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읽는 시간 - 죽음 안의 삶을 향한 과학적 시선
빈센트 디 마이오 외 지음, 윤정숙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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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경찰과 강도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쉽게 오해하고, 두려워하며, 증오에 빠지고, 자신의 이익에 흥분하며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일을 찾는 모순된 인간일 뿐이다. 세상은 지저분한 곳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의 일부로서 때로는 잘못된 이유로 옳은 일을 하기도 한다.

또는 옳은 이유로 나쁜 일을 하거나.   p.134

사람들은 대개 죽은 사람들의 사연에 관심이 많다. 그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어떤 동기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죽음이 찾아 오기 전 그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법의학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많다. 법의학자들을 허구적으로 그린 방송이나 영화, 소설 등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그런 관심은 더욱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법의학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들이 어떤 끔찍한 냄새와 비극 속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책에서는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실제 범죄사건에서 벌어지는 매우 현실적이고 놀라운 법의학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법의학자가 하는 일은 누군가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란 질병이나 부상을 의미하고, 죽음의 방식이란 자연사, 사고사, 자살, 타살 등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끈 네 가지 일반적인 방법을 일컫는다. 문제는 다섯 번째 방식이다. 바로 '의문사'. 그리고 법의학자들의 결정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교도소에 보낼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편견 없이 사실에 기초한 과학적 결론으로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무죄를 밝혀낼 수도, 혹은 용의자를 드러내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들은 5,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돈, 섹스, 권력에 움직인다. 어떤 사람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사악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선하기만 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물 위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며 바다로 가다가 선과도 마주치고 악과도 마주힌다.

난 괴물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놀랍다. 그들은 그저 칼이 잘 드는지 보고 싶어서 자신들의 목을 베어버릴 사람들이 저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p.185

이 책은 2017 에드거상범죄 실화부문 최종 후보작에 올랐을 만큼, 실제 범죄사건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법의학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저자는 병리학자이자 의학박사로 국제적인 총상 전문가인 빈센트 디 마이오와 베테랑 범죄 작가 론 프랜셀이다. 법의학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환경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법의학자가 된 저자. 그가 수많은 범죄 현장에서 목격하고 느낀 점들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방식은 마치 한 편의 스릴 넘치는 범죄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생생하다. 미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직관적인 법의병리학자라 평가 받는 그가 내부인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법의학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토대로 하기에, 그 어떤 소설보다 더욱 놀랍고 흥미롭기도 하다.

저자는 45년간 법의병리학자로 일하면서 9,000건 이상의 부검을 했고 2 5,000건 이상의 죽음을 조사했으며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의문사에 대해 자문해왔다. 그는 이 책에서 진실이 은폐되는 의문의 죽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법의학자의 수가 여전히 부족한 현실과 그 이유 등 현대 법의학 체계의 문제점도 함께 제기하고 있다. 오랜 과정을 거치고,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그 긴 시간 동안의 어려움과 검시관의 평균 연봉은 나머지 의료 분야에 비해 턱없이 낮고, 불규칙적인 근무시간에, 감정적인 트라우마와 질병에의 위험 등... 의사 면허가 있는 법의병리학자를 매년 많이 배출할 수 없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법의병리학자를 과도하게 미화하고, 첨단 기술을 동원한 과학수사가 모든 범죄를 해결할 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이 책이 멋진 점은 바로 이렇게 고스란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멋지게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범죄사건과 현장, 그리고 부검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리얼한 이야기들이 법의학이 진실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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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 허난설헌 시선집
나태주 옮김, 혜강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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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녀가 살던 시기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체계 안에서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했다. 사대부가의 여인으로서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 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녀의 시를 만나 보았다.

이 책에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애신의 마음을 노래한 허난설헌의 <연밥 따기 노래>도 수록되어 있고,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허난설헌의 작품을 고르고 오늘의 말로 옮긴 아름다운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는 집이 장간리 마을에 있어

장간리 길을 오가며 살았었지요.

꽃가지 꺾어 님에게 묻기도 했었죠.

내가 더 예쁜가요, 꽃이 더 예쁜가요?   -P.32 장간리의 노래. 중에서

허난설헌은 생전에 자신의 시집 한 권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녀가 죽은 지 1년 뒤에 동생 허균이 엮어낸 <난설헌집>에 기초하여 그대로 묶지 않고, 마음의 결을 따라 노래하듯 구성하였다.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한시이지만, 나태주 시인의 소담한 문체로 풀어내어 기존의 허난설헌 시집에 비해 조금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허난설헌의 시들은 조선 명문가 여인네의 시로 보기에는 너무도 자유분방하고 호방하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자식을 잃은 여인의 불행과 통곡을 담고 있기도 하고, 양반의 삶과는 너무도 다른 장사꾼의 삶을 읊기도 한다. 때로는 출정하는 병사들의 기백을 노래하기도 하고, 규방 여인들의 기다림을 그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계절의 냄새까지 나는 듯한 풍경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를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P.155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 중에서

