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마 저택 살인사건
아마노 세츠코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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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범죄요? 뭔가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겁니까?" 다이스케가 붉어진 얼굴로 츠유키를 보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츠유키는 다시 현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명백한 자살 현장이었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 이 막연한 찜찜한 기분은 뭘까?

오늘은 도지마 신노스케 회장의 65세 생일이다. 축하 파티를 위해 유럽의 고전적인 저택 구조를 모방한 대저택에 온 가족이 모인다. 장녀인 소노코와 맏사위 나오아키, 그리고 손자 히로키, 장남인 다이스케의 친구 타구마와 약혼녀인 카나에, 차녀인 키와코와 막내인 아카리, 그리고 아카리의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사에코이다. 거기에 가정부인 키요미와 신노스케 회장의 친구이기도 한 셰프 미야모토가 오늘 요리를 위해 저택에서 한창 준비중이었다. 음식 준비가 마무리 되고 저녁 시간이 되어 다들 신노스케 회장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식구들이 찾으러 가지만, 그는 집 안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거실 테라스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경찰이 방을 수색하고 조사를 하지만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유서도 없었고, 아무런 자살 동기도 짐작되지 않아 다들 의아했지만, 딱히 범죄라는 증거도 보이지 않아 사건은 그렇게 자살로 종결될 것처럼 보였다. 나이에 비해 지극히 건강했고, 병력도 없었으며, 독극물이 검출된 것도 아니고, 우울증이었다는 증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형사 츠유키는 뭔가 마음에 걸린다. 츠유키는 역시나 그 자살 사건이 뭔가 의심스러웠던 팀원 시마와 타가미와 함께 이상한 점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인의 정체는 점점 더 모호해지기만 한다.그리고 사건 일주일 후 칠일재 제사를 위해 저택에 그날 밤 거실에 모였던 이들이 모두 모인 날, 그곳에서 또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어찌 보면 완벽한 밀실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도지마 가의 저택에서, 다들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모여 있는데, 대체 범인은 어떻게 살인을 저지른 걸까.

 

 

"그렇지, 이틀밖에 없어. 아니, 이틀이나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제대로 써야 해. 알겠나?. 모두가 단순히 주변 정황에 현혹되고 있어. 아주 표면적인 모습에 말이야. 그래서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이 모순에 집착하고 있는 건 우리뿐이야."

작가인 아마노 세츠코는 무려 60세에 작가 데뷔에 성공했는데, 데뷔작이었던 <얼음꽃> 은 당시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 역시 후지TV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시선의 원작 소설이다. 일드의 여왕 나카마 유키에, 연기파 배우 야마모토 코지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방영 당시 일본에서 크게 화제를 모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추리소설에서 전통적인 밀실 트릭의 기법에 초점을 맞추어 미스터리로 읽어도 흥미롭고, 섬세하고 세밀한 인물 묘사를 따라가며 그들의 관계와 드라마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범인이 누구이냐, 밀실 트릭은 어떻게 벌어진 것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살해 '동기'이다.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 살인사건에서 범인이 증거들도 없애고, 확실한 알리바이도 세우더라도, 사실상 절대 없앨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동기이니 말이다. 무차별 살인 사건이 아닌 이상, 항상 범인에게는 동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작품처럼 범인이 특정 장소 안에 있었던 사람, 가족을 비롯해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인물들도 한정이 될 때는 바로 그 동기가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반전을 완성시키며, 서스펜스를 불러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은 놀라움보다는 뭔가 서글프고 씁쓸한 감정이 들게 한다.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럴 만한 배경에도 어느 정도의 이해와 공감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작가인 아마노 세츠코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고, 그래서 유독 그녀의 작품이 자주 드라마로 만들어져 사랑 받는 이유일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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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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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열심히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욕심도 버리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내 집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들을 얻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라니. 열심히 살지 못해 죄송합니다.도 아니고 말이다. 살면서 평생 노력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만 들어왔던 우리들이기에,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제목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 이 책은 일명 '야매 득도 에세이'이다. 저자는 말한다. 불혹이라 불리는 마흔 살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내가 어디로 이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 건지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때, 소중히 품어왔던 사표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표를 낸 후였고, 아차 싶었지만 없던 일로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게다가 흔쾌히 퇴사를 반기는 회사까지. 모두가 열심히 사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황당한 소리를 하는 그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말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들은 알고 있다. 노력이란 것이 항상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애초에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6년차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는 자신이 무명배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대입 4수를 거쳐서 오랫동안 투잡을 해왔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그렇게 열심히 해도 전혀 사는 게 나아지지 않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정도라면 너무도 억울했다고.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계속 누군가에게 지는 느낌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케세라세라.

