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롭 - 위기의 남자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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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위원회가 연장 신청을 받아주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 즉시 짐을 싸야 했기에 그 동안 보슈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연장 허가가 났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틀림없었지만, 이제 경찰 배지를 지니고 다닐 기한이 정해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좋은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경찰위원회가 보내올 공식 통지서에는 그가 경찰로 지낼 마지막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적혀 있을 것이다. 보슈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그 생각을 하게 됐다. 그의 미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추 형사처럼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슈는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에서 근무하다 1년 전부터 미제 사건 전담반에서 근무 중이다. 그들은 지난 50년간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미제 살인 사건을 재수사했는데, 오랫동안 잊혔던 증거들을 현대의 과학기술로 재분석해 DNA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누군가와 일치하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이번에 1989년 살인사건에서 채취한 DNA 29세 성폭행범으로 밝혀 졌는데, 문제는 콜드 히트 통지서에 나온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그가 겨우 여덟 살이었다는 거다. 과연 범인은 고작 여덟 살 때 사람을 죽이고 무사히 빠져나간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경찰국 동료들이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듀발 경위는 보슈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작스레 보슈에게 새로 발생한 사건을 맡아 달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시의원의 아들이 고급 호텔에서 추락사했는데, 보슈의 오랜 숙적인 어빙 의원이 자신의 아들 사건을 보슈에게 맡길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22년 전 살인사건에서 발견된 의문의 DNA, 그리고 시의원 아들의 알 수 없는 자살 사건을 동시에 좇는 해리 보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작이었던 <나인 드래곤>에서 전처가 죽고, 보슈가 딸과 함께 살게 된 것도 그렇고, 파트너도 죽게 되어 다음 시리즈에선 보슈의 신상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아 더 기다렸던 작품이다. 보슈는 거의 10년전쯤 퇴직연금을 전부 수령하고 경찰국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2년 후에 퇴직유예제도(드롭) 덕분에 경찰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7년 계약을 맺고 다시 돌아온 보슈는 1년 전에 재계약을 신청했었다. 드롭은 한 차례의 계약 연장을 허용했고 연장 가능한 햇수는 3년에서 5, 그 후에는 반드시 퇴직하는 걸로 규정되어 있었다.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인 <로스트 라이트>에서 부터 사립 탐정인 보슈를 만나왔고, 열한 번째 작품인 <클로저>에서 보슈는 3년간의 탐정직을 마감하고 경찰로 다시 복귀했었다. 그리고 지금 15번째 작품에서 드롭 1차 계약 만료일이 한참 지나서야 연장 허가가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앞으로 보슈에게 남은 기간은 39개월, 하지만 해리 보슈 시리즈는 2018년 현재도 신간이 출간되고 있어 21번째 작품이 나오니 우리에게 남은 이야기는 아직도 많다.

 

 

“아빠가 배지를 반납할까 생각 중이야. 은퇴하려고. 때가 된 것 같아.”

......“그런데 왜?” 마침내 매디가 물었다.

“차츰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무엇이든, 운동이든, 사격술이든, 음악 연주든, 심지어 창의적인 사고까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실력이 점차 떨어지기 마련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아빠가 지금 그런 순간을 맞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경찰국을 나오려는 거야.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실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서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는 걸 많이 봤거든. 그리고 네가 커서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든 지금 쑥쑥 크면서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LAPD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복귀한 형사 해리 보슈의 직업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DNA의 이중 나선 구조에서 영감 받았다고 하는 이번 작품은 코넬리에게도 크나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고 한다. 연결 지점이 없는 두 사건, 그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어 치밀하게 교차시키는 플롯은 빈틈없는 몰입감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보슈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추가 전편에서와는 달라진 비중으로 이야기에 흥미로움을 더해주는데, 그들이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과정 또한 이 작품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특히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는 '드롭'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중의적인 뜻 또한 단순하지 않아 더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적 색채가 짙은하이 징고사건은 너무도 빤히 보이는 자살 같지만 뭔가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 긴장감을 부여하고, 과거에 벌어졌던 강간살인사건에서 채취한 DNA를 이용해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 또한 굉장히 기발해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해리 보슈 시리즈>

