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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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제가 사직을 결심한 것은 마나미의 죽음이 원인입니다. 하지만 만약 마나미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다면,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도, 그리고 제가 저지른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교사직을 계속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직하는가?

마나미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p.28

"내 딸을 죽인 사람은 바로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충격적인 고백과 함께 범인인 열세 살의 중학생들에게 믿을 수 없는 가혹한 복수를 실행하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0년 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당시 인상적이었던, 미나토 가나에의 강렬한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번에 한국어판 출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심하게 번역을 다듬고, 세련된 디자인과 한결 가벼운 장정으로 독서의 맛을 배가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이었다. 여교사 유코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퇴직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1학년 B반 여러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나의 마지막 학생이라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그녀는 딸 마나미를 학교 수영장에서 익사 사고로 잃었다. 미혼모로 혼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유아원에 다니는 마나미를 학교에 잠시 데려다 두곤 했었는데, 어쩌다 그런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나직하고 담담한 어조로 시작된 이야기는 충격적인 고백으로 이어진다. 마나미가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의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다고 밝힌 것이다. 범인이 바로 우리 반에 있다는 말에 학생들은 술렁대지만, 유코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범인인 학생들이 생명의 무게와 소중함을 알았으면 한다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준비한 복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충격적인 복수였다.

 

살인이 범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물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물체가 소멸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p.223

충격적인 교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각 장 별로 다른 화자가 등장해 일인칭 고백체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피해자와 가족들, 가해자와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사람들. 모든 화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기에, 그 과정은 매우 잔혹하고 불쾌하고, 그러면서도 슬프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가해자와 피해자를 비롯해서 관계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지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매 장마다 충격적인 전개로 독자들을 당황시킨다. 자식이 살해당했다면 경찰에 진상을 알리고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어른의 의무이지만,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로서 범인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 아닐까. 더구나 범인이 열세 살 어린 소년이라면,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일까.

얼마 전에 자신의 자녀가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한 교사가 가해자로 의심되는 학생을 3년간 수차례 괴롭혀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교사 A씨는 자신의 아이를 때리고 왕따 시킨 10 B군을 위협하고, 그를 학교폭력 가해자로 의심해 학교와 경찰 등에 신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폭력대책위원회에서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나왔고, 경찰에서도 불처분 결정이 나왔다고. 그렇다면 부모인 교사 A씨가 자신의 자녀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재판부는 피고인이 현직 교사이면서도 자녀의 입장만 생각하고 B군도 보호받아야 할 아동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 행동 때문에 B군이 입은 정신적 고통이 크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과연 가해 학생이 스트레스로 응급실행을 한 것이 아동학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하는 일일까. 역시나 가해자의 인권만 중시하는 사법부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물론 기사에서 보여지는 사실이 전부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교사로서의 윤리보다 아이를 잃은 한 부모로서의 분노와 절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무책임한 청소년 범죄와 그것을 처벌할 수 없는 제도적 허점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면 아마도 더욱 그럴 것이다. 소년 범죄, 등교거부, 왕따, 사적복수, 에이즈, 미혼모, 존속살해 등 어느 작품보다 충격적인 소재로 인해 편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분명 아니지만, 그럼에도 대단히 잘 쓰인 문제작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압도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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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2 - 이게 사랑일까
안나 토드 지음, 강효준 옮김 / 콤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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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넌 날 미치게 만들어. 글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으로 만든다고! 널 사랑하냐고? 그렇게 묻는 그 뻔뻔함은 대체 뭐야? 그딴 걸 왜 물어봐? 내가 어쩌다가 한 번 말했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이미 말했잖아. 근데 왜 또 물어보는데? 거절당하는 걸 즐기는 모양이지? 그래서 내 주위에서 빙빙 도는 거잖아, 아니야?"  p.60

이 작품은 내숭없이 욕망에 충실한 사랑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는, 가장 현대적인 모습의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낯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연애의 과정들은 뻔한 것 같으면서도 색다르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 설레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1권을 덮자 마자 이어지는 2권의 내용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사실 2권으로 완간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페이지의 3권으로 이어진다는 문구에 실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사와 하딘의 연애 스토리는 너무도 흥미진진해서.. 3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이어지더라도 계속 찾아서 읽게 될 것 같다.

