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짓기 - 이별의 순간,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
데이비드 기펄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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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콜라주다. 명확한 순서 없이 한꺼번에 던져진 생생한 이미지, 그것을 해독하는 일이 보는 사람에게 맡겨진 이미지다. 하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각각의 이미지가 새로운 이미지를 낳고 새로운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낳으면서 끝없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간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미래는 현재를 뚫고 나가는 과거다. 그리고 과거는 그런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p.185

 

만약 아버지가 곁에 없다면, 혹은 어머니가 먼저 떠나신다면.. 우린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는 부모 앞에서 아직 어린 자식이고, 언제 어디서나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것 같았던 부모가 없다면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만큼 우리는 죽음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삶뿐 아니라 죽음도 함께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기자이자 작가인 저자 데이비드 기펄스는 은퇴한 토목 기사인 아버지와 함께 엉뚱하고도 기발한 착상으로 자신의 관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그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함께 관을 만드는 3년 여의 시간 동안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를 암으로 잃고,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이미 두 번의 암 치료를 견뎌낸 아버지에게마저 암이 재발하고 만다. 온통 죽음으로 둘러싸인 날들을 보내며 저자는 죽음과 늙어감, 삶과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죽음과 늙어감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노년의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삶과 상실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담담하지만, 깊이 있게 펼쳐지고 있어 더 뭉클하게 읽힌다.

 

 

우리는 더듬거리면서 무계획적으로, 무모하게 세상을 알아가고 우리 자신을 알아간다. 하지만 인생을 오래 살다 보니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들을 알아가는 일에, 그리고 그 실수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밝은 빛 속에서 고민에 빠지는 일에 갈수록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그 실수들에는 정보가 가득했다.    p.342

 

세상에 아무것도, 영원하진 않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까운 이의 죽음, 그리고 나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죽음이란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니 말이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불가능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날들에 사실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 사건은 늘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수 년에 걸쳐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잃어가는 경험을 한다. 가장 친한 친구와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고, 다음 해 두 사람이 좋아졌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친구가 죽고, 아버지가 새로운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자신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고, 부모가 노년이 되었을 때면 누구라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겪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이라는 것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저자가 1095일 동안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관을 만드는 과정은 평범한 일상처럼 반복되면서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이해하기에 먹먹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과장된 감정 표현이 전혀 없음에도, 오히려 그 담담함과 담백한 어조가 잔잔한 물결처럼 어느 순간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든둘의 나이에 세 번째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이언 맨처럼 힘있게 누구보다 활기찬 일상을 보내는 저자의 아버지였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삶의 지혜를 배우고,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보고 느낀다. 부모의 죽음과 가장 가까운 날들 앞에서,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할 날들에 꼭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자식의 마음이라니.. 언젠가는 나도 겪어야 할 일이기에 그 상실과 슬픔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죽음과 화해하는 법', '죽음과 마주하는 태도'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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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건축가다 - 자연에서 발견한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건축 이야기
차이진원 지음, 박소정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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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새에게 누가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준 것일까? 재봉새가 지은 둥우리를 보지 않는다면, 둥우리 건축에 있어서 조류가 다른 동물들보다 특히 더 우수하다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고 깜찍한 재봉사들은 거미줄이나 나방의 실을 이용하며, 자신의 날카로운 부리를 바늘 삼아 잎을 한 땀 한 땀 꿰매어 가장 편안한 아기 방을 만든다.     P.35

 

