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의 생물학 여행 - 지구의 생명 속으로 떠나는 영국왕립연구소의 크리스마스 과학 강연
헬렌 스케일스 지음, 이충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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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연의 스타는 태어난 지 여덟 달밖에 안 된 새끼 사자 맥스입니다. 영국 신문들은 이 특이한 초대 손님을 다루면서 이 새끼 사자는 자신에게 집중된 청중의 관심과 조명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1937 12 29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 "어린이들은 숨을 죽이고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라고 묘사했지요. 헉슬리는 사전에 청중에게 박수를 삼가라고 경고했습니다. "맥스는 다소 신경질적이거든요." 라고 덧붙이면서요.   p.63

런던 중심부의 분주한 거리에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주 잘 아는 방이 있다. 지난 200여 년 동안 해마다 이 방에서, 유명한 과학자가 왕립연구소 크리스마스 강연을 듣기 위해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66년부터는 텔레비전으로 이 강연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과거와 현재의 강연들을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크리스마스 강연을 창시한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가 오늘날까지도 이 강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강연을 듣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분명 크게 놀랄 것이다.

영국왕립연구소의 크리스마스 과학 강연은 대중에게 유익하고 흥미로울 만한 한 가지 과학 주제를 정해 그 분야 최고의 석학이 강의하고, 이를 연말에 BBC에서 연속 특집 방송하는 세계적인 행사이다. 1825년 런던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현재 전 세계의 과학 팬들이 해마다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가 되었다. 200년 역사의 강연 중에서 시공간과 천문학을 주제로 한 우주과학 강연 13편을 묶었던 <열세 번의 시공간 여행>이 먼저 출간되었었고, 이번에는 생물학을 주제로 한 최고의 강연 11편을 선정하여 엮은 책이 출간되었다. 리처드 도킨스, 데즈먼드 모리스, 줄리언 헉슬리 등 유명한 강연자들이 연단에 섰고, 털로 덮인 포유동물과 화려한 식물, 꽥꽥거리는 새,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곤충과 그 밖의 많은 동물도 강연에 함께 등장했다. 이들은 지구에 사는 생물의 비밀 중 많은 것을 푸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이로운 생명들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를 데리고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산'의 기슭으로 하이킹을 떠납니다. 크리스마스 강연에서 진화라는 주제를 직접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도킨스는 언제나처럼 뜨거운 논란을 초래하는 위험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도킨스는 식물과 동물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더 높은 차원의 지적 존재가 이들을 만들어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지구에 사는 생명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성장하는지 보여줍니다.  p.130

여러 가지 어린 동물을 강당으로 데려와 어린 동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청중에게 보여주었던 피터 차머스 미첼의 강의는 어린 시절의 동물 세계를 여행할 수 있도록 했고, 생물의 서식지에 대해 강의했던 존 아서 톰슨은 당시(100년 전)만 해도 생물이 전혀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아주 깊은 바닷속 심해의 불가사의를 다루기도 했다. 희귀한 동물과 야생 동물의 멸종에 대한 강의를 한 줄리언 헉슬리는 새끼 사자를 강당에 데려와 배에 있는 얼룩 무늬를 청중들에게 보여주기도 했고, 동물의 움직임에 대해 강의했던 제임스 그레이는 영국박물관에서 빌려온 앤티크 장난감 차들과 박제한 치타를 청중에게 보여주며 살아 있는 동물은 모두 자동차와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걸 설명하기도 했다.  사라진 동물들이 남긴 흔적과 유해를 해독하는 방법을 알려준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 지구의 끝 남극의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생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로이드 펙의 강연도 있었고, 크리스마스 강연에서 진화라는 주제를 처음으로 직접 다룬 리처드 도킨스의 강연도 있었다.

