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살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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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시 무차별 살인이었는지 몰라.'
고즈에는 그런 체념 속으로 점점 침식되어 갔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생각해 봐도 사건 이전에 구츠와 기미히코라는 소년과 접촉한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슈타라의 가설에 절대적인 설득력을 부여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거야... 누구라도... 나는 단순히 운이 나빴어... 그것뿐... 하지만... 하지만 과연 내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p.169

 

오후 여덟 시, 불빛도 드문드문하고 인기척도 별로 없는 밤에 이치로이 고즈에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익숙한 동네였고, 치안도 좋은 편이라 그녀는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무방비한 상태였다. 맨션 앞 도로 근처에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려 둔 것에 대한 불쾌함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알아 차리지 못했다. 투고 마니아였던 고즈에는 이런 일이야말로 신문에 투고를 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팔린 채로 집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스위치를 찾아 실내의 전등을 켠 순간, 무언가에 걸려 문이 닫히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보는 그녀의 등을 갑자기 누군가 난폭하게 떠밀며 들어왔다. 괴한은 덩치가 크고 단단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고즈에를 공격했던 것은 총 네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한 살인 혹은 살인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전국에 수배가 내려졌지만, 결국 범인의 행방을 찾지 못한 채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4년이 지났지만, 의사, 초등학생, 노인, 회사원 등을 대상으로 무차별 연쇄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고즈에는 이후로 일종의 대인 공포증과 함께 불합리한 극한 상황 혹의 공포에 대한 트라우마로 여전히 시달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범인이 잡히지 않아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스터리 작가와 전직 형사 등이 멤버인 추리 집단 <연미회>에 사건 조사를 의뢰하게 된다. 4년 전 사건 당시 신참으로 사건을 수사했던 나루토모, 수많은 미스터리 베스트셀러 소설을 집필한 대가인 백발노인 오츠카와, 미스터리 작가 겸 에세이 작가인 이국적인 미모의 아리사, 전직 현경 출신으로 사립 탐정 회사를 경영중인 야스노리, 대학강사이자 범죄 심리학자인 유미코, 본격 미스터리 작가인 아츠시까지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4년 전에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의 수수께끼를 어떻게든 풀어 보기 위해서. 과연 추리 전문가들의 가설과 새롭게 밝혀진 증거로 진실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고즈에에게 있어선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설이었다. 가능하면, 아니 절대로 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가능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스스로 적당히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다니. 희극이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부조리한 희극이며, 동시에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비극이기도 했다. 그것은 당사자로서 정신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p.324~325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직구 같은 정통적인 것보다는 변화구적인 본격 미스터리가 장기인 작가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평범한 소재도 특별하게 바꿀 수 있는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SF적 설정인 ‘시간 루프’를 미스터리에 도입하기도 하고, SF를 가미한 초현실적인 설정에 반전을 거듭하는 롤러코스터식 추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작품 역시 구성과 플롯이 흥미롭다. 커다란 구성은 '미궁에 빠진 연쇄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안락의자 탐정들의 릴레이식 추리 향연'이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졌던 서두의 이야기가 짧게 지나가면 대부분의 분량은 이들 <연미회> 멤버들이 사건에 대해 각자의 의견으로 토론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이다. 현직 경찰과 탐정, 그리고 범죄 심리학자와 미스터리 작가들이라는 각자 나름 범죄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모였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웠다.

 

추리 전문 집단의 설전은 범행의 동기와 피해자들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미씽링크’, 현장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범인의 ‘밀실트릭’, 정교한 복선의 ‘서술트릭’을 통하여 ‘와이더닛’과 ‘후더닛’의 수수께끼 풀이를 하는 묘미를 느끼게 해주며 점차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 그래서 실제 범인을 추적하거나, 쫓고 수사하는 과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후반부에 남겨져 있는 충격적인 반전의 임팩트 또한 매우 오싹하고도 인상적인 여운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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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인맥 수업 - 세계 최고의 엘리트 곁에는 누가 있는가
코니 지음, 하은지 옮김 / 꼼지락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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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 나가면 친구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별로 저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SNS 계정이 없다고 하거나 휴대전화 번호는 알려주기 좀 그렇다고 말하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상대와 당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해줄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떤 매력을 지녔는가?   p.44