시리즈 출간년도 원제 국내출간
1 1992 The Black Echo 블랙 에코(2010)
2 1993 The Black Ice 블랙 아이스(2010)
3 1994 The Concrete Blonde 콘크리트 블론드(2010)
4 1995 The Last Coyote 라스트 코요테(2010)
5 1997 Trunk Music 트렁크 뮤직(2011)
6 1999 Angels Flight 엔젤스 플라이트(2011)
7 2001 A Darkness More Than Night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2011)
8 2002 City of Bones 유골의 도시(2010)
9 2003 Lost Light  로스트 라이트(2013)
10 2004 The Narrows  시인의 계곡(2009)
11 2005 The Closers  클로저(2013)
12 2006 Echo Park 에코파크(2013)
13 2007 The Overlook 혼돈의 도시(2014)
14 2009 Nine Dragons 나인 드래곤(2015)
15 2011 The Drop 드롭:위기의 남자(2018)
16 2012 The Black Box  
17 2014 The Burning Room  
18 2015 The Crossing  
19 2016 The Wrong Side of Goodbye  
20 2017 Two Kinds of Truth  
21 2018 Dark Sacred Night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 마흔 살로 등장했던 해리 보슈는 어느 새 오십 대 중반이 넘어섰고, 시리즈도 열다섯 번째 이야기이다. 그 동안 보슈는 언제나 거대한 적과 맞서는 정의의 수호자같은 이미지였는데, 이번 작품에선 수사의 방향을 잘못 잡고 헤매는 모습을 보이는 등 뭐랄까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어 독자 입장에서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오랜 전부터 알고 지낸 인물과 세월을 함께 겪어 나가는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이런 게 바로 거듭되는 시리즈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일 것이다. 그래서 기대했던 것만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뛰어난 실력과는 별개로 아웃사이더이자 고독한 인물인 보슈에게 딸 매디로 인해 가정이 생겼으니, 아마도 이후 시리즈를 거듭하며 조금씩 더 변화하지 않을까 싶다. 15세의 딸을 홀로 키우게 된 형사 해리 보슈라니, 예전 그의 성격만 보자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니 말이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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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3-26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지만 사진을 너무 잘찍으십니다ㅎㅎ

피오나 2018-03-27 14:42   좋아요 1 | URL
하핫..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학일기 1
자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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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에서 엄청난 인기였던 작품 <대학일기>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동글동글 단순하면서도 귀여운 캐릭터가 인상적인데, 상황 별로 달라지는 표정이 너무도 리얼해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만화이기도 하다. 자까가 풀어내는 리얼 캠퍼스 라이프는 대학생들에게는 폭풍 공감을, 직장인들에게는 추억을 소환한다. 나도 한때 그랬었는데.. 내지는 요즘 대학생들은 이렇구나.. 라는 새로움도 있고 말이다. 이렇게 나이 대 별로 와 닿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학창 시절이라는 특수성을 누구나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1권은 1화에서 50화까지의 연재 분량을, 2권은 51화에서 100화까지의 연재 분량을 엮었는데, 만화 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단행본 분량이 묵직하다. 모바일에 최적화된 컷툰으로 구성된 원작의 장점을 지면에서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살리기 위해 올 컬러로 본문을 꾸리고 있다. 또한 웹툰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특별 4컷 만화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고, 귀여운 표정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겉표지를 벗기면 볼 수 있는 반전 속표지도 단행본만의 매력이다.