전 세계에는 9천여 종의 조류가 있다. 이들은 알 하나하나에 생명의 에너지를 담아 대를 잇는다. 새가 둥우리를 짓고, 둥우리가 알을 담고, 알이 새가 되는 대자연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연구자이자 생태 화가인 차이진원이 대자연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조류가 어떻게 온기 가득한 집을 짓는지 관찰하고 이를 섬세한 손길로 그려낸 것이다. 새 둥우리를 통해서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고, 자연 속에서 건축의 원리를 읽어 낸다니 낯설지만, 그만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도심에서는 새 둥우리를 볼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자세히 지켜보면 집 근처나 거리에 있는 나무 꼭대기에 지어진 둥우리를 만날 수도 있다. 보통은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에 자리한 경우가 많아서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더라도, 형태가 어떤지, 얼마나 수많은 나뭇가지들로 탄탄하게 둥우리를 지었는지는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새 둥우리 하면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얽힌 접시 모양만 생각했다. 그런데 새 둥우리가 참으로 각양각색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저자는 새들의 다양한 둥우리 만들기 방식을 설명할 때 재봉사, 편직 장인, 미장이, 동굴 파기 전문가, 짐꾼 등으로 새들을 묘사하며 각기 새들이 어떤 방식으로 집을 짓는지를 알려 준다.

 

 

굴뚝새는 '벌판의 가왕'이라고 불린다. 체형은 작고 아담하지만 힘이 넘친다. 번식철이면 예쁜 목소리로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새 둥우리를 여러 개 지어내는데, 지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둥우리를 다 지어도 힘이 남아 돌아서, 남의 알을 부리로 쪼거나 새끼를 죽이는 등 다른 조류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동족끼리도 서로 죽이는데, 외형만 보거나 아름다운 노랫소리만 들어서는 굴뚝새의 이런 잔인함과 난폭성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p.121

 

가장 인상적이었던 새는 바로 '재봉새'였다. 작고 아담한 체구의 재봉새는 바늘과 실을 이용한 재봉술로 둥우리를 짓는다. 뾰족한 부리를 바늘 삼아 잎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고, 식물섬유와 거미줄을 구멍 사이로 통과시킨 뒤, 실 끝부분을 공 모양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머니 모양으로 꿰맨 후, 그 안에 가느다란 풀과 솜털을 채워 넣으면 완성이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섬세한 일러스트를 보자면, 재봉새가 만든 둥우리는 정말 실과 바늘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여 신기했다. 그 외에도 새들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들과 새 둥우리를 분류하고 측량하는 방법 및 새 둥우리 관찰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어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당연하게도, 종류가 다른 새는 짓는 둥우리도 다르다. 저마다의 깃털처럼 각자 특생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둥우리를 자연 속에서 발견했을 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간단한 분류법과 관찰법을 익혀 둔다면, 새 둥우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조류는 대개 봄에 짝을 찾고 둥우리를 짓는다고 한다. 보통 고지대 조류는 3~5월, 저지대 조류는 4~6월이 번식 절정기라, 이 짧은 4개월 동안이 조류가 둥우리를 짓고 번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적기인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조류의 삶에서 가장 감명 깊은 장면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새들과 신기한 형태의 새 둥우리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유익한 자연과학 도서이자, 실제 사진보다 더 리얼하고 아름다운 생태 화가의 매혹적인 그림들을 만날 수 있는 관찰 도감이다. 조류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공룡부터 까치, 제비 등 익숙한 새는 물론, 둥우리를 바느질하는 새, 자동차만한 둥우리를 짓는 새, ‘깃털 달린 피카소’라 불리는 새까지 신기하고 놀라운 새들의 건축 이야기와 생활상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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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이 10년 후 나에게 : Q&A a day 빨강머리앤 Q&A a day
더모던 편집부 엮음 / 더모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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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는 일기장을 사용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각종 다이어리들을 활용해 일상을 기록하고, 추억들을 간직했다. 그리고 요즘은 다이어리북의 형태로 굉장히 다양한 종류들이 나오고 있어,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다이어리를 함께 사용하곤 한다. 다이어리북이 매력적인 것은 단순히 스케줄을 정리하거나 일기를 쓰는 용도가 아니라, 여러 가지 질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내가 한 권의 책을 만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만난 것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캐릭터 '빨강머리 앤'과 함께하는 Q&A 다이어리북이다. 매월 마다 앤의 일러스트와 대사가 수록되어 있고, 매일의 페이지에는 하루하루의 질문이 한글과 영문으로 쓰여 있는 다이어리북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365개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같은 질문에 10년간 10개의 대답을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질문에 해당되는 페이지가 두 페이지인데, 그 안에 10년의 매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올해 3월 17일에 내가 쓴 내용을, 내년 3월 17일에 읽어 보면 기분이 어떨까. 그렇게 매년의 시간이 쌓이다 보면 결국 내가 10년 동안 어떤 일상을 살아왔는지,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다.

