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하루, 밤에 피는 꽃 웅진 지식그림책 53
라라 호손 지음, 홍연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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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예쁜 그림책을 만났다. 웅진 지식그림책 53, 라라 호손의 <일 년에 하루, 밤에 피는 꽃>이라는 작품이다. 사와로 선인장이 일 년에 한 번 꽃을 피우는 그 하루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노란 사막은 미국 남서부에서 멕시코 북서부까지 펼쳐져 있는 넓디넓은 사막이다. 이곳에는 '사와로'라는 아주 특별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이 거대한 선인장은 일 년에 딱 하루만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 선인장은 길이 15미터에 무게가 9톤이나 되는데, 수명이 200년 정도 된다. 조직의 반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덕분에 유사시 인디언의 음료수로 이용되기도 한다.

드넓은 사막의 밤, 일 년에 한 번뿐인 꽃 축제를 즐기기 위해 사막의 여러 동물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일 년에 딱 하루라 꽃이 피어 있는 시간은 짧지만 화려한 꽃잎을 활짝 펼치고 달콤한 향기를 내뿜어 박쥐와 나방, 비둘기 같은 꽃가루 매개자들을 불러들인다. 이 동물들 덕분에 사와로의 꽃가루는 멀리까지 퍼질 수 있다고 하는데, 그 특별한 하루는 사막의 여러 동물들에게는 마치 축제와도 같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사막에 사는 독특한 곤충들과 동물들을 만나게 되는 점이 특별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무지개메뚜기, 긴 줄무늬 꼬리를 가진 호랑이꼬리고양이, 늑대의 축소판이라하는 남부메뚜기쥐, 나는 것보다는 땅 위를 달려 움직이는 갬벨메추라기, 세상에 알려진 단 두 종류뿐인 독액을 뿜어내는 도마뱀 중 하나인 아메리카독도마뱀 등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와로의 친구들은 모두 낯설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다.

페이지를 펼치면 드넓은 사막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분홍, 주황, 노랑, 빨강.. 사막에 꽃들이 활짝 피어난다. 햇볕이 점점 땅을 뜨겁게 달구는 한낮의 열기 속을 지나, 사막에는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기온이 떨어지며 밤이 다가온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찬란한 달빛 아래 사와로 선인장에는 새하얀 꽃들이 피어 오른다.

따뜻한 대지와 붉은 해가 떠오르고 시간이 지나 밤이 되며 색상이 변해가는 사막의 하늘, 싱그러운 초록빛을 뿜어내는 사와로 선장과 알록달록한 저마다의 개성과 색상을 가지고 있는 사막의 여러 동물들이 페이지 하나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살아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바로 계절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푸릇푸릇한 봄부터, 시원한 초록빛의 여름, 노랑, 빨강으로 물드는 가을, 회색과 무채색의 겨울의 모습을 모두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각 계절에 맞는 꽃과 나무, 곤충들의 모습 또한 너무도 경이로운 자연이 줄 수 있는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아름다운 광경들을 놓치며 산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가 잊어 버리고 살고 있는 풍경들을 자연의 경이로움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재현시키고 있다. 단순하지만 우아한 선과 따뜻한 채도의 생동감 있는 컬러들로 표현된 사막의 하루는 그림이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도 따뜻하게 느껴지고, 무더운 날씨도 생기 있게 보이며, 페이지 여기저기에서 달콤한 꽃내음이 나는 것만 같다.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희끄무레한 나방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한 가득 피어난 사와로 꽃에서 나는 진한 향기가 책 속에서 묻어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무더운 여름 밤, 사막의 동물들과 함께 자연의 신비로운 여행을 떠나 보자. 사막의 아름다운 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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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실험실 - 위대한 《종의 기원》의 시작
제임스 코스타 지음, 박선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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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의 따개비 연구가 끝났을 때쯤에는 다윈의 아이들도 아버지가 집에서 실험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무척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때 다윈의 첫째 아이가 15살이고 막내는 세 살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따개비를 연구하는 모습을 내내 보며 자랐다. 다윈 가족의 이웃이었던 존 러벅은 이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다윈의 아이 중 하나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집에 현미경이나 해부 도구가 없는 것을 보고, 그러면 네 아빠는 따개비 연구를 어디서 하시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다윈의 아이들은 다른 아빠들도 모두 따개비를 연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p.115~116