 

대학에 가기 전에는 축제와 MT, 소개팅과 연애 등 두근두근 설레는 일만 가득할 것 같았지만, 막상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과제와 발표, 시험의 연속은 고등학교만 벗어나면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공부의 늪에 다시금 빠지게 만들고 마니 말이다. 사실 진짜 공부는 전공이 정해진 대학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어쩐지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아무래도 주입식 교육의 폐해와 중고등학교 시절의 압박 때문에 대학생이 되고 나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본능이 꿈틀댈 수밖에 없는 게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아침마다 일어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수업 중에 조는 건 예사에 오로지 휴강과 종강만 기다리는 진짜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리얼 라이프가 펼쳐진다.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는 교정에 없다. 그런데, 그래서 더 재미있는 만화이기도 하다. 어디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고개만 돌리면 마주 할 것 같은 너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려 1300페이지에 육박하는 벽돌 전공책에 얽힌 에피소드, 언제나 실패하지만 배고플 때 야식을 참는 방법, 늘 말로만 실천하게 되는 다이어트, 에어컨 없이 여름 나기, 처음 소주 먹던 날 등등... 주로 대학 생활에 대한 에피소드이지만 소소한 또래들의 일상들이 함께 그려져 있어 매우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지금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포인트들이 많은 만화라고 할 수 있겠다. 온갖 스트레스와 주변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음식만 있다면 그저 행복한 청춘의 이야기는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일테니 말이다.

 

대학생이라는 존재가 참 아이러니한 것이 나이로는 완전한 어른이 된 것 같은데, 게다가 몸의 성장도 이제 더 클 것도 없이 성인인데, 마음만은 아직도 부모님 품이 필요한 코흘리개라는 점이다. 아직 사회 생활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단계라 뭐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사실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감까지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매 페이지마다 '공부하기 싫어! 놀고 싶어!'를 외치고 있는 듯한 이 만화는 유쾌하고, 발랄하게 내 마음에도 봄바람을 가져 온다. 

캐릭터들은 단순하면서도 귀여운데, 어느 순간 갑작스레 못생겨진 표정으로 대사 보다 더 리얼한 얼굴이 되어서는 깜짝 놀라게 만들곤 한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명쾌하게 와 닿아서 아무 생각 없이 읽게 되는 만화지만 반대로 내 일상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나도 한때 이랬었지. 그때는 나도 잘 몰랐었지. 하면서 말이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과제는 책상 정리하고 나서, 시험 공부는 스마트폰으로 잠깐만 머리 식히고 나서, 뭐든 미루고 작심삼일이 되고 마는 건 비단 대학생들만의 습관이 아닐 것이다. 직장인들은 또 나름의 애환이 있고, 주부들은 또 주부대로, 학생들은 또 그들 나름의 고민과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저자인 자까는 말한다. 자신의 만화를 보고 웃는 사람들을 볼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그러니 부디 당신도 이 만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잠시 웃으며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정말 이 만화를 읽으면서 웃다 보면 잠시 동안은 일상의 숱한 무거움들이 모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싶은 공감도, 나도 한때 그랬었지 라는 추억도 좋고, 그저 요즘 대학생들은 이렇게 사는 구나 싶은 발견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이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 거리에서 칙칙한 컬러들이 사라지는 산뜻한 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 아닌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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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의 나로 충분합니다
백두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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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으면 불행한 이유는 꿈을 이룰 수 없어서가 아니라 꿈을 꿀 수 없어서인 듯하다. 꿈을 꾼다는 것은 오늘을 버티게 하는 연료 같은 거다.

어쩌면 꿈을 이루는 것보다 꿈을 꾸는 동안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은 오늘의 삶을 버티고 봐야 하니까.

