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로드 - 사라진 소녀들
스티나 약손 지음, 노진선 옮김 / 마음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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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죽기라도 한 거야?”
“아마 그럴 거야. 확실한 건 아무도 몰라.”
여학생은 이끼 위에 침을 뱉고는 나른하게 메야를 바라보았다.
“이 시궁창 같은 마을에서 성자가 되고 싶으면 연기처럼 사라지면 돼. 그럼 다들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하려고 경쟁할 테니까.”    p.115

 

언덕이 겨울의 허물을 벗고, 녹은 서리가 땅 밑으로 흘러가고, 빛이 밤을 다 먹어 치운 뒤 곳곳에 침투해 환히 밝히는 계절이었다. 밤에도 태양이 지지 않는 백야, 렐레는 낡은 볼보를 몰고 밤마다 실버 로드를 따라 딸 리나를 찾아 다닌다. 그저 잠을 자느라 낭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그에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햇볕이 서서히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썩고 얼 것이며, 겹겹의 폭설 밑에 감춰질 것이다. 지난 3년간 리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년 전 렐레의 열일곱 살 딸 리나는 아침 일찍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사라졌다. 목격자도 단서도 없이 사건은 미궁에 빠졌지만, 렐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딸을 찾기 위해 어두운 숲과 안개 낀 습지, 인적 드문 농가와 폐가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다. 그런데 또 다시 동일한 사건이 반복된다. 리나와 너무도 닮은 외모와 키까지 같은 열일곱 살 소녀가 캠핑장에서 실종된 것이다.

 

한편, 열일곱 소녀 메야와 엄마 실리에는 인터넷으로 만난 남자 토르비요른의 집으로 이사를 온다. 그들 모녀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했고, 실리에는 자신들을 돌봐줄 남자가 있다면 기꺼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수십 번의 이사를 거치며 메야 모녀는 스웨덴 북부의 적막한 마을에 이르렀다. 딸이 집에 있든 말든 남자와 거침없이 섹스하고, 집에서는 거의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면 약에 취해 있거나 술을 마시는 엄마로부터 메야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얼마나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알기에, 그런 엄마를 지키고 감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야는 인근에 사는 삼형제의 막내 칼 요한을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의 가족은 기술문명과 교육을 거부하고 숲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사람들이었는데, 안정된 가정을 꿈꿨던 메야는 칼 요한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로 하고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살아 있는 밤은 뒤틀린 나무 사이로 축축한 입김을 거르고, 호수와 강 위로 안개를 날려보내 춤추게 만들었다.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렐레는 자동차 보닛에 몸을 기댄 채 담배 연기와 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어둠 속에서 전조등이 겨우 3,4킬로미터 앞까지 밝혔다. 인적 없는 실버 로드가 그를 기다리며 죽음의 덫처럼 옆에 누워 있었다. 밤새 뒤지고 다녀봐야 길을 잃을 것이다.    p.133~134

 

