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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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제 한 해가 지났다. 겨우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다. 처음 겪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는 점이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살아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에서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 가야 한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인들을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노인이 된 부모가 보인다. 당신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쳐 노인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그리고 지금 나와 더불어 노인이 될 게 분명한 아내와 노인이 된 우리를 기억해줄 딸아이를 본다.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 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 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p.62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올 해의 마지막 날 손홍규의 산문집을 읽었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라니 제목부터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가로등 아래 놓은 골목을 딸아이와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딸은 묻고 아빠는 답하고, 아빠의 대답에 담긴 질문을 아이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한다. 나도 부모의 입장이라서 '아이가 앞으로 새롭게 발견하게 될 언어들이 벌써부터 그리워'라든가, '아직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말에 뭉클해졌다. 매 순간 부모는 그렇게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걸 깨닫고, 몰랐던 걸 배우고,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한 마리 소를 사랑했던 소년이, 성년이 될 무렵 그 소를 떠나 보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비롯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저자의 어린 시절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주며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라고 물었던 아버지의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부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아마 몇 해전의 나였다면 이 장면에서 이해하고 싶었던 인물은 아버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위암으로 투병하던 고모의 부음을 들었을 무렵의 대학 새내기 시절, 애도와 잔치의 분위기가 뒤섞인 장례 풍습이 서먹했던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속 마르케스 대령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그렇게 저자의 삶 구석구석 문학이 함께 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할머니의 죽음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게 무엇인지를 천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했다고 한다. 지난해 나란히 칠순을 맞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들은 더 애틋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저자의 고백은, 세상 모든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온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항상 어른의 모습이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처음부터 나이든 모습이었을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한때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도 한때 우리처럼 사랑에 설레고, 실패에 좌절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온 걸음마다 이야기를 남겨둔' 우리의 부모들에게 더 말을 건네고,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자식이 부모를 기억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방은 감옥의 혼거방만한 크기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다. 그러나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 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마치 평소에는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던 평행우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낯설고 기이하지만 분명 내가 머문 시공간에 겹쳐진 또 다른 세계.    p.139

이 산문집의 많은 부분을 저자의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으며,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페이지 바깥으로 흘러 넘치고 있다. '한국의 작가들은 살롱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 그 아래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 라는 문장에서 읽히는 그 깊은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책을 덮고도 아릿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이들이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에게나 유독 마음이 기우는 문장'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글들이었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밑줄을 긋게 되고, 페이지를 멈추고 돌아보게 되고, 시간을 들여 행간에 숨어 있는 추억을 찾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가족과 관련되어서는 항상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누군가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또 듣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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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항설백물어 - 상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8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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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스케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그 환상의 섬이 아닌 걸까?

뉴도자키의 깎아지른 절벽에 뚫린 석굴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동네 사람들도 모르는 수수께끼의 섬이 아니던가? 깊은 안개에 덮여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보이지 않고 불가사의한 해류가 주위를 지키고 있는, 배도 다가가지 않고 새들도 오가지 않는 외딴섬이 아닌가? 모모스케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다.   P.63~64

다다미 열 장 정도 되는 방에 젊은 사내 네 명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밥상이 나와 있지도 않고 술 그릇이 눈에 띄지도 않는, 격식을 차린 자리 같지는 않지만 스스럼없다는 느낌도 없는, 참으로 희한한 회합이다. 이들 네 명은 한문 서적에 정통한 도쿄 경시청의 순사인 겐노신,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괴짜 요지로, 에도 막부 중신의 아들로 서양에도 다녀온 멋쟁이지만 일하지 않고 빈둥대는 쇼마, 검을 배운 호걸로 마을 도장을 하며 순사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는 소베이다. 이들은 모두 오래된 이야기, 기괴한 전설 등에 관심이 많아 누군가에게 들은 진기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참이었다. 이번에 요지로가 붉은 얼굴 에비스, 가라앉은 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겐노신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쇼마와 소베는 문명개화 시대에 그런 비합리적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부정했다. 이들은 결국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에서 의견을 구해 보기로 하고, 그를 찾아 간다.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이란, 여든하고도 몇 살이 된 학처럼 홀쭉하게 여위고 피부가 흰 늙은이이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상민처럼 보이는, 신분이나 직분이 있어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오래 전 번주의 총애를 받아 번에서 공로금까지 받았다고 한다. 요지로가 그 돈을 매달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연으로 현재까지 교류를 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매우 박식했고, 기묘하기 짝이 없는 체험담을 아주 많이 갖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요지로에게 노인이 들려주는 에도 시절 이야기는 정겹고 편안했으며, 겐노신은 순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진기한 이야기나 괴담 종류를 별나게 좋아했기에 노인이 들려주는 각 지방의 괴이한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생김새나 생업과 어울리지 않는 합리주의자인 소베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노인과 의견을 나누는 것이 즐거웠고, 약간 서양 물이 든 쇼마는 노인과 같이 사는 먼 친척 처자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네 명은 소문에 대한 진위나 기이한 전설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노인을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 노인은 바로 기존 항설백물어 시리즈에서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했던 모모스케이다. 귀신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물로 언젠가 백 가지 괴담을 모아 책으로 엮어낼 생각으로 일본 각지를 여행했던 그가 사십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것이다.

