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5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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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가지 얘기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해미시가 말했다. 그는 토미가 신도였던 것 같은 해돋이 교회를 찾아갔던 일부터 휴가를 내고 그 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샌더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왜 블레어 경감이 당신을 경찰의 제일가는 골칫거리라고 하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요. 아니, 혹시 누가 당신을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런 위험 정도는 감수하는 거죠."     p.101

 

스코틀랜드 북부의 험준한 산자락에 자리한 평화롭고 한적한 로흐두 마을, 그저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이나 주워듣고 밀렵이나 하고 공짜 차나 얻어먹으며 살고 싶은 순경이 있다. 해미시는 그 날도 여기 농장에서 차 한잔, 저기 회반죽을 칠한 농가에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면서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이 마을에서 순찰은 단순한 사교 방문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흐두 인근 글레넌스테이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약 과다 투여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악의 소굴과도 같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 고지도 더 이상 마약 청정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미시는 약물 소지죄로 체포된 이력이 있던 그 청년을 직접 만났었고, 지금은 약물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약물 과용으로 숨졌다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사망자의 유족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고 그를 찾아 오자, 본부 몰래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해미시는 청년이 신도였던 것 같은 교회를 찾아갔다 수상스러운 정황을 발견하고, 휴가를 내고 신분을 감춘 채 교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위장 취업은 시작에 불과했고, 마약 밀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책도 없이 허세를 떨다가 마약 카르텔 수뇌부를 만날 지경에 처하게 되는데, 뒤늦게 이 일을 보고받은 경찰 본부가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함정 수사를 계획하게 되면서 일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러다 졸지에 글래스고에서 파견 온 올리비아 체이터 경감과 부부로 위장해 거물 마약상 행세를 하게 되는데, 해미시의 예측 불허한 종횡무진 수사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왜 당신처럼 총명한 인재가 시골 마을 순경으로 썩고 있답니까?" 각자 술잔을 들고 자리에 앉자 배리가 입을 열었다.
해미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설명하기도 지겹군요. 나는 순경 일이 좋습니다. 로흐두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그러면 인생은 어쩝니까? 재미는 어디서 보고요?"
"한순간의 재미 따위, 인생의 행복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서요." 그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p.195~196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그 열 다섯 번째 작품이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초 고전들의 유산을 계승한 정통 코지 미스터리이다. 1985년 <험담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4권의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작가인 M. C. 비턴이 작년 12월 말에 돌아가셨으므로, 이 시리즈는 34권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무사태평, 유유자적, 행방은 늘 ‘오리무중’인 로흐두 마을의 유일 공권력인, 야망 없는 시골 순경을 주인공으로 말이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천재적인 수사 실력과 비인간적인 외모의 경찰들은 사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게 마련인데, 대부분의 유명한 시리즈 캐릭터들이 다 그렇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너무도 평범해서 고개를 돌리면 어느 거리에서나 만날 법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스토리라 그런지 어딘가 친근함으로 무장한 매력으로 중독성있는 재미를 보장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해미시가 난생처음으로 해외에 나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층 더 스펙터클한 모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만의 특별한 점이 바로 '할리퀸 로맨스와 정통 문학 작품의 경계에 서 있다'는 건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전작까지는 야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자와 상류사회의 우아한 여인이 만들어 내는 로맨스가 있었다면, 이번 작품은 그녀와 파혼한 이후 다시 솔로가 된 해미시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시리즈물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통해 캐릭터가 설계되고 발전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캐릭터이길래, 무려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수십 년 전에 쓰였던 아늑한 고전 추리물이 현대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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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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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아주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에 겪었던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뿐이다. 옷차림, 국적, 색깔이 달라졌어도 모두 똑같다. 모든 것은 과거의 메아리이자 반복이다. 슬픔도 없다. 순전히 죽음을 앞둔 아주 작고 마른 고양이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 외로움, 배신감 속에서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던 오래전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경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34

 

수 세기 동안 미술가, 작가, 과학자, 철학자 등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서재와 스튜디오를 고양이들과 공유해왔다. 찰스 디킨스, T.S.엘리엇, 레이먼드 챈들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라카미 하루키 등 고양이에 매혹된 작가들의 명단만 해도 꽤 많다. 이들의 고양이에 대한 무한 애정 공세는 그들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해 특별한 감동을 안겨 주는데, 공통점은 바로 고양이가 인간의 진정한 친구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반려 동물들은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무슨 일인지 귀찮게 물어보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짜증나게 몰아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동물들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양이와 사람이 어울려 사는 당연한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보여주는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의 풍경은 조금 더 치열하고, 거칠다.