이야기는 3년 전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여전히 수색을 멈추지 않는 렐레와 제대로 된 가정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소녀 메야가 남자친구네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따로 전개되던 두 이야기는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본업인 고등학교 선생으로 돌아간 렐레가 전학 온 메야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교집합이 생겨난다. 렐레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외로워 보이는 메야가 신경이 쓰였고, 그녀를 보면서 딸 리나를 떠올린다. 메야 역시 실종된 딸을 찾아 다니는 아빠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선생님이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처럼 불쌍해 보여 마음이 쓰인다. 차곡차곡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번갈아 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쌓아가며 후반부의 섬뜩한 반전에 다다른다. 과연 실버 로드에서 사라진 소녀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스티나 약손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19년 ‘유리열쇠상’ 수상작이다. 북유럽 최고의 장르문학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을 신인 작가가 데뷔작으로 받는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국내에 출간되었던 유리열쇠상 작품들만 보더라도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요 네스뵈의 <박쥐>, 그리고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스티그 라르손, 유시 아들레르 올센 등 엄청난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탄탄한 구조와 매혹적인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뛰어난 계절과 장소에 대한 묘사와 섬세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백야의 풍경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더욱 매혹적이다. 푸른색이 감도는 무섭도록 적막한 숲과 진물이 나는 상처처럼 퍼지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늪,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고 시커먼 호수, 그리고 그림자들이 춤을 추는 자작나무 가지 아래서 들리는 바스락 소리, 검은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눈부시게 새하얀 수련... 그 숲의 심연에 고여 있는 어둠을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누구라도 책을 읽는 동안 스웨덴 북부의 적막한 마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섬뜩하지만 매혹적이고, 강렬하지만 우아한, 아주 놀라운 북유럽 스릴러를 만났다. 스티나 약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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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가는 유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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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스스로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 좁고 허름한 집, 늘 똑같은 식사와 똑같은 옷, 둘이 나눠 쓰는 학용품, 게다가 게임도 스마트폰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 보면 기분이 암울해질 따름이다. 그런 생활이 기본이었던 우리에게 1년에 하루라고는 하나 남과는 다르게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신적인 구원이었다.     p.38

 

쌍둥이 형제인 유가와 후가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그걸 방임하는 어머니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아무 이유 없이 걷어차이고, 얻어맞았고, 남편의 폭력에 기를 못 펴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형제가 선택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공유'였다.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만큼 혼자보다는 함께인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늘 함께 다녔고, 오로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중에 서로가 있었던 장소가 서로 뒤바뀌는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갑작스레 찌릿찌릿 떨리고 막에 감싸인 듯한 감각이 밀려오면 그 자세 그대로 굳어서 바로 다른 장소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순간 이동은 1년에 단 하루, 그들의 생일에만 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났다. 이 특별한 능력은 불운으로 점철된 우울한 형제의 일상에 작은 탈출구가 되어 준다.

 

그저 잠깐 동안의 이동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남들처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있던 유가와 후가 형제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년에 단 하루라도 남과는 다르게 특별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들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구원'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생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그리하여 이들 형제는 이 특별한 순간 이동 능력을 이용해 왕따를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고, 어른들에게 착취당하던 여자 친구를 구출하기도 하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한들을 응징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나와 후가가 사회에서 엇나가지 않기 위해 익힌 지혜 중 하나에 따르기로 했다. 바로 '모르는 게 있으면 아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구하라'다. 그게 제일 손쉽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당연히 아는 것도 모른 채,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 유치원 때까지 저녁을 매일 먹는다는 것도 몰랐을 정도다.    p..164

 

겉모습은 똑같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유가와 후가는 성격도, 취향도 완전히 달랐다. 공부를 잘하는 형 유가는 과거와 미래만 신경 쓴다. 그에 비해 운동을 잘하는 동생 후가는 지금 이 순간만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후가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욱하는 터프한 성향이 있는데, 유가는 그런 동생의 앞날이 걱정되는 성향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 형제를 보고 어쩐지 '천사와 악마 같다'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얼굴은 같은데 완전히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라서, 이들이 순간 이동 능력을 통해 상대를 당황시키거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쁜 상황을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앞에 놓여진 현실이 바뀌는 일은 없다. 그들 역시 ‘세상에 슈퍼히어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냉소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서 고통 받는 약자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준다.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에는 그 어떤 위험하고 진지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유머가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닥친 그 상황과 상관 없어 보이는 무심한 유머를 툭툭 뱉어내며, 이야기는 가벼운 재미를 추구하는 것처럼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묵직한 여운을 남겨준다. 이 작품 역시 아동 학대와 왕따, 납치 및 살해, 청소년 범죄의 폐해 등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거운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들과는 다르지만, 이사카 고타로식 히어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색다른 유쾌함과 순수한 따뜻함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이사카 고타로의 초기작들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이번 작품이 더 마음에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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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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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직업에는 거짓말이 필요하고, 이쪽이 알고 싶은 정보를 갖고 있는 인물을 교묘하게 속여서 말하게 하는 것도 스킬 중 하나다.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나는 종종 스스로 거짓말을 폭로해 버린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분노를 능숙하게 받지도 못한다. 어느 쪽이든 요령이 나쁘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p.116

