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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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마 망자들도 살아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 같아. 철도와 기적 소리 때문에 점점 좁아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은 망자도 있을 테고, 못 찾은 경우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아서 잘 사는 경우도 있을까?"

나를 놀라게 하는 염의 재주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지금 행복해? 너 스스로도 톱니바퀴가 된 것처럼 온종일 증기기관을 돌리면서 사는 삶이 행복하냐고. 넌 꿈이 뭐야?"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p.99~100

어린 시절, 엄마는 특별한 장난감을 만들어 주곤 했다. 엄마가 포장지를 식탁에 펼쳐 놓고, 이리 저리 접기 시작하면,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던 울음을 그치고 나도 모르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잠시 후 엄마는 꼬깃꼬깃 접은 종이 덩어리를 입에 대고 풍선처럼 숨을 불어넣었다. 식탁 위에는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조그마한 종이 호랑이가 서 있었다. 내가 손을 뻗으면, 그것은 꼬리를 움찍거리다가 내 손가락을 향해 신나게 덤벼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 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움직였다. 그건 엄마의 마법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짧은 소설 <종이 동물원>은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표제작인 이 작품은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조리 석권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세 가지 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건 40년 동안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신예였던 켄 리우는 세계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가 된다.

전체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에는 판타지, 하드보일드, 대체 역사, 스팀 펑크, 중국 전기 소설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보통 단편집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하더라도 각각의 완성도가 모두 훌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읽을 때, 대충 읽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읽게 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말이다. 사실 열 몇 편 중에 한 두 편만 마음에 남아도, 그 책은 좋은 작품이었다고 인상에 남기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켄 리우의 이 책은 한 편, 한 편 모두다 너무도 뛰어나고, 놀랍고, 대단했다. 각기 다른 장르만큼이나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상상력도 기발했고, 그 속에 담고 있는 정서도 감동적이었고, 탄탄한 문장과 적확한 표현들로 완성도도 뛰어 났으며,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드는 장르적 재미 또한 기가 막혔다. 특히나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는 독자들에게 SF 환상문학에서도 순문학 만큼의 완성도와 감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일상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을 황홀하게 드러내는 놀라운 이야기들이라는 워싱턴 포스트의 평이 절대 과장이 아님을 열 네 편의 작품으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삼라만상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모든 생물종은 대를 이어의 지혜를 전수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거스르지 못할 시간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처럼 잠시나마 동결된 것으로 만드는 방법 말이다.

모두가 책을 만든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중에서, p.195

사실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은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덕분이라는 저자의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예감했다. 이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다는 것을. 그리고 표제작이자 첫 번째 수록 작품인 <종이 동물원> 을 읽고 나서는, 우선 책을 덮고 인터넷 서점으로 가서 켄 리우라는 작가에 대한 신간 알림을 신청했다.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앞으로 무조건 챙겨보고 싶은 작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작가의 작품이 이제야 국내에 출간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켄 리우라는 작가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한 작품, 한 작품 정말 천천히 아껴서 읽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주옥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개인의 모든 결정을 인공지능이 대신해주는 디스토피아, 인격을 가상현실로 복제해서 체험하는 기계가 등장하는 이야기, 그리고 문화 대혁명, 대만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일본군 731부대의 잔학성을 다큐 형식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등 SF 환상문학의 카테고리로 포함되어 있지만, 판타지가 줄 수 있는 허구보다는 현실이라는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SF 환상문학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독특한 세계관이나 어려운 용어들로 인해 접근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쉽게 말해 이들 장르소설들은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 지루한 초반의 진입 장벽을 깨야 하고, 딱딱하고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그런데 켄 리우의 작품은 그 모든 통념과 편견을 모두 깨고 있다. 물론 다루고 있는 소재들과 이야기의 장치들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법한 독특한 소재도 있고, 누구나 실생활에서 쉽게 생각해 볼 만한 소재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독특한 소재도 어렵지 않게, 평범한 소재도 진부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으며,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사유와 자신만의 철학을 그 속에 녹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들이 모두 감동적이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그물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이다.

