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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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이전까지 녹화된 영상은 삭제돼 있었다.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 내가 의논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근데 남편을 믿어도 될까?

어둠의 방에 혼자 갇힌 듯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십육 년 동안 가정주부로 여태껏 살아온 주란. 그녀는 친구들과 달리 한 번도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의사 남편에 똑똑한 아들까지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녀는 최근에 판교 신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원하는 설계대로 주택을 짓고 정원까지 있는 마당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당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면서, 완벽했던 그녀의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백화점 침대 코너에서 일하는 상은은 결혼 사 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신혼 초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하기 위해 변호사와 상담까지 받았지만, 임신 이후로 남편은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와 헤어지기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저수지에서 밤낚시 약속이 있어 가는 길에 친정에 들른 상은은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남편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병원으로 와서 신원 확인을 해달라는 경찰의 연락이었다.

 

나는 피곤할 따름이었다. 잠이 자고 싶었다. 푹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테고, 내 삶도 그대로일 게 분명했다. 김주란의 말대로 모두가 불행할 테고, 나의 내일도 불행할 거다. 하지만 이상하게 김주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이야기는 완벽했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의심이 커져 가는 주란과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상은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된다. 결혼과 함께 모두가 꿈꾸는 집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여자와 남편과 맞벌이하며 근근이 삶을 살아내는 여자의 삶이란 얼핏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란의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 제약 회사의 영업직원인 상은의 남편이 들락거리던 사이였고, 사고가 나던 날 밤에도 두 사람이 밤낚시 약속이 있었던 참이었다. 주란의 남편은 그날 밤에 마음이 바뀌어 약속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그의 말을 주란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극 초반에 상은이 직접 자신이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고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란의 의심은 사실상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주란은 이사오기 전에도 오해로 타인을 의심했던 전력이 있었고, 오래 전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주란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서술되는 방식이라 심리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띠고 있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완벽한 범죄를 꿈꾸는 상은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집합을 이루게 되고 주란과 상은이 만나 그들이 협력해서 같은 비밀을 추적하게 되는 순간, 작품은 또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과연 두 주인공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영미권에서 한참 인기였던 가정 스릴러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정 폭력에서 비롯된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소설 집필 경험이 없는 작가의 첫 작품이지만, 영화 연출을 했고, 장편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라 그런지 놀라운 데뷔작을 써낸 것 같다.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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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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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팀장 대리라는 어색한 직함을 단 채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상수. 팀장 대리란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일컬었다. 반도미싱에서 영업 일을 하는 상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는 했지만 융통성이 없고, 거래처 사장들과 다투거나, 정치 얘기를 하다가 불화를 만든다거나 하는 등 동료를 비롯해 공장주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결혼은커녕 연애라도 하는지 알 수 없고, 동료 팀장을 짝사랑하는 한심한 그를 회사에서 어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데다, 회장의 재수학원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렇게 10년을 흘러오던 상수는 팀장 대리라는 직함에 조금 익숙해지자 자신에게 팀원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총무부에 있던 경애가 오게 된다.

경애는 원래 홍보부에 있다가 총무부로, 이번에는 다시 영업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녀가 3년 전 농성 때 불법 해고 처단 등을 목 놓아 외쳤던 이력때문이다. 당시에 파업 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한 탓에 파업이 흐지부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여지껏 회사에서 버텨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차라리 회사를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미용실을 닫고 항암치료를 했던 탓에 도망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 그녀와 상수는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남자와 운전대만 잡으면 세상의 모든 욕설을 내뱉는 여자가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상수의 인생에서는 늘 그가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져 낭패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상수에게 실패라는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공상수 너 실패, 메뉴 선택 실패, 이메일 보안 실패, 언니로 살기 실패, 짝사랑 실패, 해외파견 실패, 팀장 실패, 아주 다 실패.

