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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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범인들이 그러듯이. 그들의 특권이자 유일하게 합리적인 전략이라는 듯이.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어떻게 이미 해결된 사건을 수사해서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뭘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진실을 거부하면서 진실과 싸운다? 강력반 형사로 일하면서 보았던 여느 범인들의 가족처럼 애처롭게 부정하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어!" 해리는 자신이 왜 수사를 하고 싶은지 알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그가 해줄 게 그것뿐이라서.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챙겨줘야 한다고 고집하는 주부처럼, 친구 장례식에 악기를 가져가는 연주자처럼. 생각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든 위로를 얻기 위해서든, 뭐든 해야 하니까.

해리 홀레 시리즈 그 아홉 번째 작품이다. <스노우맨>, <레오파드> 바로 다음 이야기이다. 《스노우맨》에서 손가락을 잃고, 《레오파드》에서 얼굴 절반이 찢어진 해리.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졌다. 소설 《팬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홍콩으로 떠난 해리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번에 그를 오슬로로 이끈 것은올레그였다. 라켈의 아들이자 그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던, 아들보다 더 가깝던 그 소년이 다른 소년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것. 그러나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레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경찰이자 아버지의 입장에 선 해리.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해리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레오파드> 이후 3, 마침내 돌아온 오슬로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 그가 평생 사랑한 여인 라켈의 아들 올레그, 이제는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되어버린 올레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해리는 더 이상 강력반 형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해리는 자신에게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올레그를 지켜야 한다.

해리가 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 라켈, 그녀가 아들인 올레그를 데리고 오슬로로 왔을 때 소년은 겨우 서너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 라켈과 해리가 만났고, 올레그는 해리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하지만 스노우맨이라는 소름끼치는 기억에서,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해리의 세계에서 라켈은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오슬로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된 올레그가 교도소에 있다. 올레그가 죽인 소년 구스토는 레그를 마약의 길로 인도한, 올레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 해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바로 죽은 구스토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을 입양해준 한 가정을 무참히 박살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마약 중독자 소년. 팬텀. 유령의 목소리. 올레그는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리는 확실해지기 전에는 누구도 유죄일 수 없다며 나름의 수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모든 증거들이 올레그가 살인을 했음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과연 올레그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유죄일까?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폭력과 마약에 찌든어두운오슬로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 덕분인지 이 작품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해리 홀레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끝을 낸다. <팬텀> 뒤에 두 작품이 더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시리즈의 마지막을 슬퍼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해리는 벙커 문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터널은 벽에 끼어 있는 철판 앞에서 끝났다. 루돌프 아사예프는 말하자면 나가는 길만 만들어놓은 것이다. 터널. 그리고 해리는 왜 다른 출구를 먼저 다 열어봤는지 알았다. 그 꿈 때문이었다.

그는 좁은 터널을 응시했다. 폐소공포는 비생산적이고 위험에 대한 거짓 신호이며 극복해야 할 증상이었다. 해리는 탄창이 MP5에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유령들은 우리가 허락할 때만 존재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 중에 해리 홀레 시리즈만 모아 보았다. 아마 대부분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내가 해리 홀레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의 남자, 그리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이지만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으로 뛰어난 수사 능력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남자!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인 <팬텀>을 만나면서, 그 동안의 작품들을 돌아보니 이렇게 모아놓고 책등만 보아도 지나간 시간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했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였다.

 

2월에는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리디머>가 출간될 예정이다. 곧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요 네스뵈는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해리 홀레를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걸로 유명한데, 이번 작품 <팬텀>에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지는 해리 홀레를 만날 수 있다. '해리 홀레의 끝, 시리즈의 정점!'이라는 홍보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말이다.

 

원래 이 시리즈는 전체 열 권으로 마무리가 되었었다. 마지막 작품 <Police>가 나온 것이 2013년이다. 국내 출간작 외의 작품들은 원서로 구매했지만, 더 이상 해리 홀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새로운 해리 홀레 이야기가 <The Thirst>라는 작품으로 2017년 봄 다시 시작되었다!! 앞으로 스무 편, 서른 편..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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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1-3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까지 모으시다니, 엄청난 팬이시군요! ^^ 원서는 생각보다 얇은것 같네요ㅎㅎ

피오나 2018-02-02 01:50   좋아요 1 | URL
ㅎㅎ 요 네스뵈의 작품들은 원서도 두툼하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으로 <Police>는 700페이지, <The Thirst>는 630페이지네요. ^^

G 2018-12-2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Police>, <The Thirst>한국어로 출판된 것은 없나요?