 

왜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일까. 왜 바쁜 일상 속에서 굳이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머리를 써가며 허구의 이야기를 읽는 것일까. 그에 대한 완벽한 답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만나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이 책은 내가 왜 소설을 사랑하는지, 왜 이야기에 매혹되는지에 대한 탁월한 사례이기도 하다. 내 책장에는 매주 신간들이 엄청난 속도로 쌓여간다. 어떤 작품들은 이미 완벽한 망각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고, 그나마 관심 있는 책들만 읽는다 해도 책들이 출간되는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운 상황이지만, 나는 켄 리우의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어 졌다. 나는 되풀이해 거듭 읽고 싶어지는 소설들을 사랑한다. 물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으로는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모두 읽어볼 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으로 우리가 매일 같이 책을 읽어도 죽을 때까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리우의 작품은 또 읽고 싶다. 더 이상 무슨 찬사가 필요하겠는가. 그저 읽고,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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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팅 게임 (한글판 출간 10주년 기념 리커버 에디션)
엘렌 라스킨 지음, 이광찬 옮김 / 황금부엉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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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말이 안 된다고? 죽음은 의미가 없지만 산 자들에게 다가온다. 삶 역시 당신이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지를 알 때까지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게임에 이기는 일에만 전념하라. 여러분이 찾는 것이 누구인지를 알기만 하면 해답은 간단하다. 하지만 유산 상속자들이여,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p.65

어느 날 평범해 보이지 않는 한 배달부가 여섯 통의 편지를 배달한다. 한 사람씩, 한 짐씩, 그렇게 배달부는 사람들을 선셋타워로 유인한다. 최신식 호화 아파트를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혜택을 받으며 임대할 수 있다는 소개에 입주 희망자들은 즐거워했고, 하루 만에 선택된 입주자들로 선셋 타워가 가득 차게 된다. 그들 가운데는 재단사도 있었고, 발명가도, 비서도, 의사도, 판사도 있었다. 선셋타워는 조용하고 모든 것이 잘 운영되는 아파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북쪽 절벽 위에 있는 낡은 웨스팅 저택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다. 그곳은 15년 동안이나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소문만 무성한 웨스팅 씨가 저 곳에 있는지, 아니면 유령이라도 있는 건지.. 세 아이들은 내기를 한다. 그렇게 그 곳에 들어가서 발견한 것은 동양 양탄자에 싸여 있는 웨스팅이라는 노인의 시체였다.

전 재산이 20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수수께끼 사업가 웨스팅 씨의 부고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변호사가 발송한 열여섯 통의 편지가 사람들에게 도착한다. 유산 상속자로 지명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유언장 낭독 시간에 맞춰 모두 웨스팅 저택으로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변호사가 낭독하는 유언 내용에 충격을 받는다. 웨스팅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며,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은 바로 여기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한 명의 유산 상속자를 정하기 위해 웨스팅 게임이라는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은 누가 되었든 살인자를 찾아 내야만 하는 것이다.

 

눈 속에 갇힌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창백한 태양이 떠올랐다. 고요히 누워 있는 미시간 호수는 보라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했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난 선셋타워의 입주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미시간 호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창가에 선 채 웨스팅 저택에 매혹되어 꿈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p.102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열여섯 명을 여덟 쌍으로 나누고, 각 쌍에게는 1만 달러와 단서가 제공된다. 참가자 한 명이 탈락하면 그의 짝도 함께 게임을 포기하고 범칙금으로 1만 달러의 돈을 반납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지는 게임의 커플은 유언장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게 요리사와 재단사, 수위와 대법원 판사, 성형외과 인턴과 말을 더듬는 휠체어 소년, 걷어차기의 명수인 말괄량이 소녀와 전국 고등학교 육상 신기록 보유자, 배달원과 사장 비서 등 다양한 나이와 성격,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각자 짝이 되어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단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하나씩 받는다. 똑같은 단서는 하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단서가 아니라 없는 단서이다. ,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이들 중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실제로 누구이든 간에 게임에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과연 웨스팅 씨를 죽인 범인은 누구이며, 그의 죽음에 관련된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유산 상속자로 지정된 이들 열 여섯 명의 인물들 중에 누가 게임에 이길 것인가. 무엇보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언어유희로 가득한 단어퍼즐이 아닐까 싶다. 문장 하나하나를 모두 추리의 단서가 되도록 설계해 놓았기에, 곳곳에 숨겨진 단서들을 찾는 재미도 있다. 이 작품은 한글판 발간 10주년을 맞아 이번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추리 소설로는 최초로 미국 최고 권위의 아동 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한 걸로도 유명한데, 뉴베리상은 해마다 가장 뛰어난 아동 도서를 쓴 사람에게 주는 상으로 '아동 도서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상이다. 영미권에서는 '12세 이상 어린이 및 청소년이 읽어야 할 필독서'로 선정될 만큼 현대 미스터리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저 청소년 추리 문학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아쉬울 만큼 어른이 읽어도 전혀 유치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과연 누가 웨스팅 씨를 죽인 범인을 찾고 백만장자의 유산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인지, 당신도 웨스팅 게임에 함께 해 보길.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당신도 한 명의 상속자가 된 것처럼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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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오디세이아 명화로 보는 시리즈
호메로스 지음, 강경수 외 옮김 / 미래타임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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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에서부터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유명 화가들이 남긴 명화를 스토리에 맞춰 편집한 '명화로 보는 시리즈'는 현재 단테의 <신곡>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일리아스> 세 권이 출간되었다. 사실 세 작품 모두 실제 원전의 분량이 만만치 않고, 번역본으로 출간된 책으로 읽기에도 엄청난 두께와 방대한 내용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그래서 더욱 '명화로 보는 시리즈'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바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이다.

