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들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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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사람들과 기업들이 부당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벌어들인 돈을 가져다가 그 부당한 시스템 때문에 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겁니다. 당신들은 공평한 운동장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리해지도록 45도쯤 기울여놓았어요. 그러니 운동장이 불공평해지고 게임이 지루해진 겁니다, 데이브." 루이는 지미에게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와 다시 비치볼 모양으로 쪼그라들어서 통통 튀기 시작했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사람이 재미없고 둔해집니다." 그가 3미터 높이로 튀어 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말한다. "당신들 미국인들은 대부분 재미없고 둔한 사람들이에요."      p.141

 

빌리 모턴은 작은 어선을 갖고 있는 선장이었다. 어느 날, 선원 두 명과 함께 그물을 펼쳐 놓고 기다리는 중에 이상한 물고기가 선실 지붕위로 올라온다. 못생긴 복어 같은데, 덩치가 농구공만큼 큰, 털복숭이 농구공 혹은 비치볼 같은 물고기였다. 빌리는 지느러미도 비늘도 눈도 없는, 물고기처럼 생긴 구석은 하나도 없는 털복숭이 물고기를 집으로 데려 간다. 아이들은 그것을 '웃기는 물고기'라고 부르며 함께 놀고, 그것은 아이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책을 읽는다. 그것은 보기와 달리 아주 똑똑한 존재였고, 외계 생물처럼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CIA와 은행을 해킹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 인간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다른 우주에서 왔다고 말하는 그것에게 빌리는 묻는다. 여기 지구에 왜 온 거냐고.

 

"목적은 전혀 없어, 빌리. 우리는 놀러 왔어."

 

은행과 기업의 계좌 수백 개를 해킹했지만, 특별한 목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그냥 재미로, 놀이를 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컴퓨터를 해킹해서 통제하는 능력을 모조리 사용한다면, 몇 주 만에 인간의 문명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즐겁게 놀려는 거지 파괴적인 혼돈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혁명에는 관심이 없다. 지구에 온 외계의 존재들은 수백 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국토안보부와 NSA 등 미국 정부로 대표되는 시스템들을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재미있어 한다. 물론, 미국 정부는 그런 일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벌이는 외계인들과 그들을 소탕하려는 정보요원의 추적극이 한바탕 소동처럼 펼쳐진다.  인간보다 훨씬 지능이 높은 외계 생명체들은 테러리스트 명단을 삭제하고, 기업가와 정치인을 겁박하고, 문학작품을 쓰거나 스포츠 스타가 되기도 한다. 미국 정부와 언론은 그들을 지구에서 추방하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데, 과연 이 난장판의 끝을 볼 수 있을까.

 

 

 

"대단하군." 내가 말한다. "내가 진짜 중요한 사람 같아."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인간 질병의 핵심이야." 루이가 말한다. "인간들이 개인으로서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놓을 수만 있다면, 그 병이 나을걸. 주위 사람들은 물론 모든 생명체들과도 하나가 되어 살아가게 될 거야.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다른 생물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런데 지난 3,4천 년 동안 당신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는 생각, 유일하게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 때문에 지구에 무슨 재앙이 벌어졌는지." 횡설수설이 말한다.      p.445

 

