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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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명과 원한을 짊어지고도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본래의 연약함과 온화함은 모두 깊이 묻어버리고 필사적으로 앞으로, 빛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오랫동안 잔잔하기만 했던 이서백의 마음에 순간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마치 봄바람이 깊은 호수의 수면 위를 스치며 일으킨 잔잔한 물결 같았다.   p.88

황재하는 형부 시랑이었던 아버지를 도와 여러 사건을 해결했고, 장안에서도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소녀였다. 그렇게 열두 살부터 이름을 알렸던 황재하가 열일곱이 된 어느 날, 가족들이 모두 독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에 그녀는 따로 연정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명문 집안의 자제와 혼례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말다툼이 있었고, 바로 그날 저녁 황재하가 손수 가족들에게 떠준 양제탕 안에 치명적인 독, 비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정황상 가족들을 살해했을 사람은 그녀 밖에 없었고, 황재하는 살해범으로 수배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녀는 몰래 장안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하나 몸을 숨기려 올라탄 마차에서 기왕 이서백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마침 장안에는 석 달 동안 세 사람이 연달아 죽게된 사방안이라는 사건이 난제로 있었고, 황재하는 자신이 사건을 해결할테니 누명을 벗고 가족을 죽은 범인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황재하는 신분을 위장하고 이서백의 곁에서 함께 사건을 풀어나가게 된다.

‘잠중록(簪中錄)’비녀의 기록이라는 뜻으로, 주인공 황재하가 추리를 할 때 머리의 비녀를 뽑아 끼적이는 버릇과도 이어지는 제목이다. 과연 황재하는 기묘하고 잔혹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누명까지 벗어 신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차갑지만 고고한 남자 이서백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황실의 기이한 사건들에서 오는 미스터리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에서 피어나는 로맨스가 짜릿하게 만나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작품이다.

 

 

문득 이서백은 텅 빈 하늘 같던 자신의 인생에 어느샌가 새하얀 구름이 덧칠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5월의 맑게 갠 하늘처럼 맑은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이서백의 운명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서로 대립해도 좋았고, 얽히는 것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서백의 인생에서는 역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며 서로를 잊는 게 제일 좋으리라.   p.293

이 작품은 중국의 인기 로맨스 작가 처처칭한의 대표작이다. 중국 문학 사이트인 텐센트 QQ 독서와 장웨(iReader)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조회수는 1억 뷰를 돌파했으며, 인기에 힘입어 웹툰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2019년 현재 소설, 만화 저장수 500만을 넘기고 종이책으로 출간되어 8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독성이 굉장히 뛰어나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뚜렷한 서사 구조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작품이다.

처처칭한의 작품 중 유일한 추리물인 작품인데, 그녀가 이미 중학생이었을 적 얼개를 짜놨으며 이후 무려 13년에 걸쳐 집필을 준비했다고 한다. 긴 집필 기간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 스토리는 탄탄하고 흥미진진하며 캐릭터는 조연 단 한 명까지도 생생하고 입체적이다. 이번에 1권과 2권이 함께 출간되었고, 3권과 4권도 출간될 예정이니, 전체 4권으로 완결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반복되지만, 진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물들의 삶이다. 벼랑 끝에 몰리며 신분을 감추게 된 황재하와 알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이서백을 비롯해서 시체 해부의 달인 주자진, 욕망의 화신 황후, 강직한 가문의 수호자 왕온 등 생생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드라마를 만들어 나간다. 역사와 허구가 뒤섞이고, 황실이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와 치열한 암투극이 더욱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다. 두툼한 페이지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으니, 어서 두 번째 이야기로 달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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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아메리카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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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는 과거의 강대국이 흐릿한 햇살 속에 폐허가 된 채로 누워 있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뉴욕 업타운의 고요한 교외 지대를 말을 타고 가로질러서, 아직도 위태롭게 걸려 있는 브루클린 브리지의 동체를 타고 롱아일랜드로 건너가, 창백한 허드슨강의 유령 너머로 저지시트를 건너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붕 없는 집들, 버려진 쇼핑몰과 모래로 뒤덮인 주차장만으로도 불편한 기분은 충분했다.    p.63

20세기 중반, 석유와 석탄과 천연가스의 소비 속도가 급증해 세계의 에너지 자원이 곧 고갈될 거라는 징조가 있었다. 결국 해결 방법이 없는 전 지구적 규모의 에너지 위기가 나타났고, 한때 번영을 누리던 국가들의 경제가 주저앉아 버렸다. 파국은 순식간에 찾아왔고 10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러다 교통이 완전히 정지해 버리고, 나라 전체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숨통이 끊어져 가는 거대 도시에 만연한 폭력과 약탈을 피해 멀리 떨어진 소도시로, 안전한 농촌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도시는 차츰 텅 비어갔다. 미국인들은 마지못해 짐을 싸 들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2030년에 이르자 미국은 완전히 버려진 땅이 되고 만다. 한때 붐비던 도시들은 그렇게 고요한 폐허로 전락해버린다.