 

"마음속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이 보였다......"

"맞습니다.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본 겁니다." 요지로가 대답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보는지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 이도 저도 다 노인이 이야기한 셋쓰의 괴이한 불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이다.   P.290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항설백물어> 2009, <속 항설백물어> 2011년에 나왔었으니 무려 7년 만에 만나게 되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항성백물어> 시리즈는 일본 에도시대 괴담집에 등장하는 설화를 모티프로 인간의 슬프고도 추한 본성을 다채롭게 해석해낸 작품이다. 이번에 출간된 <후 항설백물어> <항설백물어>, <속 항설백물어>에 이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자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고지 3000여 매 분량의 작품이라 상하권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었다. 상권에는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섬에 얽힌 이야기인 '붉은 가오리', 원인 모를 작은 불소동이 벌어지면서 괴이한 불을 둘러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늘불', 그리고 뱀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집안의 무덤 위 사당에서 독사에 물려 사람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는 '상처 입은 뱀' 세 편이 실려 있다. 제 발로 각 지방을 두루 다니며 기기묘묘한 일을 찾아 다니는 삶을 살았던 모모스케가 지금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서 마음 좋은 할아버지처럼 등장하니 어쩐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가 들려주는 고금의 괴담과 기담, 동서의 진기한 이야기들은 전작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극중 노인은 '무슨 일이든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냥 이상하다, 희한하다 하면서 무서워한다면 괴담이 되겠지만, 이는 이러저러한 이치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고 설명할 수 있으면 더는 괴담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항설백물어> 시리즈에 등장하는,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들은 그저 괴담으로 그치지 않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 더욱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했던 <속 항설백물어>에서 6편의 단편이 각각 한 편으로 완결되다가 각 이야기들이 미묘하게 얽히면서 모든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연결되었던 놀라운 구성을 떠올려보자면, 이번 작품 역시 하권까지 함께 읽어야 이야기가 완결될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드디어 출간된 <후 항설백물어> 하권을 바로 이어서 읽어 보려고 한다. 고전 설화를 재해석한 전혀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나보고 싶다면, 모두들 교고쿠 나츠히코의 특별한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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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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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쓰키 나오토를 다시 만났을 때, 그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가을은 이미 지났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코트를 껴입고 있었다.

"세상에는 비현실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어. 마쓰다하고 함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왠지 구원받는 기분이야. 네게 바람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괴로운 일을 잊을 수 있어. 소설이나 만화를 읽었을 때처럼. 그래서 혼조는 너하고 표류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던 거야."   - '염소자리 친구' 중에서, p.115

마쓰다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 2층 창문으로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있어, 마을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도 마쓰다의 집 2층에는 어째선지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마쓰다의 방 베란다에는 매일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데, 가끔은 바람을 타고 다른 물건들도 떨어지곤 했다. 사진이나 잡지, 헌 옷이나 수건, 외국에서 바람에 날려온 듯한 물건까지 섞여 있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 베란다 격자에 걸려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찢어진 신문 조각이 날아왔고, 날짜는 무려 두 달 후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에 발행된 신문이 온 것이다. 신문에 실린 기사 중에 고1 사망 사건의 참고인으로 신문을 받던 고등학생이 경찰서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얼마 뒤 실제 마쓰다의 반에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동급생 친구가 가해자를 죽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모른 척 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죄책감이 든 마쓰다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된 친구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리고 엿새 후에 벌어지게 될 신문 기사에 실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마쓰다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염소자리 친구'는 학교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오쓰이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판타지를 사용해서 풀어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를 다루고 있는 작품 중에 단연코 돋보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외에도 은둔형 외톨이로 살던 인물이 아버지의 유품인 잉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성격이 바뀌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친구들에게 도둑으로 오인 받아 학교생활이 어려워진 인물이 친구가 없어 반에서 고립되어 있는 소년의 도움을 받게 되는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쓰나미로 인해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인물이 술에 절어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죽은 아들의 장난감을 통해서 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트랜스시버'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어디서 만났던가요?”

