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콥터 하이스트
요나스 본니에르 지음, 이지혜 옮김 / 생각의날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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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헬리콥터가 필요했다. 지붕에 올라갈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내려올 방법은 현실적으로 단 한 가지뿐이었다. 소란과 이야기한 이후, 미셸은 크레인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지 알아봤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곧 포기해야 했다. 못이나 밧줄, 회반죽을 써서 등산하듯 올라가는 방법도 고민해봤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우아하게 열기구나 행글라이더를 타고 가는 방법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현실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작가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스웨덴 작가 요나스 본니에르의 첫 장편소설이다. 타임즈 선정 세계 10대 강도 사건으로 꼽히는 스웨덴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토대로 쓰인 이 작품은 출간 직후 넷플릭스와 전격적으로 영화 판권을 계약했고,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다. 작가는 실존 인물과의 수많은 인터뷰와 면밀한 조사를 통해 6개월간의 사건 공모에서 탈주까지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했다. 이 전대미문의 '헬리콥터 강도 사건'은 추후 도망친 범인들이 잡히긴 했지만 돈의 행방은 결국 미궁에 빠지고 만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작가적 상상력을 입혀 새롭게 탄생한 이 범죄 스릴러는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미셸은 세계적인 보안 회사인 G4S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다. 소란과 함께 자신들이 개발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안 가방을 판매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곧 거래할 하기 직전까지 상황이 진행되지만, G4S에서는 현재 사용 중인 보안 가방의 계약이 무려 15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나 계약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미셸은 낙담한 심정이 되고 만다. 열다섯에 첫사랑과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사미는 이제 그만 범죄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새로운 삶을 위해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모두 모아 냉동 새우 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그만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미셸과 사미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을 위해 함께 일을 꾸미게 된다. 바로 세계 최대 보안업체인 G4S에 근무하는 알렉산드라 스벤손에게 접근해 정보를 얻은 뒤, 그곳에 있는 어마어마한 현금을 털기로 한다.

 

“이 계획이 말도 안 된다는 건 나도 동의해. 헬기를 훔쳐서 코앞에 경찰서가 있는 보안 업체까지 날아가겠다니. 더구나 지붕 아래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문을 폭파하고 스웨덴 역사상 가장 어마어마한 강도짓을 벌이겠다는 거잖아. 우리가 세세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경찰이 소란을 면밀하게 감시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말이야.”

사미가 두 사람을 설득시키려는 듯 말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이 될 거야. 혹시 알아? 전 세계가 이 이야길 하게 될지.”

그들이 돈을 훔치기로 한 곳은 스웨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고로, 그야말로 북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였다. 전설적인 보안으로 유명해서, 군대 하나를 끌고 간다면 몰라도 차라리 시도를 안 하는 편이 낫다고 다들 생각했을 만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문이며 자물쇠에 카메라 수백 수천 대가 지키고 있는 금고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스벤손이 근무하고 있는 회계부였다. 이곳에는 현금만 수억 크로나가 있는데다 근처에는 보안 요원도 없었다. 그러니까 굳이 금고를 털려고 애쓸 필요 없이 지붕에 구멍만 뚫으면 바로 맨 꼭대기 층에 있는 회계부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거다. 말로는 엄청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지붕을 뚫고 현금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지붕에 올라갈 방법이야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내려올 방법은 시간 제약 상 현실적으로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해답은 헬리콥터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황당무계한 강도 사건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어두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살아 왔던 네 명의 남자, 그들은 국적도 사는 환경도 다른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6개월간에 걸쳐 모의한 세계에서 가장 대범하고도 놀라운 희대의 강도 사건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들이 사건을 공모하고, 구체화시키는 과정부터 긴장감 넘치는 사건 당일의 현장 풍경을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사건에 대처하는 경찰과 검찰, 국가 고위 관계자들의 대처 과정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어 더욱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과연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순간이 있었을 정도로 사건 자체는 황당무계하지만, 이것을 둘러싼 인물 군상들의 드라마는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고, 뛰어난 범죄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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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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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알았어. 내가 말했다. 서로 생각이 정말 다를 때는 내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이었다. 무려 18년 동안 밀려 있었던 연체료 32달러를 내고 연체 기록을 지운다. 그리고 방금 전 반납한 이디스 워튼의 책 두 권을 다시 대출한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데다 지금이야말로 그 책들이 딱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27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지금은 남이 된 남편은 옆에서 속 좁은 불평들과 상처를 주는 악담을 늘어 놓는다. 남편에게 들은 터무니없는 비난으로 인해, 그녀는 이제 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두 주 만에 책 두 권을 반납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죽을 때까지 한 남자와 부부로 살고 싶다고. 학교 제도를 바꾸고 도심의 여러 문제와 관련한 연설을 하는 유력한 시민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그녀는 방금 대출한 두 권의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는 책을 반납하러 오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평생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왔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다 일찍 죽었고 아들은 참한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대체 그녀가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모든 것들이 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삶이란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걸, 우리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 모든 걸 바쳐서 키운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 되어 동네에서 가장 품행이 나쁜 여자와 결혼하겠다 하고, 딸아이는 갑자기 이혼하겠다며 찾아온다.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엄마, 남편이 바람을 피운 아내,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불행한 여자들의 모습이 이 소설집에 실린 17편의 중·단편소설 속에 등장한다.

