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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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목사님이 화재 현장에서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금식 탓이 클 거예요. 장로님 말씀대로 목사님은 그날부터 계속 금식하면서 기도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교회에 머무르는 날도 많았고.... 주일예배 설교할 때도 보니까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 좀 조마조마했거든요. 저러다가 쓰러지고 말지, 저러다가 큰 병 나고 말지... 제가 그만두시라고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그 와중에 화재가 나버린 거예요.  P.61

한적한 시골 마을 목양면의 한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여전히 화재가 발생한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이야기는 화재의 원인을 추리하는 마을 사람들 각각의 증언을 통해서 진행된다. 다들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 주관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들과 경험한 일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거라 모두 제각각이다. 하지만 분명 화재는 인위적인 사고로 보이고, 누군가 일부러 그랬다면 과연 누가 방화 사건을 저지른 것일까. 열두 명의 서술자들은 마치 경찰에게 취조를 당해 자백을 하는 듯한 느낌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는데, 결국 화재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만,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방화를 누가 일으켰는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번 화재로 사망한 이들 중에 지하 1층 교육관에 혼자 있었던 최요한 목사도 있었다. 그는 이 교회를 세운 최근직 장로의 아들이다. 그리고 최근직 장로는 젊은 시절 사고로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극도의 절망 속에 스스로 생명을 놓을 결심을 했으나 하나님을 만난 이후 제2의 삶을 사는 인물이다. 누군가는 바로 그 최요한 목사가 스스로 불을 냈다고 하고, 누군가는 당시 금식 중이어서 화재 현장에서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했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그가 모범생 스타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혼자 속으로 삼키고 기도하는 그런 성격이라고, 또 다른 이는 목사를 그 새끼라 부르며 애 엄마에게 푸념을 늘어 놓으며 자신의 언니에게 수작을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목양면 방화 사건의 숨겨진 전말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그 목사가 그런 거라죠? 그 새끼가 불낸 거라죠? 내가 그 새끼가 무슨 큰 사고 칠 거 같아서 불안 불안했는데.... 지난달에도 언니한테 이사가자고 했는데... 씨발, 추석만 지나면 알아보려고 했는데... 좆같은 새끼... 죽으려면 지혼자 뒤질 것이지....

진정이 안 되니까 이러는 거 아니에요.... 뭘 아직 몰라요? 조사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불이 거기에서부터 난 거라는데.... 어후, 나 진짜 속에서 열불이 뻗쳐서.... 진짜로 막 여기가, 내 가슴이, 막 다 타버릴 거 같다구요!    P.65~66

이번 이기호 작가의 신작에는 '욥기 43'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기호 작가는 꽤 오래 전부터 <욥기>의 후속편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읽은 구약 속 욥은, 자신의 자식들이 고통 속에서 죽은 뒤에도 여호화의 이름을 찬송하는 이상한 아버지였기에, 젊었을 때도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된 후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좀처럼 욥이라는 인물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전체 42장으로 이루어진 성경 「욥기」의 번외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욥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과연 그는 자식을 두 번이나 잃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하나님의 뒤로 숨어버린 현실의 욥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이 소설은 총 열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모두 다른 열두 명의 서술자가 등장하여 방화 사건의 원인에 대해 추리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열두 명의 증언자 중 하나로 하나님을 세우고, 신성이 아닌 하나님의 인성을 드러내며 절대 신의 존재를 희화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기호 특유의 유쾌함이 종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술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고 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그 다섯 번째 작품은 이기호 작가의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이다.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편혜영 작가를 시작으로 박형서, 김경욱, 윤성희 작가에 이어 이기호 작가의 작품까지 출간이 되었다. 이 시리즈는 매월 25일 출간되는 월간 핀이기도 한데, 이후에 이어질 작가들의 라인업 또한 매우 기대감을 갖게 한다. 정이현, 정용준, 김금희, 김성중, 손보미 등...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기도 해서 핀시리즈로 만나볼 그들의 작품이 손꼽아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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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빵 1
보담 글.그림 / 재미주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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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 함께은행 왼쪽 골목으로 들어와서 빨간 벽돌집을 지나면 꽃집이 하나 있어요.

꽃집 왼편으로 파란 대문이 보일 때가지 걸어오면 근방으로 은혜미용실이 나오죠.

그곳 2층에 '옥탑빵'이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옥탑빵입니다.

