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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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검은 옷 당신의 말처럼 열심히의 세계로 만들어진 노래가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게다가 열심히로 만들어진 노래라니 조금도 듣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정말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했는데 아니라고 생각해.     -'안 해' 중에서, p.53

 

박솔뫼의 첫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는 2014년 출간 당시 이 작품집으로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이번에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로 재출간되었다. <오늘의 작가 총서>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2000년대 이후 출간작 중, 문학적 가치와 소설적 재미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으로 독자를 만나기 어려웠거나, 다시 단장할 필요가 있는 5종의 소설을 동시에 선보였다. 신작이 아니라 독자들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기존 작품들을 새로운 표지로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이번에 만난 작품은 표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는데,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들에 대한 사유가 근사하게 표현된 이미지라 작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소설집에는 지명을 공유하는 작품이 두 작품 있고, 공간과 등장 인물이 공통적인 작품이 두 작품 있다. <안 해>라는 작품에서는 노래방에 손님을 가둬두고 막무가내로 노래를 시키는 검은 옷 남자가 등장한다. 여고생 두 명이 손님으로 오면 한 명은 노래를 계속 부르도록 시키고, 같이 온 친구는 노래방 뒤에 있는 방에 가둬두는 식이다. 노래를 부르던 여고생이 밖으로 나가려 하면, 문을 발로 차고 가둔다. 검은 옷 남자는 어떤 기준에선지 사람들을 고른 후 가두었고, 누군가는 가두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시킨다.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정말로 열심히 부르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면 그때 그 사람의 노래가 완성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데, 물론 무작정 노래를 해야 하는 당사자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 중에 누군가가 기세 좋게 남자의 논리를 거부한다. ‘구름새 노래방’이라는 공간과 ‘검은 옷 남자’라는 노래방 사장은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이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두 작품을 연작이라고 보기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여름이 끝나고 나는 수도로 돌아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책을 읽던 남자가 말했던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해하고 나자 그 말은 당연하게 여겨져 어째서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지? 어느 때고 그렇지? 여전히 나는 가볍고 바람이 통과하고 흔들거리고 텅 비어 있고, 질문들은 빈 공간을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돌아가고 싶어지는 때도 없다. 언제나 그랬지만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어떻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해만' 중에서, p.93

 

<해만>과 <해만의 지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해만'은 육지로부터 배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섬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섬에서 서너 달 머무르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돈이 생겨 해만에 가게 된다. 그곳을 알게 된 것은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존속 살인을 한 범죄자가 해만에 숨어들어 한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없는 그곳에 가게 된 이유치고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은 마냥 안온하거나 평화로운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그곳에 온 여행자들이었다. 이야기는 그곳 여행자들의 숙소를 중심으로 어린 대학생, 책을 읽던 남자, 직장을 그만두고 온 '나'를 비롯해서 섬에 들어왔다는 존속살해범의 여동생이라 자처하는 여자까지 자발적으로 육지를 떠나 그곳을 찾아온 이들의 사연을 풀어낸다.

 

그 밖에도 5.18을 겪지 않은 세대가 '광주'라는 사건에 대해 갖는 역사적 태도를 보여주는 <그럼 무얼 부르지>, 사람이 테이블이 되어 가는 이상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 부조리극 분위기의 <안나의 테이블>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박솔뫼의 소설들은 독특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쉽게 잘 읽히지만 다 읽고 나면 무슨 얘기인가 싶은 게 있고, 연작처럼 보이는 작품임에도 뭔가 어긋나 있다. 잔잔하게 흘러가던 서사가 갑작스레 돌발적인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결여한 것처럼 보이던 인물에게도 욕망이 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고, 작가의 색깔이 뚜렸하다는 점이 박솔뫼의 소설들이 가지는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서사의 '재미'적인 요소는 조금 덜하지만,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읽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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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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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평범한 우정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어떤 것, 나를 압도할까봐, 어쩌면 나를 파괴할까봐 두려운 어떤 것. 때로는 그녀를 원한다기보다는 그녀처럼 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두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지만 끊임없이 합쳐지고 뒤섞여서 어느 순간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가 지닌 느긋한 삶의 방식을 탐했고, 그것을 갈망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것이기를 바랐다.     p.118

 