 

미야베 미유키가 유일하게 시리즈로 구축해온 탐정 캐릭터인 스기무라 사부로는 평범하고 이렇다할 장점도 없지만, 일상생활은 안정되어 있어 안락하고 행복한 인물이다. 그래서 시리즈 제목도 '행복한 탐정 시리즈'이고 말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누군가>는 2003년 작이었다. 재벌가의 딸과 결혼 후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 사내보를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남자로 등장했던 그는 2006년 작인 두 번째 <이름없는 독>에서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무차별 독극물 살인사건 속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무려 무려 7년이나 지나서 나온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 결혼 10년차였던 스기무라 사부로는 아내의 불륜과 이혼으로 회사를 퇴사를 하고, 네 번째 작품인 <희망장>에서 드디어 탐정 사무소를 개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작품인 이번 신작에서 마침내 제대로 된 프로 탐정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번에 스기무라를 찾아온 의뢰인은 50대 후반의 품위 있는 부인이다. 딸이 자살 미수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한 달이 넘도록 한 번도 딸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딸이 자살을 하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고, 전화도 문자도 소용이 없고, 딸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스기무라를 찾아온 것이다. 딸의 남편은 자살 미수의 원인이 장모에게 있다면서, 면회를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도 사위가 그렇게 우기며 전화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어서, 전혀 대화가 안 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대체 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위는 왜 가족의 접근을 차단한 채 부자연스러운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아내를 숨기는 것일까. 가족간의 갈등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생각보다 더 끔찍하게 사회에 뿌리 깊게 숨겨져 있던 어둠이 있었다. 선배의 뜻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체육계 특유의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가 어떤 식으로 무시무시한 악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 <절대 영도>에서 스기무라는 시리즈 사상 가장 비열한 악인들과 직면하게 된다.

 

 

누구의 말이었을까. 나는 떠올렸다. 사람은 모두가 혼자서 배를 저어 시간의 강을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미래는 항상 등 뒤에 있고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다. 강가의 풍경은 멀어지면 자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는 무언가라고.    p.301

 

이 책에는 세 가지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는데, 첫 작품인 <절대 영도>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나머지 두 작품 <화촉>과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소소한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스기무라의 사무소에는 손님이라곤 전혀 없었고, 광고지조차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우편함과 부재중 전화도 메일도 오지 않는 나날이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앉아 있던 스기무라는 사무소와 연결된 주인집 다케나카 부인의 부탁을 받게 된다. 지인의 조카가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함께 가달라는 거였다. 단순한 결혼식 참석처럼 보였으나, 이 결혼식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미묘한 가족들간의 사정과 결혼식 당일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또 한번 스기무라를 사건 깊숙이 끌고 들어가게 된다. 표제작이자 마지막 수록작인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 등장하는 의뢰인과 사건은 너무 쉽게, 허무할 정도로 결말이 나버렸는데 역시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뒤에 남은 이야기가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너무도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일이기도 해서 더 여운을 남겨주었다고 할까. 마지막 장면에서 푸른 하늘 아래, 사립탐정의 모습을 한 돌이 되어 그저 우두커니 서 있던 스기무라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던 다테시나 경위가 "당신도 정신 바싹 차리고 힘내요, 탐정님."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더해주기도 했다.