책의 후반부에는 한시 원문이 수록되어 있어 이해를 돕고 있으며, 각각의 시 마다 그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더욱 정취가 있다. 마치 한 폭의 시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은은한 꽃송이들과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은 허난설헌의 시를 더욱 오롯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허난설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고, 어렵게 출산한 아이를 잃고 비통의 나락에 빠지기도 했으며, 그녀 역시 이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자신이 지은 시를 모두 불살라 달라는 유언까지 남기고 말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그녀의 시들을, 오랜 시간이 흘러 여전히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인 것 같다. 조선 여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스며 들어 있는 시들이,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가슴이 저릿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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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어요, 이렇게 좋은데 - 시시한 행복이 체질이다 보니
김유래 지음 / 레드박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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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환상을 사랑한다. 확실히 나는 발리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 것 같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되게 해줄 것 같은 환상. 동화 속 어린 아이처럼 유치함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분홍빛 풍선껌 처럼 퓨우우웅 부풀어가는 환상이 이루어지길 전심을 다해 바란다.  p.110

풀빌라, 수영장, 울창한 숲이 있는 작은 마을, 힐링과 휴식 떠올리면 아마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여행지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다. 온갖 숲의 정령이 살고 있는 마법의 섬 발리의 우붓. 저자는 너무도 지쳐 있었던 어느 날 출근길에 길바닥에 주저앉고 나서야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갑상생 호르몬 수치가 일반인에 비해 여덟 배나 높다는 진단을 받고는 회사에 사표를 낸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있는 우붓으로 떠난다. 뭘 하든 걱정이 앞서고 긴장하는 소심한 성격에 서른 살 넘도록 혼자서는 잠을 못 자는 겁 많은 여자가 혼자 우붓으로 떠나 한 달을 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녀가 우붓에서 어떻게 몸과 마음의 치유를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요가하고 명상하는 하루가 당연한 곳, 명품 가방에 높은 구두를 신으면 오히려 부끄러워질 수 있는 곳, 휴대전화보다는 노트와 펜, 요가매트가 더 어울리는 곳, 그렇게 그 동안 소유하고 집착해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는 곳.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그곳. 우붓은 울창한 숲과 야성미가 흐르는 강을 끼고 있어 야생동물의 낙원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명상과 요가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랑 받는 곳이며 발리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말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뭔가 치유가 될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라는 단어는 나를 묘하게 설레게 한다. ''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두 단어가 합쳐진 '여름밤'은 그 합만큼 더 설렌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여름날의 밤이면 뭔가 신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p.233

사실 낯가리고, 겁 많고, 길눈 어두운 사람이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언젠가 나도 그녀처럼 혼자 한번 떠나보고 싶다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 같은 것이 생겼다. 그녀의 말처럼 '다녀온다고 인생이 바뀌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 소소하고, 누군가에는 시시해 보이는 행복이라도, 그 작은 것으로 하루를 또 버티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해외 여행을 주로 도심으로만 다닌 편이었는데, 이런 곳이라면 그 동안의 여행과는 또 다른 에너지를 내게 줄 수 있을 것 같아 발리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무슨 일이든 그럴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대체 이토록 쉬운 거였는데 왜 그리 어려웠을까 싶으니 말이다. 저자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일들을 하면서, 그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나쁜 것과 아픈 것들을 날려버린다. 자유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토록 쉬운 거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소풍 가는 것처럼, 혹은 여행처럼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인생은 원치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내몰고는 한다. 원하지 않아도,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수많은 현실적 제약과,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가끔은 머리보다 마음의 편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바로 이 책 속 그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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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엔 조그만 사랑이 반짝이누나
나태주 엮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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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시를 잘 모르는 이들도 모두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그 시를 쓴 시인 나태주. 그가 '사랑하고 있기에 사랑 받았던' 106편을 가려 뽑아 만든 시집이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을 즐겨 보는 이들이 많을 텐데.. 극중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이 더욱 깊어짐을 확인하는 장면에 등장했던 시가 있었다. 허난설헌의 <연밥 따기 노래>라는 시로 연모하는 이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연밥을 던지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그려진 시로 이번 시집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은 이 책에 대해 '가슴속에 숨어 있던 작은 사랑이 반짝일 수 있도록 빛나는 순간들을 골라 담았다'라고 했다. 기존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들과 공개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 10편이 더해져 수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전시가, 허난설헌의 한시에서 김영랑과 나희덕의 시, 그리고 한용운, 피천득, 황지우, 안도현, 김소월, 신경림, 윤동주, 백석 등 시대를 넘나드는 시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사랑 가운데서도 사랑의 시로 만나요. 여기에 드리는 시가 바로 그런 시들이에요.”