전편에서 이제 막 대학 신입생인 테사의 파란만장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었다. 2년 사귄 연하 남친과 키스 이상은 해본 적 없는 철벽 엄친딸이었던 그녀가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상반신을 뒤덮은 타투와 입술 피어싱을 한 건방지고 비밀스러운 남자 하딘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이런 모습이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테사의 행동은 스스로를 당황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딘은 점점 더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진다. 하지만 하딘은 만나는 여자마다 건드리지만 연애는 절대 하지 않는 나쁜 남자였고, 테사는 조신하고 순수하고 모범적인 여자였다. 애초에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면서 조금씩 로맨스를 쌓아 가는 과정은 비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닥쳤다. 이해가 잘 안 된다.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과 친해지려 내가 쏟아 부었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나는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하딘은 왜 저기 서 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p.347~348

2권에서는 대학 총장인 하딘의 아빠가 랜던의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되고, 집에 얼굴도 잘 비추지 않던 하딘은 테사 덕분에 부모님의 결혼식에 참석도 하고, 집에서 자고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반면 엄마의 착한 딸이었던 테사는 남자친구 노아와 헤어지고, 하딘과 함께 하기 위해 기숙사를 나오게 되면서 엄마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다. 결국 테사의 엄마는 하딘을 계속 만난다면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학비며 기숙사 비용도 전혀 지원하지 않겠다고 딸을 협박하기에 이르고, 테사는 엄마가 지금 내가 행복해지려는 걸 막고 있다고, 내 일은 알아서 할 테니 참견하지 말라고 맞서게 된다. 아빠가 집을 나간 후 8년 동안 엄마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며 외롭게 살아왔다는 건 알지만,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한다고,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나를 통해 보상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테사는 생각한다. 하딘을 만나기 전의 그녀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그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딘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테사를 사랑한다. 그들은 만난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됐고, 그나마도 매번 싸우기만 했지만, 하딘은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서 함께 살자고 한다. 테사는 결혼하기 전까진 누군가와 동거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지만, 그럼에도 하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러기로 한다. 결혼은 정말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말하는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 테사, 그녀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출판사에서 꿈에 그리던 인턴십을 하게 되고, 매력적인 남자 친구가 생겼지만,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스펙타클하다. 하딘은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녀를 '친구'라고 남들에게 소개했으면서, 지금은 엄마를 보러 영국에 가자고 하는 등 여전히 종잡을 수가 없는 모습을 보이고, 뜨겁게 사랑하다가도 별 것 아닌 일로 투닥거리는 모습이야 대부분의 연인이 비슷한 모습 아니겠나 싶지만... 2권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테사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 과연 그녀와 하딘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3권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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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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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도 완벽주의를 지향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이 다치는 게 싫어서 누군가에 대한 호감을 접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서 새로운 도전을 미룬다. 노력도 가능성이 보여야 하는 거라는 생각, 이제 와서 용써봤자 소용없다는 생각, 그래도 한번쯤은 시도해봐야겠다 생각은 하면서도 어느새 온갖 안전하지 않은 결말들에 사로잡혀 조용히 마음을 접는다. 그 과정은 참는 것만 잘하는 사람, 모든 일에 시큰둥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p.47