사실 그 동안에는 나이에 대한 자각을 그다지 하지 않고 살았었다. 조금 동안인 편이라 어딜 가도 실제 나이보다 어리게 봐주는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했고, 그다지 나이를 의식하면서 조심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게 되니, 아이가 쑥쑥 자라나는 것만큼 내 나이를 저절로 인식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곤 했다. 얼마 전부터 아이가 어린이 집을 다니면서 생애 최초로 엄마 없이 낯선 타인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니.. 그 나름의 사회 생활(?) 비슷한 걸 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들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면서 새삼 내 나이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치고, 잘못하면 혼내고, 서투른 부분에선 다시 할 수 있도록 격려해줘야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도 혼내지 않는 나이, 뭐든 알아서 해야 하는 나이가 되겠지. 지금 내가 그런 나이인 것처럼 말이다. 백두리 작가의 신작을 읽는 내내 그렇게 어느 샌가 서툰 어른이 되어 버린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겪었고, 나름 오래 사회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상처도 받고, 실수도 하고, 여러 경험들을 하면서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끄덕 없이 잘 버티고, 어지간하면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다고, 나는 이제 어른이니 단단해졌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에 여전히 휘둘리기도 한다고. 어른이라고 천하무적은 아니라고 말이다. 저자는 집에서 독립한 지가 15년째, 혼자 산 지는 7년째이지만, 갑자기 혼자 살고 혼자 일하며 대부분 혼자 먹었던 밥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힘겨운 사회 생활에 이제 적응될 만도 한데, 뭐든 혼자 하는 데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누군가에게 상처 받는 데에는 익숙해서 이번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세상에 익숙해지는 건 없는지도 모르겠다. 먹어도 먹어도 먹고 싶고, 자도 자도 자고 싶고, 놀아도 놀아도 놀고 싶은데, 이상하게 일은 해도 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엄마, 내가 있는데 뭐가 서러워. 울지마, 울지마, 에고, 아팠어요?"

내가 있잖아!.... 라고 든든한 딸인 척, 강한 어른인 척 했지만,

어른들은 강한 게 아니라 강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조카가 '?'를 입에 달고 다니는 시기가 왔고, 결혼 안 한 이모는 곧잘 호구가 되곤 하며, 엄마 앞에서는 여전히 투정부리는 아이가 되어 버리고, 첫사랑은 이제 너무도 오래돼 생각도 나질 않고, 남자 연예인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갑자기 아이돌 덕후가 되어 버리고 만, 삼십 대 작가의 사소한 일상들은 특별할 건 없어도 맞장구 치고 싶어지는 공감대를 형성해주어 읽는 내내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언니가 아이를 키우며 겪게 되는 육아의 고달픈 일상들과 가족들을 위해 너무도 오랜 세월 꿈을 잊어 버리고 살아온 엄마의 서글픈 마음들도 내 이야기, 우리 가족의 이야기처럼 와 닿았고 말이다. 그런 거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고만고만한 불행과 역시나 비슷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물론 힘들 때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것 같고, 나에게만 시련이 오는 것 같고, 남들은 다 즐거워 보이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엄마로서 우리 아이에게 잘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딸로서 우리 엄마에게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우리는 이미 어른이지만 순간순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불안과, 고민과, 의문들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가슴 찡하게 그림과 함께 풀어내는 에세이는 술술 읽히지만, 마음에 여운을 남겨준다.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다고,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고, 우리는 완벽한 어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더 나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있어 든든한 위로도 되고 말이다. 그렇게 이 소소한 이야기들은 정답이 없는 현실에서 고군분투 중인 서툰 우리 어른들을 위한 응원이자 삶에 지친 어느 날 우리 일상에 여백을 주기 위한 힐링이 되어 준다.

내 삶에 성실한 걸까.나를 위해 노력한 걸까.

오늘 하루, 나 최선을 다한 거 맞지?

당신은 지금 잘 하고 있다. 오늘의 나로 충분한 자신을 믿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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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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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열여섯 살 이후부터는 자기를 보면 꺅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을 숱하게 봐왔다.