두근거리는 설레임을 가득 담은 연서 같은 시,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난 뒤 느끼는 쓸쓸함과 애절함을 노래하는 시, 이별의 아픔을 보여주는 시 등등... 사랑과 관련되어 있는 거의 모든 시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현대 시뿐만이 아니라 오래 전 고전 시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점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은 감정을 노래하고 있어 여전히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그 시대 특유의 정취와 깊이가 묻어나서 시에서 특별한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혼자서도 노래하고 싶은 밤입니다

누군가의 길고 긴 이야기

실연당한 이야기라도

듣고 또 듣고 싶은 밤입니다

당신, 없는 밤입니다

                                  -나태주 '봄밤' 중에서

사실 처음에는 시집인데 두툼한 페이지의 양장본이라 조금 낯설었다. 대부분의 시집들이 작은 판형에 얇고 가벼웠으니 말이다. 이 책은 매 페이지마다 시와 함께 오른쪽 페이지를 비워두고 있다. 읽기에 좋은 시는 쓰기에도 좋을 것이라는 마음에, 손으로 옮겨 적을 페이지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필사에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소설들은 그 분량 때문에 시작하지 못했던 이들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

사랑때문에 잠 못드는 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별로 받은 상처에 위로가 필요하다면, 잊고 있었던 그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을 다시 한번 찾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예쁜 색감의 빈 페이지에다 시를 옮겨 적다보면 필사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뭉클한 감정이 고스란히 반짝거리는 순간으로 찾아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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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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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의 규칙은 야쿠자 세계의 규칙과 같아. 쉽게 말해서 운동선수들처럼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다고 보면 돼. 선배의 터무니없는 설교나 기합도 묵묵히 견뎌야 하는데 거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야쿠자는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살아. 두목이 희다고 하면 까마귀도 흰 거야.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p.22~23

이야기의 배경은 1988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 전의 암흑천지 히로시마, 현재 구레하라 동부서의 회의실은 70명 가까운 수사관들이 집결해 폭력단 항쟁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 중이다. 권총 불법 소지, 대마와 각성제 사용 및 매매, 불법 도박 등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폭력단 간의 항쟁 사건이 빈발하는 등 관내 조직 폭력 범죄가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때문에 치안이 불안해지고 선량한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었는데, 실제로 얼마 전 일반 시민이 발포 사건에 휘말려 죽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구레하라 동부서는 폭력단 관련 사무소의 일제 수색을 계획하고 있었고, 지금 막 최종 협의를 마친 참이었다. 수사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회의실 뒤쪽에 한 남자가 느긋하게 앉아 있다. 바로 오가미 쇼고, 구레하라 동부서의 수사 2과 폭력단계 반장이다. 실력은 뛰어 나지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명 높은 독종 형사로, 수사를 위해서라면 불법, 탈법, 위법도 서슴지 않았고, 야쿠자와 유착한다는 검은 소문이 끊이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이번에 동부서로 발령을 받은 히오카 슈이치로 대졸에 파출소에서 1, 기동대에서 2년 근무했고, 이번에 형사로 처음 일을 하게 된 신참이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어 폭력단 간의 이권 다툼에서 비롯된 총격전, 폭행, 살인 미수 사건 등을 수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폭력단 계열 금융회사 직원의 실종 사건을 시작으로, 폭력단 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언제 번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다. 일본의 야쿠자는 이탈리아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와 더불어 세계 3대 조직 폭력단으로 불린다. 그들은 광범위한 해외 조직망과 수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며 다층화, 기업화하고 있는 국제적 범죄 조직이기도 하다. 유즈키 유코는사회 뒷면에 자리 한 음지의 정의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야쿠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의리 없는 전쟁>이라는 영화에서 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여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선 굵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드보일드 누아르로 제대로 그려내고 있어 놀라웠다.

 

"당신, 미쳤어......" 입술이 덜덜 떨렸다.

오가미가 웅크리고 앉으며 요시다의 얼굴을 보았다.

"맞아, 난 미쳤어. 수사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거야. 네가 불지 않더라도 나중에 가코무라에게 네가 밀고했다고 일러바칠 수도 있어."    p.206

수많은 폭력단 관련 사건을 해결했으며, 표창도 숱하게 받았고, 100회에 달하는 수상 경력 또한 현경에서는 현역 최고라는 오가미 형사. 파트너인 히오카의 눈에는 그가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늑대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가미의 수사에 대한 열정은 굉장하다. 당시 공안이나 폭력단 형사라면 폭력 조직 내에 끄나풀이라고 불리는 내통자를 두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끄나풀을 잘 이용해 범죄 조직과 맞서 싸우고 사건을 해결한다. 하지만 범죄 조직과 경찰 조직의 균형이 깨지면, 언론이나 세상 사람들은 폭력단과 경찰의 유착 문제를 들먹이며 비난을 퍼붓는다. 오가미를 둘러싼 야쿠자와의 유착 관계에 대한 의혹 또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이야기가 히오카의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오가미의 행동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가미의 속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보여지는 것은 그가 야쿠자 세계의 상도를 지키는 온건한 폭력 조직 오다니구미 편에 서서 암흑세계의 위계질서 확립을 하려는 모습인데, 이 또한 현실은 경찰과 야쿠자의 유착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탄탄한 구성과 정교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의 설정 자체는 사실 특별하지 않다. 베테랑 형사와 신입 형사의 파트너 구도, 경찰과 야쿠자와의 관계, 그리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진 않겠지만 후반부에 밝혀지는 그것까지... 느와르 장르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의 깊이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정교한 이야기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어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21세기 야쿠자 영화의 신경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 자체도 장면 장면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스크린에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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