우리는 살아 오면서 평생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어른들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매사에 노력해야 하고,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것이고,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며, 좋은 집에 살게 될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살아 왔다. 그런데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에세이의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순간 멈칫하게 된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라든가,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살고 싶어> 혹은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라니 말이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말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들은 알고 있다. 노력이란 것이 항상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애초에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해도 되지 않을까.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의 저자 김신회는 일 년 반 전쯤, 갑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불편함을 느끼게 됐고, 그 손으로는 일을 하는 것도 무리여서 어쩔 수 없이 일을 쉬어야 했다고 한다. 덜컥 무기한 휴가가 주어졌지만 그녀는 쉬는 법을 몰랐다. 성과는 없어도 끊임없이 움직여대던 일중독자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열정과 노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대의 경우에는 뭔가 도태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 그녀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뭔가 일을 만들어 하거나,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산다. 쉬는 날에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고, 진짜 휴식이 뭔지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열심히 사는 사람밖에 없는데, 정작 자기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뭘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란 말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유 없는 일에 화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사 정당한 사람은 못 되더라도, 우리의 분노는 정당하다. 우리는 종종 나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기분은 나쁜 게 아니다. 설령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일단 그렇게 우기고 본다. 그래야 이 험준한 삶을 버텨낼 수 있지 않겠는가.    p.160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불안해서 끊임없이 자책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그러니까 편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누구보다 나에게 야박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기댈 데 없는 나를 제대로 돌보는 법을 하나씩 실행해나가면서 '나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알려준다. 그녀가 들려주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 바로 실천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휴일엔 맥모닝'. 아무도 쉬라는 말을 안 했어도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는 하루의 시작에는 세수도 건너뛴 채 제일 먼저 냉장고로 향한다. 그러고는 맥주 한 캔을 골라 냉장고 문 앞에서 벌컥벌컥 마시는 거다. 시원한 맥주 줄기가 혀를 적시고, 시린 이를 간질이다 식도를 통해 배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비어 있던 배가 맥주 딱 300cc만큼 불러온다. 그녀는 이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궁극의 해방감'이라고 부른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물 대신, 밥 대신 먹는 맥주 한 캔의 행복. , 생각만해도 기분이 시원해진다. 이렇게 쉬는 날에는 휴일인 만큼 최대한 마음 가는 대로, 게으른 하루를 보내 보면 어떨까.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그 어떤 생산적인 일을 도모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남들이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할 까봐, 이러는 동안 뒤처질 까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불안해했다. 하지만 눈 뜨자마자 맥주를 마시고, 종일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허투루 하루를 한번 보내보자. 주어진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사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세상을 잘만 굴러 간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까봐 전전긍긍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나는 나, 세상에 내가 있어야 타인도 존재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동안 나 자신에게 너무도 인색하게 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나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배우게 되자, 나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노력을 하든 안 하든 나는 계속 나일 것이고, 어차피 세상에 혼자라 해도 내 옆에 나는 남는다. 대단한 걸 이루지 않아도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며, 앞으로도 그 쓸모를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 생각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견디게 해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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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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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말이 맞았다. 동희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나와 있는 지금도, 뭐가 하나는 쑥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까. 그 커다란 빈 구멍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하면 좀 나아지려나.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고. 체류 기간 2년 동안 잘 생각해봐요."    p.30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그곳에서 살던 동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면 한국 국적은 자동 상실된다고 하니, 그녀는 이곳에서 국적상실 신고를 하든 국적 재취득을 하든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냐고 묻는다. 한국을 떠날 때 왜 떠나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와 비슷한 말을 미국에서도 들었다. 왜 미국에 왔냐고, 왜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왔냐고, 왜 힘들게 정착한 미국을 다시 떠나려고 하느냐고. 동희는 그때마다 단답형의 대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늘 명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유 같았고 모든 것이 이유가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원래 그렇게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대답을 안겨주지 않는다. 사실 어디에 사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극중 동희가 만난 여자의 말처럼 어디에서 죽느냐가 문제일 수도 있겠고, 어디에서 살든 어떤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든 혹은 거기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꾸 경계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삶일 지도 모르겠다. 임재희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국인 이주민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민자의 삶'이라고 하니 제일 먼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 작가가 떠오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했고, 이후 그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그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존재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면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아마도 이민자의 삶이란 그런 모습일 것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그 안에 스며있는 문화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곳에서 그곳의 언어로 생활하고 그곳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확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공허할까. 얼마나 서글플까. 소속감이라는 것이야말로 타인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뭉클한 온도인데 말이다.

어쩌면 엄마가 정작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을 생각하는 시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문득 자신들도 길 위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떠올렸다. 태엽이 감긴 인형들처럼 움직임을 멈춘 적이 없었다. 계속 학교라는 곳을 다녔고, 계속 무언가를 배웠고, 계속 시험이라는 것을 치렀고, 계속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만났다. 부모의 갈등을, 병을, 상처를, 분노를 헤아릴 여유도 없이 마주치고 흡수했다. 언제부턴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오고 있었고,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p.236

'라스트 북스토어'에서 동생 부부가 사는 미국에 여든을 훌쩍 넘긴 노모를 모시고 다니러 온 나는 엘에이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헌책방에 간다. 알고 보니 올케는 우울증약을 먹어야만 겨우 일상을 버티는 중이었고, 그런 아내와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는 딸과 이제 대학에 들어간 아들을 키우는 일은 동생에게 만만치 않아 보인다. '천천히 초록'에서 어정쩡하게 미국에서 살다가 어정쩡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사는 나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부모의 흔적을 되짚는 중이다. 그녀는 말한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 한국을 떠나 살다가 되돌아왔냐고 묻지 말라고. 뭔가 실패한 기분이라고. 이민 가서도 비슷한 질문을 숱하게 들었다고. 이제와 한국에서 삶을 다시 살면서 시간의 한 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머리와 다리만 있는 몸으로 사는 느낌, 그런 기분은 대체 어떤 걸까. 그래서 나는 그 지워진 부분이 뭔지 찾기 위해 고향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남편과 이혼한 뒤다른언어를 쓰는 곳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꽃집 여자, 어린 나이에 미국에 입양된 소년, 한국인 엄마를 뒀지만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한 남자 등 한국에 머물러 있지만 한국 사회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이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민자는 '미국으로 간 이민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경계인 혹은 주변인, 세상으로부터 어딘가 배제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어딘가를 떠도는 그들의 삶. 하지만 저자는 극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결국 내가 실존하는 그 곳이라고. 실제로 저자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 스물 한 살 때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대학 생활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미국인과 한국인의 중간에 선경계인’”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영어로 의사소통은 하지만 거기에선 아무런냄새도 나지 않으며, “한국어는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풍경들은 모두 실제 그것을 닮아 있을 것이다. 떠나는 자, 돌아온 자, 머무는 자들이 자신의 근원을 향해가는 여정은 그리하여 쓸쓸하고, 고독하지만, 누구나 상실을 겪어 왔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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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이브스 3 - 5천 년 후, 완결
닐 스티븐슨 지음, 송경아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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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북극 위 높은 곳에서 전체 모습을 '내려다보며') 묘사하듯, 지름이 84,000킬로미터인, 머리카락처럼 얇은 고리가 30억 명의 인구 전부가 사는 세계였다. 그 중심에 잇는 희고 푸른 행성의 지름과 비교하면 대략 일곱 배였다. 그 고리를 이루는 물체들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커 보이겠지만, 고리의 전체 규모에 비교하면 더없이 작은 입자였다. 최대한 가느다란 보석 목걸이, 여인의 목에 걸린 보일까말까 한 백금의 실을 상상해보라. 그런 목걸이를 지름 10미터짜리 완벽한 원으로 만든 다음 그 전체 크기에 비교하면 실이 얼마나 얇을지 그려보라.   p.34

