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커밍 다이어리북 - 참 괜찮은 나를 발견하는 155가지 질문들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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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는 모든 게 다 있었습니다.

결국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이었던 <비커밍>에서 봤던 그녀의 글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다이어리북이다. <비커밍>을 읽으며 시카고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시절부터, 우등생으로 자라나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하버드대 로스쿨에 가고, 일류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을 하다 신입 인턴인 버락을 만나게 되는 히스토리는 마치 드라마처럼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퍼스트레이디로서 모습은 여성들의 아이콘, 롤모델이라 할만 했다.

 

이번에 만난 다이어리북에는 자기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때론 강렬하게 독자를 글쓰기로 이끄는 155개의 질문들과 미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소소하지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적어나가면서, 어제와 다른 나, 어제보다 더 나다운 나를 만나는 기회를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다 소중하다. 그러니 시적으로 근사하게 쓸 필요도 없고, 벼락 같은 깨달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꼭 매일 쓸 필요도 없고, 뭔가 중요한 말만 적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평범한 일상들이나 내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는 등.. 나의 경험과 생각, 감정들을 고스란히 적어두면 된다. 그게 바로 일기의 역할이자 목표이니 말이다.

 

내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표면적 성취가 아니라

그것을 떠받친 기틀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수없이 받았던 작은 지지들,

자신감을 키우도록 도와준 사람들이

핵심이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어린 시절 자란 동네가 어땠는지 적어보세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 그와 다시 대화할 수 있다면, 무엇을 물어보겠어요? 한 해 동안 겪은 굉장한 일 열 가지를 꼽아볼까요.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싶나요? 어린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생님은 누구였나요?  부모님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나요? 지금 어떤 변화를 겪고 있나요? 그것을 겪어낼 준비는 단단히 되었나요? 세상에 근심이라고는 하나 없는 듯 마음이 평온했던 순간을 돌이켜 적어보세요.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바꾸는 일을 해본 적 있다면, 무엇인가요? 풍파 속에서도 늘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당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등등.. 바로 떠올려보고 적을 수 있는 질문도 있고, 좀 생각해봐야 할 것들도 있고,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비커밍, 무언가가 되어간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비커밍 다이어리북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남들과 나누는 과정 자체를비커밍' 으로 보았던 그녀의 메시지에서 출발하는 다이어리북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각종 다이어리와 플래너가 각양각색의 실용성과 예쁨을 뽐내며 시선을 사로 잡는 시기이다. 연말과 새해만 되면 모두들 한 해 동안 얼마나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새로 맞이할 일년 동안에 해야 할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 세우곤 하니 말이다. 일 년은 365개의 경험 조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퍼즐과도 같다. 눈뜨자마자 정신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평범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수많은 하루하루가 쌓여서 오늘의 나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무심코 지나치는 매일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종종 잊어 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사소한 일상들을 기억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올해가 시작된 지 벌써 10일이나 지나버렸다. 비커밍 다이어리북과 함께 올 한해는 참 괜찮은 나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내가 되어가는 시간이 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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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1-11 02:07   좋아요 0 | URL
저도 매년 별다방 다이어리로 새해를 맞이하는데.. 올해는 비커밍 다이어리북도 함께 하려고요. ^^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 - 패션 컨설턴트가 30년 동안 들여다본 이탈리아의 속살
장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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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 이탈리아에서 발견한 특이한 점은, 어린아이 가운데 심하게 칭얼대거나 우는 아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개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로 늘 어수선해 보이는 사회이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유유자적하게 삶을 영위해가는 그들만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자신을 들볶지 않는 합리적인 개인주의, 평화로운 공존. 어릴 때부터 받아온 충분한 사랑이 자양분이 되어 아기들도, 개들도 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p.61

 

패션 컨설턴트 장명숙이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만난 사람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다채로운 모습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대한민국 최초로 밀라노로 유학을 떠난 저자는 지난 40여 년간 한국과 밀라노를 오가며 패션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유명 백화점의 패션 담당 바이어로, 무대의상 디자이너로서 살아오고 있다. 최근 유튜브 [밀라논나] 채널을 운영하며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과 코디, 패션 이야기로 다가올 젊은 세대를 만나고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던 저자이니, 그야말로 그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의 속살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 