 

10년 간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꽤나 두툼한 페이지이지만, 판형이 컴팩트하게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 무겁지 않아서 참 좋다. 게다가 크기는 작지만 튼튼한 양장본이라,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손때가 곱게 묻어가는 동안에도 끄덕 없을 것 같아 든든하다.

 

 

오늘이 3월 17일이니, 우선 오늘에 해당되는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질문은 이렇다.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어? 언제 그렇니?' 각각의 질문에는 마치 이모티콘처럼 작고 귀여운 앤의 얼굴이 실려 있는데, 엉엉 우는 앤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너무 사랑스러웠다. 누구나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감정은 당시의 상황이나 주변 환경에 아주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올해 쓴 답과, 내년에 쓴 답과, 몇 년 뒤에 쓴 답이 같을 수 없다.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겨보는데, 재미있는 질문들이 많았다. '평생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어? 왜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올해 안에 가장 도전해보고 싶은 것은 뭐야?', '최근에 한 가장 큰 실수는 뭐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의 105쪽 첫 문장이 뭔지 적어줄래?', '금요일이나 토요일을 보내는 특별한 방법이 있니?', '가장 하기 싫은 집안일과 가장 좋아하는 집안일이 뭐야?', '지난 한 해 동안 너에게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뭐야?', '너의 인생을 책으로 쓴다면 제목은 무엇이 될까?', '너의 버킷리스트 10가지를 써봐' 등등.. 질문을 보자마자 바로 답을 할 수 있는 가벼운 것부터, 잠시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은 질문들까지 흥미진진했다.

 

 

매일매일 사랑스러운 앤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기록해 나가다 보면 현재를 돌아보게 되고,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위로도 해주고, 잠시 쉬면서 힐링의 시간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눈뜨자마자 정신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평범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수많은 하루하루가 쌓여서 오늘의 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렇게 다이어리북을 통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매일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사소한 일상들을 기억하게 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특별한 다이어리이다.

 

일 년은 365개의 경험 조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퍼즐과도 같다. 그러니 1년 중 어느 날에 시작해도 괜찮다.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서 10년 뒤에 우리는 지극히 사소하지만,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나만의 '3,650개의 하루'를 갖게 될 테니 말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에도 너무 좋은 다이어리북이지만, 소중한 친구, 연인, 가족, 지인에게 선물하기에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정말 너무 예쁜 책처럼 생긴 다이어리북이라, 받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선물이 될 테니 말이다. 나를 위해,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위해 '빨강머리 앤 Q&A a day'를 선물해보자. 무심코 흘려 보낼 뻔했던 우리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멋진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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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지나간 후
상드린 콜레트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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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과 파타가 열심히 노를 저으면 12일 만에도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로서 도저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문제, 그의 입 속을 활활 태우는 문제. 그들에게 배는 달랑 한 척뿐이었다. 파타의 짐작대로 마디는 이미 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 그를 쏘아보는 불같은 눈, 미움과 절망이 뒤섞인 저 눈, 그를 완전히 원망하는 눈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다, 폭풍, 불운이 모두 그의 탓이라는 듯이, 순전히 그의 탓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누구를 남길 건데?"     p.35

 