신이 이 자연을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이 주류이던 19세기 초반, 찰스 다윈은 그러한 믿음에 의심을 품었다. 자연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위대한 지적 탐구는 40년 동안 가족과 함께 살았던 다운하우스의 시골집 뒷마당 실험실이었다. 그의 집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집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개구리 알을 덮은 축축한 종이로 복도가 어지러웠고, 뒤뜰 새장에서는 비둘기들이 요란하게 울어 댔으며, 온갖 씨앗을 둥둥 띄운 소금물로 가득한 항아리가 지하 창고에 수두룩했다. 모아둔 비둘기 뼈 때문에 악취도 진동했는데,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렇게 다윈은 끊임없이 기이한 실험을 했던 빅토리아 시대 괴짜 박물학자쯤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러한 실험 덕분에 오늘날 생물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역사적인 인물이 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웠던 진화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 모든 과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화학, 생물학, 해부학, 박물학, 지질학 등등 다윈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고, 끈질긴 관찰과 투철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친구, 사촌, 조카, 어린 자녀들은 물론이고 집사와 가정교사까지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연구에 참여시켰다. 딱정벌레를 수집하고, 전 세계에서 수집한 비둘기를 키우고, 온실에서 덩굴식물을 기르고, 벌들을 쫓아다니며, 파리지옥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먹이로 주고, 지렁이와 대화를 나누며 합주곡을 들려주는 등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실험들이 펼쳐지는데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항상 바보처럼 실험한다'는 다윈이 말처럼 그의 행보는 어딘가 웃음을 자아내는 구석이 다분했다. 그럼에도 '천재가 하는 바보 같은 실험'은 결국 위대한 발견을 해내는 도약의 발판이 된다.

다윈의 관점이 언제나 옳은 사실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기의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끈기와 독창성을 발휘하는 모습은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교훈을 시사한다. 그 동안 해왔던 수많은 견구처럼 분산의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그가 오랜 시간 소박한 방식으로 기발한 실험을 실행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은 약간의 독창성과 자원을 활용하는 지혜가 거의 전부가 아닐까 한다.   p.271~272

다윈의 <종의 기원>이 그가 청년 시절 5년간의 역사적 항해 동안 남미와 대서양·태평양·인도양을 넘나들며 수많은 동물·식물을 채집하여 연구한 것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20여 년 동안, 진화론을 입증할 방대한 증거와 자료들을 수집했던 그 긴 과정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비글호의 좁은 선실에서 시작된다윈의 실험실은 이후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다운하우스 시골집의 서재와 복도 그리고 정원에서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했던 실험들이 무슨 거창한 도구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도구와 재료를 갖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는 매 장마다 '다윈의 실험' 이라는 메뉴로 다윈이 했던 여러 가지 실험들을 실생활에서 직접 재현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씨앗 날리는 실험, 다윈이 변이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게 했던 따개비 관찰, 잔디밭 실험구 만들기, 벌집 분석과 비눗방울 실험, 식충식물 관찰하기 등등.. 누구라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직접 참여해볼 수 있는 실험들이 위대한 다윈의 이론의 바탕이 된다니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책은 <종의 기원>을 대중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교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열정의 실험가이자 10남매의 아빠, 자상한 남편, 다정한 이웃으로서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찰스 다윈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별한 재미도 준다. 그리고 근대 과학사의 흥미로운 장면들을 직접 엿볼 수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고, 평범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어린아이의 눈높이로 모든 현상에서 '' '어떻게'를 질문하는 것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놀라운 과학적 발견의 탄생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 감동적이기도 했다. ‘위대한 이론의 탄생 현장에 함께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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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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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로 판결해버리면 판사는 마음 편하다. 억울한 죄인을 만들 가능성은 제로가 되니까. 하지만 그걸로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피해자가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놓고서, 정작 처벌을 맡은 국가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법관은 당위 말고 다른 건 고려할 필요 없어, 하고 외면하면 그만일까. 살의를 품은 예비 범인을 안심시키는 판결이 되지는 않을지 한 번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완전 입증을 요구할수록 오판 가능성은 낮아진다. 판사의 마음은 이쪽이 편하겠지만 그만큼 완전범죄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판사는 그 책임은 지지 않는다.   p.53