 

 

저자가 유학을 떠났던 40여 년 전만 해도 서울에서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려면 타이완과 방콕, 바그다드, 로마를 거쳐 꼬박 3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직항으로 12시간 정도만 가면 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이탈리아는 자전거 도둑이 횡행하고 소매치기와 사기꾼이 득실거리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또 놀라울 따름이다. 이탈리아 하면 갖가지 명품 브랜드가 바로 떠오르고, 스파게티와 피자 등 이탈리아의 음식 또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지금에서야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지금은 밀라노가 패션과 디자인의 도시로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 하고 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패션과 디자인, 성악과 요리 등을 배우러 이탈리아로 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이탈리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여기, 이탈리아통이 이야기하는 ‘진짜’ 이탈리아 이야기를 만나 보자.

 

 

"이탈리아 남자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잘생기고 멋있어요?"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탈리아 사회의 비애가 자리하고 있다. 워낙 성향이 그렇기에 잘 차려입는 것이 즐겁긴 하겠지만 이제는 항상 긴장을 하고 살아야 한다. 미혼남은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기혼남은 사랑이 식었다고 언제 폭탄선언을 할지 모를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또 이혼남은 언제 어디서나 새 파트너를 찾아야 하므로 늘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결국 불안한 결혼의 현주소 때문에 남자들은 더욱 피곤해지고 남성복 산업은 호황을 누리는 것이다.     p.117~118

 

밀라노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5일 근무에 백화점도 일요일에는 쉰다고 한다. 어느 직장이라도 여름휴가 한 달은 기본이요, 직장에 따라 성탄절, 부활절 휴가 등 1년에 거의 2개월의 유급 휴가를 준다. 어디든 노동조합이 확실한 역할을 해 하루 8시간 근무를 초과하는 법이 없고, 감기만 살짝 걸려도, 마음이 조금 우울해도 당당히 결근을 한다고 하니.. 우리로선 부럽기 짝이 없는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사는 방식이 구석구석 다른 북부와 남부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이탈리아 남자들의 못 말리는 바람기,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배우는 멋있게 나이 드는 법, 프랑스 제품의 하청 국가에서 밀라노를 세계 제일의 패션 도시로 키운 배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고 있던 것 이상의 정보들을 만날 수 있어, 언젠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면 더 재미있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탈리아의 패션과 관련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 전반적인 것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책이라는 느낌이다. 남북으로 긴 반도국가라는 지리적 위치와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품성 때문에 이탈리아는 흔히 우리나라와 닮은꼴로 회자되는 나라이지만, 사실 문화나 생활양식 등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진짜 이탈리아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길 추천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깊숙이 숨어 있는 은밀한 이탈리아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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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간호사 - 가벼운 마음도, 대단한 사명감도 아니지만
간호사 요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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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던 길, 같이 퇴근하던 동료가 말했다. “우리가 이 직업에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즐기면서 부담 없이 일하면 되지 않을까?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병원은 내가 나에게 바라는 것보다 더 큰 걸 요구하고,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부담 없이 일할 수는 없다. 그러니 보람, 그거라도 있어야 버틸 것 같은데....     p.43

 

현직 간호사가 그들의 리얼한 현실을 그려내 화제가 되었던 웹툰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콜 벨을 눌러 분노케 만드는 할아버지 환자부터 잘해도 못해도 타박하는 선임 간호사, 초과 근무가 잦은 근무 환경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는 간호사의 시선이 실감나게 담겨 있다.

 

 