 

미야베 미유키는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소소한 사건을 해결하는 평범한 탐정을 떠올리게 된 계기를 마이클 르윈의 '앨버트 샘슨' 시리즈가 너무 좋아서, 그런 느긋하고 사람 좋은 사립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앨버트 샘슨 시리즈는 <인디애나 블루스>와 <침묵의 세일즈맨> 두 권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탐정 소설에 흔히 나오는 명석한 탐정이 아니라, 가족의 실종 같은 평범한 사건을 다루는 서민의 탐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기무라 사부로가 다루는 사건들이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내, 교우관계, 회사에서 꼬여버린 인간관계로부터 태어난 악의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스기무라는 탐정으로서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저 불운하게 사건에 잘 휘말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장점은 타인에 대한 예의와 정직함, 그리고 지혜로움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 전체의 장점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탐정다운 모습을 보여줄 스기무라 사부로의 성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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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 매일 흔들리지만 그래도
오리여인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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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위로만 쑥쑥 자라온 삶은 아니었다. 사람은 물론 일에서도 많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그런 시간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다. 나와 같은 상황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나 노하우도 생겼다. 쨍하게 햇빛이 들지 않는다고, 더 높이 자라지 못한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햇빛을 받고 쑥쑥 자란 나무는 사람에게 과일도 주고 그늘도 주는 인생이라 좋고, 질경이처럼 삶이 척박하여도 헤쳐나가다 보면 누군가에게 작은 좌표가 되는 삶도 좋다.    p.71

 

사랑스러운 그림과 따뜻한 글로 SNS상에서 15만 팔로워와 소통하고 있는 오리여인의 4년 만의 신작 에세이이다. 오리여인이라는 이름으로 4권의 책을 펴내며 5년이 넘게 한 번도 쉬지 않고 활동해왔다. 이런 저런 트러블도 있었고, 너무 소진되어버린 상태라 스스로 활동을 멈추게 된다.  그 동안 머릿속에 일, 오로지 일밖에 없던 그녀에게 하루,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자신만의 시간이 갑작스럽게 생기게 된 것이다. 처음 한 달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인터넷에 검색해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모든 걸음을 멈추자 오히려 그녀의 일상이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려가거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에서 숨가쁘게 뛰어다니느라 우리는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것에 참 인색하다. 오리여인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보폭으로 걷는 삶을 그저 가만가만 보여준다. 땅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식물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더니 결국은 싹을 틔워내는 것처럼, 각자에게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식물에게도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살면서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에, 타인과의 비교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존심으로 만든 둑이었나 보다. 와르르 무너진 마음 사이로 열정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마음이 물에 젖은 한지같이 질척이고 무거워졌다.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먼지 같은 이야기에 마음 쓰지 말라며 밥이나 먹자 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하고 같이 걷다 해방촌 계단에 앉았다. 달이 보인다. 한참을 친구와 이야기하니 푹푹 젖어 있던 마음이 꾸덕꾸덕 말라간다. 그래. 눅눅해진 내 마음, 시간을 들여 잘 말려주면 마른 한지처럼 더욱 질기고 단단해지겠지.    p.190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을 수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을 피하게 되는 것 같다. 자수를 놓는 것처럼 한 땀 한 땀 마음을 천천히 눌러 담는 일, 정성으로 마음을 쏟아 요리를 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대목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오리여인이 들려주는 시간을 들여 마음을 다독이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위로가 되어 주기도, 힐링이 되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박한 일상 속 행복들이, 평범해 보이지만 따뜻한 순간들이, 당연한 것처럼 느끼며 살았지만 사실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아침에 먹는 따뜻한 밥, 친구가 힘내라고 보내주는 문자, 혼자서도 잘 자라고 있는 화분, 재미있게 읽은 책과 음악 등.. 당연한 것은 정말로 없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의 진짜 삶과 닮아 있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람 마음일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여도, 평화롭고 고요해 보여도, 걱정 없이 부유해 보여도 사실 그 안에 어떤 감정과 생각들로 마음이 채워져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다들 어떤 마음으로 사는 걸까. 이런 저런 마음들이 뒤엉켜 떠밀리듯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다들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건지 말이다. 오리여인은 말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내가 나를 기다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보폭으로 걷는 삶이라는 것이 매일 불안하고, 망설이며, 주춤거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멈추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한걸음 다시 내딛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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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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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에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더불어 그곳의 자연에서 나는 음식이 많이 나온다. 막 짜낸 신선한 염소젖, 불에 구운 황금빛 치즈. 그야말로 천연 유기농 유제품들의 향연이다. 무뚝둑하지만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낌없이 마련해주는 염소젖과 치즈를 하이디는 실컷 먹고 또 먹는다. 대접에 담긴 염소젖을 꿀껄꿀꺽 소리 나게 들이마시고, 버터처럼 부드러운 치즈를 빵에 발라서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그 장면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지 웬만한 '먹방' 뺨친다. 작가가 순전히 먹는 장면을 쓰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p.19