피오나 2018-12-24 22:10   좋아요 0 | URL
네. 두 작품 모두 아직 번역본은 출간 전이에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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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일생을 책 한 권, 문장 하나, 단어 몇 개에 전부 담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간단한 단어들에. 하지만 이 작품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도 유려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말이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도리고 에번스는 유명한 외과의였으며 전쟁영웅으로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이었고, 전기와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지난 주에 일흔일곱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무려 오십 년의 세월 동안이나 기억의 망령에 사로잡혀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젊은 시절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일본군의 포로로 노역하다 살아남았다. 이야기는 도리고가 참전 전 젊은 숙모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기억과 전쟁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비참한 기억과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계속 교차되다 보니 글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와 형식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바섬 고지대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수용된 전쟁포로수용소에서 대령이었던 도리고 에번스는 포로 천 명의 부사령관 역할이었다.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시체들, 고성능 폭약의 시큼한 악취, 죽음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농담을 주고 받던 기억, 폐허와 먼지로 변해버린 마을의 모습, 비처럼 쏟아지던 포탄들, 총알로 벌집이 된 자동차... 전쟁의 풍경들이 그에게 남긴 선연한 기억들은 그렇게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생 그를 지배한다. 끊임없는 굶주림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이질 등의 질병에 시달리던 동료들의 모습, 오래된 토사물, 배설물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들...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부분들을 리처드 플래너건은 고스란히 페이지 속으로 불러 들인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버마 철도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어린 시절 참담하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체험을 듣고 자란 그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12년간 집필에 매달리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다섯 개의 다른 판본을 썼다고 한다. 그 모든 판본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 작품은 전쟁 소설인 동시에 한 남자의 평생을 좌우하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도리고 에번스는 부대에 배치되기 전 훈련 중 휴가 때,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그에게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머리에 붉은 꽃을 꽂은 대담한 모습으로, 함께 온 남자들의 선망의 눈길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온 그녀에게 도리고가 한 눈에 반하거나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마디 대화를 했고, 그가 그녀에게 책 속 몇 구절을 읽어 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단 두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이 만남을 작가는 무려 열 페이지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그가 한 사소한 행동들과 그 순간 했던 생각들은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 장면은 서사 문학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독자들에게 안겨준다. 단어 하나하나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현재의 노인이 된 도리고는 여전히 전쟁포로 막사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꾸고, 당시의 여자친구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독한 고독함에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도리고가 우연히 고모부의 아내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가까워지는 과정과 일본군 포로로 지내던 끔찍했던 기억 사이를 오간다.

일본군 대령들이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을 종종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의 제목 역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어판 제목과 같다고 한다. 리처드 플래너건은바쇼의 책이 일본 문화의 최고 정점에 있다면, 내 아버지와 전쟁포로들은 그 문화의 최저에 있던 셈이라고 말하며, 작품의 소제목들도 모두 바쇼와 잇사의 시 구절에서 따오고 있다. 하이쿠 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과 그들이 철로 건설을 통해서 세계를 정복하며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어떤 은유로 보여지는 지 또한 굉장히 흥미롭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소문만큼이나 굉장했다. 장편소설이라기 보다 거대한 호흡의 서사시같다는 느낌이랄까. 기억과 트라우마에 대한 유려한 서사도 훌륭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묘사와 표현들도 멋졌다. 무엇보다 산문이 안겨주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여러 번 읽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쟁 소설을 읽으면서 잘 쓰였다고 감탄한 적은 있어도, 공감이라는 걸 경험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평생에 걸쳐도 절대 체험해볼 수 없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작가라는 존재가 인물의 심장과 영혼 사이의 어두운 주름 속으로 다가가,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사람이라면, 리처드 플래너건은 바로 그런 마법을 내게 보여주었다. 전쟁의 서사를 가지고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게, 아름다운 단어들로 삶과 사랑을 그려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현대판 오디세우스',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라는 평이 절대 과찬이 아님을, 모두 직접 읽고 느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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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홀했던 것들 - 완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완전한 위로
흔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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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나는 캄캄한 골목도 무섭다고 잘 걷지 못하면서 사람은 잘도 믿었다. 그래서 관계에 자주 걸려 넘어졌으며, 무릎에 까진 상처처럼 마음에도 딱지가 앉기 일쑤였다.