원래 각각의 강연들은 축제 기간 중 며칠에 걸쳐 3~6시간 동안 진행된 것인데, 이 책에서는 각각의 강연자가 다룬 가장 흥미진진한 발견과 개념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나 이 책이 매력적인 부분은 전설적인 과학자들의 강연을 마치 강연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기적인 유전자>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강의에서는 중간에 깜짝 손님이 등장하기도 한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쓴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였다. 그는 동물이 순전히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적 견해를 전개하는 부분을 청중에게 읽어 주었고, 이후 도킨스와 애덤스는 좋은 친구 사이로 우정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러한 크리스마스 강연은 당시의 여러 사회 문제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우리가 전설적인 과학자들의 연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놀라운 여행의 여정이면서, 다음 세대의 어린 과학자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자, 우리가 처한 기후 변화 및 멸종 위기 생물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물론 세계적인 석학들의 흥미진진한 생물학 강연을 안방에서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니, 지구와 생명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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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부서진 밤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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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안은 발길을 들여놓는 순간, 대낮임에도 사방이 어두웠다. 요동성의 성벽보다 높은 양쪽의 절벽 덕분에 햇빛이 들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절벽이 검은색 칡넝쿨로 덮여 있어서 검게 보였다. 그런 기괴한 광경에 어디선가 시체가 썩는 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말갈족에게 쫓기는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앞장선 욱래도 같은 생각인지 숨을 헐떡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대낮인데 왜 이리 으스스하지?"    p.41~42

지금은 함락된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장군을 찾기 위해 요동에 위치한 망월향에 도착한 세활과 그 일행은 퇴로를 막아선 말갈족를 피해 짙은 안개를 뚫고 가까스로 계곡 안으로 들어선다. 계속 쫓아오던 말갈족은 알 수 없는 존재의 공격을 받아 물러났지만,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짙은 안개와 기분 나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칼로 베어도 죽지 않는 정체 모를 괴물의 습격을 받게 된다. 박쥐처럼 날개가 달려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칼날이 깊숙이 박혀도 피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늑대 같은 이빨을 지니고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의 존재는 무엇일까. 겨우 그들을 피해 계곡 안으로 들어간 세활과 일행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안개로 뒤덮인 계곡에서 정체불명의 괴물과 싸웠다는 사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온한 곳이었다. 이상한 건 싸울 수 있는 건장한 어른은 없었고, 아이들과 노인들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죽지 않는 정체불명의 괴물들에 대해 알고 있는지, 과연 이곳에 양만춘 장군이 있을지,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올 여름에 조선을 배경으로 좀비 액션 영화가 개봉했던 걸 다들 기억할 것이다. <창궐>은 좀비라는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를 조선시대로 가져왔다는 설정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던 작품이었다. 극중 등장하는 야귀란 존재는 좀비와 뱀파이어의 성격을 일부 차용해 만든 괴물이었다. 조선시대라는 특수한 배경과 야귀의 결합만으로도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난 소설 역시 역사와 호러가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다. 한국 장르소설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정명섭 작가는 좀비라는 소재를 고구려라는 시대로 가져온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부흥군을 이끌어온 세활이 지금은 함락된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장군을 찾기 위해 망월향으로 향하는 여정이 주요 스토리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양만춘 장군 역시 올 여름 영화 <안시성>이라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라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영화 <안시성> 보다 한참 뒤의 시점이긴 하지만, 교차 진행되는 세활의 과거 속 어느 부분은 영화와도 교집합이 있으니 어느 정도 익숙한 배경이기도 하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그런 존재들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물면서 죽음만 갈구하는 존재들, 몸은 있되 마음은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존재들요."

리뉴의 말에 세활은 계곡에 들어오면서 안개 속에서 마주쳤던 그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육신이 움직이는 망자입니다. 빛을 두려워하고, 사람처럼 도구를 다루거나 말을 못 하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는 존재들이에요."   p.193

세활을 비롯한 무리들은 군대끼리의 싸움으로는 당을 이길 수 없는 전력이고, 신라는 그들을 이용하려고만 들고 있는 상태라, 양만춘 장군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고 그걸 토대로 적과 싸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양만춘 장군이 살아 있는지, 정확히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조차 아는 사람이 없다. 단지, 그가 죽었다는 걸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디선가 살아 있기를, 그리하여 흩어진 민심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이 시대를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 정도로 가까웠던 시대'였다고 말한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시대적인 배경에도 해당되지만 좀비라는 죽음과 가까이 있는 존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 흥미롭다. 살아 있는 시체들이라는 것이 실제로 죽은 뒤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라 없이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테니 말이다.

