하고 그 핵심에 범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노벨문학상.퓰리처상 수상 작가 12인의 미스터리 걸작선인 이 작품 <헤밍웨이 죽이기>를 엮은 엘레러 퀸의 의도는 매우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범죄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 파괴되지 않는 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며, 범죄 요소를 없앨 경우 무너져버리는 소설이 범죄소설이라는 공식'에 대입해보자면, 이 작품의 꽤 많은 이야기들이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 속에 미스터리의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만큼 장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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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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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미스터리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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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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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한 문장을 비유 삼아 말해보자면, 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바로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그것이다.

 

누군가 넬라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삶을 흔들고 있다. 만약 이 물건이 실수로 배달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요람은 아직 한 번도 쓰지 못한 결혼 침대와 영원히 순결을 지키게 될 것 같은 그녀에 대한 조롱이다. 감히 누가 그토록 무례한 장난을 치는 걸까? 개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의자도 지나치게 정확하고, 요람은 지나치게 암시적이다. 미니어처리스트는 그녀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열 여덟 가난한 소녀 넬라가 서른아홉의 부유한 상인에게 시집을 온다. 소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빚을 잔뜩 남겼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엄마와 철없는 두 동생,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궁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녀는 그저 그곳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이 앞날이 그 동안과는 달라질 거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그녀를 맞이한 건 차가운 시누이와 어둡고 낯선 하인들이었다. 시누이의 날 선 목소리와 하녀의 경멸 어린 눈빛, 남편의 무관심은 어린 소녀를 좌절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소녀는 밤바다 남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기를 기다리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면 자신이 여전히 혼자라는 걸 깨닫고 만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 남편과,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시누이와, 숨어서 키득거리는 것 외엔 웃을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하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크고 웅장한 캐비닛을 집에 가져온다. 결혼선물이라며 넬라에게 말을 건네는 요하네스가 커튼을 젖히자 드러난 캐비닛 내부는 아홉 칸으로 나뉘어진 미니어처 집이었다. 마치 실제 집이 줄어든 것처럼 정교함이 돋보이는 아홉 칸의 방과 작업용 부엌, 응접실, 다락방까지.. 완벽한 복제품이었다. 요하네스는 그것을 주의를 분산시킬 소일거리라고 표현했지만,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던 넬라에게는 집안에서의 부실한 입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난 이미 소꼽 놀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대체 실제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이런 곳을 가꾸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후 넬라는 우연히 명부에서 발견한 미니어처리스트의 연락처를 보고 캐비닛 안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주문하고, 얼마 뒤 주문한 상품을 받아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녀가 주문했던 줄이 달린 류트와 약혼 기념 컵, 그리고 마지팬 한 상자는 마치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기술과 정성이 들어가 있다. 마지팬에선 장미수 향기까지 풍기고, 류트의 줄을 당기면 실제로 선율이 흘러나오고, 약혼 기념 컵은 곡식 한 알보다 작은 크기지만 그 무엇보다 실제 같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더 등장한다. 아래층 응접실에서 마린이 앉아 있던 아름다운 나무의자와 아기 요람이 바로 그것이다. 넬라는 이것이 실수라고, 다른 사람이 주문한 물건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요하네스가 키우는 개 레제키와 다나 마저 미니어처로 등장하자 이건 진짜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뭔가 침범 당한 것 같은 기분, 새 신부의 어리석음이 철저히 관찰 당하는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기 시작한다. 그 물건들은 그녀에게 혼란과 날카로운 두려움과 함께 휘몰아치는 호기심마저 불러오고, 그렇게 넬라의 삶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넬라는 다시 칼베르스트라트로 돌아선다. 미니어처리스트의 특별한 존재가 곰보딱지 같은 사람들에게 낭비되고 있다고, 넬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밝혀지건, 그 눈동자만으로도, 그 꿰뚫어보는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단서와 이야기로 가득 찬 믿을 수 없는 소포만으로도, 그녀의 존재는 특별할 것이다. 태양 간판 집에 그녀의 몸이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뒷목이 당겨지는 것 같아 얼른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칼베르스트라트는 여전히 고요하다. 그 한복판에 이상한 존재를 숨기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애초에 넬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미니어처 속의 세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캐비닛 속의 미니어처 세계가 해답을 쥐고 있다고, 미니어처리스트가 구원의 불빛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미래가 담겨져 있는 미니어처를 넬라에게 보내기 시작하고, 넬라는 점점 더 그것들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그녀가 미니어처의 세계 속에 푹 빠지게 될수록 그녀 주변의 실제 삶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결국 그녀의 남편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캐비닛을 선물하려고 했던 생각이 옳았던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이 그녀의 주의를 분산시켜 엉뚱한 곳만 쳐다보게 만든 거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이 집에서의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게임이고, 가짜 연습이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그리고 열여덟의 넬라 앞에 닥쳐오는 일들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마치 일생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헤어날 길 없는 온갖 추측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충격적인 남편의 비밀과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없다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절망하지만, 그렇지만 그녀의 삶에 닥칠 파도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엄마가 될 수도 없고, 은밀한 밤의 비밀을 나눌 수도 없고, 살아 있는 영혼이 자랄 수 없는 캐비닛 말고는 집안 살림을 꾸려갈 필요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삶에 닥쳐온 일들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전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넬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자신의 사생활을 원했으며, 그럴수록 점점 더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내는 물건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 캐비닛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마도 넬라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작 이야기를 하는 이는 넬라가 아니다. 그녀가, 의문의 미니어처리스트가 넬라의 삶을 실로 짜고 있는데, 정작 넬라 본인은 그 직물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저자인 제시 버튼은 아직 작가가 되기 전에, 낮에는 개인비서로, 저녁에는 배우로 무대에 서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네덜란드에서 보낸 휴가로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에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재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니어처 하우스를 보고, 소유자의 인생에 대해 상상하다가 그것을 소설로 써보겠노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사 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 열일곱 번에 이르는 퇴고 끝에 탄생한 이 작품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이다. 특히 책 전체를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과 눈부신 묘사가 압도적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표현들이다.

'사랑은 리넨 헝겊 위의 핏자국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해진 얼룩처럼 공격성이 번져간다', '그의 말이 한 조각 얼음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힌다', '설탕을 뿌린 과일 조각처럼 선명한 방 안의 에너지에 넬라는 진이 빠진다', '10월 말의 아침 햇살은 방 안의 모든 것에 냉혹한 선명함을 드리운다', '코르넬리아의 나눔 덕분에 껍질에 금이 가고 넬라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흐너스는 불규칙한 파장으로 불행을 발산하는 것 같다', '찰나의 발가벗은 친밀감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면서 춥고 어두운 밖으로 나가려던 욕망을 잠재운다', '넬라의 상상력이 자아낸 실이 대화를 수놓고, 대화의 조각보를 헐겁게 꿰매기 시작한다', '그녀의 심장이 콩알만큼 작아져서 갈비뼈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밤은 깊어지고, 별들은 다정하지 않고, 추위는 그녀의 목에 닿는 칼날 같다', '달려가 편지를 집어 들고 읽는 순간 날카로운 두려움이 그녀를 벤다', '여자의 친절이 넬라를 찢어놓는다' 등등...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은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런 순간에 단어를 사용하다니, 이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이 작품은 나에게 너무 압도적이라 두 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한 번 읽을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날이 될 수 없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치 세상이 변해 버린 것만 같은 강렬한 감각을 줄 수 있는 종류의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신은 절대 이 작품을 놓치면 안 된다. 더없이 새롭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매혹적인 이 작품은 당신의 세계도 변화시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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