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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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 의식이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겐야는 고모 기쿠에가 여행 중 온천지의 여관에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쿠에 고모는 남편이 1년 전에 죽었고, 딸도 여섯 살 때 죽어,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가족도, 친척도 딱히 없었기에 화장 절차는 일본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유골을 남편 묘 옆에 묻어주기 위해 겐야는 고모의 집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고모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고모가 겐야에게 42억 엔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유언장에서 여섯 살때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레일라가 사실은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 된 것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고모는 만약 레일라를 찾게 되면 겐에게 물려준 유산의 70퍼센트를 레일라에게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하면 레일라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운동에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문구를 썼었다.

겐야는 애초에 42억 엔이나 되는 유산을 상속받을 생각도, 그 돈으로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보다 27년 동안이나 딸의 생사를 모르고 살았을 고모의 괴롭고 힘든 나날에 마음이 쓰여, 되든 안 되든 레일라를 찾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고모가 홀로 생활했던 커다란 저택에서 비밀 상자에 있던 의문의 편지를 비롯해 작은 단서들을 발견하고, 사립탐정을 고용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행방불명인 채 생사도 모르고 몇 년이나 지난 아이들만도 수만 명이었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레일라를 찾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비밀을 감춘 채 생을 마감한 고모의 일생을 돌아보며, 과거에 있었던 그 날의 진실에 점점 다가갈 수록,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진실이었다.

 

 

 

 

겐야는 끓기 시작한 브로도에 잘 저은 달걀과 소시지를 넣어 충분히 섞고, 다시 한 번 끓었을 때 바로 가스 불을 끄고는 로잔느가 놓은 수프용 접시 두 개에 담았다.

"이건 굉장해요. 오늘 이렇게 호화로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인생에는 살아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행복이 무진장 흘러 넘친단다, 하고 늘 말해주었어요. 주술처럼 말이에요."

 

미야모토 테루는 일본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린다. 국내에 소개된 <환상의 빛> <금수>라는 작품 역시 그에 걸 맞는 작품이었고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느 정도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모토 테루 특유의 담백하고, 잔잔한 감성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죽은 고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남자가 숨겨진 비밀을 찾게 되는 과정 자체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형식이지만, 이 작품에 긴장감이나 서스펜스 같은 요소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게 되는 상실의 아픔을 그렸던 전작처럼, 이 작품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과 그로 인해 달라져 버린 삶과 운명에 대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수수께끼 자체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가 왜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겐야의 고모가 살던 대저택에는 여러가지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고, 넓은 정원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겐야는 경찰도 수사를 포기해버린 지 이미 20수년이나 지난 사건을 조사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고민하거나, 레일라의 생사를 비롯해 자신에게 닥친 미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질 때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풀꽃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꽃과 풀들에게 말을 건넨다. 너희들이 레일라를 위해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겐야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에게도 마음을 담아 칭찬하면, 반드시 응해오는 법이라고 말이다. 후반부에 숨겨졌던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정원의 꽃들은 또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잔잔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게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미스터리를 놓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 더욱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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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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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은 자기 위로 함정의 입구가 철커덩 닫히는 게 느껴진다. 다시금 눈물이 솟구친다. 난 끝장이야!

시체를 감춰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만일 오두막을 부수지 않았다면, 레미를 그 위로 올려놓으면 아무도 거기까지 올라가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프랑스의 시골 마을인 보말에 사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6년 전 이혼한 아버지는 한 번도 보발로 돌아오지 않았고, 앙투안은 고독한 어머니에 대해 책임간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별로 외향적이지 못한 천성이라 약간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이 새로운 게임기에 정신이 빠져 있어 그의 친구는 옆집 데스메트 가족의 윌리스라는 개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윌리스가 자동차에 치였고, 앙투안은 데스메트 씨가 죽어가는 개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엽총으로 쏴 폐기물 담는 자루에 넣는 걸 보게 된다. 앙투안은 너무나도 괴로웠고,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자신을 따르던 데스메트 씨의 여섯 살 아들에게 순간적으로 화풀이를 하고 만다. 분노에 휩싸여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앙투안은 윌리스의 죽음이 가져온 쇼크와 분노로 들고 있던 작대기로 아이를 후려치고 만다.