그리고 백년 뒤, 2114년 유럽에서 꾸려진 탐사대가 한 세기 전에 버림받은 대륙 아메리카로 출항한다. 아폴로호에는 선원들과 과학 탐사대 외에 몰래 밀항한 스물 한 살 청년 웨인도 있었다. 그는 제2의 아메리칸드림을 품에 안고 폐허가 된 미국을 재건해 자신이 새로운 통치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20년전 미국 원정대에 소속되어 일을 하다 행방 불명된 아버지를 찾고 싶기도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얼굴도 모르지만, 아메리카 어딘가에서 찾아내게 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아메리카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꿈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나름의 계획이었다.

 

“그래, 물론 지금 아주 치명적인 전염병이 다가오고 있긴 하단다. 아주 전염성이 높고 치료제도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지.”

“박사님도 알고 계세요?”

“알다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질병이니 말이다. 그 질병은타인이라는 이름이지. 머지않아 이곳에 도달할 게야.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원정대를 이루고, 이 땅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열의에 가득 차서……”    p.281

아폴로 원정대의 주목적은 최근 아메리카 대륙에서 검출된 방사능 수치 증가의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면서 항구에 가라앉아 버린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황금으로 가득한 뉴욕의 땅과 마주한다. 건물에서 쏟아진 금가루가 바다로 흘러 들고 있었고, 막대한 부에 대한 기대로 그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황금빛 해변과 달리 오랫동안 버려졌던 대륙에는 거대한 타워와 버려진 쇼핑몰, 지붕 없는 집들과 건물 사이 골짜기를 메운 모래 언덕들로 창백한 유령처럼 보인다. 과연 이들은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특별한 '아메리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웨인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이 되어 폐허가 된 미국을 재건시킬 수 있을까?

현대문학에서 시작하는 'JGB 걸작선' 그 첫 번째 책이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자신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진짜 '아메리카'는 맨해튼이 나 시카고의 거리나 중서부의 농업도시가 아니라 할리우드와 대중매체가 빚어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할리우드가 현실보다 훨씬 영향력이 강한 가상의 미국의 이미지를 널리 퍼트리고 있어, '미합중국'이 마치 24시간 내내 방영되는 가상현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환상으로부터 가상의 미국을 구축해, 아메리칸드림의 매력적인 껍질 아래 도사린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22세기 콜럼버스들의 두 번째 신대륙 발견 여정을 따라가면서 디스토피아 렌즈를 통해 미국 문화의 최악과 최고를 특유의 환각적인 내러티브로 보여 주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된 미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리들리 스콧 제작으로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기도 하다. 'JGB 걸작선' 그 다음 작품은 <콘크리트의 섬> <밀레니엄 피플>이 출간될 예정이다. 세계문학 단편선을 통해서만 만났던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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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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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환자의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 채취한 단 한 방울의 혈액만으로 모든 검사를 시행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기를 바랐다. 그 아이디어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엘리자베스는 직원이 공개 취업 설명회에서 빨간색 허쉬 키세스 초콜릿에 테라노스의 로고를 박아 전시했다는 사실에 무섭게 화를 내기도 했다. 허쉬 키세스 초콜릿은 소량의 혈액을 상징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생각한 혈액의 양을 전달하기에 키세스 초콜릿의 크기가 너무 크다며 화를 냈다.   p.35

엘리자베스는 환자의 집에 카트리지와 판독기를 배치하여 환자가 정기적으로 혈액을 검사 받을 수 있도록 계획했다. 판독기의 통신용 안테나는 진단 결과를 중앙 서버를 통해 환자 주치의의 컴퓨터로 보낸다.  그렇게 하면 환자가 채혈 센터에 방문하여 혈액 검사를 받거나 다음 병원 방문을 기다릴 필요 없이, 의사가 환자의 처방전을 신속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이러한 테라노스의 캐치프레이즈는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혈액 진단 기술 덕분에 환자 개개인에게 약품이 섬세하게 맞춤화되는 세상에 대해 설명하며,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을 테라노스가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말 그대로 생명을 구하는 일이었다. 저렴하고도 편리하게 질병을 발견 및 예측해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그녀의 말은 비싼 의료비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20대의 젊은 CEO 엘리자베스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로 세상 모두를 속였던 것이다. 2015 10, 월스트리트저널의 특종 기사로부터 이 거대 사기극이 폭로되기 시작하자 홈즈는 촉망받는 기업가에서 중대 범죄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처음 의혹을 감지하고 정보들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간판 기자 존 캐리루였다. 캐리루는 테라노스를 퇴사한 직원 60명을 포함해, 160명의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엘리자베스 홈즈와 회사의 운영진들이 저지른 각종 비행에 대한 증거를 샅샅이 파헤치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은 이메일을 무시했다. 테라노스에 입사한 지 8년이 된 안잘리는 윤리적 기로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연구 개발 과정에서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에게서 혈액을 자의로 제공 받아 제품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할 때는 괜찮았지만, 월그린 매장에 제품을 출시한다는 것은 승인조차 받지 않은 연구, 실험 단계의 기계를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잘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임하기로 결심했다.    p.251