얼마 전에 그야말로 '인생 몽블랑'이라고 외치고 싶었던,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 아주 우연히 갔었다. 원래 그날 일정이던 장소에 갑자기 못 가게 되어서, 거기까지 간 김에 근처에 있는 다른 곳을 찾아보다 무심코 발견한 곳이었다. 골목 골목을 지나 주택가 안에 있는, 간판도 제대로 달려 있지 않아서 지나갔다 되돌아 오게 만들었던 가게였는데, 그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그곳에 있던 디저트의 수준은 놀라웠다. 아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옥탑빵' 역시 그런 케이크 맛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중한 사람들과 만나면 어디서 밥을 먹을까. 보다 어디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을까.를 더 고민한다. 공들여 잘 만든,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예쁜 디저트들을 먹는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고민과 시름을 모두 다 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받게 되는 작지만 달콤한 위로이기도 하고 말이다. 보담 작가의 <옥탑빵>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뭉클한 작품이다.

이 책은 다음 랭킹전 1위에 빛나는 웹툰 <옥탑빵>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저자 역시 극중 지영이처럼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2년 전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빵집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기에, 꿈꾸던 빵집으로 그림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렇게 <옥탑빵>이라는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저자가 빵을 좋아하는 만큼 심플한 그림 속에서도 포근한 빵 냄새가 물씬 나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지영은 옥탑빵을 열기 전 작은 회사에서 일할 때 퇴근 후 사 먹던 케이크 한 조각이 소소한 행복이었다. 빡빡한 업무에 지쳐 집에 가는 길에 씻을 힘도 없다, 눈 감았다 뜨면 집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남아 있는 케이크를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그 날을 버틸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옥탑빵을 연 지금, 자신의 그랬던 마음을 담아 '오늘의 케이크'를 만든다. 계절과 재료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날의 기분이나 먹고 싶은 케이크로 매일매일 새로운 '오늘의 케이크'를 만든다.

인생에 답이 어디 있어. 그냥 각자의 삶을 사는 거지.

사는데 정해진 답은 없잖아.

그러니까 너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p.95

누군가는 담백한 통밀빵을 좋아하고, 누구는 달콤한 딸기 케이크를 좋아하고, 또 누구는 향긋한 얼그레이크를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빵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누구나 입맛이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르다. 그러니 인생엔 정해진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물론 괜찮아, 잘하고 있다. 스스로 위로하다가도,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되고, 다독이던 마음마저 지치게 마련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달콤한 케이크이다. 이렇게 맛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싶은 생각이 들만큼 그렇게 잘 만든 케이크. 고소한 빵 냄새, 향긋한 커피 향, 신선한 우유,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크림...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이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견디게 만들어 준다.

 

서른 셋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작은 빵집을 차린 지영,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점점 꿈은 멀어지고,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데 급급한 혜수, 6년이라는 긴 시간의 연애 때문에 질질 끌려온 은혜... 과감한 결정을 하더라도, 주어진 현실 안에서 어떻게든 버틸 방법을 찾더라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더라도... 누구의 선택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라는 의심이 매 순간 들더라도, 자신의 선택에 맞는 책임을 질 수 있는 건 오로지 스스로밖에 없다. 그러니 남들이 하는 말보다는 자신이 하는 말에 더 귀 기울여 보자. 그래야 힘들어도 웃는 날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만화 속 옥탑빵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꼭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다.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꿈과 현실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답이 안 나올 때, 그럴 때 당신만의 옥탑빵을 찾아 보자. 빵 냄새가 솔솔 풍기는 듯한 따뜻한 그림과 이야기를 통해 잠시 쉬어가자. 당신은 지금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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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티벳여우 스나오카 씨
큐라이스 지음, 손나영 옮김 / 재미주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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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큐라이스의 네 컷 만화친절한 티벳여우의 단행본이다.‘ 티벳여우 스나오카 씨는 외모는 험상궂지만 행동은 친절하게, 겉으로는 무심한 듯하지만 사실 매우 다정한츤데레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캐릭터이다.

'츤데레'라는 말은 일본의 인터넷 유행어로, 새침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일본어츤츤과 부끄러움을 나타내는데레데레가 합성된 단어이다. 보통 차가운 모습과 따뜻한 모습이 공존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 혹은 처음에는 퉁명스럽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살갑게 구는 사람을 나타내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무심한 듯 다정한, 겉으로는 무뚝뚝하더라도 뒤에서는 세심하게 배려하는 남자들에게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이 말은 최고의 칭찬이기도 하다.