..........후회는 없다. 그렇다고 내게 남은 것이 온통 보람과 환희도 아니다. 하루를 소홀히 살았던 적이 많아서, 앞으로 제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이라서.

나는 내가 소홀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할 생각이다.

요즘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너도 나도 글을 쓰는 시대이다. SNS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된 것도 있고, 워낙 사는 게 마음을 헛헛하게 하는 것이다 보니 글을 통해 위로 받고, 공감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탓도 있을 것이다. '흔글'이라는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독특한 필명을 가지고 있는 저자에 대해 찾아 보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 채널 등 70만 독자가 뜨겁게 공감한 글'을 쓴 작가라는 정보일 것이다. 게다가 이미 책도 여러 권 낸 작가였는데, 나는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SNS에서 핫하다는 작가들의 '평범한 글들'을 많이 보아 왔기에,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머리로만 생각하고 흉내낸 겉멋이 아니라, 가슴에서 비롯되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들이라 조금씩, 조금씩 나는 편견을 버리고 그의 글에 잔잔히 스며들고 말았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굳이 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단번에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짧은 문장에 빠져, 교과서 대신 시집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이력이 고스란히 현재 그의 글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짧은 단락들로 이루어진 생각의 편린들과 일상의 풍경들이 이어지는 그의 글들은 읽기에도 참 편하고,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많았고, 무엇보다 허세가 실린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민하고 생각한 티가 나타나는 글들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살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과 오늘이 아니면 내일 하면 된다는 안일함으로 소홀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홀하다'는 의미에 대한 저자의 생각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내가 소홀했다고 느낀 것들 중에는.. 실제로 소홀하지 않았지만 내 역량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한,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사람, 그때 했어야 한다고 끝끝내 후회하게 되는 미련, 과거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바램, 제대로 들을 줄을 몰라서 흘려버린 소중한 사람들과의 대화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소홀했던 부분들은 참 많기도 하다.

불필요한 감정들은 걸러낼 줄도 알고, 사랑 받기 위해 욕심부리지도 않으며, 외롭다고 칭얼대지 않고, 행복하다고 해서 나태해지지 않는 것. 괜한 다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감정이 요동칠 때는 잠시 마음을 비우고, 눈길 둘 곳 없을 때는 괜히 하늘도 쳐다보면서 약한 마음에 다짐을 채워 넣는 것. 이별을 겪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닌 흠뻑 젖을 정도로 아파하다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 긴 시간 자리 잡은 적 없던 마음속에 누군가가 자꾸 서성이는 것을 느끼며 웃어도 보는 것.

이 책은 연애와 일상, 사람들간의 관계와 삶의 태도를 돌아보고 그저 웅크리고 버티는 것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머무르는 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항상 뭔가 아쉬운 과거, 항상 뭔가 부족한 것 같은 현재, 그리고 영원히 완벽하지 않을 것 같은 미래까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그 모든 시간들은 모두 상대적이라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제와 오늘이 주어지고, 내일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내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뛰어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닐까. 세상은 나한테만 이렇게 불공평한 것 아닐까. 아니면 다들 비슷한 마음인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책과 같은 위로가 아닐까 싶다.

