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모르는 나의 하루하루가 점점 많아진다
김소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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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웹툰 작가인 김소은이 사랑하는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과정과 딸을 낳고 키우던 순간들, 그러는 사이 깨달은 감정들에 관한 기록이다. 일상만화를 올리던 작가는 엄마를 간병하며 웹툰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밝혔고, 많은 독자들이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버터와 소>라는 일상만화는 '엄마 3부작'으로 인해 입소문을 탔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다.

 

엄마의 옛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철없는 딸로서 존재하는 엄마가 보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보다 더 자유롭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엄마를 멀리서 한 번쯤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어린 엄마가 그리는 꿈과 미래를 온 마음으로 응원해주고 싶다.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 그렇게 되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엄마는 그냥 처음부터 엄마인 줄 알았는데, 엄마도 이렇게 힘들게 나 키웠어?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되는 건, 내 자식을 낳아 키우게 되고 나면서부터이다. 우리의 부모들이 내가 속을 썩일 때마다 한숨처럼 내뱉던 그 말, "너도 너랑 똑같이 닮은 자식 새끼 낳아봐라. 그때는 내 마음 알 거다."라는 대사가 비로소 체감이 되는 순간, 그제야 내가 부모가 되면서 다시 한번 더 자식이 되어, 내 부모의 소중함과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저 '당연하게' 늘 곁에서 보살펴주고 무한정한 사랑을 주기만하는 존재가 엄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엄마의 입장을 알게 된 이후로는, 가족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어찌보면 부당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이가 어디있겠는가.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고, 손해보면서도 티내지 않고, 억울해도 참고, 힘들어도 아닌 척 하고.. 그렇게 정해져 태어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엄마가 얼마나 자식들을 힘들게 키웠는지.. 우리는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내가 속 썩이고 걱정끼치는 건 생각지 않고, 오로지 엄마가 하는 잔소리만 듣기 싫어 하면서, 나중에 언젠가 내가 엄마가 되면 저런 소리 안 해야지하는 생각 따위는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엄마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엄마는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사랑해줄 거라는 믿음이 이런 식으로 나를 제멋대로 굴게 만들었다. 잠이 깨자마자 드는 머쓱함과 무안함에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더 누워있다가 일어나 솔이와 놀고 있는 엄마에게 갔다. "엄마, 미안해." 엄마는 힘들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었다. "자기 엄마가 화나 있으니까 이 조그만 게 눈치를 엄청 보더라." 그 말에 나는 더더욱 못난 사람이 되었다. 성질을 부리고 실컷 울고 나니 내 속은 후련해졌지만 나를 제일 믿고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고 말았다.

 

저자는 결혼을 그다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친구들 중에 가장 빨리 결혼을 하게 되었고 딸을 낳아 엄마가 되었다. 철부지 딸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엄마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하루 아이를 키우는 건 전쟁과도 같았고, 육아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다 어느 날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항암치료를 하고, 하지만 암세포는 전이되어 결국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결국 그렇게 엄마를 떠나보냈지만, 그녀가 병실에서 엄마를 간병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은 소중한 그림일기들로 남게 된다.

 

