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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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인생은 모든 게 엉망이야."

나는 반박했다.

"나는 아무것도 끝까지 해내지 못했고 남자와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어. 게다가 이미 몇 년 전에 대학을 그만둔 사실을 부모님한테 말할 용기조차 없어. 난 술도 마시고 담배도 너무 많이 피워. 남성 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한두 가지는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소위 흑역사라고 불리는 그것.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하지 않을 그런 행동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과거를 지워주는 회사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잊고 싶은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준다고 하면 당신은 과연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살 것인가.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스물아홉 찰리는 부모님 몰래 대학을 그만두고, 술집에서 7년째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다.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마음이 찢어질 거라고 걱정하지만, 그럼에도 거침없는 성격과 제멋대로인 생활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에 저지른 창피하고 민망한 실수들 때문에 스트레스인데, 절친인 줄리의 남자 친구와 잠자리를 하는 바람에 가장 친했던 친구를 잃어 버렸고, 운전면허 시험 도중 속도 측정 장치를 들이받고 도망치거나, 취해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졌을 때 출동한 경찰한테 반항을 하거나, 애도 있는 유부남과 사귄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그녀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들이 너무 많아 후회가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된다.

 

“지금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들은 건가요?”

여자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어서 이곳에 찾아왔죠.”

“그렇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나요?”

“사이비 종교예요?”

엘리자는 크게 웃었고 그녀의 눈 주위에 수백만 개의 주름이 잡혔다.