 

중요한 대화가 아주 간절했던 순간, 남자의 모든 세계를 코로 들이마시며 냄새로 느끼고 싶었던 순간, 나의 다정한 언어를 그의 시들지 않는 육체적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할 줄 아는, 적어도 한 명의 똑똑한 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 순간, 나는 별 도리 없이 아이들 가득한 동네 공원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그레이스 페일리는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이다. 수전 손택은 "우습고 슬프고 담백하고 겸손하며 유쾌하고 예리하다. 나를 울리고 웃기고 감탄하게 만든 책." 이라고 했으며, 그녀의 작품들을 직접 번역해 일본에 소개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이 넘치고, 즉물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고답적이며,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고, 남자 따윈 알 바 아니라면서도 매우 밝히는, 그래서 어디를 들춰봐도 이율배반적이고 까다로운 그 문체가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라고 말했다. 국내 번역본에는 하루키가 일본에서 이 소설집을 번역했을 때 썼던 에세이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하루키는 페일리의 어조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 유머 감각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어둡고 심각한 내용에서도 왠지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오는 부분이 있다고, 역시 뉴요커인 우디 앨런의 어조와도 다소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페일리는 첫 단편집을 낸 후 사십 년 동안 단 세 권의 단편집밖에 발표하지 않은 작가이다. 그러니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때 '질 좋은 오징어를 씹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곰곰이 맛을 음미하면서 즐겨야 한다. 하루키의 조언처럼곱씹어보게 되는 중독성 강한 문장'이 굉장히 인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짧게 갑작스럽게 끝나 버리는 이야기라서 더 임팩트있게 다가오는, 서사보다는 장면에 집중하는 단편이라서 여운과 잔상이 더 길게 남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극중 페이스와 같은 순간을 맞이 하게 된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평범한 하루였지만, 어느 한 순간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만나는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 오길.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일자리를 옮기고, 삶의 방식과 말투까지 바꾸게 되진 않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책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그레이스 페일리를 만나기 전과 후, 달라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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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소설가 - 대충 쓴 척했지만 실은 정성껏 한 답
최민석 지음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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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질문자님의 고민을 접한 뒤, 제가 오히려 고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건 바로 ''을 읽으면 졸린게 아니라, ''만 읽으면 졸리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정하고 노력하면 인생에서 책 따위는 외면하고 지낼 수 있습니다. 졸업하면 책과 담을 쌓아도 되고, 입사 후 선배가 업무에 도움이 된다며 책을 추천해도 "한국 책 잉크에서 나오는 독소에 호흡이 곤란해지는 아나필락틱 쇼크를 앓고 있다"며 둘러댈 수도 있습니다. 이 질병은 심할 경우 의식 저하와 사망까지 유발한다니, 악한이 아니라면 이해해줄 겁니다(책이 이러게 위험할 수 있다니, 왠지 작가로서 반성하게 되네요).

세상에 고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왜냐하면 다들 나이 드는 건 처음이니까. 다들 사는 게 처음이니까, 세상에는 처음인 것 투성이니 말이다. 누군가는 연애를 하는 게 처음이고, 누군가는 대학생이 되는 것이 처음이고, 또 누군가는 엄마가 되는 게 처음이다. 그러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왜 늘 이 모양인 건지, 혹은 제대로 연애는 할 수 있을지, 취직은 잘 될지 불안한 것이 당연한 거라는 얘기다. 어릴 때는 어려서 서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사실 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부족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고민한다. 내가 이상한 건지,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말이다.