이렇게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에겐 사실 그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교집합이 있었다. 경애는 고등학교 시절 하이텔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며 학창 시절 유일하게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그런데 호프집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무려 56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경애는 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덕분에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 E를 사고로 잃고 만다. 상수 역시 같은 사고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그 친구가 바로 경애의 친구 E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연애상담 페이지를 7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팔로워가 2만명에 이르는 곳으로, 상수는 그 계정에서 언니, 라고 불렸고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 오랫동안 언니로 살았다. 경애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산주 선배가 결혼을 한 뒤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하고, 연애상담 페이지에 편지를 쓰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장을 하는 '언니'가 상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인상적인 이야기로 만났던 김금희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하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를 했었다. 이야기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남녀의 현재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그들 자신을 몰랐지만 한때 공유했던 과거의 시간을 함께 풀어 낸다. 반도 미싱에서 한 팀이 되어 근무하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일을 하게 되는 상황과 '언죄다' 페이지의 언니들이 상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사랑의 여러 유형과 그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살다 보면 끝장난 사랑 때문에 마음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잃어 버리고 세상의 끝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극중 모두의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고.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는 다채로움도 가지고 있어 더욱 특별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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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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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를 관계의 우주라고 부른다. 우주는서로가 있음으로 성립한다. 서로라는 말은 당신과 내가 고유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행성이라는 의미다. 동등과 존중의 거리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사이를 가질 때 그것을 우주라고 한다. 사이와 서로는우리라는 말처럼, 인류가 발명해낸 아름답고 황홀한 천체물리학 개념어다.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과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부분 위로나 공감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삭막한 인간 관계,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이 딱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당신 때문에 내가, 나 때문에 당신이, 우리는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은 구성원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바로 그것이 누군가는 지옥을 경험하고, 삶의 벼랑 끝으로 몰게 하는 무서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필요한 최적의 거리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과 당신의 이해 사이에서, 불필요한 오해 없이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림태주 시인은 말한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고. 어쩌면 지구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관계의 비밀스러운 원리와 은유법을 알고 싶어 별과 사막과 날씨와 천체물리학을 참고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당신의 사이를 관계의 우주, 관계의 물리학에 빗대어 풀어내는 은유는 표현 자체도 참신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공감하고 위로 받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수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이 책에서 표현하는 색다른 접근 방식은 굉장히 신선했고,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나에게 나의 입장이 있듯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삶은 관계의 총합이고, 관계는 입장들의 교집합이다. 상대방이 없는 관계란 성립 불가능하고, 모든 상대방은 각자의 입장으로 존립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성이라면, 저 별빛 하나하나가 다 입장들이다. 별빛이 반짝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어둠 속에 별이 있는 줄 알아보겠는가.

'당신과 나의 만남이 우연처럼 쉽고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난하고 지극한 운동의 결과'라는 말은 굉장히 로맨틱하게 들리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애쓴 필연과 두려움을 이겨낸 행운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더라도 가뿐하게 이겨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게나 어렵게 이어진 관계였는데, 내가 지금 이 사소한 걸로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지구별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고, 그 관계의 힘으로 지구는 자전하고,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의 우주에서 알게 된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관계는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한다고. 어떤 물리적 관계는 우아하게 도약해서 관계의 화학으로 나아간다고.

여타의 심리학서나 에세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는 특별한 감성이 아닐까 싶다. 절절한 감정을 자아내려는 문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뭉클해지거나, 담백하게 관계에 대한 철학을 풀어내는 글에서도 설레임이 느껴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쉽게 술술 읽히지만, 자꾸 페이지를 들춰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들을 우주에 비유하고, 사람을 얻고 또 잃는 말과 태도의 얄궂음을 이야기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로에 대한 오해와 마주하며 외로움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이 책은 그 동안 만나왔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다룬 책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이런 류의 책들이야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지만 놓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대부분 한 번 읽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 책은 곁에 두고 자꾸 펼쳐서 읽고 싶은 책이다. 문장도 좋고, 은유도 색다르고, 사유도 깊이가 있어 에세이지만 마치 시처럼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맺고 끊고 적당한 거리를 주는, 사이의 균형에 서툰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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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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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국민 8,000만 명이 8N8 사냥감의 적이다. 어린이, 노인, 환자, 교도소 수감자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대대손손 편하게 먹고 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8N8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렇겠지.