작가이자 판사로, 이제는 변호사로 활동 중인 도진기 작가의 신작 논픽션이다. 도진기 작가의 국내 출간작들은 거의 다 읽었지만, 어쩐지 이번 신작은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라서 더 기대가 되었던 작품이다. 아무래도 그가 장편소설을 여덟 편이나 발표한 소설가이긴 하지만, 판사로, 변호사로 법의 최전선에 여전히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이나 실망시키지 않는 작품이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들도 등장하고, 구체적인 사건 전개 과정 등이 나열되는 등 다소 딱딱할 수도 있는 글인데도 너무 술술 잘 읽혀서 깜짝 놀랐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논픽션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에는 도진기 작가가 변호사가 된 후 2017 7월부터 2018 8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판결의 재구성> 원고와 각 파트 끝에 조선일보 <일사인언> 코너에 쓴 짧은 수필들이 수록되어 있다. 도진기 작가가 경향 신문에 연재한 '판결의 재구성'을 가끔 읽었었는데, 이렇게 한 권의 책에 담아 놓고 보니 정말 훌륭한 논픽션이 된 것 같다. 김성재 살인사건, 낙지 살인사건, 이태원 살인사건,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등등...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다 알고 있는 그 사건들의 실제 판결 과정과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가 도진기가 20년 판사 생활을 통해 들여다본 가장 뜨거웠던 30번의 판결들을 모은 것인데, 사건이 아니라 판결을 들여다본다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건의 제목만 보고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사실들, 언론에 숱하게 보도 되었던 정보들의 나열이 아닐까 추측했던 점은 책을 읽으면서 완전히 판단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중의 입장에서 들어서 알고 있던 정보들의 나열과 실제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해당 사건들의 진행 과정과 판결을 낱낱이 분석해서 도출한 사실들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생생한 논픽션의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틈으로 인해 진범을 놓치는 일은 안타깝다. 그러나 그 틈을 메우는 건 법 이론이 아니다. 합리적 의심 기준을 완화하면 억울한 이들이 생기기 쉽고, 반대로 강화하면 범인이 빠져나가기 쉽다. 여기서 필요한 건, 혹은 앞으로 더 필요한 건 수사 기술과 시스템이다. K 순경 사건에서처럼 현장 경찰관의 엉성한 기록만을 믿고 법의학적인 판단을 해서는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외부인 침입 가능성'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초동 수사에서의 법의학적 자료 확보와 과학적 분석, 감정 같은 것들이다. 그 발전이 언젠가 법률가들을 '합리적 의심'에 대한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시킬지도 모른다.   P.287~288