특별하지 않은, 누구나 매일 겪는 일상의 고민들과 평범한 하루에 대한 저자의 글들은 바로 그 특별하지 않음으로 인해 위로와 공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응원해주고, 지나온 과거가 당신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격려해주고, 당신만 힘든 거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그래서 당신도 사소한 것들에 웃을 줄 아는 여유와 거대한 슬픔에도 담담히 버틸 줄 아는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사랑을 잃어 버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람도,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아 힘이 든 사람도, 너무 바빠서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추운 겨울,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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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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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돌아봐도 막막할 뿐이다.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들어서 한 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나는 두 눈을 지니고 있어 조금이나마 글자를 알고 있으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든 채 마음을 달래고 있노라면 무너진 마음이 약간이라도 안정이 된다. 만약 나의 눈이 비록 오색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책을 마주하고서 마치 깜깜한 밤처럼 까막눈이었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까.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아마도 그를간서치(책 바보)’라는 별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꽤 많은 것이다. 나도 이덕문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은 그 정도였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책을 통해서 이덕무가 평범한 일상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문장에 녹여내는 데 탁월했던에세이스트였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은이덕무 마니아인 고전연구가 한정주는 그가 남긴 소품문 에세이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꼽아 번역해서 소개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학파 실학자이자 조선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독서가의 글이지만,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진리를 쉽게 그리고 있어 참 좋았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일상을 만드는데, 정작 우리는 그 매일 지나치는 소소함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살면서 기쁘고 행복한 일보다 뜻대로 되지 않고,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날들이 더 많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바로 소소한 일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책을 통해서 이덕무의 따뜻한 문장들을 만나다 보면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처럼 누군가의 일생을 좌지우지할만한 특별한 사건이란, 어쩌면 평생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마주하게 되는 작은 순간들, 추위에 얼어붙은 풍경 속에서, 갓 내린 향긋한 커피 향기 속에서, 모처럼 날이 풀려 따스해진 햇살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런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섬세하게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이덕무의 문장들에는 '위로' 그 이상의 것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생활 속 잡감을 거리낌 없이 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이다. 일상은 그냥 두면 지나가 버리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글로 옮겨 담으면 색다른 의미와 가치로 영원히 남게 된다. 이덕무는 추운 겨울 날, 늦은 밤에서 이른 새벽까지 불평과 화평 사이를 오간 잡감의 조각들을 이 글에 묘사했다. 이러한 잡감이 하루 이틀의 일이겠는가?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고 갔으리라. 어디 이덕무만 그러했겠는가? 아마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과 감정의 기복을 겪었으리라.

이 책에 소개되는 글들은 크게 여섯 가지 테마로 나뉘어 있다. 우선 첫 번째는 이덕무가 보고 느낀 그대로 진경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글들이고, 두 번째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소소한 생명체들의 풍경에 대해, 세 번째는 그가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들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글들, 네 번째는 정직하고, 자유로운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글들, 다섯 번째는 어른들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어린아이의 솔직함과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지혜에 대해, 여섯 번째는 그가 생각하는 참된 문장과 독서의 가치를 보여주며 그가 온몸으로 글을 쓰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글들이 소개되어 있다. 덕분에 이덕무의 문장들이 지닌 가치가 그저 몇 백 년 된 고전으로서의 그것 만이 아니라는 점이 고스란히 와 닿는다. 이 글들을 통해 한 사람의 생생한 삶과, 온 힘을 다해 살아냈던 일상을 느끼게 되고, 이것은 바로 지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매 순간이 너무 바빠 지치고 스트레스 가득한 내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내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는 듯한 느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단했던 청년 시절 자신을 이끈 힘을 이덕무의 글에서 얻었다고 고백하듯 그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울림과 온도에는 특별한 무엇인가 있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삶의 온도가 바뀐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나 아무렇게 들춰서 이덕무의 문장들을 읽어 보자. 어느 새 당신의 어깨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삶의 무게도, 쫓기듯 달려가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메마른 그것도 조금씩 툭툭 털어낼 수 있을테니까. 그러다 보면 우리의 삶의 온도도 조금씩 바뀔 지도 모르겠다. 머리나 가슴 어느 한 쪽만이 아닌 온몸을 다해 써낸 정직한 문장만이 줄 수 있는 무언의 위로를 오늘도 지친 당신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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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스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0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남자들이 화가 잔뜩 나서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거든요."

", 그렇다면 남편 하나가 그 사람 코에 한 방 먹이면 곧 마을을 떠나겠네요."

해미시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엄지손가락이 쑤시는 걸 보니, 무언가 사악한 것이 이리로 다가오고 있구나.' 그건가요?"

"비슷해요."

 