앨리스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유일한 가족인 고모가 소개해준 남자 존과 충동적으로 결혼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로 이주해 새 출발을 해보기로 한다. 사실 존은 그녀가 꿈꿔왔던 이상형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시끄럽고 사교적이고 자신만만했으며 종종 무모한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약속들과 꿈들을 선택하기로 한 것은,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 잊을 기회, 지난 일은 묻어두고 돌아설 기회. 하루 종일 매 순간, 그날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지 않을 기회. 일 년 전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그 일을 과거 속에 묻어두고 눈을 감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모로코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탕헤르의 뜨거운 열기가 벅차기만 하다. 그렇게 일종의 광장공포증을 겪으며 집안에만 틀어박힌 나날이 이어지고, 남편은 아내를 내버려두고 신비한 도시 탕헤르와 사랑에 빠져 밖으로만 나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가 앨리스를 찾아 온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루시는 앨리스와 미국의 베닝턴대학에서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다.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앨리스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한 루시는 서로에게 매혹되었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참혹한 그날의 사건 이후로 모든 게 틀어져버렸다. 앨리스는 버몬트를 떠나 모로코의 먼지 날리는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순간들 속에서 단 한 번도 루시를 다시 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무도 친밀하고, 익숙해서 때로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 같다는 기분까지 느꼈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존재가 다시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앨리스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루시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끔찍한 과거를, 따분한 현재를, 제값을 하는 점술가라면 누구라도 지치고 서글픈 나의 손바닥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을 암울한 미래를 잊었다. 낡은 택시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서, 모로코의 울퉁불퉁하고 구불거리는 길을 달리는 택시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바람과 모래가 내 얼굴을 때리도록 내버려두면서, 그런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리고 거의 성공했다. 가슴이 아리도록 근사했던 그 몇 시간 동안―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따금 행복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p.203

 

앨리스와 루시는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지만, 두 가지 다른 버전의 탕헤르에 있었다. 앨리스는 루시의 탕헤르를 상상할 수 없었고, 루시가 알고 있는 앨리스의 탕헤르 또한 현실과 달랐다. 탕헤르,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닌 이상한 무법의 도시. 아프리카대륙 북쪽 끝,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 탕헤르는 오랜 세월 여러 서구 열강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은 모로코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독립을 되찾은 해인 195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립을 향한 모로코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끓어오르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좁다란 골목길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시가지 곳곳에 긴 세월 쌓여온 역사와 비밀을 감추고 있는 탕헤르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국적인 풍경들은 서사를 완성시키고, 인물들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독자들이 넋을 빼놓고 빠져들도록 최면을 건다.

 

크리스틴 맹건이라는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단 몇 페이지 만에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도무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심리적인 통찰력, 예민하고 근사한 문장, 숨을 들이켜면 탕헤르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생생함이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 작품에 대해 "도나 타트와 길리언 플린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 같다."고 말했다. 특히 이 작품은 히치콕스럽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조지 클루니 제작, 스칼릿 조핸슨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어 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탕헤르는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길로 이루어진 메디나와 고지대에 있는 성채 카스바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언젠가는 꼭 한번 탕헤르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 여성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집착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탕헤르에서 그들이 함께하는 여정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해도 좋다. 놀라운 서스펜스와 숨막히게 매혹적인 악몽을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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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척 무례했던 너에게 안녕 - 칠 건 치고 둘 건 두는 본격 관계 손절 에세이
솜숨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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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걸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데 쏟아부을 체력도, 시간도 이젠 없다. 무엇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도 없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일 따위 더는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낮부끄러움에 몸소리가 쳐진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실컷 좋아할 수 있도록 그 밖의 관계는 정리하는 게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더는 지름길이리라.      p.20

 

본업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온라인에서는 '솜숨씀'이라는 부캐로 활동하며 매일 조금씩 근력과 글력을 기르며 심신을 단련 중이라는, 저자의 첫 에세이이다. '솜숨씀'이라는 독특한 필명도 흥미롭지만, '칠 건 치고 둘 건 두는 본격 관계 손절 에세이'라는 부제목도 눈길을 끌었다. 저자는 말한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 알고 보면 여린 사람 등 그 동안 관계를 이어온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대체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고 조심성이 없었다고. 싫은 사람은 그냥 싫어하면 되고,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면 될 텐데, 우리의 사회 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면서 정리되는 게 아니라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은 이제 됐다는 이 책의 첫 번째 글부터 공감이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그녀는 너무도 만만해서, 좋은 게 좋은 거란 후려치기에 어물어물 넘어갔지만, 이제는 못들은 척 못 본 척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그거야 너한테나 좋은 거지'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뭔가 시원하고 통쾌한 기분 마저 들었다. 사실 좋게 좋게 넘어가면 언젠간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회 생활에서 사용하는 저런 식의 표현이란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대충 얼버무리거나, 바꾸자니 번거로우니 그 동안 해온 대로 하자는 식의 무사안일 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아닌 건 절대 안 되는 것이고, 싫은 건 그냥 싫은 거라는 걸 받아 들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자. 좋은 게 좋은 거지,는 한 개인의 노력과 정당한 주장을 무마하는 말이다. 나만 참고 지나가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면 모든 것이 순조로우리라는 상대의 이기적인 말에 쉽게 넘어 가지 말자.