이 책의 부제는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이다. 사람들은 재판이 재판 외적인 이유로 왜곡되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도진기 작가도 이 책을 통해 말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같은 말은 이젠 거의 법정에 대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의 클리셰가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법정 밖의 시선과는 다르게 법정 안의 일반적인 정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무의식적인 편향이 있을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달리 대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이니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을 테고, 실제로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로 재판에서 유리하게 판정이 되곤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차별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판결의 안쪽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판결을 위해 고민하는 작가의 시선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각각의 사건에 대한 케이스에 대한 과정과 판결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나면, '그저 공상에 불과한 것인데'로 시작하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법률가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몽상이라며, 비법률가적인 공상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런 대목들을 가장 흥미롭고, 통쾌하고, 속시원하게 읽었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건의 부당함과 안타까움도 담고 있고, 추리소설 독자로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상력도 놓치지 않으면서, 법률가로서의 통찰력도 있는 의견들이기 때문이었다. 판결의 논리와 상식이야말로 시민의믿는 구석이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던 이유도, 올바른 판결이 시민들의 억울함을 풀고 법의 힘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줄 거라는 믿음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보였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각 파트의 끝에 수록된 짧은 에세이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주로 그의 독서 편력을 엿볼 수 있는 책에 관한 짧은 단상들인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가 20대에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들, 교고쿠 나쓰히코의 <망량의 상자>와 오쓰이치의 <GOTH 고스>에 대한 특별한 리뷰,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홍보문구를 떠올렸던 이유 등등... 도진기 작가의 개인 서재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들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작년에 문유석 판사님도 쾌락독서라는 책을 쓰셨는데, 도진기 작가님의 독서, 책 읽기에 관한 에세이도 따로 책으로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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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 한강의 기적에서 헬조선까지 잃어버린 사회의 품격을 찾아서 서가명강 시리즈 4
이재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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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시대다. 산업화에 성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정작 국민 대다수는 이 모든 업적을남의 이야기라고 느낀다. 행복감은 떨어지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민주화를 이룬지 30년이 넘었는데, 정작 투표장에 가는 유권자는 줄었다. 촛불혁명을 이루었다는데, 시민의 정치효능감은 바닥이다. 풍요의 역설이자 민주화의 역설이다.   p.11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이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은 2017년 여름부터서가명강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다른 주제의 강의를 펼쳤으며, 이 배움의 현장을 책으로 옮긴 것이 바로 서가명강 시리즈이다.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 생명과학부 홍성욱 교수, 수학교육과 최영기 교수에 이어 이번에는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가 바톤을 넘겨 받았다. 이 책은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가 한국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안한 대중교양서이다.

제목부터 임팩트가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대부분 부정적인 답변을, 고민도 없이 하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서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정작 국민 대다수는 이 모든 업적을 '남의 이야기'라고 느낀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개인의 생애와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사회의 역사라는 세 꼭짓점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이러한 역설의 시대에서 '사회의 품격'이야말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이다.

 

 

기본적으로 인권선언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것이 사회구조다. 그래서 사회구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불평등이다. 불평등이 구조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에 그치지 않고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굳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p.134~135

겉으로 보기에 한국은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기적의 나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 스스로는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의 마음은 '불신, 불만, 불안'으로 가득하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한데 자살률은 급증하고 행복감은 폭락했으며, 정치적 냉소로 인해 투표율 또한 폭락했다. 저자는 이처럼 역설적인 사회현실을 들여다보면서, 한국사회가 이러한 역설에 빠지게 된 이유를 짚어 본다. 사회 시스템이 만드는 마음의 습관을 살펴보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와 이후 등장한 에코 세대(1979~1992년생)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세대 간에 드러나는 뚜렷한 갈등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인간적으로 살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해결책을 여러 가지 데이터와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는데,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매우 쉽게 읽혀 흥미로운 책이기도 했다. 나 역시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가 별로 없는 사람 중 하나라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서두에서 '독자들이 사회학이 가진 종합적인 상상력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문구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사회의 품격'이라는 낯선 단어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언젠가는 우리 나라도 '살고 싶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조금 가지게 된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과거 경험과 전혀 다를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이 책을 통해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드리는 평온함을 갖기를, 그러나 바꿀 수 없는 것은 과감히 바꾸는 용기를 발휘하기를, 아울러 이 둘을 구별하는 예리한 지혜를 갖기를' 나 역시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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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뇌
케빈 데이비스 지음, 이로운 옮김 / 실레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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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래 정상적이고 비폭력적이던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머리에 가해진 충격, 뇌손상, 또는 기타 신경학적 이상이 그렇게 평소 성격과 전혀 다르고 폭력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을까? 그 가족에게 닥친 더 무서운 사실은 데이비드가 살인 미수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뇌가 손상된 것이라면 책임은 어디까지 져야 할까? 데이비드는 중대한 흉악범죄를 저질렀고 법의 잣대로는 기소 당해 마땅했다.   p.89