파도가 일어나고 6일이 지났다. 파도는 세상을 집어삼키고 집, 차, 가축, 사람, 모든 것을 한바탕 쓸고 갔다. 쓰나미가 밀려왔고, 미쳐 날뛰는 날씨와 거의 쉬지도 않고 퍼붓는 폭우에 시달린 끝에 루이의 가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섬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도 루이의 가족들은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화를 면한 것이다. 집은 무사했지만 이제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은빛의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구조대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6일째 되는 날에도 해수면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먹을 것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바다의 수위는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떠나야했다. 물 밖으로 나와 있는 땅까지 이동하려면 배로 꼬박 12일은 걸릴 터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배에는 가족 모두 탈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루이의 가족은 무려 열한 명이었다. 9남매 중에 형들 두 명 리암과 마테오는 열다섯, 열세 살이었고 루이를 포함한 중간 셋은 각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루이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뒤틀린 채로 나와 절름발이였고, 그 아래로 페린은 어릴적 사고로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었고, 노에는 마치 난쟁이처럼 몸집이 왜소하고 작았다. 그들 아래로 딸 넷은 겨우 여섯 살, 다섯 살, 세 살, 한 살로 아직 너무 어렸다. 맨 처음 태어난 형들은 체격이 건장하고 잘생겼고, 나중에 태어난 네 딸에게도 아무 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이는 중간 아이들만 왜 이 모양인지, 그들만 세 명의 실패작이 아닌지 생각한다. 자, 과연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데려가야 할까. 엄마는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고, 아빠가 최대한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리암과 마테오는 아빠와 함께 교대로 노를 저어야 하고, 어린 딸들은 아직 부모의 손길이 너무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중간 세 명을 남기기로 한다. 엄마는 제일 성치 못한 애들을 남기자는 거냐고 하지만, 아빠는 그들은 매우 영특한 데가 있으니 어떻게든 버틸 거라고 말한다. 과연 남겨진 세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들 가족은 무사히 육지에 도달해서, 남겨진 세 아이를 데리러 돌아올 수 있을까.

 

 

애들을 혼내서는 안 된다. 이제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은 저 어린것들밖에 없다. 그가 다음의 일, 다음 끼니를 앞질러 고민할 때 과거를 잊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순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저 아이들이 백 번 천 번 옳다. 파타는 어린 딸들의 동물적인 자발성이, 계산이 깔리지 않은 생동감이 부러웠다. 그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지 않고 내일로 나아가니까. 선악을 모르는 백지 같은 영혼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들은 이기적이고 눈부셨다. 파타는 딸들을 눈 속에 품고 한두 시간쯤 선잠을 잤다. 딸들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p.215

 

거대한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은 일가족 11명, 그러나 안전한 곳으로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다.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대단히 흥미로운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대단히 흡입력 있는 서사를 보여준다. 차세대 프랑스 누아르 소설가 중 가장 뛰어난 작가로 손꼽히는 상드린 콜레트의 작품으로 우화처럼 읽히기도, 심리 스릴러처럼 읽히기도 하는 대단히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모가 힘겨운 선택을 하고 남겨진 세 명의 아이의 시점에서 먼저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머지 여섯 명의 아이들과 배를 타고 섬을 떠난 부모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교차 진행된다. 남겨진 아이들은 생각한다. 왜 하필 우리 셋일까. 아빠 엄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남겨진 그들끼리 부모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한편,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섬을 떠난 부모의 상황 역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점점 더 험악해졌고, 배 한 척도 과히 믿음직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생존, 그것도 자신의 그것이 아니라 어린 자녀들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로서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와 닿도록 하는 세심한 심리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내몰린 인간으로서의 선택, 그 잔인한 딜레마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게 읽히고,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속도감과 차가우면서도 따뜻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재난 소설과 휴먼 드라마로서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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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방 - 개정증보판
오쓰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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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깨달았다. 아빠에게는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엄마에게는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다고, 아빠와 엄마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아빠와 엄마 어느 한쪽이 죽은 거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아빠는 엄마가 죽어 나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반대로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서로가 보이지 않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각자에게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 'SO-far'중에서, p.73

 