"어떤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게 정상일까, 그대로 다 안 되는 게 정상일까?"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거."

"빙고! 그러니까 네가 이 모양인 것도 지극히 정상이라는 얘기야."

"... 위로 맞지?"

이 작품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위트 있는 일러스트들이다. 만화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심각한 대사를 하거나, 노골적인 그림으로 당황스럽게 만들어 놓고서 촌철살인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다. 글은 매우 진지한데,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들이 피식 웃게 만들고, 가끔은 깔깔거리게 만들면서 무거웠던 고민들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너무도 리얼하고, 가감 없는 일러스트에서 전달되는 그것은 현실을 꿰뚫는 날카로움과 답답한 사회에 한 방 훅 날리는 시원함이다. 갑작스레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내던진 비현실적인 상황에 있으면서도,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적이라 누구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것들이기도 하다.

 

나도 가끔 생각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한 듯 바쁘게 움직이며 살고 있지만, 내가 가는 길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 말이다. 어떤 날은 종일 엉덩이 붙이고 앉아 쉬지도 못했구나 싶은 날도 있었고, 수험생도 아니면서 자는 시간이 아까워 억지로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뭔가를 했던 날도 많았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걸까. 가끔은 아무 목적 없이 산책도 하고, 느긋하게 앉아 음악도 좀 늦고, 또 가끔은 정말 별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한 게 아닐까.

 

열정과 노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대의 경우에는 뭔가 도태되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것에 대한 부담이 어느 정도 덜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나도 굳이 열심히 아둥바둥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어떤 기준 없이, 특별히 바라는 것 없이, 그러니까 기대 없이 인생을 사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이제는 견디는 삶이 아니라, 순간을 즐기는 삶도 한번 시작해보고 싶어 졌다.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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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갇힌 여자 스토리콜렉터 63
로버트 브린자 지음, 서지희 옮김 / 북로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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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친년 취급받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요. 제가 못 참겠는 건 말입니다, 이 여자애들한테 일어난 일이에요. 아무런 노력도 안 해보고, 오늘 밤에 발 뻗고 주무실 수 있겠어요? 우리가 처음 경찰이 됐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젠장, 수색에 드는 비용은 저한테 청구하세요. 인사 위원회에 회부해서 저를 해고하셔도 돼요, 지금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어요."

주말 내내 내린 눈이 눈보라가 되어 흩날리는 한겨울, 런던의 차가운 호수 아래 얼음 속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상류 노동 귀족의 딸로 사교계의 명사로 소개되던 아름다운 앤드리아였다. 마쉬 총경은 이 중대한 사건을 위해 경시청 소속 에리카 경감을 소환해 수사를 맡긴다. 스물 셋의 앤드리아는 오는 여름 약혼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억만장자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 왔던 그녀가 외딴 호수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에리카 경감은 기존 수사팀의 책임자였던 스팍스 경감의 적의와 사사건건 간섭하려 드는 앤드리아의 아버지 사이먼 경의 압박 사이에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사실 에리카 경감은 과거 여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공으로 서른아홉밖에 안 된 나이에 경감으로 승진했던 스타 경찰로 주목받았다. 경찰이던 남편을 작전 수행 중에 잃고 나서 죄책감과 슬픔으로 한 동안 일을 쉬었고, 아직도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는 뛰어난 직감과 올곧은 원칙으로 사건을 파헤치고, 주위의 어떤 방해나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범인을 쫓는다. 아직도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범죄 피해자들의 애달픈 삶에 마음이 흔들리는 감상적인 면도 가지고 있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윗선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강한 면모도 보여 주고 있다.