 

겉모습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 속에 영역과 서열을 다투고 짝 하나를 두고 경쟁하며, 때론 돌볼 여력이 없는 새끼를 미련 없이 버리는 모습들 또한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고양이들을 지켜보는 레싱의 다정함은 단순히 동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대등한 존재처럼 보여서 더욱 놀라웠다. 이미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던 상태에서, 길에서 데려온 한 마리까지 세 식구가 되어 살아온 시간을 그리고 있는 '살아남은 자 루퍼스'라는 글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고양이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루퍼스는 생존자의 지능을, 찰스는 과학적인 지능을, 장군은 직관적인 지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충격 때문에 데려온 지 사 년이 지나서야 레싱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루퍼스,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기계들에 관심을 가지는 찰스, 그리고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할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장군까지.. 나는 이 고양이들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싱의 고양이들에 대한 애정과 다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충격적이고 놀라운 즐거움을 맛보고,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는 삶.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털, 추운 밤에 자다가 깼을 때 느껴지는 온기,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양이조차 갖고 있는 우아함과 매력. 고양이가 혼자 방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고독한 걸음에서 표범을 본다. 심지어 퓨마를 연상할 때도 있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사람을 볼 때 노랗게 이글거리는 그 눈은 녀석이 얼마나 이국적인 손님인지를 알려준다.    p.264

 

이 책은 도리스 레싱이 1967년, 1989년, 2000년에 발표한 글을 한 권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불행하게 보낸 유년 시절을 함께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작가로서 성공한 후, 당시 곁에 있었던 다리 하나를 잃은 늙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곁에 있어준 고양이들을 바라보는 레싱의 시선은 여타의 고양이 에세이에서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사랑의 그것만은 아니다. 특히나 그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야생 고양이들에 대한 기억은 치열하고, 날 것 그대로의 생존 투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놀라웠다. 야생 고양이들의 수가 마흔 마리를 넘기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직접 살처분을 해서 개체 수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던 야만스럽고, 끔찍한 기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참혹했다. 이렇듯 그 어떤 고양이를 다루고 있는 에세이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어 그들의 진짜 삶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고양이들의 발정, 출산, 육아 등의 모습들 역시 사랑스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특별히 싫어하는 편도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거의 매일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을 피해 훌쩍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곤 한다. 길고양이들은 잘못된 속설 탓에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쓰레기봉투를 뜯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잡혀가 안락사를 당하거나 텃밭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무심히 지나쳤던 길고양이들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인간이나 고양이나 살아간다는 건 혹독하고 냉엄한 국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 그 둘 사이에 놓인 벽을 넘으려 애쓰는 레싱의 따뜻한 글을 통해서 사람과 고양이가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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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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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아이들이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하는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이탤리언델리에 가서 갓 구운 롤빵과 커피를 사 마셨다. 집안일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창가의 의자나 보도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와 기쁨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외로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쐐기풀' 중에서, p.260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 <런어웨이>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이지만,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먼저 읽게 된 것은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을 정도로 공감이 되곤 했었다. 특히나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꾸는 걸로 그려져서 여성 독자로서 더 인물에 동화되고, 그들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법한 여자들을 화자로 삼는다. 그녀들의 서사는 흔하디 흔한 일상에 대한 것이지만, 삶 전체를 껴안듯 복잡한 무늬들이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담겨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결혼이 큰 변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마지막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포스트앤드빔' 중에서, p.330

 

대부분이 작품이 여성 캐릭터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남편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피오나와 그랜트는 오십 년간이나 함께한 부부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랜트는 아내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피오나는 남편에게 자신을 요양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그랜트는 결코 장기 입원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냥 한번 시험 삼아 쉬면서 치료할 겸 가보자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입소자가 처음 삼십 일 동안 어떤 방문도 받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고, 그랜트는 아내를 만날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긴 한 달을 홀로 보내고, 마침내 아내를 만나러 갔지만 피오나는 그랜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요양원에 잠깐 머물렀던 거라 곧 떠나버리고, 피오나는 상실감으로 심하게 앓기 시작한다. 그랜트는 그녀를 위해 그 남자의 아내를 찾아가 그를 다시 요양원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집에 가서 그의 아내에게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는 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아이러니, 갈등과 상처, 그리고 관계와 회한 등이 섬세하지만 담담한 문장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내일 당장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감동을 주고, 위안을 안겨준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을 통해 먼로의 작품이 가진 힘을 만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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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세스 에이징 - 노화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뇌과학의 힘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이은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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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지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뇌를 구성하는 기관마다 나이 드는 속도는 다르다. 어떤 기관이 쇠하는 와중에 오히려 효율과 효과가 증가하는 기관도 있다. 우리가 대중문화 속에서 접하는 기본적인 메시지, 즉 노년은 순전히 쇠퇴하기만 하는 시기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물론 어떤 기능은 분명히 쇠하지만 우리의 건강과 행복, 재치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가장 큰 단일 결정 요인은 우리가 어느 정도 타고나기도 했고 바꾸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는 것, 바로 성격이다.    p.35