열 살인 나는 곧 고등학생이 되는 누나와 함께 창문도 없는 작은 사각형 방에 쓰러져 있다가 눈을 뜬다. 대체 어떻게 이 방에 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엄마가 장을 다 볼 때까지 누나가 나를 돌보던 중이었고, 그들 남매는 산책로를 걷던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뒤쪽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고, 머리에 지독한 아픔과 함께 이 방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곳은 어디인지, 누가 그들을 가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가운 회색 상자 같은 방에는 바닥의 중앙 부분을 관통해서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 체구가 작은 소년이 도랑 안을 지나서 방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도랑을 타고 다른 방을 넘나들며 이곳에 있는 방이 일곱 개라는 사실과 각 방에는 영문도 모르고 갇혀 있는 사람이 한 명씩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매일 저녁 6시, 도랑에 흐르는 물에 붉은 색깔이 비치며 끔찍한 것들이 떠내려온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들 남매는 이 방을 탈출할 수 있을까.

 

표제작인 <일곱 번째 방>은 마치 영화 '큐브'를 연상시키는 설정으로 초반부터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몰입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남매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동기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극한의 공포를 선사하는 이 이야기는 놀라운 결말에 이르기까지 오싹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섬뜩할 정도의 상상력으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오츠이치의 천재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논란과 찬탄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마성의 천재 작가'라고 불리는 오츠이치 답게 본격 추리 미스터리에서 SF, 호러, 블랙코미디 등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을 자유자재로 선보이고 있는 소설집이라 오츠이치 종합 선물 세트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기도 하다.

 

 

헤드라이트 불빛 아래, 하얀 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 양 옆의 마른 풀이 빠른 속도로 뒤쪽을 향해 멀어져갔다. 조금만 있으면 간판이 나타난다. 늘 결심이 꺾이고야 마는 장소다. 나는 숨을 멈췄다. 차가 그 지점을 통과한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암흑 속에서 차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우주에서 정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었다.     -'ZOO' 중에서, p.120

 

유치원생인 나는 아빠랑 엄마랑 셋이서 살고 있었다. 그들 가족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자주 함께 앉아서 일상을 보내곤 했는데, 항상 내가 가운데 앉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엄마와 아빠는 서로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셔서 우리 둘뿐이지만 열심히 살자고 했고, 아빠는 엄마 몫까지 꿋꿋하게 살자고 말했다. 나는 아빠에게는 엄마가 보이지 않고, 엄마에게는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빠는 엄마가 죽어 나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이지 않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각자에게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고, 나는 아빠와 엄마 사이를 오가며 두 사람 각각과 생활을 해야 했다. 아빠가 살아 있는 세계와 엄마가 살아 있는 세계, 그리고 각각이 겹쳐진 곳에 존재하는 나, 대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SO-far>라는 작품이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결말 이후에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였고, 오싹한 감정과 먹먹한 슬픔,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주는 충격까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집은 <일곱 번째 방>을 비롯해 <ZOO>, <카자리와 요코>, <SO-far>, <양지의 시> 등 5편의 단편이 옴니버스식 영화 <ZOO>로 개봉해 마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이번에 출간된 이 작품이 오츠이치의 신간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국내에 2007년에 출간되었던 <ZOO>의 개정판이다. 표지 분위기가 바뀌었고, 수록된 작품 중에 표제작을 바꾸어서 제목이 달라졌을 뿐이다. 오래 전에 출간된 작품을 이렇게 새로운 옷으로 바꿔 입혀 재출간하게 되면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언제나 반기지만, 요즘은 개정판이라는 표기를 전혀 하지 않아서 신간인줄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신간이라고 구매했는데, 읽다 보니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인 경우도 있을테고 말이다. 오츠이치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섬세함과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퓨어 계열'의 화이트 오츠이치와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는 '다크 계열'의 어두운 블랙 오츠이치로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규칙이나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섬뜩할 정도의 상상력과 인간의 두려움, 뒤틀린 내면에 대한 묘사가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는 이 소설집은 가장 오츠이치 다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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