'주사위의 결정'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도발적인 콘셉트를 바탕으로, 경계도 한계도 없는 강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다이스맨>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루크 라인하트의 신작이다. 권태에 지쳐가는 정신과의사가 어느 날 주사위를 던진 뒤, 주사위 눈이 내려준 결정이 강간, 살인 같은 끔찍한 일일지라도 무조건 따르기로 한다는 파격적인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 작품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이상하지만 색다르고, 진지하면서도 경쾌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루크 라인하트는 파격적인 데뷔작 <다이스맨> 이후로 45년이나 지나서 이 작품 <침략자들>을 출간했다. <다이스맨>이 ‘20세기 최고의 컬트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침략자들>은 '가장 독창적이고 유쾌한 SF'라는 수식어로 설명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은 지구를 찾은 '털복숭이 비치볼' 외계인들과 인간과의 조우를 통해 인간들의 부조리와 21세기 미국과 미국인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 무거운 주제들을 가볍고 유쾌하고, 그럼에도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파격적인 작품인 만큼, 표지 역시 색다른데 띠지를 걷어내면 보여지는 앞표지에는 제목도, 저자 이름도, 출판사 명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마치 컴퓨터 오류 화면 같기도 하고, 암호처럼 느껴지기도 한 이미지가 전부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원서 표지가 외계의 존재들을 드러냈던 것에 비해, 한국판 표지가 더 파격적이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재미있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사회고발 SF를 만나 보자. 작가의 이웃들은 그를 괴짜 노인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정말 루크 라인하트만이 그려낼 수 있는 괴짜 SF 소설이다. 싸움보다는 장난을 좋아하는 이상한 외계인들의 대혼란 파티에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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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웅진 세계그림책 213
앤서니 브라운 지음,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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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많은 엄마는 아들과 개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간다. 개의 이름은 빅토리아, 공원에 가서 목줄을 풀어 줬더니 꾀죄죄한 개가 나타나 쫓아 버리려고 했지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못마땅하다. 아들 찰스와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 찰스가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걱정이 된 엄마는 목이 쉬도록 찰스를 부른다. 저 멀리 어떤 여자애랑 얘기하는 찰스가 보였고, 엄마는 얼른 아들과 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항상 혼자인 것이 심심하고 외로운 찰스는 엄마와 빅토리아와 함께 공원에 간다. 빅토리아는 상냥한 강아지를 만나 재미나게 놀고, 찰스도 공원에서 만난 여자아이 스머지와 함께 미끄럼을 타고, 구름사다리에 매달리며 재미있게 논다. 하지만 엄마가 노는 걸 발견하고는 바로 집에 가야했다. 찰스는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며 다음에 공원에 왔을 때도 스머지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야기는 네 명의 화자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겪은 일들을 들려주고 있다. 첫 번째 목소리에서는 찰스의 엄마, 두 번째 목소리에서는 스머지의 아빠, 세 번째 목소리에서는 아들인 찰스, 네 번째 목소리에서는 딸인 스머지의 1인칭 시점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들은 공원이라는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있었지만, 각자 다른 것을 느끼고 생각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낯선 아이와 어울리는 모습이 못마땅한 엄마가 되었다가, 외로운 아들의 입장도 되어보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지친 아빠가 되었다가, 아빠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긍정적인 딸이 되어보기도 한다. 덕분에 누구의 입장으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는 특별한 재미를 안겨준다.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매우 간결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그림들이 인상적인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신간이다. 그림책을 잘 모르는 누가 보더라도 앤서니 브라운 그림이라고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친숙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익숙하고 현실적인 풍경 속에 숨겨진 수상하고, 특별한 점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엉뚱한 상상력과 웃음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표정, 섬세하게 연출된 배경들까지 앤서니 브라운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할스의 작품 <웃는 기사>, 다빈치의 <모나리자>, 뭉크의 <절규>, 마그리트의 그림 등 이야기 곳곳에 숨겨진 익숙한 명화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으니 놓치지 말아야겠다. 네 가지 이야기를 누구의 입장에서 읽느냐에 따라 공감하는 포인트가 달라지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여러 번 반복해서 볼수록 더 재미있는 그림책이다. 앤서니 브라운이 전하는 마법 같은 공감의 순간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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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섬 웅진 모두의 그림책 41
다비드 칼리 지음,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이현경 옮김, 황보연 감수 / 웅진주니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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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름 없는 숲속에 '꿈의 그늘'이라는 곳이 있다. '소원의 늪'과 '잃어버린 시간의 폭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신비한 병원이 있다. 숲속 동물들의 악몽을 치료해주는 곳이다. 누구나 가끔은 무서운 꿈을 꾸게 마련이다.

 

동물들은 여러 가지 악몽들을 꾼다. 가시두더지는 거대한 발에 짓밟히는 꿈을 꾸고, 주머니쥐는 꿈속에서 사나운 고함 소리에 고통 받는다. 쿠스쿠스의 악몽에서는 정체 모를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코알라는 휙휙 기괴한 소리에 잠을 못 이룬다. 악몽을 자주 꾸게 되면 왈라비 박사에게 가면 된다. 그는 악몽을 치료해주는 뛰어난 의사이다.

 

 

어느 날, 숲속 외딴 곳에서 새 환자가 찾아온다.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였다. 왈라비 박사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온 늑대가 들려주는 악몽은 조금 이상하다.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둠만 보이는 것이다. 두툼한 책들을 여러 권 뒤져 보았지만, 늑대의 꿈과 비슷한 악몽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내, 왈라비 박사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당신,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 씨는..... 멸종되었습니다."

 

 

다비드 칼리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가 함께 한 이번 작품은 이미 멸종이 되었거나,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들을 대상으로 그려졌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고, 기묘하고, 오싹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여러 감정을 불러오는 독특한 그림책이다.