기존에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꽤 읽어본 편인데,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여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 흥미로웠다. 이는 '좀비 전문가'이기도 한 정명섭 작가가 이들을 '일종의 피해자'로 보고 있다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좀비라고 하면 인류를 멸망시키는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사실 대부분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좀비가 되어 버린 존재들이 이들이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좀비라고 명확하게 지칭되지는 않을 뿐이지 모든 문화권에는 죽은 사람이 되살아서 다시 산 사람 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의 설화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용재총화>라는 책에서 좀비와 비슷한 존재가 등장한 적이 있고, 이 작품은 그 얘기를 듣고 구상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 속에 좀비 혹은 그것과 비슷한 존재가 있다면 어떻게 얘기를 풀어 갈지가 이 작품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좀비는 무덤에서 일어났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며, 죽었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하나하나에게 월등한 능력은 없지만 모이게 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좀비들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익명의 대중으로 투영될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좀비들은 그 배경부터 조금 색다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대중적인 좀비와는 전혀 다를 수 있으니 보다 신선하고, 색다른 좀비물을 만나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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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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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재하는 '초능력'을 수량화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여지껏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러니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이미 여러 차례 과학적 실험을 통해 초능력은 극단적인 관찰 기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 기술이 바로 제이크가 잘 쓰는 방법이다. 그는 죽은 사람과 대화하거나 영적인 세계와 소통하지 않는다. 단지 관찰할 뿐이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계산하고 수수께끼를 푼다. 초능력자인 척 행세하는 사기꾼들은 이런 걸 '콜드 리딩'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현실적인 행위였다.   p.137

FBI 특별 수사관 제이크 콜은 삼십 삼 년 만에 고향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 간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명한 화가인 아버지와는 전혀 왕래 없이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재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고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인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철저한 은둔자이자 완벽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노인이 된 상태에서 그 뒷수습을 하게 된 것이 제이크는 편하지가 않다. 뉴욕주의 외딴섬인 그곳 몬탁에는 곧 허리케인이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고, 아버지의 집은 디킨스의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무대처럼 시간이 멈춰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집을 둘러보고 있는 제이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현지의 보안관으로부터 살인 사건이 벌어졌으니 최대한 빨리 와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사람들, 어떻게 죽었습니까?"

"살가죽이 벗겨진 채로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제이크의 머리가 얼어붙으면서,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그 빌어먹을 공포가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을 느낀다. 제이크의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 때 살해당했다. 당시 그녀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죽임을 당했고, 범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놈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건 현장을 찾은 제이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분노를 느낀다. 모든 것이 삼십여 년 전과 너무도 비슷했다. 제이크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놈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제이크는 머릿속으로 기상천외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사람들이 죽기 전 마지막 순간을 그리는 능력이었다. 그 괴상하고 섬뜩한 재능은 괴물들을 사냥하는 데 빛을 발했고, 그는 그 능력으로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간 광기의 현장에 홀로 남아 범인이 남긴 미세한 특징을 잡아내고, 그들의 시그니처를 해독했다.

 

아드레날린이 한꺼번에 솟구쳐 가슴을 옥죄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슴의 감각이 점차 차가워졌다. 액자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 카펫에 탁 하고 떨어졌다.

'우연 같은 건 없어.'

스펜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빠져나가 싸늘해졌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는 여자는 제이크가 잘 아는 여자였다.   p.227~228