그렇게 단 몇 초 사이에 앙투안의 삶의 방향이 달라져 버린다. 열두 살짜리 소년이 살인범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겁에 질린 그는 아이의 시체를 숲에 있는 나무 둥치 구멍에 숨기고, 이후 실종수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는다. 12년 후, 의사가 되어 파리에서 살던 앙투안은 가급적 고향과 멀리 하며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요청으로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데,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건이 벌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열두 살 소년 시절의 비중이 가장 많다.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발각되지 않았을 때, 결코 죄 지은 자는 편하게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경우 수를 떠올리며 불안감에 떨고, 그냥 붙잡혀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그저 이곳을 피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하게 마련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작품에서 서스펜스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데 더 치중하고 있다. 인물을 지배하던 죄책감과 불안감을 결국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심코 저지른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는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과 함께 변한 것, 그리고 앙투안을 슬프게 하는 것은 이제 여기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요성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사실, 이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가 죽인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노력, 그의 모든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로, 안전과 무사함에 대한 자신의 열망으로 향해져 있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추리, 스릴러 작품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다. <오르부아르>가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공쿠르상과 추리 소설 관련 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그의 위치가 독특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올해 <오르부아르>의 후속작인 <화재의 색깔>을 발표했고, 이는 '전쟁 3부작'으로 연결된다. 이번 신작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은 이 두 작품 사이에 위치한 작품으로 분량 때문인지 일종의 간주곡과도 같은 작품이라 평가 받기도 한다.

 

무대를 옮겨 다시 추리, 스릴러 작가로서 르메트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설명에 기대를 했지만,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을 추리, 스릴러라는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문학성 넘치는 스릴러' 내지는 '문학적 추리 소설'이라는 평도 있지만, 글쎄 이 작품은 <오르부아르> 이후 완전히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기존 그의 미스터리들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르부아르> 이전에 보여줬던 그의 작품 스타일이 더 좋았던 것 같다. 플롯과 구성, 캐릭터 모두 엄청나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 있었던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를 좋아했다. 각 권이 모두 꽤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부분 전혀 없이 모든 요소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과정에서 변화 무쌍한 플롯으로 인한 반전까지 훌륭한 시리즈였으니 말이다. 그의 '전쟁 3부작'이 기대가 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 같은 작품을 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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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디블 가족 - 2029년~2047년의 기록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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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감정의 영향을 받아. 모든 값어치는 주관적이야. 따라서 돈은 사람들이 느끼는 딱 그만큼의 가치를 갖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돈을 믿기 때문이야. 경제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까워. 수백만 시민들이 통화를 믿지 않으면 돈은 그저 색을 입힌 종잇장에 불과해. 마찬가지로 채권자들 역시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면 그 돈을 결국 받는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돈을 빌려주지 않겠지. 그러니까 믿음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야. 유일한 문제라고."

이야기의 배경은 세계 대공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9년의 미국이다. 서민들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와 실업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들은 샤워를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그나마도 초절수 샤워기를 이용해 안개처럼 분사되는 물로 씻어야 했다. 그렇게 물 부족으로 인해 평상시에도 재활용수를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게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뉴욕의 식당들은 붐볐고, 증권시장은 활황이었으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국은 그 동안 숱한 위기를 겪어 왔다. 2001년의 911테러로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받았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뒤이은 세계경기 침체, 그리고 2024년에는 스톤에이지 사건으로 주요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사회는 예상보다 빨리 안정세로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다. 바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금융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2029년의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러시아 동맹국을 상대로 무혈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룻밤 사이에 달러의 가치가 폭락하고, 새로운 기축통화가 이를 대체하면서 정부는 보복성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되는데...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은 국가의 위기를 넘어 시민들 모두의 돈도 순식간에 집어삼키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저작권사를 운영하며 저명한 소설가들을 유치하여 큰돈을 벌어 들인 더글러스 맨디블의 가족들이 이 위기 상황을 겪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더글러스의 장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장녀 에놀라와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카터, 그리고 카터의 두 딸과 막내아들, 그들의 가족들이 있다. 주요 스토리는 카터의 큰딸로 노숙자 보호소에서 일하는 플로렌스와 그녀의 가족, 사설 클리닉에서 환자를 돌보며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둘째 딸 에이버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보여 주고 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해선 아버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잖아. 미래를 위해 저축한 사람들. 미래를 믿은 사람들. 자기 자신을, 그리고 미래를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기 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거든. 거대한 몹쓸 장난에 당한 기분이라고."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누구나 생각했지만 아무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가장 시니컬하고 강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이다. <케빈에 대하여>에서는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모성애를 다뤘고, <내 아내에 대하여>에서는 의료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에 대해, <빅 브러더>에서는 사회적 문제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 문제인비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작품 <맨디블 가족>에서는 금융 쿠테타로 인한 통화의 위기로 인한 서민의 삶을 통해 정부와 사회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장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날을 각자의 입장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맨디블 가족에게 통화의 위기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꿈처럼 현실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 왔고, 미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노인 원호 생활시설에서 여생을 즐기던 더글러스부터, 플로렌스의 외동아들로 어른보다 더 경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심이 많은 열세 살 윌링에 이르기까지 맨디블 가족들은 4대에 걸쳐 각자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재정적 파탄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인프라나 금융을 포함해 모든 거래는 오프라인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어 종이 계좌 내역서와 수표책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민간 대중교통이 사라지고, 국가는 개인이 보유한 모든 금을 회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주식 시장이 붕괴되고, 자본가들의 연금이 날아가 버리고, 군인들이 집들을 다니며 숨겨둔 금을 찾아 개별 수색을 하기 시작한다. 담보대출 이자는 계속 치솟았고, 월급의 물가 수당이 올랐지만 실제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엄청난 연구 조사를 했고, 그 철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논리를 토대로 경제적 디스토피아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너무도 리얼하게 현재를 반영하고 있어 더 오싹하고, 공감되는 무서운 작품이기도 하다. 맨디블이라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패권전쟁으로 생존 위기에 직면한 서민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등장 인물들에겐 하나 같이 대사가 빽빽하게 주어져 있고, 마치 경제학 책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경제와 관련된 전문적인 이론들이 난무하는 작품이라, 읽기에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현재를 너무도 소름 끼치게 반영하고 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 만큼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시대를 탁월하게 포착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2018년 현재, 우리가 이 작품을 꼭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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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2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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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하루였는가, 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것은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다.