 

 

'멘토'라는 단어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타케 왕국의 오디세우스 왕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멘토르가 오디세우스 왕이 20여 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왕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맡아 그의 친구요 스승이자 상담자로, 혹은 때로 아버지가 되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양육한 것에서 유래했다.   p.44

유럽의 문학은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쓴 수수께끼 같은 작가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사실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기원전 8세기 무렵 활동한 시인으로 추정할 뿐, 그가 실재한 인물인지, 서사시인 전체를 가리키는 총칭인지, 실재한 인물이라면 두 서사시는 동일한 작가의 작품인지 등 호메로스를 둘러싼 질문들은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끝없는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기원전 700년에 쓰인 호메로스의 작품은 서양에서 구전이 아닌 최초로 기록된 문학이라 더욱 가치가 있다.  호메로스는 유럽 문화가 문자가 없는 시대에서 문자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있는 작가이다. 문자시대 이전의 문학은 기록 없이 전해졌으니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자 이타케 섬의 왕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배 12척을 가지고 참가하여 지모가 뛰어난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전쟁 후에 귀향하던 길에 각 지역을 표류하며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출국 20년 후 간신히 고국에 귀환한다. 오디세우스의 활약을 담은 예술 작품들은 매우 많다. 그만큼 그의 소재가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p.446

<오디세이아>라는 시의 주제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귀향 모험담이다.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시는 총 24편으로 나뉘며, 6각운으로 작곡되었다. 이 책은 시간 순의 구성 대신에 복합적인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전쟁이 끝이 난 뒤의 상황에서 시작해, 7년간 노예로 전락해 있는 오디세우스와 그의 모험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오디세우스가 고향에 도착한 이후의 이야기와 그가 구혼자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무엇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유명 화가들이 남긴 명화들을 통해서 스토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과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새겨진 일리아스 장면을 함께 수록하고 있어 스토리의 고증감을 높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오디세우스에 관한 고대 부조상 및 등장인물들의 조각상 등 사진 자료들이 가득해 사실적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있다. 18세기 이래 학계에서 끊임없이 호메로스라는 시인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고, 그러다 극단적으로호메로스라는 시인은 실재하지 않았다. 다만 짧은 시가 있었을 뿐으로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집대성되어 호메로스의 시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니,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자료들로 인한 리얼리티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에는 다시 호메로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 동안 호메로스의 작품이 다소 어렵게 느껴져 원작을 읽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명화로 보는 시리즈'를 통해서 조금 더 생생하고, 재미있게 만나보면 어떨까 싶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 각종 자료를 통해서 살려진 사실성으로, 신화 속 이야기 혹은 오래된 고전문학이라는 틀을 넘어서 현재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듯한 영웅들의 모험담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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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 - 처음과 끝의 계절이 모두 지나도
동그라미(김동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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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오듯 비가 내렸다

가방에 작은 우산 하나 챙겨 다녀야 하는 곳이다. 오늘 비가 내린다면 우산을 꺼내지 않으려 한다. 흠뻑 젖을 때까지 그냥 이대로 비를 맞을 것이다. 가끔은 그렇게 내면을 바깥 세계와 만나게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121

올해는 유독 SNS 작가들의 책이 많이 출간되고, 인기를 끌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인스타그램 몇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누구누구, 혹은 페이스북 몇만 독자들의 뜨거운 공유, 또는 몇만 SNS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 누구 식으로 소개되는 작가의 띠지가 붙어 있는 책들을 숱하게 보아 왔다. 그 중에는 정말 베스트셀러로 오랜 기간 인기를 끌었던 작가들의 책도 있었고, 웬만한 중견 작가도 그 이름값만으로 팔아 치울 수 없는 그러한 판매율을 자랑하는 책도 있었다. 심리학과 관련된 에세이들이 매달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이들 NS 작가들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도 아마 시대적인 흐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개인의 자존감이 낮아지고,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서 위로와 감성의 코드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시대를 지배하는 대중의 욕구, 독자가 원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싶다. SNS를 통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짧은 글의 인기가 높아지게 된 이유도, 이들 작가들의 글들이 깊이 있고, 문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젊고, 감각적이며, 대중의 코드와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성이 충만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딱딱한 종이책을 집어 드는 대신 그들의 몽글몽글한 언어에 기꺼이 손을 내민다. 이번에 만난 책 역시 '70만 팔로워의 새벽을 함께한 작가' 라는 호칭으로 소개되는 SNS스타작가 동그라미의 신작이다.