 

친구 두 명이 100세까지 산다고 했을 때, 두 사람의 수명은 동일하지만 질병 수명은 무척 다르다. A는 50세에 건강이 서서히 쇠하기 시작해서 80세가 됐을 때 하루 24시간 간병인이 필요했다. 반면 B는 70세에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지만 95세까지는 심각한 건강상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나 평온한 나날을 20년 더 보내고, 질병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기까지 15년 더 행복하게 사는 인생을 선호할 것이다. 인지과학계의 거장 대니얼 레비틴은 이 책에서 '노화에 접근하는 방식을 크게 바꿈으로써 그 균형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기울이고 건강 수명을 늘리기에 늦은 시기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경과학, 심리학, 뇌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뇌와 노후의 관계에 대한 방대한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이 책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반드시 감퇴하고, 신체적?정서적?인지적으로 둔화된다는 통념과도 같은 편견들을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반박들로 뒤집고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

 

노인들에게 삶을 되돌아보고 가장 행복했던 나이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언제라고 대답할까. 대부분 아무 걱정 없이 즐거웠던 어린 시절 혹은 사회 생활 경력의 정점이었던 젊은 시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72개국에서 조사한 결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가장 많이 꼽히는 연령은 82세였다고 한다. 전혀 예상 밖의 결과라 의외라는 생각부터 드는데, 집단 조사 결과 행복감은 30대 후반에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내다가 54세 이후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정서적?사회경제적으로 만족감을 유지하는 노인들의 사례를 통해 활기와 명민함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는 일이 점점 끔찍하게 느껴지고 있는 이 시기에, 나이를 먹을 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러한 노년의 시기를 열 살 이나 스무 살쯤 높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년을 어떻게 보내고자 하는 지가 중요하다. 때때로 우리는 심장과 폐, 신장, 간이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데도 마음이 쇠락하고 오랫동안 삶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모는 92세이고, 지난 15년 동안 의미 있는 대화를 함께 나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모는 살아 있고 기관계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가 '삶'과 연관 짓는 기쁨이나 자각을 전혀 경험하고 있지 않다. 지금 이모는 건강 수명이 아니라 질병 수명 구간에 속하는 게 확실하다.     p.349

 

나이가 들면서 뇌에서 도파민이 감소하고 도파민 수용기가 퇴화하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향이 줄어든다고 한다. '마음'이라는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몸'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동기가 줄어든다는 사실은 정말 슬프다. 게다가 이를 가속화하는 것은 신체와 인지 기능에 한계가 생기고, 기억에 관한 문제도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꼭 알츠하이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연스레 노화의 현상 중 하나로 기억력이 나빠질 테니 말이다. 나는 아주 나이를 많이 먹어서도 언제나 책을 읽으면서 생활하고 싶다는 바램이 있는데, 그래서 노년에 시력이 나빠져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례를 듣고 있으면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해지곤 했다. 아마도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도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년기를 위해 어떻게 뇌를 단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노화에 따른 기억력 감퇴는 실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적으며, 감각 체계 쇠퇴를 완화하는 노화의 보상 기전 중 하나로, 경험이 많아질수록 패턴을 알아차리고 향후 결과를 예측하는 기량이 향상된다는 말은 대단히 희망적으로 들렸다.

 

노화를 종말이 아니라 정점으로 여기도록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노화에 대한 편견을 완벽하게 뒤집는 인상적인 의견이었다. 노후가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변화들을 최소화시키고, 80대, 90대에도 새로운 일을 시도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뇌과학적으로 뇌를 어떻게 단련할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노후에 대한 현명한 계획을 한 번 세워봐야 할 것 같다. 노후를 건강하고 지혜롭게 재구성하는 혁명적 방법이 궁금하다면,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년기를 위해 어떻게 정서와 육체의 변화를 다뤄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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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작 사부작 오늘의 드로잉 - 전2권 - 손그림으로 담아내는 소소한 나의 일상
박진영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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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시국이라 봄이 되었지만 계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어느 새 여름을 앞에 두고 있다. 나들이도, 여행도 못하고 집콕 신세인 나날 속에 각자의 취미를 찾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혹시 아직 뭘 해야 할지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책상 위에서 쓱쓱, 이 책과 함께 나만의 힐링 타임을 가져보면 어떨까.