 

 

실제로 티벳여우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덥수룩한 털, 무념의 눈빛, 험상궂은 표정으로 정말 딱 만화 속 스나오카 씨와 똑같이 생겼다. 외모는 늑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행동은 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여우이다. 극중 스나오카 씨는 딸을 홀로 키우는 싱글 대디로 인상은 매우 험상궂고 절대 웃지 않을 것처럼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친절하다. 영화관에서 뒷좌석의 아이를 위해 앉은 자세를 낮춰 주기도 하고, 상사에게 혼나고 의기소침해진 직원에게 스윽 달콤한 마들렌을 건네주기도 하며, 부하 직원이 화장실에 간 사이 몰래 계산을 하고, 차에 갇힌 아기 토끼를 구해주고, 날치기를 쫓아가 가방을 찾아 주는 등..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그야말로 개념 있는 캐릭터이다.

홀로 딸을 키우며 마음 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레시피를 연구해 요리를 하고, 도자기 만드는 솜씨도 수준급이며 못하는 것이 없는 사기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생색내지 않고 무심한 듯 척척 도움을 주는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험상궂게 생긴 동물이 무척 친절하다면?'이라는 생각에서 스나오카 씨가 탄생했다고 큐라이스 작가는 말한다. 큐라이스의 작품은 시무룩한 표정이 매력인 뚱뚱하고 소심한 고양이 <네코노히>를 통해서 먼저 알게 되었는데, 네코노히와 스나오카 씨 모두 독특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힐링을 안겨 주는 특별한 캐릭터이다.

 

스나오카 씨의 표정도 거의 시종일관 비슷하고, 짧은 만화 안에서 대사라고 할 만한 것도 몇 줄 안 되지만 굉장히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보고 또 보고 싶은 만화가 아닐 수 없다. 요즘 가장 트렌디한 '츤데레'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라 이삽십대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사십대 아저씨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단행본에서는 세상에 아직 공개하지 않은 특별한 에피소드와 뒷얘기도 만나볼 수 있으니 온라인상에서 먼저 만났더라도 책으로 다시 한번 읽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티벳여우를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라는 무념무상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친절한 티벳여우 스나오카 씨를 만나 보길. 일본 트위터를 뒤집어놓은 화제의 만화답게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성의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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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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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외부인은 경비원을 거쳐야만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거든요. 분명 별일 아닐 거예요.” 마치 이 세상에 나쁜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투였다. 케이트의 아빠가 말했을 법한, 어리석지만 선의에서 비롯된 단언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 누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은 늘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늘 최악의 결론을 도출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 결론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23

런던에 사는 케이트는 보스톤에 사는 육촌 코빈과 6개월간 집을 바꿔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는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공황 상태에 빠진다. 누군가와 서로 집을 바꿔서 지내기로 한 계획 자체가 갑자기 최악의 실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그녀가 택시 안에서 공황 발작과 공포를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집착이 심했던 전남자친구 조지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이으로 인해 불안 장애와 신경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지는 케이트를 찾아와 그녀를 벽장에 가두고는 자살했다. 그녀는 벽장 속에서 이틀이나 지나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고, 그 후로 그녀의 마음은 좁은 벽장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런 케이트였기에 미국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 삶을 살 수 있는 이번 기회는 굉장한 도전이기도 했다. 과연 그녀는 이 낯선 도시에서 신경증과 불안 장애 증상을 극복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원제는 'Her Every Fear'로 국내 번역본 제목인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와는 어떻게 보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의미로 읽힌다. 가끔 이렇게 원제와 전혀 상관 없는 제목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생뚱 맞은 오역인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처럼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반대로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제목은 실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내용 상의 설정인데다 문장 그 자체로도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작품의 타이틀로 전혀 손색이 없거니와, 사실 다 읽고 나면 이 제목이 완벽한 맥거핀의 일종이라는 점 때문에 더 멋지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바로 이 제목 때문에 범인을 유추하는데 커다란 함정이 만들어지고, 초반 스토리의 흐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실제로 꽤 중요한 단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굉장히 센스 있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사귀었고, 둘만의 세상에서 안전했다. 어쨌든 케이트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평생 언제든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살았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데려간 상담소에서 심리치료사가 가장 무서운 것을 세 가지만 말해보라고 하자 케이트는 울음을 터뜨렸다. 낯선 사람, 거미, 가스 유출, 학교 일진, 보이지 않는 세균, 험한 날씨 중에서 세 개만 고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두의 예상대로 불안 장애 진단을 받았고, 또한 공상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진단도 받았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했다.    p.112~113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항상 생각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로맨틱 홀리데이>라는 작품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주는 낯설지만 아득하고 설레이는 공간에 환상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은 L.A에서 잘 나가는 영화예고편 제작회사 사장인 아만다와 영국 전원의 예쁜 오두막집에 살면서 웨딩 칼럼을 연재하는 아이리스. 6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두 여자가 홈 익스체인지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2주의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서로의 집을 바꿔 생활하기로 한다. L.A에 있는 화려하고 최신식의 커다란 집과 영국에 있는 벽난로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한 오두막집이 낯선 공간이라는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새로운 공간이라는 설레이는 느낌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피터 스완슨의 신작에서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나라에 있는 두 사람이 집을 교환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작품에서는 낯선 공간이 주는 무서움과 불편함을 극대화시켜 색다른 공포를 자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오싹함을 안겨 주고 있다.