예전에는 당연했던 일들이 점점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이 되는 건, 언제나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 버리고 나서라는 사실이 슬프지만...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언젠가 한번쯤은 겪게 되는 일들이라 가슴 먹먹하면서도 머리에,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대목들이 많았다. 항상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생각도 한번 되돌아 보게 되었고 말이다. 책은 저자가 엄마와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어린 시절과 그녀의 결혼, 육아 일기가 함께 담겨 있어, 엄마의 죽음이라는 우울하고 슬픈 과정도 마냥 어둡게만은 그려지지 않아 더 담백하고 좋았던 것 같다. 저자는 “많이 표현하고 살아. 참지 말고”라는 엄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오늘도 딸과 남편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긍정 마인드가 작품 전반에 배어 있어 담담하면서도 뭉클한 딸과 엄마의 이야기가 완성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 책에는 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우리들의 엄마 이야기가 매 페이지마다 내 마음을 쿡쿡 찔러 댄다. 심플하고 귀엽게 그려진 일러스트들이지만, 함께 있는 글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엄마를 잊어 버리고 사는 우리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일러스트의 비중보다 글을 비중이 더 많아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 전달되는 에피소드들의 임팩트가 강해 웹툰처럼 짧지만 강한 임팩트가 남기도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책은 엄마를 까맣게 잊은 채 그저 사는 게 급급한 우리에게 여전히 우리 곁에 엄마가 있다는 걸, 엄마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이젠 엄마 옆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딸이라서 더 서운했던 것들, 엄마라서 더 안타까운 것들, 그것들이 한데 섞여 원망이 되고 후회가 되었던 시간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세상의 모든 딸들과 모든 엄마들이라면 비슷한 상황들을 경험해왔을 것이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연애하느라 정신없다고, 사는 게 만만하지 않아서,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이를 챙기느라, 어쩌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제일 먼저 엄마라는 존재를 미뤄왔던 게 아닐까. 나부터 미안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특히나 가슴 먹먹했던 대목은 책의 후반부에 실려 있는 '내가 모르는 엄마의 시간'이었다. 엄마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앨범들 속 사진을 일러스트로 그려서 담아두었는데.. 그 어떤 절절한 말이나 표현보다도 더 와닿을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평범하지만 우리의 엄마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그런 장면들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시절의 엄마 모습, 엄마와 아빠의 결혼 사진, 그리고 내가 갓난아기 일때의 모습, 함께 가족 여행을 갔던 곳, 어느 새 내가 자라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해서 할머니가 된 엄마의 모습, 손주와 함께 있는 행복한 엄마의 모습과 마지막 병실에 누워 있던 모습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설명 없이도 한 컷의 그림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이 심금을 울렸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계실 때 잘하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지만, 그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 바보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그런 엄마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꿈밖에 없는데 말이다. 나도 더 늦기 전에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표현하고, 배려하고, 챙겨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딸들, 그리고 엄마들이 꼭 읽어 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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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소피 골드스타인 지음, 곽세라 옮김 / 팩토리나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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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최고의 그래픽 노블에 수여하는이그나츠 어워드수상작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는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띤다. 만화책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보통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긴다는 것이 매력이다.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다.

 

 

그녀들의 나라에서는 비밀리에 범죄자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쓸모 있는 기술을 가진 전과자들에게 감옥에 갈 건지, 식민지 별에 파견되어 일할 건지 선택하게 한다는 거다. 그리고 식민지에 가기로 결정한 범죄자들은 환경에 맞게 유전자 변형을 시켜서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못하도록 일종의 낙인을 찍는다. 그녀들이 교육을 하려는 소녀들 역시 남자처럼 눈이 네 개인 외계인들이다. 그녀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소녀는 단 한 명이고, 나머지들은 그것 마저 못하지만 여자들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그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여성들만 있는 곳에 있는 단 하나의 남성이라는 설정은,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 숨겨진 욕망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그들의 복잡미묘한 심리변화와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심플하지만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이미지들과 식민지 행성의 황량하고 독특한 풍경들은 굉장히 흡입력있는 서사를 전개한다. 그래서 단숨에 읽히는 이야기이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자들을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수상쩍은 남자는 원주민 여자들의 단순함을 노리고 그녀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에게 푹 빠진 여자들에겐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제국에서 25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우주의 미개척 행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그렇게 현대 사람들의 질투와 욕망, 그리고 배신과 집착을 그려낸 것처럼 리얼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 그리고 남자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여자들. 섬뜩하도록 기괴한 환경 속에서 이야기는 점점 공포스럽게 변해간다. 정확한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설정도 없고, 기묘한 인물들과 독특한 상황 설정들 모두 기괴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래픽 노블은 흥미나 재미 위주로 만들어진 만화와 달리 소설이나 다큐멘터리처럼 탄탄한 스토리가 뒷받침됐으나 이를 화려한 만화로 풀어내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들을 가리킨다. 대부분 그래픽 노블은 엑스맨, 아이언맨, 헐크,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 등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많이 만나왔을 것이다. 특히나 이들 작품들은 영화를 통해서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히어로물이 가진 강점을 드러내기에 좋은 장르임에 틀림 없다.