 

도구도 간단하고, 방법은 더 간단해서, 누구라도 색연필만으로 감성 넘치는 그림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연필스케치부터 채색까지, 도구도 단계도 번거롭게만 느껴지는 드로잉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케치 없이 색연필로 그리는 그림은 어떨까.

 

 

이 책은 유성색연필을 사용해 특별한 기술 없이 힘 조절로 편하게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해주는 드로잉 북이다. 유성색연필은 오일로 만든 색연필로 물과 잘 섞이지 않으며 꾸덕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 크레파스와 크레용의 중간 느낌이라고 보면 되는데, 일정한 힘을 주고 종이에 유성색연필로 색칠을 해보면 꾸덕한 질감이 잘 표현된다. 거기에 디테일한 부분은 채색 후 4B 연필로 표현해주면 된다.

 

특히나 이 책이 흥미로운 부분은 '스케치 없이 채색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형태를 머릿속에 그린 후 색연필로 가장 넓은 면을 채색하고, 작은 면들과 선과 점으로 디테일하게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보통은 스케치를 하고 나서 완성이 된 다음에 채색하는 작업이 또 필요하게 마련인데, 그걸 한 방에 끝낼 수 있다니 초보자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저자인 박진영 일러스트레이터는 5년 동안의 산골살이를 마치고 2년 첫 서울로 독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도 작가의 산골 라이프가 가득 담겨 있어 더욱 재미있었다. 계절, 사람, 사랑, 공간으로 4개의 파트를 나눠 '벌써 일 년', 'DEAR MY', 'ONLY YOU', 'LIFE'로 구성했고, 마지막 파트에는 작가가 산골짜기 운주에서 보냈던 5년의 시간을 기록한 짧은 에세이를 일러스트와 함께 담고 있다.

 

마지막 파트에 수록된 '운주 라이프'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산골짜기 운주의 시간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에세이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도시에서 자고 나라서 도시 라이프밖에 모르는 독자로서, 산골짜기에서 생활하는 일상의 풍경이 너무도 근사하게 느껴졌다. 이 부분은 따로 그림 에세이로 출간이 되어도 챙겨서 읽어보고 싶을 만큼, 짧아서 너무 아쉬웠던 대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색연필 드로잉북과 컬러링북, 그리고 7장의 예쁜 엽서로 구성되어 있다. 컬러링북에는 본 책에 수록된 작품 중 20점의 그림을 선별해 담고 있는데, 일종의 밑그림 형태라 아직 그림에 자신이 없는 초보라면 이걸 바탕으로 채색을 하면서 드로잉을 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220g의 도톰한 도화 용지에 깨끗하고 깔끔하게 뜯어지는 제본으로 되어 있어 채색을 다 한 후에는 뜯어서 포스터처럼 바로 활용할 수도 있어 더 좋다.

 

 

따뜻한 그림들로 채워진 7종의 엽서 또한 드로잉할 때 참고로 활용해도 되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거나, 빈 벽에 장식으로 붙여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본 책에 컬러링 북, 거기다 엽서까지 3종 세트로 구성되어 있어 가격 대비 정말 실용성이 뛰어난 책이다.

 

알록 달록한 색감이 보는 것만으로도 비타민처럼 상큼한 제철 과일과 채소들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풍경들도 그리고, 가족, 동네 꼬마들, 강아지, 카페, 시장 등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다. 각각의 테마 앞에 '컬러 가이드'라고 해서 주요 색상들의 정확한 컬러 명을 표기하고 있어 더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색상을 고르느라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사부작사부작'이라는 단어의 뜻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을 가리킨다. 힘 주지 않고 쓱쓱, 대충 그리는 것 같지만 근사한 드로잉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멋진 단어가 있을까 싶다. 사실 단순한 선과 디테일로 표현되는 그림들이 더 그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보며 그저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니, 이번 기회에 그림을 배워보고 싶었던 누구라도 적극 도전해보기를 추천한다.

 

뭔가 그려보고 싶지만 타고난 곰손이라서, 그리다 망쳐버릴 것 같아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스케치 없이 그리는 게 이렇게나 쉽다는 걸 깨닫고 놀라게 될 것이다. 도구가 준비물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이 책과 색연필만 있으면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손그림을 통해서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다. 진정한 취미란 바로 스트레스 해소와 힐링, 그리고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자, 오늘부터 책상 위, 나만의 힐링 타임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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