 

당신은 스무 살 생일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하루키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로 커피점 점원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을 바꿔줄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생일날도 종일 즐거운 일 따위는 하나도 없이 보냈다고. 하루키의 신작 단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역시 고독한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그녀는 생일날 밤을 함께 보냈어야 할 남자친구와 며칠 전에 심각한 말다툼을 했고, 아르바이트 친구가 날짜를 바꿔주기로 했지만 감기가 도져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급히 일하러 나오게 된다. 어차피 스무 살 생일이라고 딱히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롯폰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플로어 매니저는 가게가 있는 빌딩의 육층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는 사장의 방에 저녁식사를 가져다 주는 일을 했는데, 갑작스런 복통으로 그 일을 그녀가 맡게 된다. 정확히 8시에, 604호실로 식사를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8시가 되어 사장의 식사가 차려지자 그녀는 왜건을 밀려 육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있던 노인에게 요리를 전달한다. 그런데 노인은 그녀에게 의외의 제안을 한다.

"아가씨, 오 분쯤만 자네 시간을 내줘도 괜찮겠는가?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네." 라고.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스무 살 생일을 이제 막 맞이한 그녀와 노인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사실 식당 직원들 사이에서 사장은 조금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그 동안 플로어 매니저 외에는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원하는 요리 또한 항상 치킨으로 정해져 있었다. 조리법과 곁들이는 채소는 그날그날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치킨 요리였다.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의문의 노인과 하필 생일날 아무런 특별한 일을 갖지 못한 고독한 여주인공.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공기 중엔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과연 그녀의 스무 살 생일날 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일 축하하네." 노인은 말했다. "아가씨,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두 사람은 잔을 마주쳤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아트' 프로젝트, 그 네 번째 작품이다. <>, <이상한 도서관>, <빵가게를 습격하다>에 이어 독일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시크의 그림과 함께하는 이 작품은 일본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단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짧은 분량의 이야기이지만, 독특한 분위기의 일러스트와 함께 보여지는 스토리는 꽤나 매혹적이다. 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들은 삽화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하루키의 글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짧은 단편이지만, 그림책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예쁜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빨강, 주황, 핑크, 강렬한 세 가지 색과 과감한 클로즈업 컷 등 선명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일러스트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모든 사람이 일 년 중에 딱 하루, 시간으로 치면 딱 스물네 시간, 자신에게는 특별한 하루를 소유하게 된다."고 생일의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생일이라는 것은 당신에게 일 년에 딱 하나밖에 없는 정말로 특별한 날이니까 이건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그리고 유례를 찾기 힘든 그 공평함을 축복해야지요." 라고.