 

한국과 일본 만화에 익숙한 우리 독자들에게 유럽·미국식 그래픽 노블의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 같은 장르적 특성이 장벽으로 작용하긴 한다. 하지만 요즘은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읽고 자란 세대가 중년에 이르러 적극적 독자군으로 등장한데다 인기 높은 그래픽 노블 대부분은 현지에서 영화 등으로 제작되면서 이미지와 영상 시대,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접근 동기를 제공하고 있어 그래픽 노블 시장이 국내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특히나 소피 골드스타인의 이 작품은 SF와 사이코섹슈얼 드라마의 만남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매우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그래픽 노블을 즐겨 읽었던 사람들에게도 꽤나 인상적인 느낌을 줄 것 같다. 그리고 나처럼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 자체가 아직 낯선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순하지만 강력하게 각인되는 메시지, 한 컷 한 컷에 담긴 놀라운 은유와 암시가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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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헌터
존 더글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비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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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의 그림을 보라." 나는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말해왔다.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피카소를 이해했다거나 잘 알고 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간특한 연쇄 살인범은 화가가 캔버스를 구성하듯이 자신들의 살인행각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조직한다. 그들은 자신의 살인행위를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회가 거듭될수록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에드 켐퍼를 직접 만나서 면담한 것은 연쇄 살인범을 평가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그의 작품(범죄행위)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나와야 한다.

세상에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이란 없다. 당연히 동기가 없는 범죄도 없다. 혹은 정말 이유가 없는 무차별 살인일 경우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동기 혹은 그 징조를 미리 알아낸다면 벌어질 수도 있었던 사건을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게 바로 프로파일링의 시작일 것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모든 끔찍한 범죄에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절박한 질문이 제기된다. 도대체 어떤 유형의 인간이기에,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범죄 현장 분석과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답하려는 노력이다. 행동이란 인성의 반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살인범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또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해당 살인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되풀이 해 온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일을 평생 해온 이 책의 저자 같은 범죄 수사를 하는 이들의 일상이 그렇다. 이 작품은 미국 FBI '살아 있는 전설'이자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의 제이슨 기디언의 실제 모델이자 영화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수사관들의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존 더글러스의 회고록이다. 현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NETFLIX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CSI 같은 인기 드라마나 숱한 스릴러 영화들을 통해 누구나 과학수사, 프로파일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인 존 더글러스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도, ‘연쇄 살인범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FBI에 입사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신입요원과 경찰관 교육을 담당했고, 수감 중인 살인범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다니면서 인터뷰를 해 수많은 범죄 사례들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수사에 적용하게 만든다. 최초의 프로파일러인 셈이다. 물론 처음에는 사회와 FBI 모두 범죄심리학과 프로파일링 기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20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을 비롯해 끔찍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프로파일링 기법이 하나의 수사 및 검거 기법으로 인정받게 되고,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이 나온 지 100, 그리고 셜록 홈즈가 명성을 떨친 지 50년이 지나서야 행동 프로파일링이 소설책에서 뛰쳐나와 현실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사건을 맡으면 관련 증거와 사건 보고서, 현장 사진과 설명, 피해자 진술서, 부검 소견서 등을 모두 수집한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숙독한 다음, 범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범인처럼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범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구체적 과정을 설명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건 나도 잘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양들의 침묵>을 쓴 토머스 해리스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범죄 사실과 관련해 나에게 많은 자문을 받았다. 물론 그런 자문이 소설을 쓰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해리스 자신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 소설 속의 인물들을 창조해냈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하면, 그도 우물쭈물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쓰다 보니 작중 인물이 떠올랐다고 대답할 것이다.