 

 

좋아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오기도 하고(좋아하던 일이 싫어지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잘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잘하던 일이 좋아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이든 잘하는 일이든 우직하게 가다 보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오랜 시간 맑고 깊은 맛을 내는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꼼수 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힘을 줘야 할 땐 힘을 주고, 힘을 풀어야 할 땐 힘을 풀면서. 그렇게 내가 원하는 인생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p.115~116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이 많고, 아는 지인들이 많아야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점점 먹을 수록 쓸데없는 인간관계들은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 '인맥이라든지 네트워크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관계에도 미니멀리즘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저자의 깨달음은 아마 비슷한 나이대의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겉으로만 친해 보이는 여러 사람보다는 진짜 내 편이 되어줄, 나를 이해해주는 한 두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애기다. 그렇다면 관계를 어떻게 덜어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관계를 아주 단순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원인과 결과, 문제와 해결책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밀어내는 절차를 간략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 책에서 알려주는 인간관계 단순화 방식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타의에 의한 관계에서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어보는' 길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게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관계에 있어 선택과 집중하기를 알게 된다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새삼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내가 확실히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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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녀의 거짓말 - 구드 학교 살인 사건
J.T. 엘리슨 지음, 민지현 옮김 / 위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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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사회학적 연구라도 하듯 많은 자료를 찾아 읽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자신에게, 서로에게.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받아 들여지기 위해, 그리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과거에는 거짓말로 돈을 벌거나 손해를 피하기가 훨씬 쉬웠다... 지금은 모두가 약장수인 시대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대중이 당신의 창문과 대문, 나아가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거짓말을 하려면 신중하고 치밀해야 한다. 연출하고, 걸러내고, 계획해야 한다.      p.18

 

완벽하게 줄지은 창문들, 그 안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안뜰을 굽어보는 듯한 지붕 창들, 엄청난 예산을 들여 가꾸는 교정과 숙소들, 수목원.. 아름다운 학교다. 그러나 뭔지 모를 불안한 기운이 서려 있다. 이곳은 1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 기숙학교인 구드 학교이다. 워싱턴 D. C.의 엘리트 계층인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외교관, 정부 고위직과 그 밖에 억만장자의 딸들이 모인 영재학교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버드를 비롯한 아이비리그에 진학한다. 학 학년의 정원은 단 50명, 모두 포드 학장이 직접 선출한다. 구드는 최고의 학생만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노력한 만큼 미래를 보장시켜 주는 곳이었다.

 

전학생이 거의 없는 이곳에 어느 날 영국에서 온 아름다운 소녀가 전학을 온다. 180센티미터에 윤기 흐르는 피부, 연회색이 감도는 파란 눈동자, 천연의 금발 머리, 그리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미소를 가진 애쉬 칼라일. 그녀는 얼마 전에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한날 한시에 부모가 자살한 것이다. 런던에서 인정받는 자산관리 전문가였던 아버지가 재무부 차관에 내정되기 직전 불륜 스캔들이 터지자 자살했고, 어머니 마저 심한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게다가 오래 전 남동생도 그녀와 함께 호숫가에 있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열여섯 소녀 주변에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고, 이러한 애쉬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포드 학장은 그녀의 개인사를 밝히지 않고, 이름을 바꾼 상태로 입학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애쉬가 전학을 오고 나서 구드 학교에 의문의 죽음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모든 과거를 잊고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멀리 전학 온 애쉬를 또다시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과연 그녀는 그 모든 죽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최악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살아간다. 아픈 치아를 찔러보고, 멍든 자국을 눌러보면서 아직도 아픈지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 현재의 행복을 흘려보낸다.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으므로. 평안하다는 것, 행복하다는 것은 뭔가 잘못했다는 뜻이니까. 누군가의 어깨에 올라타거나, 누구를 아프게 했거나, 속이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니까. 상처에 덮인 딱지를 떼어내서 피 맛을 보고, 싸우고, 미워하고, 섹스를 하고, 사랑을 한다. 무엇을 위해? 인생이란 도대체 뭘까?      p.403

 

구드 학교는 오래된 전통만큼이나 여러 떠도는 괴담들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0년 전, 숲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학생 하나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당시 살인자의 아들이 지금 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있었다. 비밀 클럽이 다락방에서 신생아 뼈를 여러 구 찾았다는 얘기도 있었고, 학교 밑으로 지나가는 지하철도와 터널도 위험했으며, 수목원 길은 절대 혼자 다니면 안 되고, 계단이 붉은색인 이유도 어떤 여학생이 목을 매달면서 흐른 피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와중에 애쉬는 항상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 게다가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특권층 소녀들의 견제와 질투, 선생님들의 암묵적인 묵인 하에 운영되는 비밀클럽과 학교의 수많은 규칙들로 신입생의 나날은 정신 없이 흘러 간다.