 

진저브레드와 생강빵, 월귤과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과 산딸기 주스, 각각의 단어는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번역가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 의미는 같으나 어감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주로 고전 작품들은 번역판이 다양하게 나오는 편인데, 이는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의미가 그만큼 많다는 뜻도 된다. 이 책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을 탐험하는 ‘번역’의 황홀함과 고단함을 이야기하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본 적 없는 풍경을 생생히 옮기는 번역자로서, 이야기의 집을 짓는 작가로서 책 속으로 떠나는 매혹적인 탐험, 상상 속의 음식들, 원어와 번역어 사이에서 빚어지는 달콤한 오해를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어렸을 적 읽었던 세계 명작 소설이나 소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한 번도 맛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저 낯선 음식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며 상상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글을 쓰고 번역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토록 신비롭게 들렸던 마법의 주문들 중 일부는 사실 잘못된 번역이었으며, 그 환상적인 뉘앙스는 번역가가 음식의 이름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지 못해서 생긴 오해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이웃집에 살던 가난할 할머니에게 주고 싶어 안달했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하얀 빵, 소공녀 세라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포도가 박힌 큼지막한 빵들, 애거사 크리스티의 <외로운 신>에 등장하는 빵 껍질에 윤기가 흐르고, 폭신폭신한 롤빵, 그리고 워더링 하이츠의 식탁에 차려진 바삭바삭한 거위 구이, 스칼렛 오하라가 파티 전에 먹은 짭쪼름한 그레이비 등.. 고전 명작 34편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매혹적인 마법을 선사한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군침이 돌만큼 맛깔스러운 식사 묘사가 많은데, 그중 절반은 오블론스키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특히 초반에 모스크바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오블론스키와 레빈이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오블론스키는 시골에서 올라온 오랜 친구 레빈을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앞 벨벳 의자에 앉아 굴, 야채 수프, 진한 소스를 끼얹은 가자미, 로스트비프, 사철쑥을 곁들인 닭 요리, 과일 샐러드, 와인과 치즈를 주문한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굴이다.    p.172

 

어린 시절 아파트 입구에 있던 조그만 빵집에서 솔솔 풍겨오는 빵 굽는 냄새에 이끌려 가지고 있던 용돈을 털어 빵을 하나 사온 적이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게 빵이란 동화책 속에서나 등장하는 딱딱한 바게트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날 이후로는 갓 구운 빵 하나만 들고 있으면, 밀린 숙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성적표도, 친구와의 다툼도 다 잊어 버리고 행복해졌던 기억이 난다. 퍽퍽하지만 담백한 스콘은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고, 진한 초코 향의 브라우니는 우울했던 기분마저 사라지게 만들어주었고, 특유의 향에 매혹되었던 시나몬 롤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고, 우유랑 함께 먹으면 너무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카스텔라는 친구랑 함께 먹으면 든든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시기를 상징하는 음식은 시간이라는 틀을 거쳐 추억으로 박제가 되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영혼마저 감싸주는 소울 푸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학 작품 속에서 만나는 음식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읽는 편이다. 음식이란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작품의 배경을 그려주기도 하고, 등장 인물의 성격을 의미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플롯 전개에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스러운 일러스트와 따뜻한 색감으로 읽기도 전부터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책은 구성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식전 요리인 빵과 수프, 메인 디시인 주요리, 그리고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각각의 맞는 작품들과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각 챕터 끝에는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덧붙였고, 윤미원 푸드 일러스트레이터의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들이 사랑스럽게 곳곳에 수록되어 있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눈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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