 

모스는 거의 매일 목숨을 걸고 칼과 총, 복수심과 원한으로 무장한 미치광이들을 상대했다. 반면 제이콥이 아는 세상은 두 엄마와 장난감, 머리 위에서 느릿느릿 돌아가는 모빌과 점점 사그라드는 편안한 노랫소리가 다일 터였다. 에리카는 처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나쁜 놈 하나를 잡는 동안 열 놈이 더 생기는 현실에 살고 있었으니까.

에리카는 사건을 조사하다 미결로 묻혔던 매춘부 세 명의 죽음과 앤드리아의 죽음이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목격한 증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마저 시체로 발견되고, 조사를 위해 방문한 술집에선 주인이 공식 항의서를 제출하고, 윗선에선 그녀의 과거 이력을 들먹이며 정신감정을 의뢰하겠다고, 면직 조치를 내리고 만다. 그리고 그날 밤, 범인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과연 에리카 경감은 범인의 경고와 경찰관 정직이라는 최후의 통첩으로부터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

시리즈로 이어지는 스릴러 작품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캐릭터일 것이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은 현실성을 부여해야만, 독자는 이야기에 빠져 들 수 있다. 왜냐하면 피가 난무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현장이야말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현실성'의 표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딘가 사람냄새 물씬 나는, 그래서 정말 살아 숨쉬는 인물처럼 느껴지는 캐릭터가 등장해야 우리는 이야기에 비로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로버트 브린자의 범죄 소설 데뷔작인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시리즈로 갈 수밖에 없는, 성공적인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 같다. 스릴러에서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덕분에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사회 기득권층에 분노하고 맞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짜릿한 통쾌함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에리카 경감 시리즈는 <밤의 스토커>, <어두운 바다>, <마지막 호흡>, 그리고 최근 출간된 <콜드 블러드>로 이어지고 있다. 어서 빨리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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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도서관
김이경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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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좋은 불쏘시개는 없느니!"

정신을 좀 슬게 하는 책들을 불살라 왕국의 난방까지 해결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있으랴. 광장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놓이고, 사람들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책들을 던져 넣었다. 골수에까지 좀이슨 자들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몰래 책을 감췄다. 그자들에겐 철퇴가 필요하다. 철퇴는... 활자판을 녹이면 되었다. 왕은 기꺼이 재활용을 허락했다. 문자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칼의 시대였다.  

-'분서' 중에서

만약 저승이 커다란 도서관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저승에서 할 일이란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고, 그걸 잘 써서 통과가 되면 니르바나의 세계에 들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써야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연 내 삶은 책으로 쓸 만큼 특별하고, 감동적인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극중 누군가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니르바나에 가지 못하고 저승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쉽게 글을 쓰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이라고 말이다.

이 책 <살아 있는 도서관>은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던 <순례자의 책>이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이다. 초판에는 책에 관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었고, 이번 개정판에는 처음과 끝에 2편의 이야기가 덧붙었다. 추가된 처음 프롤로그는 애초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동화 같은 짧은 상상, 이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 에필로그는 오랫동안 작가가 마음속에서 궁글려온 이야기로 지난해 발표한 최신작이다. ‘책에 관한 소설집이라는 전무후무한 형식도 놀랍지만, 이 소설집 속에 실린 단편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도 다양하고, 흥미진진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마치 어린 시절 막 세계 명작 동화에 입문했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책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페이지들에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힘이란, 그야말로 굉장했다.

"길을 잃었소?"

"아니오. 책을 구하러 가는 길이오."

흰 수염을 늘어뜨린 대상이 물었다.

"책이라고? 그게 무어요?"

"거짓은 죽이고 진실은 영원히 살아남게 적어두는 거라오. 내 혀가 죽은 다음에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책이 있기 때문이오."                           