 

이야기는 주로 신입생 애쉬의 시점과 포드 학장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두 인물 모두 명백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 숨기는 게 있다. 그리고 현재의 버지니아 마치버그에서 벌어지는 일 사이로 몇 개월 전 영국 옥스퍼드에서 있었던 일이 교차로 보여지면서 더욱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소녀들만 모여 있는 명문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학원 스릴러 내지는 영어덜트 소설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작품이었다. 심리 묘사도 촘촘하고, 플롯도 잘 짜여 있고, 반전도 인상적이고, 페이지를 넘길 수록 더해가는 서스펜스 또한 훌륭하다. J.T.엘리슨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 낯설지만, 영미권에서는 FBI 시리즈와 형사 테일러 잭슨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통령 임명직으로 백악관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워싱턴 정가 엘리트의 실체를 누구보다 훤히 꿰고 있어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매혹적인 배경과 생생한 인물들,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영화화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J.T.엘리슨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소개되어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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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의 책 - 독립출판의 왕도
김봉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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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이 만든 걸 과연 정말로 책이라고 불러도 될까? 책은 대학을, 그것도 국문과나 문창과를 전공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예지 공모전에 등단한 사람들이나 사회의 저명인사들같이 삶에서 어떤 원대한 이상과 목표를 달성해낸 이들이 그들의 고매한 정신을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적어내는 것이 아닐까?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놀기만 하면서 남들보다 부족한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어쩌면 책에 대한 일종의 모독은 아닐까? 나는 불안했다.     p.35

 

이 책은 30대 무직이었던 한 사람이 독립출판을 하고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저자는 군대를 전역하고 30대 무직 남성의 소소한 하루들과 사소한 일상들을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그렇게 블로그를 운영하며 순간순간 스치는 단상들, 매일의 단출한 기록들을 10년 정도 모아서 책으로 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독립출판의 장점이다. 독립서점에는 여행기, 사진집, 시집, 소설집,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다양한 판형으로 나와 있다.

 

살면서 책 한 권쯤 내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이 할 것이다. 요즘은 일반인이 글을 쓸 수 있는 매체도 많은 편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강좌나 독립출판을 한두 달 과정으로 도와주는 워크숍들도 많은 편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독립출판의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다. 책의 판형과 폰트, 자비출판과 독립출판의 구체적인 제작비, 본문을 편집하는 프로그램과 매뉴얼, 표지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표지 안쪽의 프로필, 제본 방식, 교정과 교열, 책의 가격을 측정하는 방법과 출판사 등록하는 과정, 판매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사람이 하는 일들에 모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지쳤습니다. 행동에는 목적이 없을 수 있고 그 목적엔 당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도 간혹 마주해야 했습니다. 학벌, 경력, 자격증, 살아 있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에 대한 당위는 이러한 것들로 채워져야 하는지 모릅니다. 30대 백수 쓰레기와 디자이너와 경제학도가 낸 책들에 이런 당위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에는, 책을 낸 이유에는,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까요.     p.115~116

 

요즘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너도 나도 글을 쓰는 시대이다. SNS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된 것도 있고, 워낙 사는 게 마음을 헛헛하게 하는 것이다 보니 글을 통해 위로 받고, 공감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SNS에서 조금만 인기가 있다 싶으면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책이 되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몇몇은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SNS에서는 핫하다는 작가들이 왜 책 속에서는 이렇게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의 글들'을 쓰는 건지 생각해 보면, 아마도 출판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낮아서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 이 책을 쓴 저자처럼 실제 현실에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낸 과정들을 통해서 독립출판계 문을 두드린 이의 글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처음 출간한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가 조금 궁금해졌다. 21세기 보부상, 보따리장수, 독립출판의 전설이라 불리며 강렬하게 독립출판계에 입문했다고 하는데, 사실 나처럼 독립출판물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낯설기만 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내가 쓴 책을 내가 만드는 일에 대한 묵묵한 기록'과 함께 저자의 평범한 일상과 고민들이 에세이처럼 수록되어 있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독립출판에 대해 배우면서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언젠간 책 한 권 써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이들에게, 글로 써야만 하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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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8-2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오나님이 풀간 하신 줄 알았어요 :-)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하면 안 망한다는데 ㅎㅎㅎ 발상이 좋은 책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