2003, 스탠퍼드대학교를 자퇴한 갓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 홈즈는 첨단 의료기술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한다. 손가락에서 채혈한 몇 방울의 피만으로 약 200개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휴대용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그녀에게, 담당 교수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물이 열혈팬을 방불케 하는 지지를 보냈다. 2015년 초에 이르자 테라노스는 실리콘밸리 최고의 스타트업 기업 중 하나가 되었고, 기업 가치는 무려 10조 원까지 치솟았다. 그렇게 '2의 스티브 잡스'라고 불리던 엘리자베스 홈즈의 가짜 성공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기업가치 10조원의 기업이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스토리는 웬만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읽다 보면 이 책이 경제경영서인지 소설인지 잊어 버릴 만큼 빠져 들게 되니 말이다.

"테라노스가 운영되는 방식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동시에 버스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아요. 도중에 누군가는 죽고 말 거예요."

이 책은 뉴욕타임스 48주 베스트셀러이자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아마존 베스트셀러 10권을 지키고 있다. 그만큼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몰락한 기업 테라노스의 실화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기 대문이다. 그리고 제니퍼 로렌스 주연으로 영화가 제작 중이라고 한다.  범죄 스릴러보다 박진감 넘치는 테라노스의 성공 신화와 몰락, 그리고 아찔한 폭로전은 그 실화 그대로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희대의 사기꾼을 스크린에서 재탄생시킬 제니퍼 로렌스도 기대가 되고 말이다.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전대미문의 사기극의 실체가 궁금하다면, 희대의 테라노스 스캔들,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지금까지 이런 경제경영서는 없었다. 소설 같은 짜임새와 줄거리가 돋보이는, 웬만한 범죄 영화보다 긴장감 넘치는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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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헤르만 헤세 지음, 박희정 그림, 서유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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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내면에는 야만적이고 무질서하고 교양 없는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것부터 깨트려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위험한 불꽃을 일단 끄고 밟아 없애 버려야 한다. 자연이 창조한 인간은 종잡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다. 미지의 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와 같고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과도 같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어 내고 정비하고 강제로 제재를 가해야 하듯이 학교도 자연 상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   p.76

한스 기벤라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다. 진지한 눈망울과 총명해 보이는 이마, 단정한 걸음걸이, 명석한 두뇌까지.. 선생, 이웃, 목사, 동급생 등 모두가 그를 특별한 존재로 인정했다.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에서 이제껏 한스 같은 인물이 나온 적이 없기에, 마을 어른들이 한스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그래서 그의 장래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결정되었다. 이 지역에서 부모가 부자가 아닌 이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주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를 거치고, 신학대학에 진학해 목사나 교수가 되는 길이었다.

주 선발 고사는 국가가 주의 수재들을 선발하기 위해 매년 실시하는 힘겨운 시험이었고, 한스는 이 작은 마을에서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후보자였다. 모두의 바람대로 한스는 부지런히 공부해 시험해 합격하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라는 대로 공부만 하며 살았던 그는 그곳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헤르만 하일너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한스가 보기에 하일너는 활동적이고 자유분방했고, 자신만의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다른 고뇌가 있었고, 우울과 슬픔을 소중한 것인 양 즐겼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두 사람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친구 관계였다. 경박한 학생과 성실한 학생, 시인과 공부벌레의 조합이었으니 말이다. 공부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압박과 동급생의 죽음을 겪으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던 한스는 하일너와 가까워지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한스는 우정에 열정적이고 행복하게 매달릴수록 학교와는 점점 더 멀어졌다. 새로운 행복감이 갓 담은 포도주처럼 한스의 피와 생각을 짜릿하게 지배했고 리비우스는 물론 호메로스도 중요성과 광채를 잃어 갔다. 교사들은 지금까지 흠잡을 곳이 전혀 없는 학생이었던 기벤라트가 문제 학생으로 변해 가고 수상쩍은 하일너에게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p.151