이 작품 속 그녀처럼, 누군가 나에게 생일이니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단 그 소원은 하나여야 하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도로 물릴 수 없다. 어떤 소원을 선택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소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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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함은 분만실에 두고 왔습니다
야마다 모모코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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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속옷 위에 줄무늬 티셔츠, 육아에 허덕이는 좌충우돌의 나날. 짬이 나면 스마트폰과 눈싸움을 벌이거나 과자 먹기..... 나의 심신도 여성스러움도 깨끗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성 호르몬의 사하라 사막인가?!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태평양보다 넓고 깊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이 바로 '육아'라 가끔은 누구나 하는 걸 과연 힘들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퇴근 하자마자 집에 와서 제2의 일을 시작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달픔이야 실제 엄마가 아닌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24시간 아이와 함께 지내느라 온 마음과 시간을 다 투자해야 하는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맘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매일같이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직장 생활을 다시 하는 게 아이를 종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도 엄마는 당연히 처음이다 보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매일매일이 새롭고, 매 순간이 실수투성이에 정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육아에 관련된 책도 읽을 만큼 읽었고, 주변 친구나 선배맘들에게 노하우도 많이 전수받았고, 이 정도면 엄마로서 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 부딪히는 육아의 세계란, 책을 통해 만나고,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짐작했던 그 수준이 아니었다.

그 스트레스를 해소 하기 위해, 공감하고, 위 받고 싶어서 숱한 육아와 관련된 에세이들을 죄다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고, 공감되는 책을 만났으니, 바로 인기 일러스트레이터야마다 모모코의 리얼 엄마 데뷔전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이다. 이름하여 '섹시함은 분만실에 두고 왔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이렇게나 충격적인 비주얼의 일러스트가 어울리나 싶은 생각은 잠시 접어 두시길. 그야말로 유쾌한 자학이 작열하는 폭소 육아일기는 당신에게 엄청난 공감과 위로와 유쾌함을 안겨줄 테니 말이다.

 

산휴, 육휴 기간은,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휴직 전에 예상했던 생활이나 외모와는 많이 다른 결과가 된 것도 아쉽다. 전혀 살이 빠지지 않았고, 옷으로 가려지지도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기성 유아식에 의지한 채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해버린 적도 있었다. 나는 전혀, 절대로, 완벽한 엄마가 아니었다.

야마다 모모코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18개월의 대장정 동안 좌충우돌하는 진풍경을 담은 육아 카툰 에세이는 예쁜 엄마는 도시전설에 불과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제 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일러스트로 그려내고 있는 모습은 전 프로레슬러 '라이오네스 아스카'랑 닮은, 섹시함은 원래 없었지만 출산 후 완전히 상실했다고 표현되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일부러 못생겨 보이도록 그려낸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눈이 가고, 자꾸 웃음이 나고, 이해되고, 공감되는 캐릭터이다. 임신 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달걀형 얼굴이 되고 싶었는데, 달걀형 몸매가 되고 말았다는 그녀의 한탄은 아마 대부분의 임신부들이 경험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날씬하게 임신 전 원래의 몸매 그대로 배만 볼록 나온 임신부도 참 많더만, 전체적으로 거대해져버려 마치 험프티 덤프티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 모습에 그만 빵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의 하루는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밤이 왔다!'의 느낌.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루가 다 가버린 기분이다. 매일매일 아기가 중심인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아기가 낮잠을 자고, 밤에는 덜 보채고, 수유를 주기적으로 하고, 때 맞춰 병원에 가서 예방 접종을 하고 등등... 잠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아이 때문에 샤워할 때 욕실 문을 열어두고 하는 건 기본, 잦은 수유 때문에 노브라에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화장은커녕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 그 모습들이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엄마들의 폭풍 공감을 불러올 것 같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궁극의 못생김에 가까워져 가는 낯선 얼굴에, 출산 후에 수유만 열심히 해도 원래 몸무게로 돌아간다고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다 거짓말인 걸로, 나도 경험했고, 당신고 경험했을 그 모든 구질구질하고, 불쌍한 사연들이 특유의 자학형 유머로 유쾌하게 소개되고 있다. 정신 없이 웃으면서 읽히는 카툰 에세이지만,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가슴 속에 콕콕 남아 찡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 일, 청소해놓아도 바로 난장판이 되어 버리는 집,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한 꺼 번에 감당해야 하는 우리의 엄마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잊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일인지 충분히 느끼고, 그 상황을 즐기며 누리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그다지 녹록치 않으니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그리고 곧 엄마가 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엄마들의 고충을 알 수 없는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도. 이게 바로 진짜 '현실 엄마'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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