워라밸은 꿈꿀 수 없는 3교대와 잦은 초과 근무, 군대 못지않은 위계질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태움’까지… 간호사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여지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간호사들이 매일 업무 시작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은 사원증과 네임펜, 가위, 볼펜, 면테이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멘탈'이다. 제대로 밥 먹을 틈도 없이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겨우 시간이 나서 구내식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밥을 꾸역꾸역 삼킨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렇게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이 든다니.. 괜시리 자괴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 가고, 병원에서의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렇게 저자는 이제 대형 병원 5년 차 간호사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병원은 조금 더 다닐만해 졌고, 이제는 적응이 됐는지 처음의 힘들었던 감정이 가물가물해졌다.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지 않을까. 버티다 보니 어느새 신입이 아니라 선배가 되었는데, 여전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내가 이러고 있나'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입사 초, 말로만 듣던 ‘태움’이 내게도 찾아왔다. ‘여쭤보고 해야 하나?’ 싶어서 물어보면 ‘아직 그것도 몰라?” 그래서 알아서 하면 “모르면 쫌 물어봐야지!” 기승전 혼남! 이러나저러나 혼나기는 마찬가지...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은 없기에 입사 초기의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기가 있을 거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다는 말로 한 사람이 느끼는 어려움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선배들이여! 제발, 말은 예쁘게 씁시다!    p.60

 

한때 뉴스에 숱하게 보도되어 일반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간호사들의 '태움'에 대해서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태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비롯해서 그에 대한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도 수록되어 있다. 현재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라던가, 신입 간호사로 일을 시작한 이들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초과 근무가 잦은 근무 환경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둘까 말까 고민하는 간호사의 시선 또한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현실감 있는 충고가 되어 줄 것이다.  

 

 

주로 현직 간호사들이 울고 웃을만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어서 간호사 커뮤니티에서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을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어쩌다 간호사가 되었지만 어쨌든 간호사다'라는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창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해내는 세상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도 와 닿을 수밖에 없는 문구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직업들이 그렇지 않을까. 장래 희망이나 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성적에 맞춰서, 등급에 맞춰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선택하게 된 길이 직업이 되어 버린 경우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든 싫든, 보람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대단한 사명감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보람을 찾으며 오늘도 버텨내는 간호사들을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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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정의 - 문학으로 읽는 법, 법으로 바라본 문학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안경환.김성곤 지음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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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소설에서 교묘하게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들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법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법은 상황증거나 막연한 의심만 갖고는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불안은 바로 그런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 어디에도 확실한 것은 없고, 우리는 그 속에서 끝없는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만큼 복합적이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법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p.143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며 살고 있다. 그리고 법의 궁극적 목적은 정의의 실현에 있다. 그러나 과연 법이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법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는가? 이 책의 두 저자는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니, 문학과 영화를 통해서 세상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법과 문학과 영화'라는 과목의 합동강의를 열기도 했다. 1999년 서울대학교에서 최초로 개설된 안경환, 김성곤 교수의 합동강좌는 폭력과 정의라는 법의 두 얼굴을 소설과 영화로 성찰해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사랑 받았다. 이 책은 강의에서 다른 작품 중 소설 20편과 영화 36편을 엄선해 텍스트로 삼아 두 학자가 머리를 맞대고 집필한 인문교양서이다.

 

푸코는 정의라는 말 자체에 회의적이라고 했다. 정의는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지만, 독재자 스스로도 자신이 정의라고 믿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우리의 군사독재 시절에도 정부의 구호는 '정의 사회 구현'이었으니, 독재자 스스로 자신이 정의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대편에서 보면 민주화 투사들이 독재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정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절대적 정의라는 것이 있을까. '자신이 정의라고 믿으면, 독선적이 되어 우월감과 편견을 갖게 되고, 폭력 또한 합리화할 수도'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로만 나누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가치판단은 현실과는 괴리감이 크다. 이 책에서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통해서 정의도 폭력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들도, 사회도, 정치도 폭력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었다. 그 외에도 <메이즈 러너>, <황야의 7인>,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마당을 나온 암탉>, <엽기적인 그녀>, <앵무새 죽이기> 등의 작품을 통해 정의와 편견에 대해서 흥미로운 시선들을 엿볼 수 있었다.