아까 공작새랑 같이 집 안에 있을 때는 아침에 저지른 무례한 행동을 파자마 아가씨가 용서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테이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딴 판이었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에 푹 빠져 살았던 터라, 내가 로맨스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시기는 거의 없었다. 학창 시절 잠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유는 당시 반 친구들 사이에서 할리퀸 로맨스가 인기였기 때문인데, 그때는 누군가 책을 한 권 사면 순서를 정해서 친구들끼리 돌려서 읽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책을 빌려주는 중심에 항상 내가 있었기에, 내가 좋아하는 장르와 당시 유행하던 장르를 적절하게 섞어서 읽었던 시기였다. 대부분 등장인물만 약간 다르고, 기본적인 스토리는 거의 똑같은 로맨스 물이었는데, 주드 데브루는 할리퀸 로맨스계의 대모라고 불리는 작가였다. 그래서 이번 신작의 작가 이름을 보고는 우와, 이 분이 아직도 작품을 쓰고 계셨구나 싶은 마음에 반갑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했다. 이 장르를 떠올리면 바로 머릿속에 연상될 정도로 주드 데브루는 독보적인 할리퀸 로맨스의 여제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마흔세 권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썼고, 1980~90년대 할리퀸 열풍을 이끌며 전 세계 6천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녀의 작품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거의 90년대 후반부터였으니, 20년 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무려 불후의 고전인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21세기 감성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게 세련된 표지 이미지와 감각적인 스토리 라인이 더해져 '할리퀸 로맨스'라는 다소 케케묵은 장르가 2018년 지금에도 여전히 읽히는 세련된 이야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케이시는 돌아서서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고 더뎠다. 지금껏 대체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테이트 랜더스는 나랑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 남자는 스포트라이트에 둘러싸여 레드 카펫을 밟으면서오스카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야. 집에 다 왔을 무렵 케이시는 깨달았다. … 자신과 테이트 랜더스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절대진지한 사이가 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의 세상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요리사고, 그는 슈퍼스타다.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하다 남자 친구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충격을 받은 케이시는 휴가를 내고 변방의 작은 마을 서머힐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베란다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젊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경찰을 부르거나 적어도 비명이라도 질러야 했지만, 남자가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지만 그와의 만남은 서로에게 불쾌한 기억만을 남기게 된다. 테이트는 지역 연극에 참여하기 위해 잠깐 들른 유명 배우였던 탓에 케이시가 자신을 몰래 촬영하는 파파라치라고 생각해 언성을 높이고, 케이시는 그를 무례하고 거만한 연예인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테이트는 로맨스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인기 배우였지만, 케이시는 그가 나온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연극 '오만과 편견'을 공연하기 위한 배우 오디션을 진행하려던 참이었고, 케이시는 그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요리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형편없는 연기 실력 덕분에 연출인 키트는 케이시가 실제로 테이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무대에서 표현해 줄 것을 제안하게 된다.

테이트를 오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 치부하고 그를 싫어하는 케이시의 감정은 극중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생각하는 것과 같아 묘하게 연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게 되고, 케이시는 얼떨결에 연극에 캐스팅되고 만다. 그것도 테이트가 연기하는 다아시의 상대역인 엘리자베스 역할에 말이다. , 서로에 대해 오해와 편견으로 시작된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어느 정도 상상이 될 것이다. 자존심과 오해, 미묘한 감정싸움과 남녀간의 은밀한 밀당에 주드 데브루 특유의 유머와 따스함이 더해져 사랑스러운 작품이 만들어진다. 잘생긴 남자 주인공, 솔직하고 당돌한 여자 주인공, 그리고 그들 사이를 훼방하는 방해꾼의 등장, 이야기는 적절한 탐색전과 클라이막스를 거쳐 위기에 흔들리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이어진다. 너무 뻔하지 않으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페이지를 쉽게 놓을 수가 없다는 점이 바로 이 장르만의 중독성있는 매력이 아닐까. 유치하고 오글거리지 않느냐고? 로맨스 장르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내가 읽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유쾌하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라 책을 읽는 동안 멋진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좋았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할리퀸 로맨스의 부활을 반기는 이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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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명작 시리즈 미니북 세트 - 전3권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겨울 가면 봄이 오듯 사랑은 또 온다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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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한테 사랑은 그 사람 땜에 잠 못 자고, 가슴 설레고, 참 많이 아픈 거예요.