지금의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고, 그러다 가끔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싶다라고 생각해본 적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실패했던 일들, 민망하고 창피했던 모든 사건들,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 수 있다면? 만약 그런 모든 일을 우리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말이다. 마치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이 작품 속 주인공 찰리의 삶은 그 선택 이후로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삭제하면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달라지지만, 찰리라는 인물 자체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환경이 달라진 것일 뿐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니, 당연히 찰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달라져 버린, 자신도 알 수 없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사랑한 기억이 전혀 없는 남자와 결혼식장에 가기 직전이었고, 헤픈 여자로서 살아왔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조신한 여자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6년 전에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작품은 이번에 더 달콤하고 예쁜 표지로 개정판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개정판의 세련된 표지가 작품의 분위기와도 더 잘 어울려 좋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마치 한 편의 로맨틴 코미디 영화처럼 지루할 틈 없이, 유쾌하게 읽힌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게 만들어 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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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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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그 아이들한테 바라는 게 뭘까요, 라모나? 그 스포츠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게 뭘까요? 거기에 평생을 바쳐서 얻을 수 있는 게 기껏해야 뭘까요? 찰나의 순간들........ 몇 번의 승리, 우리가 실제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몇 초의 시간,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된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조그만 도시 베어타운은 해마다 점점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혜가를 집어삼키는 곳이다. 이 곳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아이스 하키라는 스포츠에 대한 사랑이다. 주목할 만한 게 거의 없는 곳이지만 이곳이 하키 타운이라는 것만은 모든 주민들의 자랑이자 그들을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청소년팀의 준결승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의 하키 경기가 중요해봤자 어느 정도겠냐 싶지만, 그 경기에 이긴다면 온 국민에게 이 도시의 존재를 다시 일깨울 수 있다. 정부에서 이곳에 하키 스쿨을 설립할 수도 있고, 주변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대도시가 아니라 베어타운으로 몰려들 것이고, 그러다 보면 후원사들이 늘어나고, 도로는 물론이고 컨퍼렌스 센터와 쇼핑몰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시합은 중요하다. 이 도시의 경제가 걸려 있고, 자존심이 걸려 있으며, 무엇보다 주민들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오베라는 남자> <브릿마리 여기있다>에서 매력 만점 노년의 주인공을 그려냈었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서는 애어른 같은 일곱 살 소녀를 매혹적으로 탄생시켰었다. 그리고 마치 동화와도 같은 짧은 단편 소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에서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천천히 헤어짐을 배워가는 손자의 세상에서 가장 느린 작별 인사를 아름답게 그려냈었다. 이번 작품은 그 중 가장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묵직한 이야기를 들고 왔다. 게다가 첫 장부터 매우 강렬하게 시작한다. 어느 날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게 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주민들이 하키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곳, 베어타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작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충격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키도 작고 근육도 없지만 그 누구보다 빠른 하키 신동 열다섯 아맛, 아이스링크 청소부로 일하며 아맛을 홀로 키우는 파티마, 체격과 손재주와 머리와 심장을 모두 갖춘 하키 팀의 에이스 열일곱 케빈, 하키팀의 거물급 후원자인 케빈의 부모, 케빈의 단짝이자 그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잘생긴 얼굴과 슬픈 눈빛을 가진 싸움꾼 벤야민, 베어타운 하키단 단장 아빠를 두고 있는 열다섯 소녀 마야는 하키보다 기타를 더 좋아한다. 마야의 아빠 페테르는 이곳이 배출한 스타로 NHL까지 진출했던 하키 선수였다. 은퇴 후에 이곳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와 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페테르의 아내 미라는 변호사로 일하는 워킹맘으로 매사에 논리적이고 똑부러지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하키에 평생을 바친 늙은 코치 수네, 곧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젊고 패기 넘치는 다비드 코치 등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캐릭터의 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이야말로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만 같은 인물들로 가득한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비극이 더 가슴아프고, 와닿는 이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하키를 왜 좋아하느냐고? 하키에는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프레드릭 배크만을 왜 좋아하느냐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사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베라는 남자>에 등장했던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했던 쉰 아홉의 까칠한 오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다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해서 왕따를 당하는 일곱 살 엘사,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예순 셋 할머니 브릿마리.. 그리고 이번 작품 <베어타운>에 등장하는 페테르와 미라, 그리고 아맛과 마야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매크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벽하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의 손을 잡아 끈다. <베어타운>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구성과 스토리의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제 프레드릭 배크만의 대표작은 <오베라는 남자>가 아니라 <베어타운>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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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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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들은 삽화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하루키의 글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분량이 짧은 단편이지만, 그림책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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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 - 한국어판 100만 부 돌파 기념 특별판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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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잡음이 현실감각을 완전히 지배할 대, 사람들은 둔해진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은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별 볼일 없게 느끼고, 부정적인 생각이 주는 자극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몰고 가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고병, '생각병'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국내에 불었던 코이케 류노스케 열풍을 기억한다. 초판 표지였던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평온해 보이는 모습과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제목에서 오는 어감이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책이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나도 당시에 이 책을 읽었었고 특별판이 출간된 지금,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나는 과연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었던지 돌아보게 된다. 실패를 자주 하거나 부정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이 많은 편이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이 사려 깊은 결정을 내리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부정적인 사고를 통제할 수 없게 해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로 생각을 멈춰야 한다고 결심해도, 실제로 '생각 버리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실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책에서는 오감을 갈고 닦아 실제적인 감각을 강화시키는 연습을 통해, 생각을 자유롭게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생각 버리기 연습을 통해 충전 시간을 가지고, 충전을 끝낸 뒤 예리함과 명철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불교의 명상법이 생각을 다스리기 위한 트레이닝으로 무엇보다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잡다한 생각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해, 일상생활에서 습관을 다잡는 연습을 시작한다. 말하기, 듣기, 보기, 쓰기와 읽기, 먹기, 버리기, 접촉하기, 기르기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바로 생활에서 해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특히나 일반인들도 쉽게 할 수 있는 마음 조절법은 유용한 방법이다.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긴장이 되면 일단 눈을 반쯤 감고,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걸로 시작하는데, 이런 게 뭐 대단한 거냐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순간이 찾아 왔을 때 이 방법을 떠올리고, 직접 실천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일단 시야를 차단하고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집중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한다면 당신도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소유하고 있으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이 늘 '이것은 내 것이다. 잃고 싶지 않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잡음과 같은 생각을 일으키며, 무의식에서 마음을 어지럽힌다.

우리는 욕망에 쫓겨 불필요한 것을 쌓아두는 경향이 있다.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을 서가에 늘 꽂아두고, 필요 없어 보이는 것도 거의 버리지 않는다. 버리기는커녕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이 점점 쌓여만 간다. 이런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항상 마음에 부담을 준다.     