 

 

<설국열차>의 마지막에 살아남는 요나와 흑인 소년처럼, 배 속의 아이와 어린 수안은 미래의 상징이다. 기차는 우리 사회의 소우주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하며 살고 있고, 그러한 질병은 좀비처럼 전염되어 퍼져나가고 있다. 어린 세대에게 살기 좋은 사회를 물려주려면, 지금이라도 좀비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힘을 합해 우리 주위의 좀비들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p.292

 

법이 가지고 있는 이면을 들여다보고, 정의와 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살펴보고 나면,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나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괴물>, <설국열차>, <부산행> 등 한국 영화들을 많이 다루고 있어 우리 나라의 정치, 사회적인 명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괴물>은 노무현정부 시절에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반미감정을 잘 반영하고 있어 당대의 사회상을 대표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고, <설국열차>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양극단의 싸움이 아닌,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시스템을 벗어나 외부로 나가는 제3의 길에 구원이 있음을 시사하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좀비 영화면서도 좀비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점을 보여주었던 <부산행> 속 기차는 우리 사회의 소우주이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한국의 현대사를 한국적 유머로 조감하고 있는 <국제시장>은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법과 문학과 영화가 어떻게 경계를 넘어 서로 만나며, 그것이 어떤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웠다. 문학으로 읽어 내는 법이 궁금하다면, 법으로 바라보는 문학은 어떤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필경사 바틀비>부터 <채식주의자>까지, 그리고 <굿 윌 헌팅>부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까지, 20편의 소설과 36편의 영화 속 뜨거운 논쟁의 순간들이 폭력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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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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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탁기 옆에 우두커니 선 채, 어린 마음에도 확신했다. 내 출생과 관련해서 엄마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고. 그 비밀이 아빠와 관련된 일인지 아닌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엄마 모습이 그날 밤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내 출생과 관련이 있고, 그래서 엄마가 괴로워하는 것일까. 내가 텔레비전에 출연했기 대문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라도 한 것일까.   p.54

 

홋카이도에서 나고 자란 대학생 우지이에 마리코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어쩌면 엄마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왔다. 대학교수였던 아빠는 집에 있을 때도 서재에 틀어박혀 일할 때가 많았고, 언젠가부터 엄마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엄마와의 거리감이 생기게 된 것은 자신이 부모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고민한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집에 불이 나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만다. 마리코와 아빠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여러 정황상 엄마가 집에 불을 질러 동반 자살을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 사고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마리코는 우연히 엄마의 유품 속에서 도쿄행 비행기 운항 시간표와 의문의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되고, 도쿄로 향하게 된다.

 

도쿄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고바야시 후타바는 대학에서 록밴드 싱어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텔레비전에 밴드의 멤버들과 출연을 하게 되고, 그날 이후 이상한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후타바는 어릴 때부터 아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이야길 듣지 못했고,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서 엄마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에 대한 진실을 듣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게다가 뺑소니 교통사고의 배후에 의도적인 동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는, 엄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엄마가 젊은 시절을 보낸 홋카이도로 떠나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우지이에 마리코와 고바야시 후타바, 두 사람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마리코와 후타바,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과거를 추적해 숨겨진 비밀에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상대가 숨겨진 쌍둥이도, 그저 비슷하게 닮은 것도 아닌 서로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긴장감 넘치게 전개된다.

 

 

나는 머리가 점점 아파 왔다. 마치 2천 조각짜리 직소 퍼즐이 눈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건 참고할 만한 밑그림조차 없다. 각각의 조각이 제멋대로 존재한다. 가로로도 세로로도 연결되지 않고 어떤 식으로 늘어놓아도 형태가 맞춰지지 않아 도무지 진전이 없다.     p.227

 

이 작품은 히시가노 게이고의 1993년 작으로, 국내에는 <레몬>이라는 이름으로 2005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원제인 <분신>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금단의 영역을 넘본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비극을 그린 장편 ‘메디컬 스릴러’로 현대과학, 첨단의학을 소재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해왔던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이번 작품 역시 매우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일본에서는 2012년에 5부작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고 한다.

 

과연 '나는 이 세상에 유일하지 않다'는 느낌은 어떤 걸까. 누군가의 복제품, 혹은 귀중한 실험의 결과가 나라는 존재라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의 두 인물의 여정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말투도 기질도 재능도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 그런데 외모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이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레몬을 먹는 방법이 같다는 것 정도인데.. 도쿄와 홋카이도에서 각자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면서 맞춰지는 퍼즐의 조각들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복제 인간, 도플 갱어 등 최첨단 과학과 의학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의 거의 대부분은 미스터리 스릴러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의 사백 여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퍼즐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고, 후반부에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비극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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