 

살다 보면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일, 인간관계, 연애, 돈 등등..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한데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관계'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디서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인간관계라는 것이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관계란 것은 혼자 애써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한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면 탁월한 인맥을 가지고 있고, 누구와도 자연스레 관계를 맺는 능력은 천부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베이징 대학교 국제경제학과와 하버드 경영대학원 MBA 졸업 후 제너럴일렉트릭(GE), LG전자 등 글로벌 회사에서 근무한 저자가 20여 년에 걸친 사회생활 경험을 통해 ‘영향력이 있는 사람과 교제하고, 자신 역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진정한 인맥은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르던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적극적인 내 사람으로 만들어 나와 그의 지식과 네트워크를 기꺼이 공유하고, 서로의 성공을 돕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맥이라는 거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통해 소통과 관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기술'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알려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사귀고 싶어 하는 대상이 되어 인맥의 달인이 될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많은 이들이 내게 평소에 늘 사람들을 만나 식사하고 그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일일이 다 챙기면서 관리까지 하면 너무 바쁘지 않느냐고 묻는다. 실제로 그렇다.... 사실 인맥 다지기는 일종의 생활 방식이자 습관이다. 아마 매일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시간을 모두 계산하고 기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일까? 이미 습관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맥 다지기를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지 다음 일곱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p.157

 

구글에서 '사회 공포증'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약 5만6천 개의 결과가 나온다. 인터넷 서점에 '인간 관계'라는 단어를 검색해도 수백 개의 관련 책들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늘 자신감이 부족해서 걱정이고, 먼저 다가가서 말 거는 게 어색하고, 대화 중간에 말이 끊기는 상황이 너무 힘들고, 누구는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누구는 과거에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던 탓에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부터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단계별 노하우, 의미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 질문하기, 온라인 인맥 관리를 위한 SNS 운영 원칙, 상사와 동료를 내 편으로 만드는 법, 단단한 인맥을 다져주는 ‘식탁 교제’ 등 '관계 맺기'를 위해 필요한 모든 노하우가 총망라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원론적인 얘기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모든 방법들이 실제 사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내성적인 사람의 인맥 넓히기, 낯선 사람과 가까워지는 비결 등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팁이 될 것 같았고,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인맥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직장 초년생은 물론 중간관리자나 경영자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 내용이었다. 요즘 유튜버들을 비롯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아 젊은이들에게 또 하나의 선망 직업이 되고 있으니, 온라인 인맥을 위한 SNS 운영법도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많았다. 저자는 어떻게 졸업과 동시에 5개 기업에 동시 합격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신입사원이었을 때 2천만 달러의 미수금을 회수할 수 있었을까? 답은 바로 '인맥력' 이다! 인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마법처럼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철저히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스펙이다. '누구를 아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면, 성공이나 행복의 많은 부분이 인맥에 달려 있는 셈이다. 자, 하버드가 전하는 관계 맺기의 6가지 기술을 통해 당신도 인맥의 달인이 되어 보자. 여기 당신을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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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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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녀들에게 분명히 선언한 메시지가 두 가지 있었다. 시간을 잘 지켜라. 그리고 변명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그는 늦어서 무슨 알리바이를 댈지 수십 가지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자기 생일 전날 엄마를 묻으러 가게 되다니. 그의 마지막 생일이 될 터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명령을 선포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불러들였다. 이 생일은 아무도 잊지 못할 완벽한 파티가 되리라.     p.43

 

죽음이란 참으로 우습고도 현실적인 농담이다. 물론 이는 해질녘을 향해 점점 빨라지는 카운트다운을 체감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노인들이라면 어린 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막상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는 생각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일흔을 목전에 둔 빅 엔젤 역시 이제껏 크리스마스 아침을 예순아홉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전혀 충분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암 선고를 받은 그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잊지 못할 자신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온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런데 생일 일주일 전, 100세가 된 빅 엔젤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만다.