워낙 추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을 좋아하고 많이 읽다 보니, 실제 범죄 심리학이나 법의학, 수사 기법 등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관련된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어 많이 찾아 읽었는데, 대부분 개론서 느낌이 강해 조금 가볍거나, 반대로 전문 용어가 난무해서 일반인들이 다가가긴 조금 어렵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지난해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가 집필한 프로파일링에 관련된 책이 흥미로웠는데, 그 책 마저도 <마인드헌터>에 비하면 굉장히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이 작품은 프로파일링에 관한 압도적으로 완벽한 책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 분량 자체가 많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담고 있는 내용 때문에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범죄 소설을 읽을 때, 범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묘사와 범인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만 페이지가 계속 지속된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그것도 거의 육백 페이지에 가까운 두툼한 분량으로 말이다. 거의 쉼표 없이 미국 최악의 범죄자들에 대한 실제 사례들이 계속 이어져서 잠시도 한 눈을 팔 겨를이 없는 빡빡한 책이지만, 그만큼 몰입도가 뛰어나 웬만한 스릴러 작품들만큼이나 굉장히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25년 동안 살인범의 마음속을 넘나들며 축적한 거의 모든 경험과 수사기법에 대한 완벽한 보고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온갖 잔혹한 살인사건의 면면과 검거에 실패한 범죄자들에 대한 기록, 최악의 흉악범들이 털어놓는 엄청난 살인 행각과 연쇄 살인과 강간 수사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기까지의 전 과정과 수사관들의 활약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이 상세하고 리얼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범죄심리학, 수사기법, 프로파일링에 관련된 내용으로는 앞으로도 이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그 어떤 책도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살인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혹은 범죄 소설을 즐겨 읽어 이제는 웬만한 작품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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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2. 에티켓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2
윤태호 지음, 김현경 교양 글, 더미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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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100권으로 기획된 '오리진' 시리즈는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1권 보온에 이어 2권은 에티켓 편이다. 전작에서 우리는 열을 지키는 '보온'이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36.5도에서 1~2도만 높아지거나 낮아져도 생명이 위험해지는 존재이니, 외부 환경의 변화에 관계 없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봉투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된 하나의 '생각' 중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

'당신 역시 나를 존중해줘야 한다.'

‘나는 당신을 해칠 의사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 너무 다가오지 말아달라.’

‘나와의 거리를 유지해달라.’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사회에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생존 기술이자 본능이라는 에티켓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윤태호 작가는 말한다. 상대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미션과도 같다고. 매우 어려운 일이나 꼭 해내야 하고 유지해야 하는 감수성이라고 말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아가게 된다. 상대를 매우 싫어하거나 매우 좋아한다면 자신의 행동 노선을 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진짜 어려운 것은 평범한 관계이다. 적절한 거리 조절에 실패하게 되면 무례하고 무심한 사람이 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상대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서로를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로봇은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로봇이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을 베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친절은 로봇이 모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형식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문 열어주기..상대방이 말할 때 마주보며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활짝 웃기,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기 등. 친절한 로봇을 만들려는 사람은 친절의 이런 형식적인 요소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요소들을 우리는에티켓또는매너라고 부르고, 이미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가르치고 있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들은 그들에게 매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같은 건 좀처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춘기만 되어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거나 허락없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부모들은 또 당연히 뭐가 그리 까탈스럽냐고, 부모가 한 집에 사는 자식 방에 들어가는 게 뭐 굳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냐고 되묻기 마련이고 말이다.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에 한 번이라도 타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타인들과의 비좁은 거리. 그 시간대에는 그 누구도 적절한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출퇴근하는 현대인들은 그걸 또 당연히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불편으로 여긴다.

 

봉원이네 집에서 하숙하는 과학자 친구들은 아침부터 화장실 전쟁을 치른다. 1층에 달랑 하나 있는 화장실을 분식집 가족이랑 집주인네 딸하고 아들 등... 엄청난 인원이 함께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투가 한밤중에 콘센트 옆에서 드륵소리를 내면서 충전을 하는 바람에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친 주인집 할머니는 아침부터 봉원이네 집에 처들어 와서는 소란을 피운다. 봉투는 별 생각없이 봉원을 따라간 분식집 가게에서 냉장고 전원을 빼고 충전을 했다가, 음식물을 죄다 상하게 만드는 대형사고를 쳐서 나선녀 아줌마에게 된통 혼이 난다. 화가 나서 떨어지라고 소리치는 아줌마의 모습에 놀란 봉투는 사람들 간에 서로의 적절한 거리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마다 가까워지기 위해선, 지켜야 하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윤태호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에티켓'은 일종의 생존 기술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사물화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해서건 강요해서건. 그래서 때로 우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나 보다.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만큼 약속도 많아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에티켓을 지키는 일이고 에티켓을 지킨다는 건 나에게도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우리가 서로 허용한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를 보호하는 가장 첫 번째 조건.
가까워지고 싶다면.. 그 거리를 유지해주세요.