현장을 한 번 둘러보면 머릿속에 디지털 녹화 장치가 든 것처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전부 기억해내는 남자, 사진처럼 완벽하게 현장을 떠올려 머릿속으로 외과수술을 하듯 피살자의 비밀을 닳고 반질반질해지도록 돌이켜보는 일을 하는 남자. 그는 과연 오래 전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놈을 잡을 수 있을까. 그가 놈을 뒤쫒을 수록 제이크의 주변 사람들이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채로 살해당하고, 아버지가 집안 곳곳에 남겨 둔 그림 조각들이 단서들로 연결되려는 순간, 제이크의 아내와 어린 아들이 사라진다. 제이크는 과연 사랑하는 가족을 무시무시한 살인마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두툼한 페이지가 무색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으로, 이야기가 폭발한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과 등골이 서늘하게 만드는 오싹함으로 달려가던 이야기는, 후반부의 반전에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악마적인 한 방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으스스하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로버트 포비는 '다음 세대의 스티븐 킹'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는 존 더글러스의 논픽션 <마인드헌터>를 비롯해 실제 범죄 사례와 영상 자료, 인터뷰 기사 등 폭넓은 자료를 섭렵해 주인공 제이크 콜의 캐릭터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살가죽을 벗겨서 죽인다는 끔찍한 설정과 잔혹한 묘사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보다는 독특한 캐릭터의 특별한 수사 방식에 더 눈길이 가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사실 추리, 스릴러 장르의 책들을 많이 보는 편이지만,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묘사가 많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도 워낙 잔혹한 걸로 소문난 소설이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했는데, 포인트가 끔찍함 자체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보니 그 외의 부분들이 더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것 같다. 서사 자체가 탄탄하고, 후반부의 반전은 그야말로 전체 이야기를 쥐고 흔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하고, 사건 현장과 범행 수법, 수사 과정 등이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긴장감이 놀라운 스릴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그놈이 돌아왔어. 이봐 친구, 넌 이제 끝장이야.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없다. 수많은 복선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하나의 퍼즐로 완성이 되어야 이 모든 비극의 이유가 밝혀진다. '괴물 같은 작가의 악랄한 데뷔작'이라는 평가가 저절로 수긍이 될 만큼, 역대 가장 충격적인 반전을 만날 수 잇었던 작품이었다. , 이제 당신 차례이다. 괴물 같은 작가의 놀라운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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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인생이 먼저예요
이진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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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너무 평범할지도 몰라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하루를 살아요.

가끔은 이 평범함에 대해서도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내 인생. 최선을 다했다고는 못 해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런 나를 세상은 이해해줄까요? 별이 되지 않으면 어때요. 반짝이지 않으면 어때요.   p.51

한 동안 '열심히 살아라!'고 외치는 책들이 인기였는데, 요즘은 세상 신경 쓰지 말도 '나대로 쿨하게 살라'고들 한다. 그런데, 쿨하지도 않고, 신경도 많이 쓰고 예민하기만 하다면.. 남들이 말하는 편하고 자존감 높은 인생처럼 살자니 내 불안한 성격들에 구멍들만 더 크게 보일 것 같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나로 태어난 걸까?'를 매일 고민하는 이진이 작가의 이번 책에서는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덜 피곤하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한다. 그냥 나답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말이다. 그녀는 가끔 너무 예민해서 스스로가 힘들고, 너무 배려하려다가 피곤해지기도 하고, 인간관계도 좁은데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주위에서, 참 이래라 해, 저래야 해, 잘해야 해. 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그게 때로는 참견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걱정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이 아닐까 싶다. 집착과 예민함, 불안함, 부족함 등등을 이겨내고 고친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러다 한평생 노력만 하다 인생이 끝나 버릴 것 같다면.. 그렇다면 전쟁처럼 살아가는 대신에 그냥 조금 더 손해보고, 남들보다 성처 받고, 조금 더 힘들게 살면 어떠냐는 거다. 다 그렇게 산다는 말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글들 속에는 사소한 실수나 서투름도 보이지만, 소소하고 평범한 행복들도 많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하루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앞에 두고 걱정만 열심히 하고는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한다.

"난 최선을 다 했어. 뭘 더 어쩌라는 거야?"

잘 생각해보자.

당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고민만 했을 뿐이다.