 

결국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일주일 미뤄서 자신의 생일 파티와 함께 진행하기로 한다. 여기 저기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생일 파티를 위해 먼 길을 두 번이나 올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70세 아들의 생일 파티와 100세 어머니의 장례식을 같은 날 한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발상이냐 싶겠지만, 이상하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시끌벅적 유쾌한 이런 가족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멕시코인이고, 멕시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지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4대를 아우르는 대가족의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 수가 없다. 이들 가족들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독설이 난무하지만 그 속에서 웃음과 유머가 묻어나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일흔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본인이야 모든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상 아무것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걸 어떻게 해야겠다는 필요성도 간절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생일날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껏해야 20년 정도 더 살겠군.' 그리고 한 해 한 해가 점점 어둡게 저물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15년 남았군.' '10년 남았나.' '이제 5년 정도겠군.' 그러다가 아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사는 게 뭐 대수라고. 내일이라도 버스에 치여 죽을 수 있어! 언제 골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p.150

 

이 작품은 시작부터 장례식으로 시작하고, 곧 죽을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극중 빅 엔젤이 하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허풍을 떨고' 유쾌한 기조를 잃지 않는다. 재혼한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나 소외감을 느끼고,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하고, 데드메탈에 빠져 소리만 질러대기도 하고, 미군에게 속아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리고,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기도 하고, 결혼생활의 힘겨움을 토로하고.. 세상 모든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전부 다 보여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이들 가족에게는 바람 잘 날이 없다. 빅 엔젤과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어머니를 기리면서 소중한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오백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 동안 실제 흘러가는 시간은 단 며칠이지만, 이들 대가족의 수십 년 동안의 세월이 모두 담겨 있어 묵직한 시간의 무게를 안겨주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는 이 작품을 실제 형의 마지막 생일 파티에서 영감을 받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재치 있는 문체로 그려내어 “현대의 마크 트웨인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필립 로스와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을 영화화한 스콧 스테인도프의 지휘 아래 할리우드 TV 시리즈로 영상화될 예정이기도 하다. 웃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한 편의 가족 시트콤 같은 작품이라 TV 시리즈로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이야기였다. 가족,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그래서 더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는 관계. 가족이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라 그만큼 더 소중히 배려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작품을 통해 모두 자신의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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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은 끝! - 일을 통해 자아실현 한다는 거짓말
폴커 키츠 지음, 신동화 옮김 / 판미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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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일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아니라 언어의 힘을 다룬 이 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통찰이다. 이 통찰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일이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명하려던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삶에 전반적으로 얼마나 만족하느냐고 물었을 때 직업이 있는 사람의 행복도는 직업이 없는 사람보다 높다.    p.10~11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마주하게 되는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일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라는 문장은 살짝 당혹스럽다. 사람들이 일은 좋아하지만 일하기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일에 관해 하는 거짓말이다" 라고. 우리는 머릿속에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일은 좋아하지만, 막상 일을 직접 하기에는 질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직장 생활은 이상적인 이미지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을 이상에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관념을 실제로 맞추는 것이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심리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거짓된 환상들에 속지 말고,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으로 일을 대하자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직업이나 일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실제 일하기는 싫어하는 이유가 '일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실제 일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라는 말에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러니 일에 대한 환상과 거짓말들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직장에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이라는 옷은 인간관계라는 옷감으로 짜여 있다. 우리는 상대방에 자신을 투영하고, 상대방과 마찰을 경험하고, 상대방 고유의 사용설명서를 해독한다... 그리고 이로써 자기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자꾸만 업데이트해 나간다. 이것이 바로 많은 이가 엉뚱한 곳에서 헛되이 찾는 진정한 도전이다. 점잖든 천박하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인생은 계속된다.    p.87

 