이 책은 소설가 최민석이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주간지 「대학내일」에 연재한 대학생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칼럼의 내용과 못다한 질문을 추가로 더해 엮어내었다. 세상의 모든 '프로 고민러'들에게 전하는 최민석 작가만의 색다른 고민 해결 방법들은 매우 진지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유쾌하다. 소설가 특유의 말빨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고민에 대한 해답을 넘어서 기발하고, 깊이 있고, 논리적이고, 신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 '사랑' '관계' '미래' 등으로 2030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제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질문과 답을 구성했기에 읽기도 쉽고, 필요한 대목들을 찾아서 보기에도 편하다.

 

 

, 듣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네요. 가슴이 사막처럼 갈라지고, 키보드가 눈물로 침수될 지경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답변을 거짓말로 할 수 없는 제 입장이 한스럽네요.

갑자기 이별 통보를 하고 연락이 두절됐다고 했지요. 그런 채로 7년 넘게 지내다가 이번에 재회를 했는데, 헤어지기 직전에 말했죠. "연애를 굳이 할 필요를 못 느끼겠어. 연애에 지쳤어."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전 여친은 질문자님에게 이성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요(어떡하죠. 주소라도 알려주신다면, 위로의 선물로 제 책이라도 보내드릴까요?).

대학생들의 고민이라 그런지 질문의 내용이 정말 다양하고, 기상천외했다. 저는 왜 글만 읽으면 졸음이 몰려올까요. <검은 사제들>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 무서워서 잠이 안 오는데, 무서움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머리가 너무 커서 고민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자친구가 가난한데, 돈 걱정 없는 연애도 해보고 싶어요. 남자친구 SNS에 제 사진이 없어요.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없는데 결혼해도 될까요? 친구가 자꾸 약속에 늦는데, 이 지각하는 버릇 어떻게 하면 고쳐줄 수 있을까요. 등등.. 현실적인 고민부터 소소한 고민, 진중한 고민 등 각자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삶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질문들이다. 그에 대한 최민석 작가의 답변은 더욱 흥미롭다. 무조건적인 위로나 천편일률적인 모범 답안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담에 빗대어 건네는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인 답변들은 때로는 공감되고, 때로는 그 유머에 감탄하고, 따뜻함에 위로도 받으면서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하면 바로 떠오르는 분이 한 분 계신다. 이유는 매일 숙제로 검사를 했던 일기장에 항상 코멘트를 달아주셨기 때문이다. 의례적인 문구가 아니라 고민에 대한 답변 혹은 내가 겪었던 상황에 대한 이해의 문구들을 달아주셨기에, 어린 나이에도 그게 굉장히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난 이것도 잘하고 싶고 저것도 잘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 걸까요. 라고 쓰면 욕심이 많은 건 나쁜 게 아니라고 서두를 열고는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식이었다. 사실 일기 검사는 단순한 숙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최민석 작가의 이 책을 읽는 동안 초등학교 시절 그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렇게 질문자 한 명 한 명에게 애착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가이드해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호모 고미니우스(고민하는 존재)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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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즈 - 만화로 보는 여성 투쟁의 역사
마르타 브린 지음, 제니 조달 그림, 한우리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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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거의 없었고,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직업을 가질 수도, 돈을 벌 수도,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 투표도 하지 못했다. 여성은 무력하다는 점에서 어린아이나 노예와도 같았다.

 

이후 노예제 폐지 운동과 더불어 여성의 참정권 운동과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모임, 그리고 여러 페미니스트 단체가 등장한다. 하지만 1800년대 말까지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직장에 다닐 수도 없었다. 여성은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가정에 있어야 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속에서도 평등을 위해 투쟁한 만국의 여성들이 있었다. 덕분에 세상은 150년 전보다 나아졌다.

 

움직이지 않는 이는 자신을 묶은 사슬을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만화를 통해 종교, 국적,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세계 곳곳의 여성들이 사회의 불평등에 맞서 어떻게 연대하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왔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노예 출신으로 페미니즘에 기여한 여성은 목숨을 걸고 수백 명의 노예가 자유의 몸이 되도록 탈출을 도왔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한 여성은 조합을 결성해 수백 건의 폭발과 방화를 저지르며 여성 투표권의 중요성을 알리고, 전투적인 여성참정권 투쟁에 돌입했다.

 

 

 

여성들에게 피임 방법을 가르쳐 성 혁명을 일으키는 데 역할을 한 간호사도 있었고, 탈레반의 횡포를 세계에 퍼트린 여학생도 있었다. 이렇듯 자유, 평등 ,연대를 위해 싸운 여성들의 150년 역사는 만화를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에 더 생생하고, 한 번에 와 닿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싸워 온 주요 안건은 세 가지였다.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며, 재산을 소유할 권리,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 투표할 권리, 신체 온전성을 유지할 권리.