2010년 한국어판 초판 발매 이후 100만 부 돌파 기념으로 이번에 특별판이 출간되었다. 코이케 류노스케의 <생각 버리기 연습>, <나를 지키는 연습>, <화내지 않는 연습> 세 권이 지금 계절과도 닮은 화사한 컬러의 표지로 새로 옷을 갈아 입었으니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언제부턴가 자려고 누우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찾아와 쉽게 잠이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늘 시간에 쫓겨 생활하는 탓에 가급적 수면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인 생활 패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몸과는 정반대로 생각병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면증까지는 아니지만 누워서 편하게 바로 잠에 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피곤한 습관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이 책이 더욱 반갑고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생각의 잡음을 누르기 위한 명상법부터 일상생활의 소소한 습관들까지 제시되어 있어, 복잡한 머리 속을 비우기 위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생각의 잡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하루를 상쾌하기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생각하지 않고 오감으로 느낌으로써 어지러운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뇌를 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생각이 많아 잠 못 이룰 때,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비우는 일상의 기술이 당신을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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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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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오리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은하철도의 밤》을 받아 들었다.

“미야자와 겐지는 도호쿠에서 성장기를 보냈어. 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로 이주해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일본을 떠나본 적이 없었지. 그런 사람이 은하여행을 그린 책을 쓴 거야.”

가오리가 차창으로 들이비치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신 듯 커튼을 반쯤 내리며 말했다.

가오리가 내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디로 떠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미야자와 겐지는 아마도 병든 누이와 은하여행을 떠나고 싶었을 거야.”

만약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시간 속으로 가고 싶을까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 혹은 그런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첫사랑일 수도 있고, 뭔가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일 수도 있고, 잊을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모에가라는 과거에 만났던 연인 가오리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녀를 만난 날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으며, 비로소 오래도록 멈춰 서 있던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생의 가장 특별했던 순간, 바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존재가 누구의 삶에서나 단 한번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은 굉장히 특별하다. 일본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한 글이 9만 명이나 되는 팔로워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며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이 된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트위터에 140자씩 글을 써서 올리다 보니 ‘140자 문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게다가 저자인 모에가라는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그저 평범한 마흔 세 살의 중년 남자에 불과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생의 경험들을 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는 소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에가라는 수많은 독자들의 열광과 공감을 얻어냈던 것일까.

"국회도서관에는 우리가 앞으로 50년쯤 더 살고,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해도 끝내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출판물들이 있어. 세계인구는 70억을 넘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지. 우리가 앞으로 5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모든 인류를 다 만나볼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기적이나 다름없어."

그렇다. 세키구치가 그나마 이런 녀석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 해올 수 있었다.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모에가라는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 '알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글과 함께 한 여성의 이름을 보게 된다. SNS를 하다 보면 종종 내가 아는 사람 혹은 아는 사람과 연결된 다른 아는 사람들이 추천 목록에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여성은 바로 지난날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여자 가오리였다. 지나치게 친절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분에 그는 가오리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현재 남편과의 생활과 일상들을 둘러보게 된다. 그러다 전동차 안의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그만 실수로 가오리에게 친구 신청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했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20대 초반 시절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별다른 꿈도 없이 에클레어 공장에서 포장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취업정보지 펜팔을 통해 가오리와 연락을 하다 만나게 되고, 연인이 되었다. 이야기는 17년 전 펜팔로 만났던 연인을 17년 후 페이스 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의 그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가 살아낸 시간과 사는 동안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소소하게 들리지만 8,90년대의 색채와 풍경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불운의 연속이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귀여워해주었던 스트립걸 누나, 에클레어 공장의 인간미 넘치는 동료 나나미, 오랜 세월 함께 일해 온 동료 세키구치 등등... 지금의 그를 잊게 만든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 잊을 수 없는 연인 가오리도 있었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내 이야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지나온 내 생을 돌아보며 나를 스쳐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이를 만난 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건 기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찾아올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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