 

 

 

1부 오리진 만화가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연결되는 2부 오리진 교양에서는 에티켓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에티켓과 예의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에티켓의 역사와 문화상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거리들로 에티켓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조절하는 현상처럼, 일상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문화가 마치 제2의 본능처럼 작동하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 적인 예로 텅 빈 전철을 탔을 때 사람들이 팔걸이가 있는 양쪽 가장자리에 먼저 앉는 경향을 들 수 있겠다. 전철에 자리가 차는 순서를 보면, 정말 나도 그렇게 앉고 있었구나 싶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지면서 각자 자기 위치를 방어적으로 고수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 속 순간에서 조차 말이다.

 

에티켓은 '체면'과 관계가 깊은데, 체면 차리기는 매우 인간적이면서 사회적인 특성이라고 한다. 대부분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에티켓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마련이다. 이미 누군가 체면을 잃고, 그 결과 다른 사람까지 민망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복구 의례 네 단계도 매우 흥미로웠다.

 

윤태호 작가의 '오리진' 시리즈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거나,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누구나 살면서 생각해보거나 고민해봤을 만한 부분들을 그저 일상 속 스케치로 쓱쓱 그려 보여줄 뿐이다. 게다가 테마부터 무려 '교양 만화'이다. 뻔하거나 지루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짧은 만화 속에 감정을 건드리는 대목들이 매번 존재한다. 5~6세 정도의 지능을 가진 AI 로봇 '봉투'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게 되고, 이해하고, 배우게 되는 그 과정들이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뭔가를 두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부분들이지만, 그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혹은 사는 게 너무 바쁘고 고되어서 잊고 있었던 그것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그 순간들이 참 감동적이었다.

 

전체 100권으로 기획된 '오리진' 시리즈는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1권 보온에 이어 2권은 에티켓 편이다. 전작에서 우리는 열을 지키는 '보온'이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36.5도에서 1~2도만 높아지거나 낮아져도 생명이 위험해지는 존재이니, 외부 환경의 변화에 관계 없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봉투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된 하나의 '생각' 중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꼭 아이들을 위한 만화로 된 과학, 역사 동화 종류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어른인 내가 읽기에도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운 대목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정말 전체 100권을 다 소장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 내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꼭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시리즈이다. 다음 시리즈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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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벤 파운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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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 세계에서 이보다 큰 스포츠 대회는 없다. 브라보 대원들은 그 거품 낀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그들은 이틀 후면 이라크에 재배치되어 남은 11개월의 복무를 마쳐야 하지만, 지금은 온갖 미국적인 것이 자궁처럼 안전하게 그들을 감싸고 있다. 풋볼, 추수감사절, 텔레비전, 여덟 종류는 되는 경찰과 보안요원, 그리고 3억 명의 호의적인 국민. 클리블랜드에서는 한 노인이 몸을 떨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이 바로 미국이야.”