피터 스완슨은 데뷔작인 <아낌없이 뺏는 사랑>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비밀 가득한 악녀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 같은 선택을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까라는 걸 보여 줬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어차피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라는 살인의 당위성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그려내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었다. 사랑의 다른 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답게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그 동안 옳다고 믿어 왔던 통념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했었다. 이번 작품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에서는 여성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집착, 언어폭력,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 등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그려 내며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 본다. 구성과 플롯, 반전 등 모든 면에서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당장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생하고,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피터 스완슨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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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너를 찾아서
케리 론스데일 지음, 박산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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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혼식 날, 내 약혼자 제임스는 관에 담겨 교회에 도착했다.

나는 오랫동안 제임스가 내게만 짓는 미소를 머금은 채 제단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꿈을 꿔왔다.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매번 설레서 아찔해지곤 했다. 하지만 내 단짝 친구이자 첫사랑이며 유일한 사랑인 그를 향해 걸어가는 대신 나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P.11

이야기는 약혼자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원래 그 날은 에이미와 제임스의 결혼식 날이었다. 결혼식 하객으로 축하를 해주었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젊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그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 결혼식이 너의 장례식으로 바뀐 그 날, 나이 지긋한 어떤 여자가 다가와 에이미에게 말을 건넨다.

"난 제임스 때문에 왔어요. 그의 사고에 대한 정보가 있어요."

 

제임스는 멕시코로 나흘 정도 걸리는 짧은 출장을 갔었다. 고객 접대용 낚시를 하고 저녁을 먹으며 계약에 대한 협상을 한 뒤 돌아올 거라던 그는 몇 주 동안 실종 상태로 있었고, 그러다 그의 시체가 해변으로 밀려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미 관 속에 들어간 그의 장례를 치르고, 검은 영구차가 떠나고 있는데, 웬 낯선 여자가 등장해 제임스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알 수 없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만약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의 얼굴에서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지구 끝까지 찾아보겠죠."   p.203

에이미와 제임스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오며, 단짝 친구에서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한 사이였다. 에이미에게 제임스는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고, 그가 사라진 지금 마치 세상이 끝나 버린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게다가 부모님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물려 받아 인수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재정적인 이유로 부모님은 레스토랑을 처분해 버리고 만다. 보통은 의문의 여자가 등장해 죽은 약혼자가 사실은 죽지 않았다고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러 가는 과정이 주요 플롯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충격적인 첫 장면 이후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제임스 없이,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하는 에이미의 삶에 주목한다. 에이미는 빚더미에 오른 부모님의 레스토랑 대신 자신만의 카페를 개업하고,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그녀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사라진, 혹은 죽은 연인의 행방을 뒤쫓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야 진행되는 스토리이다.

덕분에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는 로맨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임스와 에이미가 어린 시절부터 사랑에 빠지고 함께 했던 순간들이 계속 교차 진행되고, 자신만의 카페를 개업해서 일을 진행시키고, 사진작가 이언을 만나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현재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감정의 결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특히나 반전 이후, 에이미가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은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에이미와 제임스, 그리고 에이미와 이언이 보여주는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들은 잔잔하면서도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놀라우면서도 뭉클하고, 담담하면서도 심금을 울린다. 올 가을, 가슴 한 켠이 빈 듯한 느낌이 들 거나 옆구리가 허전해서 외로울 때, 이들의 지독한 사랑의 여정을 만나 보자. 오글거리지 않는 러브 스토리, 뭉클한 드라마가 있는 미스터리로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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