사랑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요,

 

사랑은 있어요.

 

                                                                    -'거짓말' 중에서

 

인생 최고의 드라마로 노희경 작가의 '거짓말'을 꼽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무려 이십 년 전 드라마이지만, 아직도 캐릭터며, 대사며, 그 풍경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떠오를 만큼 좋아했고, 여러 번 봤던 드라마였다. 남녀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인물들의 삶에 모두 특별했고, 슬프고, 아름다웠고, 사랑에 대한,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빛났던 그 작품은 당연히 대본집으로도 사랑을 받았다. 요즘은 웬만큼 화제가 되는 드라마들은 거의 모두 방송이 끝나고 나서 대본집으로 출간이 되고 있는데, 어쩌면 그 시초가 노희경의 드라마들이 아니었나 싶다. 노희경 작가만큼 대본이 책으로 많이 출간된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녀의 대사들은 드라마 만큼이나 사랑을 받았으니 말이다.

 

 

노희경 작가의 필력은 대본이 아닌 에세이로도 매우 뛰어나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겨울 가면 봄이 오듯, 사랑은 또 온다>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번에 작가 노희경의 명작 세 권이 '한정판 MINI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노희경 작가의 첫 에세이이자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비롯해 소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데뷔 20주년 기념 명대사집 <겨울 가면 봄이 오듯 사랑은 또 온다>까지 세 권이다.

 

 

아버지한테 화내지마. 이제 늙어서 힘도 없는 사람이야.

부모자식간은 서로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남남끼리나 상식적으로 대하면 끝이지. 핏줄은 그러는 게 아니야.

핏줄은 피로 이해하는 거야. 무조건 이해하고 무조건 용서해줘.

 

                                                        -'내가 사는 이유' 중에서

 

이번 미니북 세트는 새로운 일러스트의 너무 예쁜 표지를 입은 리커버 버전으로, 한 손에 들어오는 핸디 사이즈로 되어 있다. 미니북이지만 글자 크기와 여백이 충분해 실제로 글씨를 읽는 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다.

 

대부분의 미니북이 소장용으로 가치가 있는데 반해, 글을 읽기 에는 다소 빽빽하거나 작아 어려웠는데, 이 책들은 매우 실용적인 셈이다. 그리고 세트의 특별 선물로 95개의 드라마 명대사가 들어 있는 '노희경 명대사 노트'도 같은 크기로 제작되어 있어 더 훌륭하다.

 

노희경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책을 시작하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어쩌면 이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그 수많은 감정들은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녀 없이 세상이 살아지는 게 참 묘하다고 말하는 노희경 작가가 엄마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모곡이 바로 이 작품이다. 드라마로도 좋았지만, 소설로도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사람이 전부다'라는 변함없는 인생철학을 20년간 드라라마에 투영해오며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작가 노희경. 그래서 늘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게다가 글과 삶이 따로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20년을 한결같이 매일 8시간 이상 글을 써온 성실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들이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어, 나는 그녀의 글을 좋아한다. 게다가 이번 미니북 세트는 따뜻하고 촉촉한 감성 충만 일러스트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삽입되어 있어 선물용으로도 그만이다. 미니북이라 크기도 예쁘고, 예쁜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아 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말만 남겨진 삶이 아니길, 말이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이길,
말이 목적이 아니길, 어떤 순간에도 사람이 목적이길.

대사를 잘 쓰려 애쓰던 서른을 지나고, 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사십의 야망을 지나, 이제 오십의 그녀는 말 없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촌철살인의 대사로 유명한 그녀인데, 자신의 드라마에 대사가 모두 없어진다 해도 후회는 없을 만큼의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말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이 목적인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직 노희경 만이 쓸 수 있는 그런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를 앞으로고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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