플러시천을 씌운 리무진 좌석에는 모두 열 명이 앉아 있었다. 브라보 분대의 남은 병사 여덟 명과 공보부에서 나온 호송관, 그리고 영화 제작자. 빌리와 브라보 분대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고 적들이 아군을 쏘고, 그래서 무작정 싸워야만 했던 이라크 전투 영상으로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되어 승전 여행 중이다. 그들은 곧 전설적인 텍사스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 하프타임 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무려 데스티니스 차일드와 함께 말이다. 이야기는 그들이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전쟁터를 향해 스타디움을 떠나는 데서 끝이 난다. 그렇게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이야기들과 이 주라는 기간 동안 승전 여행을 다니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 각자의 고향집 방문과 전쟁이 벌어지던 순간의 과거가 교차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04년 댈러스 카우보이스와 시카고 베어스의 풋볼 경기일에 데스티니스 차일드가 공연하고 군복 차림의 미군들이 행진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작가인 벤 파운틴은 그것을 보고는 그때 등장한 마르고 검게 그을린 군복 차림의 군인들과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 현장에 있던 그들이 광란의 한복판에 떨어진 그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전쟁을 한낱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행태와 군인들이 느꼈을 혼란과 절망이 고스란히 담기게 된 것이다. "전쟁에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끔은 전쟁이 필요하다는 걸 누구나 알지." 라는 극중 대사처럼 이것이 바로 미국의 실상이다. 이 작품은 여전히 전쟁의 광기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전쟁 강박을 여과없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영웅 대접을 받는 건 고달픈 일이며, 시민들과의 접점인 통로 쪽 좌석에 앉으면 그 고달픔은 배가된다. , 감사합니다. , 부인,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빌리는 브라보 대원들의 사인을 원하는 시민들이 내미는 팸플릿을 대원들에게 돌리고, 사인이 끝날 때까지 대화에 응해야 한다... 빌리는 단 한 번이라도 누가 자신을 아기 살인자라고 불러주길 바라지만, 사람들은 아기들이 살해되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듯하다.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 대량살상무기 이야기만 한다. 그들은 너무도 간절히 믿고 싶어하고, 빌리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그들은 산타클로스가 정말로 있다고 믿지 않으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까봐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우기는 아이들처럼 열렬하다.

브라보 대원들은 이 주 동안의 승전 여행 동안 비행기와 자동차, 호텔방에서만 지내다 보니 운동할 시간이 없었고 몸도 마음도 풀어졌다. 따라서 그들은 나약해져서는 지치고 신경질적인 상태로, 그만큼 효율성이 떨어진 상태로 전쟁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틀 후면 이 모든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을 영웅으로 치켜 세우며, 그들에게 열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말이다. 빌리는 대원 누구라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그야말로 기적처럼 느껴진다. 모든 대원들이 간발의 차로 죽음을 피해온 것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전쟁이 진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바로 염병할 무작위성이다. 화장실에서 넷째 칸이 아닌 셋째 칸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돌리는 것 따위의 사소한 일에서 생과 사, 끔찍한 부상이 판가름 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전쟁터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전투를 재개해야만 한다.

그들의 현실이 세상을 지배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목숨까지 구해주지는 못한다. 폭탄도 총알도 막아주지 못한다. 그들의 꿈을 산산조각 낼 전사자 수의 포화점이 존재할까, 빌리는 생각한다. 비현실이 얼마나 많은 현실을 취할 수 있을까?

미국인들은 날마다 정신적으로 힘겨운 전쟁을 겪는다. 빌리는 이곳에서 매일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전쟁의 열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는 영웅적인 행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 행위가 그에게 왔을 뿐. 그리고 그는 그 행위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두렵다. 빌리는 누나의 사고 이후 파혼한 비겁한 약혼자의 차를 파손시킨 일로 간신히 졸업장만 겨우 받고, 군에 입대했기에 열여덟 이라는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되었다. 졸병 중의 졸병 보병대 이등병. 그런 그가 전쟁을 겪고, 승전 여행이라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바라보는 미국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에게는 미국인들이 나이와 지위와 관계없이 모두 어린애로 보였다. 모두들 전쟁의 완전한 죄악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극중 빌리의 입을 빌어 '미국인들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고 가끔 죽기도 해야 하는 어린애'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안 감독의 연출로 작년에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로는 크게 성공을 하진 못한 것 같다. 국내에는 개봉하지도 못했고 말이다. 이 작품을 읽어 보니 왜 영화로는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벤 파운틴이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머러스한 대화와 농담, 웃음 아래에는 자괴감과 비애를 보여주고, 전쟁을 강력히 옹호하면서 정작 자신은 참전을 기피하는 모습을 천역덕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전쟁과 엔터테인먼트가 뒤섞여 충돌하는 블랙코미디라니, 그 어떤 작가가 이런 글을 써낼까 싶을 정도로 '글의 힘'이 뚜렷한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당연히 '소설'로 읽어야만 한다. 미국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미국적인 작품인데다, 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어느 정도 예상되는 지점이 분명이 있었는데, 실제 작품은 분명 그것을 넘어 선다. 문장은 아름답고, 예리하며, 어조는 거침없고, 신랄하다. 블랙 코미디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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