 

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부터 여러 동물들을 모습이 나타난다.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 오하우꿀먹이새, 핀타섬코끼리거북, 큰바다쇠오리, 사우디가젤, 마다가스카르코아뻐꾸기, 도도, 파란영양, 사막캥거루쥐 등등... 이제는 사라져 다시 볼 수 없는 동물 128마리의 모습이 책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이미 멸종된, 또는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들이 꾸는 악몽은 기괴하고, 무섭다. 왈라비 박사가 악몽을 사냥하는 방법이라고 보여주는 '악몽 사냥 설명서' 또한 오싹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들이 모두 인간이 동물을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었다. 인간들의 욕망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멸종된, 그리고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들이 꾸는 꿈이라니.. 섬뜩하고, 슬픈 상상력이다.

 

이제 세상에 없는 동물들의 영혼이 모여 사는 유령의 섬으로 그들을 데려 가는 왈라비 박사. 어둑한 섬들 여기 저기에 자리한 그림자뿐인 동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라 너무 어린 아이들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어쩐지 책 속 이미지들이 아이들의 꿈 속에 나타날 것만 같으니 말이다. 반대로 어른들에게는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그림책이다. 꿈과 현실의 조각들을 정말 근사하게, 환상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그림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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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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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이 뒤집혀버리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고게쓰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작 한 마디로 나라는 인간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단지 그런 불운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뿐, 거기에 특별한 차이는 없을지도 몰라요." 고게쓰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누구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걸 경험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건, 그저 행운일 뿐이겠죠. 우리는 그런 차이만으로 살아 있는 건지도 몰라요."     p.199~200

 

영능력이니, 심령현상이니, 오컬트 같은 것에 관심이 있거나 믿지는 않는다고 해도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바라고 있지 않을까. 설명되지 않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이 세상에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사후 세계가 있기를 바란다거나,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영혼이 가해자를 찾아내도록 도와 준거나 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스스로를 '경찰도 탐정도 아닌, 그저 보잘것없는 글쟁이'라고 소개하는 고게쓰 시로는 조즈카 히스이라는 젊은 영매와 함께 온갖 사건을 해결해왔다. 영매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다니,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오거나, 영시로 범인을 특정한 다음 그 정보를 토대로 분석해 과학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리를 이끌어내거나 법적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 진다. 사실 범인을 특정할 수 있다고 한들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체포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영매탐정 조즈카가 사건 현장을 둘러본 뒤 영시를 통해 누가 범인인지 알아 내면, 추리소설가 고게쓰가 논리적인 사고로 물적 증거를 찾아내고, 범행 과정을 추론해낸다. 영능력으로 범인을 밝혀내고, 그것을 단서 삼아 물적 증거를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범죄자가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어떤 트릭과 꼼수도 현실을 넘어서는 영능력 앞에서는 헛수고가 될테니 말이다.

 

 

 

"우리 일상에 탐정은 없어요. 저건 이상하다, 이걸 생각해야 한다, 그게 수상하다, 앞장서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죠. 우리는 일상 속에서 뭘 생각해야 하는지, 뭘 눈여겨봐야 하는지,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해요. 뭐가 이상한지 모른다? 너무 사소한 문제라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 정말로?"
빙글빙글 머리카락을 감던 손가락이 멈췄다.... "탐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도, 우리는 명탐정의 시선을 가져야 해요."      p.388~389

 

하얀 프릴로 장식한 블라우스, 가느다란 허릿매를 강조하는 하이웨이스트 스커트, 완만한 웨이브를 그리는 긴 흑발 머리, 앳된 얼굴의 정교한 서양 인형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바로 조즈카 히스이라는 인물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데다 해외에서 오래 살다 와서 친구도 거의 없고, 나이대에 맞는 일반적인 경험도 부족해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소녀의 전형처럼 보인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부터 전형적인 라이트 노벨 작품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야기는 정말 제대로 된 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맞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 캐릭터와 서사의 부조화에서 오는 독특함이 오히려 신선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2020 본격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202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1위!에 빛나며 전례 없는 미스터리 차트 5관왕의 신화를 기록한 작품이다. 아이자와 사코는 주로 라이트 노벨 작품들을 써온 걸로 아는데, 이번에 만난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 장르이다. 표지에서 보여지듯이 미소녀 영매가 주인공이지만, 결코 표지만 보고 섣불리 이 작품에 대해서 판단하면 안 된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서 범인을 지목하는 영매탐정과 추리소설가이자 경찰의 자문탐정이 그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서 사건을 해결하는 형식의 연작 단편집은 촘촘하게 짜여진 미스터리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지만, 특히나 후반부를 강타하는 반전이 역대급이다. 단순히 독자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의 깜짝쇼가 아니라, 반전에 이르기까지의 서사가 굉장히 흥미롭고 잘 짜여 있어서 그 충격은 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시종일관 본격 미스터리와 라이트 노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로 독자들과 밀당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 지루할 틈 없이 두툼한 페이지가 금방 넘어간다. 현지에서는 7월에 속편인 <조즈카 도서집>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너무 궁금하다. 국내에서도 영매탐정 조즈카의 다음 이야기를 빨리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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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8
조지 손더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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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편지의 독짜는 이런 구절을 들어봣겟죠? 채고의 시간이엇고, 채악의 시간이엇다. (어떤 책에 나온 구절이애요. 언젠가 그 집 엄마가 세끼들에게 이 책을 일거주려고 햇서요. 그런데 이 책은 낫말이 너무 만아 지루햇서요. 그래서 세끼들은 어린 잉간들이 지루할 때 하는 짓을 하기 시작햇죠. 그건, 손가락으로 코를 파며 딩굴딩굴하다 아기 동셍을 꼬집기.)      p.40