                 -'순례자의 책' 중에서

세상에 없는 책을 상상하고, 그런 책들이 꽂힌 도서관을 꿈꾸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저승의 도서관'이라는 그림을 완성시켰고, 고대 서구사회에서 책의 주재료였던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넘어 13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이후 유행했던 인피로 제본한 책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패설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일본 에도 시대의 책 대여상 가시혼야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진진해서, 하나의 소재로 발전시켜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좋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거기다 책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책을 어떻게 훼손하고 통제하는지 보여주는 분서의 역사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도 있고, 덴마크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표제작도 매우 재미있었다.

시대도, 소재도, 방식도 너무 다양한 단편들이 마치 선물 상자처럼 느껴지는 이 단편집은 그 뿐 아니라 ''에 관한 방대한 지식까지 함께 전해 주고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서는 '소설 속 책 이야기'라고 해서 각각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지식들이 실려 있다. 인류의 놀라운 발명품인에 관한 인문학적 주제를 '이야기'로 재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된 정보들이라 소설만큼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누드 제본 방식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에 관한 백과사전 급 단편 모음집'이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제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 자체로도 아름답고, 360도 쫙 펴지는 제본이라 읽기에도 너무 좋고, ''이라는 것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식이라 이 작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본이라는 생각도 든다. 짧고 술술 읽히는 이야기들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멋진 작품이라 오래된 도서관의 운치만큼 여운을 남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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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3
진 웹스터 지음, 김지혁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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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람에 누워 있던 귀여운 아기를 도둑맞은 적 없으세요?

어쩜 제가 그 아이인지도 몰라요! 소설 속 이야기라면 이쯤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겠죠?

자신의 근본을 모른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못하게 찜찜한 일이지만, 흥미롭고 낭만적인 면도 있답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 소녀가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소녀의 성장 소설이자, 풋풋한 연애편지로 된 서간체 소설이기도 하다. 아마 꿈 많던 소녀 시절에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를 꿈꾸며 설레는 기분을 느껴보지 않았던 여성 독자들이 있을까 싶다. 그 이유로 이 고전 적인 플롯은 아직도 애니메이션과 영화,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변주되어 현대에도 꾸준히 사랑 받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열정적이고 모험심 강한 고아 소녀 제루샤는 올해 열일곱 이다. 보통 열여섯 살이 넘으면 고아원을 나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제루샤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규정보다 2년이나 더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덕분에 손님들이 올 때면 마룻바닥이며, 침대며 청소를 하고, 아흔일곱 명의 어린 고아들을 깨끗이 씻기고, 빗질하고, 제대로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의 부름을 받게 된 그녀는 상상도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된다. 주로 고아원의 남자아이들에게 지원을 했던 한 신사분이 제루샤가 쓴 수필을 읽고는 그녀를 대학에 보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제안한 그의 조건은 단 하나, 답례로 한 달에 한 번 감사 편지를 써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제루샤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학업 진행 상황과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익명의 키다리 아저씨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쨌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최근에 알게 된 비밀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절 허영덩어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실 거죠? 그럼 말씀드릴게요.

전 예뻐요.

정말이라니까요. 방에 거울을 세 개나 두고도 그걸 모른다면 완전 바보게요?

그리하여 이 동화의 주요 스토리는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한 쪽에서 보내는 편지로 진행되는 스토리이지만 흥미진진한 이유는 바로 발랄하고, 긍정적이고, 고아라는 처지와 후원을 받는 입장 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할 말은 하는 여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인물에 대한 미스터리함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녀가 새로운 생활을 겪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설레임이 묻어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또한 매력이다. 거기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존재에 대한 일본의 반전까지 더해 지면, 그야말로 소녀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완벽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고전 명작을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다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가 리커북으로 출간되었다. <키다리아저씨>는 그 세 번째 리커버북이다. 기존의 시리즈에 비해 서정적이고 따뜻한 색감의 예쁜 일러스트는 그대로, 거기에 고전적 프레임의 더 커진 판형과 빈티지한 색감으로 클래식한 느낌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나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는 따로 한 장씩 떼어놓고 보더라도 작품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따스하고 포근한 색감과 터치로 그려낸 세밀한 이미지들은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도 바로 현실을 잊고 추억에 빠져 들도록 만들어 준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소장용으로도, 누군가를 위한 선물용으로도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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