고민은 노력이 아니다.    p.288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해 보이는 삶 말고 내가 행복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 때가 있다. ‘B형에 다혈질 성격을 가졌으나 A형의 소심함도 넘쳐나는 다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은 어릴 적 화상을 입은 경험, 가난한 집안환경, 성격에서 비롯된 어렵기만 한 인간관계 등등...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의 환경이 성인이 되어서도 성격과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고 말이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저자는 어른이 된 지금에야 그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 역시 한 번씩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진짜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언니랑 통화를 하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너무 힘이 없어 보여서 "힘 좀 내..."라고 말했더니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 하나 기분 좋으라고 힘을 내야겠냐?" 이 솔직한 대답에서 속이 시원했던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보니 "힘내"라는 말을 듣는다고 힘이 나진 않는 게 사실인데, 사람들은 평소에 별 생각 없이 힘내라는 말을 참 자주,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니처럼 저렇게, 내키는 대로 막 던지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저자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소심한 작가의 대범한 고백이 유쾌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는,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작은 용기도 되고,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위로도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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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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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죽여본 적 있습니까?

불현듯 떠오른 장면. 서서히 꺼져가는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와, 아스팔트와 흙에 스며드는 검붉은 피. 죽인 것과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둔 것은 질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 윤은 잠시 생각했다. 윤은 잠자코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는 푸석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p.116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들 열두 명이 죽었다. 그날은 전당대회가 있었고 식사를 마친 의원들은 온천에 갔다. 경찰이 도착했을 땐 타일 바닥 곳곳에 피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고, 붉게 변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는 고요한 표정의 남자, 그는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수사관들은 의도와 배후 세력을 물었고,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답은 간결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게다가 그의 지문은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주민번호도 없었으니, 당연히 그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사이코가 아니었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지도 않았다. 수사는 난항이었고, 방송에서는 연일 미스터리한 그의 존재에 대해 방영했고, 사건을 다각도로 분석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으며 대법원까지 가지 않고 1심에서 판결을 받아들였다. 형은 확정되었고 교도소로 이송되어 사형수를 지칭하는 붉은색 명찰을 붙였고, 474번을 부여 받았다.

그렇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수감번호 474번과 그의 담당 교도관 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74번이라는 캐릭터는 범행 동기는 전혀 알 수 없고, 죄를 받아들이고 모두 인정하지만, 뉘우치고 반성하는 태도는 아닌, 지나치게 여유롭고, 너무도 깔끔한, 기묘한 인물이었다. 교도관들은 그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찜찜하고, 불안했고, 언론에서도 그와 관련되어 색다른 사실 하나라도 잡아 보려고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윤은 474번의 담당 교도관으로서 그를 매일 만났다. 가까이에서 느낀 건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하고 착실한 수형자라는 거였다. 그럼에도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뭐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의 작은 행동과 표정 속에서 작은 기미라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많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지만 사람을 죽입니다. 어떤 이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합니다. 그는 그런 이들을 대신해 손이 되고 칼이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지요. 그는 지금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은 일어난 일의 결과로 죄를 판단합니다만 사실 인간은 결과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의도가 죄죠.   p.12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일곱 번째 책이다. 정용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악은 타고나는 것이며악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절대 악과 절대선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474번은 사수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냥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죽였는데, 생명을 빼앗는 일을 좋아하거나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누구보다 그걸 잘했기 때문에 일로서 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었다. 문제는 그에게 죄의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괴물인 걸까?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 같은 게 없다면, 의도도, 목적도, 욕망이나 쾌감도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그저 본성이었다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각증 환자이자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청부살인업자,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존재 없는 비존재인 유령으로 살았던 그를 접견하겠다고 찾아온 한 여자. 자신을 고아라고 말했던 그의 실재하는 가족인 누나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존재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474, 신해준은 자신의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도관들과 수형자들을 죽이겠다고. 사형의 딜레마는 혹시 있을 오판과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길 원하는 인간의 인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형 집행을 미룰 근거가 없다. 문제는 그를 사형시킨다면 사형 폐지 국가라는 잠재적 위상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므로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마치 공범처럼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괴물처럼 등장했던 474번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고, 그의 존재성이 구체화되면서 악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낯설고 혐오스럽지만, 어떤 부분에선 익숙하고 이해할 만한 지점의 끝에 ''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악에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악에는 너무도 많은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도 든다. 악과 악인,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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