시청자 절반이 팩션 드라마를 다큐멘터리로 여기는 나라라면 안 될 것도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당신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리고 만약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한 때 잘나가는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자작곡을 연주했었던 벤은 현재 커버 밴드에도 못 끼는 곳에서 해고 당한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해고였고, 술이나 마시려고 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가며 구해줬더니 소녀는 아저씨 때문에 다 망쳤다며 돈이 날아갔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찾아간 딸의 병원에서 전부인인 제니퍼는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실 벤의 딸 율레는 4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 사고가 나 두 다리를 잃었고, 일주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현재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심쩍은 상황들 때문에 딸이 살인미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굳어 지려는데, 갑자기 건너편 호텔 옥상의 대형 스크린에 벤의 사진이 뜬다. 아까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의 이마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8자가 그려진 채로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정부에서 살인 복권을 발행한다. 단돈 10유로만 내면 누구나 죽이고 싶은 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8일 저녁 8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 제비 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약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인을 포함한 모든 위법행위를 용서하겠다고 공표하고, 사냥감을 포획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유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 국민 전체, 수천만 명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벤은 생각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진짜일 리 없어. 장난일 거야. 하지만 올해의 살인 복권이 추첨되고, 그 대상자로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과 벤이 지목된 것이다. 과연 벤은 온 세상이 참여하고 있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는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까.

 

“벤, 만나서 반가워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준비되셨나요?”

벤은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이아나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얼른를 터치했다.

“고마워요, . , 그럼 물을게요.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벤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만약 오늘, 지금, 현재, 하룻밤 동안 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추방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당신이라면 이런 살인 복권에 누군가를 추천하겠는가? 혹은 당신이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상금을 마다하고 당신을 숨겨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오직 피체크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다. 이번 작품 역시 초반부터 온 세상이 지목한 살인 게임의 사냥꾼이 된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긴장감을 부여하고, 숨 막히는 도심 속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 정부가 하루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락하는 미래 세계가 등장하는데, '미래에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다고. 거기서 그는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는 현실적 아이디어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누가 당신을 해치고 모욕하고 화나게 했나요?

혹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마녀사냥이 먼 이야기가 아닌 요즘, 살인 복권이라는 작품 속 설정이 허구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혹시 누가 내 이름을 적지는 않을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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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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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부인은 모든 것을 잘해냈고 좋은 삶, 자신이 원하는 삶,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꾸렸다. 지금 여기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있었다. 거미 무용수의 사진처럼 리처드슨 부인은 이런 삶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의 고요하고 우아한 지역사회 셰이커하이츠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칙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 구획부터 주택 외벽 색깔 등 셰이커하이츠의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지역 신문 기자가 된 리처드슨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변호사 리처드슨은 네 자녀들과 함께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부인은 부모가 물려준 작은 집을 세놓고, 그곳에 미혼모인 미아와 그녀의 딸 펄이 이사를 오게 된다. 예술가인 미아는 그들 모녀가 겨우 먹고 살 정도만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매일 자신의 예술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그들 모녀는 미아의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이동해왔고, 이번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정착하기로 한다.

리처드슨 가족의 네 자녀들은 고3인 렉시, 2인 트립, 1인 무디, 그리고 열넷인 막내 이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디는 금방 펄과 친구가 되고, 매일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펄은 무디와 함께 그의 집에서 리처드슨 가족들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태생과 배경이 전혀 다른 두 가정의 아이들은 서로의 삶에 이끌리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펄은 리처드슨가의 아이들이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자신감, 리처드슨 부부의 고상함을 동경했고, 반대로 무디는 미아 모녀의 예술적인 떠돌이 생활 방식을 낭만적으로 느낀다. 렉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동생 이지보다 펄과 더 자매처럼 지내게 되고, 펄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트립과 사랑에 빠진다.

 

 

 

"그게 신경쓰이는 거군요, 그렇죠?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이제 미아가 리처드슨 부인을 살필 차례였다. 부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얼굴에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듯이.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무언가를 놓쳤을 까봐. 자기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포기했을 까봐."

평생 질서 있고 엄격한 삶을 살았던 리처드슨 부인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슨 부인의 오랜 친구인 린다가 버려진 아기를 입양하게 되면서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모가 나타나 양육권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처드슨 부인이 분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자라는 것을 이용해 미아의 뒷조사를 하게 되는데, 상상치도 못했던 숨겨진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 이 정도로 묵직한 울림을 남겨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너무도 술술 읽힌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영리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모녀 관계가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과 막내 이지의 관계, 그리고 미아와 펄의 관계. 자세한 이들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절대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는 관계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이 처해 있는 독특한 상황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해의 눈으로 보고 싶게 만드는 힘 또한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된다. 누구나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씨처럼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의문과 억눌렀던 욕망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은 바로 그 불씨를 피어 오르게 만드는 발화점과도 같다. 때로는 이렇게 모든 걸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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