 

여우 8은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 물론 쓰기도 글자도 완벽하진 않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관심이 많은 여우 8이 어느 날 낱말을 만드는 인간의 목소리를 엿듣게 된다. 아이에게 사랑을 담아 해주는 이야기가 음악 같다고 느끼면서, 여우 8은 그걸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매일 밤마다 인간이 말하는 방식을 배우려고 몰래 훔쳐 보았던 것이다. 여우 8의 친구인 여우 7은 인간의 말을 알고 있는 여우 8에게 깜짝 놀랐고, 그들은 우두머리인 여우 28에게 가서 인간의 말을 들려 준다. 우두머리는 여우 8의 새로운 기술을 무리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달라고 부탁한다.

 

 

여우 8은 한 간판에 써진 글을 읽고, 곧 '폭스뷰커먼스'라는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곧 트럭들이 몰려와 원시림을 파헤치고, 나무를 뽑고, 옹달샘을 파괴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곳들을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집과 먹을 것을 잃어버린 여우 무리들은 점점 쇠약해지고, 늙은 여우들은 목숨을 잃는다. 여우 8은 여우 7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러 쇼핑몰에 가서, 몇몇 친절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얻는다. 인간과 여우가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는 것도 잠시, 밖으로 나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끔찍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여우 8이 인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인생이 멋찔 수 잇다는 걸 알아요. 대게는 멋찌죠. 난 무더운 날에 차고 깨끗탄 물을 마셧고, 사랑하는 이가 부드럽게 짓는 소리를 들었고, 눈이 천천이 네리며 숲피 고요해지는 걸 봣서요. 하지만 이제 그 모든 행복칸 광경과 소리가 사기처럼 느껴저요. 조은 시간은 그저 연기에 불과하고 그개 걷치고 나면 현실이 나타나는 거죠. 그 현실이란 바로, 바위 갓튼 모자, 거더차고 짓밥는 발. 거더차고 짓밥는 발이 업는 순간은 모두 진짜가 아닌 것만 갓타요. 무슨 말인지 알겟서요?     p.50~51

 

이 책은 <12월 10일>, <바르도의 링컨>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조지 손더스의 신작이다. 오랜 시간 단편소설만을 써오다 쓴 첫 장편소설로 맨부커상을 수상했었는데, 그 작품이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 소설의 경계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의 말을 배운 여우가 인간들에게 쓴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는 우화로 우리를 찾아 왔다. 인간에게 숲을 빼앗기고 같은 무리의 여우들을 모두 잃어버린 여우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의 환경 파괴와 지나친 소비주의에 대한 경고를 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겨 준다.

 

 

인간의 언어를 독학한 여우가 쓴 글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자가 엉망이라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수월하진 않다. 하지만 시작부터 '내가 글짜를 틀리개 쓰더라도 이해하새요. 난 여우라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이 여우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맞춤법이 틀린 문장을 읽는 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새삼 깨달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어 나갔다. 중간 중간 심플한 드로잉으로 등장하는 여우의 모습 또한 재미를 더해 준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은 작품이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짧은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철자로 쓰니 이 글은 아이들이 읽기에 더 수월할 지도 모르겠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환경을 파괴하면서 살고 있는 어른들을 향해 있다. “당신들의 얘기가 행복카게 끈나기를 원한다면, 좀 차캐지려고 노력카새요.” 라고 말하는 여우의 문장이 뭉클했다. 숲을 파괴하고, 동물들을 보호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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