'직장 생활에 대한 거짓된 환상들'이라는 장은 특히나 공감하며 읽었다. 열정을 불태우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장한다? 자유롭게 무언가 만들어 낸다? 일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 나는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아마도 이론적으로 혹은 이상적으로 보자면 모두 정상적인 문장들이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 이다. 이 문장들이 모두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거짓말들이라는 것을. 열정이 지나치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나머지 삶이 일 속에서 증발해 버릴 위험이 있고, 일은 도전이 아니라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며, 자신의 '자아'란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니 일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 대체 불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일을 둘러싼 각종 거짓말들을 짚어내고, 일에 대한 환상을 걷어 내고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저자에 따르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에 실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면, 오히려 솔직함을 통한 새로운 동기 부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일에 열정을 불태워도 좋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진실로 만족하고 생산적이고 건강할 수 있다.” 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자신의 일에 실망하거나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새로운 마음가짐을 안겨줄 것 같다. 당신이 일하기 싫은 건 잘못이 아니다. 일단 집에 가자. 내일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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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경찰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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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척 상황이라.....'
내가 하는 일이 대체 뭔가, 라고 세라는 생각했다. 사람 하나가 죽었는데 그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하면서 무슨 교통과 사고 담당자인가.
하지만 그런 불만을 후쿠자와에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 사고 이후로도 몇 건의 인신사고가 일어났고, 마치 교사가 시험 채점을 하듯이 서류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p.86

 

늦은 밤, 한산한 도로에서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치고 옆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맞은편 차선에서 달려오다 충돌한 승용차 운전자는 손목에 붕대를 감는 정도의 가벼운 부상만 입었지만, 트럭 운전자는 사망하고 만다. 이상한 건 트럭 운전자가 교통 법규를 위반한 적도 없는 무사고 운전자였으며, 동료들이 그의 운전이 너무 점잖다고 놀릴 정도였다는 거였다. 사고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은 트럭이 뭔가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꺾다가 타이어가 미끄러지면서 중앙분리대를 치고 넘어간 것 같다는 판단에 목격자를 만난다. 사망한 운전자의 아내인 아야코가 담당 경찰인 세라와 동창이라 그들은 함께 의심되는 노상 주차 운전자를 찾아 내지만, 안타깝게도 법적으로는 운전자의 과실을 증명할 수가 없다. '법규는 아주 살짝 어긋나는 것만으로도 적이 되기도 하고 한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지켜 줘야 할 그것이 반대로 사람들을, 그것도 피해자를 공격하게 되는 상황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야코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그 선을 넘어가 보기로 한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으로 '교통경찰'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양날의 검 같은 교통 법규에 저항하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중앙분리대'를 비롯해서, 시각장애인 소녀의 기적 같은 청각이 밝혀낸 교통사고의 전말을 담고 있는 '천사의 귀', 앞서가는 초보운전 차를 재미로 위협한 뒤차 운전자에게 닥친 후폭풍을 보여주는 '위험한 초보운전' 등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법한 교통 법규 위반이라는 범죄를 매력적인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킨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의 계산대로 진행되었다. 유일한 오산은 유지의 차가 아직 굴러떨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죽이고 싶다고 했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고......."
"시끄러, 조용히 좀 하라고."
핸들을 쥔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p.185

 

프리 카메라맨인 후카자와는 마치코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핸들을 잡은 후카자와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마치코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앞차에서 뭔가 날아온 것 같다고 생각한 직후의 일이었다. 갑자기 눈이 아프다는 마치코를 데리고 병원으로 급하게 가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원인은 조수석 쪽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빈 커피 캔이었다. 그들이 마신 것이 아니었으니, 달리던 앞차에서 타고 있던 누군가 던진 게 분명했다. 후카자와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요즘 빈 캔을 창 밖으로 던지는 무개념한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 차량을 특정하기도 어려운 데다, 설령 찾아내더라도 자기는 빈 캔 같은 건 버린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어쩔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확실한 사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경찰의 입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느닷없는 부상을 당한 입장에서는 그저 운이 나빴다 치고 넘어가긴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랑의 힘이 불러온 의도치 않은 응징을 보여주는 '버리지 말아줘'는 두 커플의 이야기가 별개로 진행되다가 복수 아닌 복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인과응보를 보여주며 통쾌함을 느끼게 해 준 이야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치밀한 트릭과 반전이 매 작품마다 포진하고 있어, 발표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잘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에 걸쳐 문예지에 실었던 것을 1992년에 한 권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국내에는 2010년에 출간되었었고,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롭게 번역해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더욱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교통사고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반대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전에 익숙해지면 교통법규를 무시하거나, 도로에서 다른 차와 경쟁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탈과 부주의함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뒤흔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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