자신의 몸을 소유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여성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배우고 자라온 우리들은 이렇게 당연한 권리 조차 누리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분노도 느끼게 된다. 특히나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2018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처한 불평등과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차별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더욱 의미가 있다 하겠다.

 

 

페미니즘은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의 평등을 위한 것이다. 과거에 비해 많은 여성은 자유를 얻었으나, 아직 모든 나라에서 평등한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에선 여성이 가져서는 안 되는 직업이 수백 가지가 넘으며, 많은 어린 소녀가 결혼을 강요당하고, 어떤 문화권에서 소녀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 성 평등을 자랑하는 나라에서조차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억압을 경험하며,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은 강간을 당하고,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150년 전 여성 투쟁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여전히 지금에도 유효한 그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계속 울려 퍼질 것이고, 천천히, 확실히 우리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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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토피아 -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성차별과 섹스 파티를 폭로하다
에밀리 창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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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성 엔지니어가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었고, 심지어 자신에게 집적댔던 그 관리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엔지니어들도 있었다. 말인즉, 파울러가 당한 일이 그가 처음으로 저지른 '악의 없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파울러는 인사 부서를 다시 찾아가 다른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이번에도 담당자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너무 뻔뻔한 거짓말이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그녀가 글에서 밝혔다.

한국 여성 중 반 이상은 직업을 가졌지만, 아직도 세계에서 임금 격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남성 동료들에 비해 여성 임금이 무려 37퍼센트나 적고, 한국 500대 기업에서 임원직 여성 비율은 3퍼센트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사법 당국에 접수된 성폭력 신고 건수가 수천을 넘지만, 실제로 기소된 경우는 그에 비해 너무나도 적다. 수많은 다른 국가와 비슷하게, 오래된 남성 위주의 네트워커 및 행동 방식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미투, #위드유를 외치며 성적 학대 및 성희롱에 대해 용기 내어 말하는 여성들이 있기에 한국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이다. 이 책은 기술산업에서 전개되는 #미투 문제를 집중조명하고 있다. 애플, 삼성,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기술 산업은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들 기업에서 결정권을 갖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의 몫이다.

기술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실리콘밸리는 어떤 곳일까? ‘브로토피아(BROTOPIA)’. 브로토피아는 브로 문화(Bro culture)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다. 브로 문화는 테크놀로지 산업과 실리콘밸리를 특징짓는 표현으로, 남성 우월주의와 남성 중심 문화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남성들이 직접 만든 규칙으로 완전히 지배하는 세상이다. 반면에 절대 소수인 여성들에게 실리콘밸리는 그야말로 유독한 세상이다. 성차별과 성추행이 만연하고 온탕에 몸을 담근 채 투자 회의를 하며 섹스 파티에서 인맥을 쌓는다. 블룸버그 TV의 진행자이자 기자인 에밀리 창이 이 책을 통해 실리콘밸리의 충격적인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유토피아적인 이상향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실리콘밸리가 성차별의 온상이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당당히 목소리를 내며 반격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물론 남성들도 온라인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강간 협박, 살해 협박, 스토킹 같이 더욱 극단적인 형태의 괴롭힘의 희생양이 된다. 남성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스포츠 팀 때문에 조롱받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여성들은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격 당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에밀리 창이 직접 만난 실리콘밸리의 많은 여성들은 현실이 훨씬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열심히 '들이대고' 있지만 아무 효과가 없다고 좌절한다. 한 저명한 여성 경영자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못을 박아 문을 막아버리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들어도 늘 제자리예요." 뾰족한 수가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제도적 변화가 만들어질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문제는 그게 언제냐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실리콘밸리의 성차별과 성추행, 성폭력과 그 밖의 여러 불평등한 상황들은 사실 국내의 기업에서도 숱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일 것이다. 수위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여성들이 기술 산업에서 배척당한 역사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런 아픈 경험이 우리의 미래일 필요도 없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보자고, 저자는 말한다. 남녀 성비가 완벽히 균형을 이루는 실리콘밸리를, 즉 여성들이 실리콘밸리의 전체 일자리 중 절반을 차지하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유럽은 이미 비즈니스 세상에서 양성평등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벌써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변화가 나타나게 나려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조금 더 달라질 거라고 믿으며 이 책을 읽는다.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넓은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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