같은 작품인데도 읽을 때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 문학들이 그러하다. 학창시절 읽었던 책을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다시 읽었을 때, 여전히 그 작품이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10대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는 지금 다시 읽는 헤르만 헤세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학창시절에는 어렵게 느껴지거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고 보니, 쉽고도 보편적인 이야기로 바뀌어 읽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말이다. 게다가 개성이 무시된 권위적이고 규격화된 제도와 교육으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적인 삶의 모습은 현대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여전히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계 명작 고전을 감각적인 일러스트로 재해석하여 보다 젊고 새로운 감성으로 표현한 위즈덤하우스의 비주얼 클래식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헤르만 헤세가 실제로 경험하고 괴로워했던 삶의 한 조각을 담은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박희정 만화가와 함께 콜라보레이션해서 섬세하고 감각적인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미 오래 전에 읽었고, 여러 판본으로 가지고 있는 책이지만 이렇게 매혹적인 표지와 일러스트로 재탄생한 작품이라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시 읽게 되는 것 같다. 특히나 박희정 작가의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한스와 하일너의 모습 또한 너무도 매력적이다. 그러니 이미 다른 판본으로 가지고 있더라도, 이 작품은 소장용으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혹시 아직까지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에 아름다운 표지와 일러스트로 무장한 이 작품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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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 Tour 카페 투어 - 카페에 빠진 인스타그래머가 추천하는 국내 카페 105
장인화 지음 / 책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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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카페 흐름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울.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카페가 많은 연남동을 비롯해 성북동, 송파동, 성수동 주변에 개성 있는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연남동은 이름난 카페들이 가까이에 모여 있어 투어 하기 편리한 편. 한갓진 분위기를 원한다면 성북동을, 개성 잇는 카페를 경험하고 싶다면 성수동을 추천한다.

이제 카페라는 공간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한 이유만으로 가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카페 투어가 하나의 취미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나 역시 워낙 커피와 디저트를 좋아하고 즐기기도 하지만, 친구와 만나 하루에 카페만 연속으로 두 세 곳을 가본 적도 있고, 카페 투어를 위해서 하루에 커피를 서너 잔 마신 적도 있다. 특히나 요즘은 인스타그램에 예쁜 카페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기에, 나도 시간이 나면 새로운 카페를 찾아보기 위해 SNS를 찾아 다니곤 한다.

이 책은 카페에 빠진 인스타그래머가 추천하는 국내 카페 105군데를 담고 있다. 저자가 잡지사 에디터였기도 하고, 현재도 프리랜서 에디터로 카페, 음식, 리빙숍 등을 취재해서 그런지 사진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마치 잡지를 보는 듯 트렌디하고 세련된 책이다. 얼마 전에 일본의 파워 인스타그래머들이 소개하는 카페들을 다룬 책을 읽은 책이 있었는데, 국내의 카페들도 그렇게 소개해주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바로 이 책이 그간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었다. 특히나 서울의 핫한 명소들만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천, 수원, 경기도, 청주, 대전, 대구, 강원도, 부산, 제주 등등 정말 우리 나라 곳곳을 다니며 취재한 것이라 이 책을 통해 카페 투어 여행을 아예 계획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서울과 쌍벽을 이룰 만큼 감각적이고 근사한 카페가 많은 부산. 특히 일본과 가까이 접해 있어 일본풍 분위기의 카페가 많다. 참신하고 아기자기한 디저트를 선보이는 카페는 물론, 눈앞에서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그림 같은 경치의 카페도 다양하다. 카페 투어만 하며 3 4일 여행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

사진 찍기 좋은 카페도 있고, 시그니처 메뉴가 유명한 카페도 있고, 디저트가 정말 근사하게 플레이팅되어 나오는 카페도 있다. 이국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곳도 있고, 런던, 스위스, 교토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의 카페도 있었다. 서울은 웨이팅을 많이 해야 하는 대신 트렌디한 카페가 가장 많은 곳이고, 인천, 수원 등은 그에 비해 조금 여유롭게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전통문화의 도시답게 고즈넉한 분위기의 전주와 완주 카페,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거제와 통영 카페,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일본풍 분위기가 많은 부산의 카페, 감귤밭이 드넓게 펼쳐진 제주의 카페 등등... 전국의 아름다운 카페들을 여행하고 싶어 졌다.

보통 SNS에 소개되는 카페들은 시그니처 메뉴 위주의 사진들이 많은데, 이 책에는 각 카페의 감성을 살릴 수 있는 사진들이 많아 더욱 좋았다. 카페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볼 수 있어 한 눈에 어떤 카페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페의 주소, 전화번호, 오픈 시간과 대표 메뉴, SNS주소와 주차장 유무 등에 관한 정보를 각각 담고 있어, 실제로 여행 가이드처럼 이 책을 들고 카페 투어를 가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카페 정보 아래에 QR코드가 수록되어 있어 위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길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카페를 간다는 것은 빡빡한 일상 속에서 누리는 나만의 작은 사치이자 힐링 포인트가 된다. 지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가까운 '카페로 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떨까. 그러한 소소한 행복들이 쌓여 내일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고, 조금 더 일상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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