1991년 뉴욕에서 광고업에 종사하다 은퇴한 65세의 남성인 와인스타인이 말다툼 중에 아내를 살해했다. 전과기록이나 폭력 행동 이력은 전혀 없었다. 원래 평범하고 차분하고 침착하며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그가, 어느 날 아내의 목을 조른 후 12층 높이의 아파트 창문으로 아내를 내던질 수 있는 걸까? 변호인은 와인스타인이 뇌에 있는 낭종 때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미국 최초로 재판부가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PET(양전자 방사 단층 촬영)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도록 허락한 사건이었다. 뇌를 다치면 온화하던 사람도 폭력적인 성향으로 바뀔 수 있는 걸까? 과연 그는 뇌 이상으로 인해 아내를 살해하는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 걸까?

범죄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여러 해 동안 범죄 사건을 다루면서,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온갖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손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범행을 학대받 은 어린 시절, 가난, 알코올, 약물 남용 또는 나쁜 친구들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 중 일부는 이해와 동정을 얻어 징역 대신 치료를 받게 되고, 또 일부는 과부하 걸린 형사사법제도하에서 비웃음 당하고 만다. 그는 뇌이상 항변이 일리가 있는지, 법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가벼운지에 대해 알고 싶어 신경과학과 법의 세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지지해줄 전문가를 찾아냅니다. 그 전문가의 역할은 의뢰인의 입장을 열심히 변호해주는 것이고요. 진실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어지는 것이죠." 메이버그의 말이다. "신경과학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동일한 자료를 놓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요. 실험을 되풀이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과학자들이 실험을 약간 변경할 수도 있거든요."   p.168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악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 원인을 궁금해한다. 폭력이라고는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던 남자가 어느 날 아내를 살해하고, 유능한 공사감독관이었던 남자는 뇌를 다친 후 폭력적이며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다정다감했던 가장은 계단에서 넘어진 이후 아내와 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운동 중 뇌진탕을 자주 경험했던 미식축구 스타가 끔찍한 가정폭력을 저지른다. 이들의 갑작스런 범죄 행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뇌 손상과 이들의 행동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면밀한 관찰과 취재, 과학적 증명, 심리학, 사회학, 뇌과학, 신경과학을 넘나드는 심층 연구를 통해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진짜 이유를 밝혀내고 있다. 물론 법정에 선 '범죄자의 뇌'라는 테마는 실제로 현대 법률에서 가장 뜨겁고도 격렬한 논쟁의 주제이기도 해서, 책을 읽는 내내 명쾌하게 어느 한쪽으로 정답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법에서 형을 면해줄 수 있다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좀 더 합리적인 사법제도, 범죄자에게 책임을 지우면서도 범죄자의 생각을 이해해볼 여지가 있는 제도를 만들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이 있는 사람이 정신이 건강한 사람과 반드시 같은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과 이 불행한 범법자들은 이성적이거나 자발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어느 정도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이상이 있다고 해서 범죄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거나, 정상 참작이 되어 죄에 합당한 형벌이 아니라 치료를 받는 등의 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 쉽게 수긍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악용하는 범죄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신이상에 대한 의학적 해석과 법적 입장의 차이로 인한 공방도 있고, 무엇보다 시작이 어쨌든 결과적으로 중대한 흉악범죄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했으니 법의 잣대로 기소 당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웬만한 스릴러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최고의 논픽션'이라는 마이클 코넬리의 추천평처럼 전혀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게,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범죄자의 뇌, 그리고 법정에서의 신경과학이라는 이슈는 모두 함께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속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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