 

사랑할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할게요

사랑했어요

사랑했나요

 

사랑이 뭔가요?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p.231

사랑과 연애, 이별에 관한 에세이답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부끄러워 꺼내놓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공감 받고 싶었던 사랑의 기쁨, 아픔, 슬픔과 그리움들을 장마다 펼쳐놓는다'는 출판사의 책 소개문구처럼, 그리고 '팔로워의 새벽을 함께' 했다는 호칭처럼 밤에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낮에 읽기에는 어쩐지 오글거리고 글들 투성이니 말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누구나 달라진다. 어떤 작가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 보면 이걸 내가 썼나 싶을 때도 있을 만큼 감성적이라고 말이다. 지나간 사랑이 떠오르는 어느 밤, 추억에 빠져 들고 싶은 멜랑콜리한 그런 밤에 읽기에 딱 좋은 글들이 가득한 책이다. 현재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다면, 혹은 이별의 아픔에 모든 유행가 가사가 내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그럴 때 필요한 책이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랑이 일상이 되기 전의 상황들을 그리고 있다. 사랑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고, 제대로 된 사랑을 아직 해보지 못했다면 배울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사랑을 하고,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는 결혼이라는 단계를 지나 그 사랑이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이라면.. 사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착하고 따뜻하기만 한 사랑 이야기를 읽기엔, 우리의 삶이 이미 너무 닳고 닳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랜 만에 첫사랑과 순수했던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떠나고 싶은 이들이라면 주저할 것 없다. 이 책이 지나온 사랑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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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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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건 환상일 뿐이라는 게 그의 오랜 철학이었다. 이 세상은 불공평과 차별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다양한 계층으로 나눠진다.

언젠가 반드시 최상층의 인간이 된다, 지배자가 된다…….

그것이 다쿠야의 최종 목표였다.   p.26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에 발표한 초기작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나왔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기작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답게, 3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가독성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공대를 졸업하고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에 다녔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발휘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인공지능에 대한 인한 이슈가 한참 논쟁이 되고 있는 요즘에 읽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이미 30년 전에, 기계화 되어가는 사회를 배경으로 이런 소설을 써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통찰력과 뛰어난 감각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을 하는 다쿠야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성공지향형 인간으로 살아 오고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술에 취해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회사에서 뛰어난 엘리트로 평가 받았고, 최근에는 윗사람도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임원실 직원인 야스코에게 접근해서 전무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 그의 딸인 호시코와 결혼할 기회에 가까워지게 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내연 관계가 된 야스코가 임신 소식을 알리며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게다가 야스코가 관계하던 남자는 다쿠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뜻밖의 호출을 받게 된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세 명, 그들은 야스코의 임신으로 발목을 잡힐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녀를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겁을 먹고, 질투나 할 뿐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대체로 인간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 뿐이다. 지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일이라면 로봇이 훨씬 우수하다.

게다가 저 녀셕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아...... 늘어선 로봇을 등지고 다쿠야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p.165

이들이 모의한 살인 방법은 시체를 릴레이 하듯 운반하자는 거였다. 공범이 세 명이기 때문에 '릴레이'라는 독특한 트릭을 고안해낸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야스코는 오사카에서 죽이지만, 시체가 발견되는 곳은 약 5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가 된다. 실행 당일, A는 오사카, B는 나고야, C는 도쿄에 있고, 우선 A가 야스코를 죽이고는 시체를 차에 싣고 나고야로 향하면, B A가 두고 간 차를 타고 미리 정해둔 장소로 간다. 그곳에는 C가 와서 기다리고 있고, 차에 시체를 옮긴 후 C는 도쿄로 향하고, B는 나고야로 돌아온다. A, B, C가 공모했다는 사실을 경찰이 모른다면,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알리바이가 구축되는 것이다. 카드 뽑기를 통해서 A, B, C 역할을 정하고 살인 릴레이 주자 두 번째로 다쿠야가 시체를 전달받아 이동을 하는데, 놀랍게도 전달받은 시체는 야스코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도서형 추리소설(트릭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고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서술 방식)의 수작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시체를 바통 삼아 릴레이를 한다는 설정도 기발하고 트릭과 미스터리 또한 정통 추리물로서의 탄탄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었다. 유독 과학을 소재로 한 추리 소설을 많이 써온 히가시노 게이고이기에, 이번에 만난 초기작이 그의 미스터리 세계를 이루는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 남자들을 수단화하는 여성 캐릭터나, 인간보다 로봇을 더 신뢰하며 주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여성 캐릭터 역시 이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러 작품에서 더 발전되고, 변주된 형태로 등장하게 되니 말이다. 그의 최신 작품들만큼이나 뛰어난 트릭과 흥미로운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이번 기회게 꼭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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