나는 물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소녀의 눈은 양쪽의 색이 달랐다. 오른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붉은색. 오드아이.

“벌써 잊었어? 네가 나를 죽였잖아.”

소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 놀라운 고백을 듣고 동요하지 않았다.  - 메리 수 죽이기' 중에서, p.202

이 책은 청춘소설에서 호러, SF, 판타지,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작가가 펼치는 다채롭고 환상적인 단편 모음집이다. 전혀 다른 매력의 일곱 편의 단편으로 만들어진 한 권의 환몽 컬렉션인 셈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 현대 문단의 천재 오쓰이치, 청춘·연애소설로 잘 알려진 나카타 에이이치, 괴담 작가로 유명한 야마시로 아사코, 복면작가 에치젠 마타로, 해설을 맡은 아다치 히로타카까지. 사실 이들 다섯 명의 작가 모두 한 사람, 오쓰이치이다.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방식과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다는 설정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엄연히 다섯 작가들의 이력도 책 표지에 실려 있어 당황스러운 책이었다. 이들 다섯 작가들은 오쓰이치의 다섯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창적인 구성과 방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들은, 사실 전혀 정보 없이 읽는다면 모두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개성과 색채가 뚜렷하다. 한 작가에게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츠이치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섬세함과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퓨어 계열'의 화이트 오쓰이치와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는 '다크 계열'의 어두운 블랙 오쓰이치로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거기에 더해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 이 작품집은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오쓰이치의 오쓰이치에 의한 오쓰이치 팬을 위한 압도적인 소설집'이라는 평가가 제격이라는 느낌이 드는 정말 색다르고 매혹적인 작품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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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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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반쯤 잠든 것 같은 상태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가끔 눈을 떠서 산소마스크 안쪽을 긁어댄다. 내가 부채질을 멈추면 그녀는 금방 내 손을 찾는다. 카린, 내 팔에 감각이 없어. 내가 말한다. 이 망할 부채질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카린이 산소마스크를 벗는데도 나는 제지할 힘이 없다. 카린이 단숨에 말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간호사가 뛰어 들어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카린은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마스크를 벗으면 안 돼요. 간호사가 말한다. 이 사람도 압니다. 내가 간호사에게 말한다.   p.17

이 책은 스웨덴에서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평단의 호평을 받은 시인  톰 말름퀴스트가 자전전 이야기를 써 내려간 첫 소설이다. 이야기는 임신 33주인 아내 카린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가면서 시작된다. 다행히 태아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하는데, 가벼운 독감 증상으로 시작되었던 아내의 상태는 점점 심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급성 호흡부전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카린의 증상은 심한 폐렴처럼 보였으나, 여러 검사 결과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한 뒤,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카린은 심각한 상태였고,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어 시간이 없었다. 바로 1주일 전만 해도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피검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틀 전만 해도 함께 영화를 봤고, 그들은 아직 하지 못했던 결혼도 계획 중이었다. 이 모든 평화로운 일상이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톰은 갑작스럽게, 한달 반이나 일찍 아빠가 된다. 그리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백혈병으로 인한 아내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불가능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날들에 사실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 사건은 늘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남의 일 같지가 않게 느껴진다. 당장 내일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상실과 슬픔이니 말이다.

 

내 이름은 이제 아빠다. 아이가 또 나를 부르고 있으니 내게는 생각에 잠길 시간도 뭔가를 느낄 시간도 없다. 너처럼 리비아도 삶의 작은 것들을 눈에 담는다. 이를테면 쏟아진 기름의 다양한 색깔, 빗자루 손잡이 끝에 붙어 있는 벌레, 내 팔꿈치의 긁힌 상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공들 사이에 걸쳐 있는 거미줄 같은 것들. 심지어 녹슨 병뚜껑조차 리비아에게는 마법이 된다. 아이는 네 사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사진들을 침대의 내 옆자리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건네기 때문이다.    p.372~373