'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달이 폭발했다.' 에서 시작한 <세븐이스트>가 드디어 3부까지 전 권이 출간되었다. 달의 폭발 이후 1년 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에서는 달은 일곱 개의 큰 덩어리와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조각들로 붕괴되었고, 증가하는 유성충돌이 '화이트 스카이'사태로 이어지고, 며칠 뒤 '하드레인' 현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과학자들은 2년 안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장비를 궤도로 쏘아 올려야 했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주선에 인류를 대변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태워 우주로 보낼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달이 붕괴하고 예상대로 2년 후 하드레인이 시작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2부에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인듀어런스 호가 클레프트에 도달하기까지 3년 동안 인구의 대다수는 여러 가지 원인, 즉 우주 방사선, 자살, 암 등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그들이클레프트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무렵 우주에는 단 여덟 명의 생존자만이 남게 된다.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미 폐경기에 접어든 사회학자 루이사를 제외하면 가임기의 인구는 일곱 명, 세븐이브스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유전학 실험실을 이용하여 인류의 재건에 필요한 자원을 보유하고자 한다.

그들 일곱 명의 여자들이 남자 없이 스스로 임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자손을 이을 수 있는 실험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5,000년 후의 이야기가 3부에서 펼쳐진다. 5.000년 후, 이제 우주에는 30억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하드레인에서 살아남은 세븐이브스, 그리고 그들에게서 뻗어 나온 일곱 종족. 각 종족을 대표하는 일곱 명이 비밀리에 소집되고 이들세븐멤버는 지구에서 발견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1권에서 하드레인으로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다이나의 아버지가 지하 깊은 곳에 대피한다고 했었는데, 그들이 생존해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으로 대피했던 이들 역시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천 년 동안 각기 어두운 광산과 깊은 바다 속에서 삶을 영위해온 두 종족은 사회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진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싸움은 방법을 알아서 하는 게 아니야." 타이가 말했다. "결심하기에 달린 거지."

"난 그냥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게 말이지, 5천 년 전 우리 이브들이 내린 결정이 우리 행동을 통제할 때가 있어. 어떨 때는 우리가 무력할 정도지. 너는 뒤로 물러서서 관찰하고 분석하도록 되어 있어."

"당신은 영웅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고요."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p.272

이 작품이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두고, 탄탄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쓴 '하드 SF' 장르이기 때문에, 사실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다소 문체도 다소 딱딱하고, 낯선 용어들과 설정 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인 3권은 상대적으로 매우 잘 읽힌다. 물론 앞선 1권과 2권의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말이다. 닐 스티븐슨은 눈부신 상상력과 천재성으로 인류사를 다시 쓰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행성의 충돌로 시작해 지구가 파괴되고, 세계의 해체와 재건의 시간을 지나 인류의 재탄생이라는 우주 대서사극이 그렇게 만들어 졌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로켓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생물학, 유전공학, 무선전신 및 프로그래밍 언어학, 철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등 방대하지만 검증 가능한 이론들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장점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장벽을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꼭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천체물리학자였던 스티븐 호킹 박사는 “2020년까지 화성과 달에 식민지를 세우고 그곳에 노아의 방주처럼 보관 시설을 세워 인류가 살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소행성 충돌의 위험, 지구 온난화와 자원고갈 등으로 새로운 우주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계속 높아지고 있는 요즘, 소행성 충돌을 미리 알기 위한 조사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고 하니, 닐 스티븐슨이 그려낸 세계를 단순히 공상과학소설 속 허구의 그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멸망과 재건이라는 주제 자체는 SF장르에서 드물지 않지만, <세븐이브스>만큼 높은 과학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 않을 것이다. 첨단 과학 기술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매혹적인 스토리를 만나 빛을 발하는지, 꼭 한번 만나보길 추천한다. 이 작품이 제대로 된 과학소설의 세계로 안내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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