사건이라고는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아마도 영국 제도에서 가장 따분한 마을 드림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기고 매력적인 젊은 남자 피터 하인드가 이사를 온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도 한 눈에 반한 아도니스처럼 아름답다는 남자 덕분에 마을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해미시 멕베스 경사는 로흐드 마을에 살지만, 드림 역시 그의 담당 구역이기에 소문을 듣고 인사도 나눌 겸 찾아가 보기로 한다. 젊은 사람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마을에 살겠다고 나타난 피터의 의도가 의심스러웠지만, 해미시가 보기에도 그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마을에 정착한 젊은이가 중년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탓에 파리만 날리던 미용실이 중년 여성들로 붐비고, 그런 아내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남편들은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외지인을 향한 남자들의 증오심이 깊어지면서 점점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지는데, 어린 소녀가 해미시를 찾아와 시체 없는 살인 사건을 신고한다. 갑작스럽게 피터가 쪽지를 남겨두고 마을을 떠났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가 살해된 것 같다는 거였다. 물론, 시체가 발견된 것도 아니고, 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번 작품은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그 열 번째 이야기이다. 말단 순경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지난 여덟 번째 이야기에서 경사로 승진하고, 전편에서 오랜 짝사랑 상대였던 프리실라와 약혼한 이후 해미시의 달라진 일상이 시작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프리실라는 해미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그를 높은 자리로 승진시키고 싶어 하는데, 그저 유유자적한 삶을 원하는 해미시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성공시키겠다고 죽자사자 애쓰는 그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해미시는 성공한 남자가 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고, 그저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이나 주워듣고 밀렵이나 하고 공짜 밥이나 얻어먹으며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게 바로 그가 약혼 전 평온하던 시절에 늘 하던 일이었고, 그게 바로 해미시 맥베스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전부였으니, 앞으로 시리즈가 점차 진행되면서 프리실라에 의해 과연 변화하게 될지를 지켜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야망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남자와 상류사회의 우아한 여인이 만들어 내는 로맨스는 살인 사건과 미스터리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이 시리즈 전체를 계속 읽게끔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 커플 덕분에 우리는 작가의 말처럼 '그동안 단 한 권도 없었던, 할리퀸 로맨스와 정통 문학 작품의 경계에 서 있는' 시리즈를 만날 수 있다.

 

 

 

 

 

시리즈를 모아 놓고 찍으려다 보니, 아무리 찾아도 2권이 안 보인다. 판형이 작고 가벼워 휴대성이 좋은 반면, 잔뜩 어지러진 책장에서 찾을 때는 오히려 잘 안 보인다는 단점이.. 하핫...

 

 

 

해미시는 랜드로버로 돌아가서 차 안에 앉아 침울하게 아래쪽 호수를 빤히 바라봤다. 이 사건을 좀 더 파고들지 않는다면, 죽는 날까지 후회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해미시는 게을렀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은 최악의 범죄였고, 그는 베티의 죽음이 사고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온갖 것에 간섭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보이는 프리실라 때문에 해미시는 왠지 자신의 약혼이 깨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해미시가 로흐두를 떠날 의사가 전혀 없는데 비해 프리실라는 끊임없이 이사할 좋은 집들을 알아보지만 그녀 역시 엉터리 점성술사에게서 들은 불길한 예언 때문에 어딘지 두렵다. 그녀는아가씨는 맥베스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남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테니까.” 라는 말을 들었고, 그 이후에 매력적인 청년 피터가 등장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피터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난 뒤에도 여전하다. 마을의 남자들은 화가 잔뜩 나 있었고, 여자들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렸으며, 사건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미시는 어딘지 수상하다는 느낌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무사태평, 유유자적에 게으르고 매사 느긋하기만 한 경찰이지만, 정의감만은 투철한 점이 바로 해미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최악의 범죄였고, 만약 범죄가 일어난 거라면 반드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결국 해미시는 살인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니 애초에 살인이 일어나긴 한 걸까. 짧은 분량이지만 이야기는 소소한 재미와 흥미진진한 요소들로 무장하고 있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초 고전들의 유산을 계승한 정통 코지 미스터리이다. 1985년 『험담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2018 2, 33번째 권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데,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인 M. C. 비턴은스코틀랜드 북쪽 끝에 있는 서덜랜드의 낚시 교실에 참가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고지대의 황무지에 고립된 11명의 사람들, 이 얼마나 멋진 고전적인 탐정소설의 무대인가! 그렇게 해미시 맥베스가 탄생했죠.”라고 탄생 비화를 말한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이 시리즈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도 완벽한 설명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언제나 스코틀랜드 고지를 무대로,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을 소란하게 만드는 인물이 출현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너무도 평범해서 고개를 돌리면 어느 거리에서나 만날 법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스토리라서 더욱 공감도 되고, 몰입도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시리즈물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무려 서른 권이 넘는 시리즈가 부디 모두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한 권짜리 이야기보다 지속되는 시리즈는 더 많은 즐거움을 주는 법이니까. 시리즈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누적되는 인물들 만의 소우주를 엿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대체 어떤 캐릭터이길래, 무려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아늑한 고전 추리물이 2018년 현재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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