누군가의 삶이 멈추고 끝장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슬픈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저자의 문장은 시종일관 담백하고 건조하다. [뉴욕타임스]지금까지의 자전소설은과거의 회상을 의미했으나 말름퀴스트는 이러한자전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켰다고 평가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고통스러운 상실의 순간을 회상하는 과거의 시제가 아니라 모두 현재시제로 서술하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게. 그러나 격한 감정의 폭발이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드라마처럼 극적인 상황에서조차 그의 문장들은 담담하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감정에 공감되고, 이해되고, 안타까웠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상황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들이 모두 현재시제로 그려져 있어 그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더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이며, 따라서 우리는 늘 누군가를 잃고, 떠나 보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그럼에도 바보 같은 삶은 계속된다. 그렇게 인간이란 상실을 숙명으로 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에, 이러한 작품이 전해주는 감정과 여운이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슬픔이라는 파도가 우리를 집어 삼켰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 그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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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론도 스토리콜렉터 7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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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시 우리 중에 도를 넘은 사람들이 있었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거라고."

"꼭 그렇진 않아. 우리 모두가 계속 입다물고 맞서 싸우면 돼.

슈나이더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맞서 싸운다고? 미안하지만 승산이 없을 텐데."

"있잖아.... 어제저녁부터 쭉 생각해봤는데,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까?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이길 수 있을까?"    p.78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이다. 전작이었던 <죽음을 사랑한 소년>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슈나이더의 충격적인 선택으로 끝이 났었기 때문에, 더욱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원래 이 시리즈는 삼부작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파격적인 결말로 마무리했던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래서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도 후속작 출간을 요청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시리즈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그렇다면 과연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을 총으로 쐈던 슈나이더는 어떻게 됐을까.

이 작품은 슈나이더가 체포되어 정직 처분을 당하고 9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슈나이더가 아카데미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대신 수업을 맡았던 동료가 출장을 가게 되면서 자비네가 여름방학까지 남은 한 달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자비네는 슈나이더의 공판에 주요 증인으로 참석했었고, 이후에는 그와 전혀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는커녕 조언을 구한 적도 없었으며 모든 사건을 혼자서 해결해왔다. 실제로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슈나이더가 사건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그의 두 제자인 젊은 수사관 자비네와 티나가 주도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모습이 그려진다. 거의 3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슈나이더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모하리만큼 호기심 많고 고집스러운 자비네가 아무리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 나고, 이해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슈나이더이다. 그는 범죄 분석에만 25년 경력을 가진 전문가로, 법의학과 범죄심리학 공부도 했으며 유럽공동경찰기구의 멤버이기도 하지만, 마리화나를 피우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기를 죽이고 스트레스를 주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그는 현장에 가서 사건을 다시 분석하고, 사건을 가능한 세분화하면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살인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수사를 해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만큼 능력 또한 독보적이니 말이다.

 

 

당신, 왜 그랬지?

불현듯 그는 이레네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었다. 이레네의 영혼이 아직 방에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따뜻한 말 몇 마디 해주기를 바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차갑고 생명이 없는 몸을 이 방에서, 이 집에서, 그리고 이 지역에서 떠나기 전에.    p.409

한 남자가 고속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역주행해서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단순 실수라고 보기엔 정황상 운전자는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사망자는 연방 범죄수사국 경정으로 다섯 살 된 아들을 혼자 키워왔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자택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이 목이 부러져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여자가 슈나이더 대신 수업을 맡았던 안나 하게나의 친언니로 밝혀진다. 그리고 얼마 뒤 안나 하게나는 철로 위에 차를 세워둔 채 자살한다. 이어 만찬석상에서 나와 다리 밑 철로로 뛰어내린 여자, 그리고 욕실에서 자신의 턱을 총으로 쏜 남자 등 자살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데, 모두 연방 범죄수사국 수사관과 그 가족들이었다. 자비네는 동료들이 연이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사건의 발단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슈나이더에게 수년간 지겹게 들어왔던 말처럼, 우연이란 절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사건을 추적할수록 모든 단서와 연결고리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 모두 20년 전 마약전담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비네는 슈나이더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지만, 그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즉각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순순히 사건을 포기할만한 자비네가 아니었다. 극중 슈나이더가 자비네에게 "당신은 과거의 작은 다람쥐가 아니야. 야생 고양이가 됐소."라고 말할 정도로 기존 시리즈에 비해 자비네는 이번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수사를 펼치기 시작한다. 과연 20년 전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이유라면 대체 왜 이제야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죽은 수사관들과 슈나이더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슈나이더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읽는 내내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페이지 끝까지 달려가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존 시리즈에서 거만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결코 속마음이라고는 보여주지 않았던 슈나이더가 처음으로 조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면, 이번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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