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일할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곽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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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간혹 의사도 피해를 입히는 것이 사실이다. 연구에 따르면, 중증 합병증의 절반가량은 피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 불가피함이 위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경우는 내가 잘못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실수로 누군가의 삶이 영원히 바뀔 수 있다. 지금도 사회는 이러한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실수를 저지른 의사들이 악당일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악당 아닌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으킨 피해는 오명으로 남는다.

몇 년 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속 대사가 생각난다. 럭셔리한 재벌 상속남이자 백화점 CEO인 남자 주인공은 건방지고 예의 없지만, 완벽한 외모를 가진 까칠하고 도도한 인물이었다. 그가 임원들이 가지고 온 기획안을 볼 때마다 하는 대사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냉정을 넘어 냉철하기까지 한 남자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 주려는 대사였지만, 사실 극중 늘 똑같은 기획안을 그대로 답습해오는 임원들을 다그치고 꾸중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이후로 이 대사는 온갖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 되고, 기사의 제목으로 쓰이는 등 인기를 끌었다. 아툴 가완디의 신작을 읽는 데, 나는 오래 전 이 대사가 떠올랐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일이든, 나의 일을 대하는 최선의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글 쓰는 의사 아툴 가완디는 임상 외과의로서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풀어놓은 이 책에서 의료 현장의 다양한 관점과 시도를 취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 전장의 야전병원, 인도의 소아마비 소탕작전, 독극물 주사를 사용하는 사형집행장, 의료 소송이 벌어지는 법정, 제왕절개 수술이 한창인 분만실 등 다양한 의료 현장을 통해 성공과 실패의 사례, 그리고 그 속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본다.

 

 

의사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의 삶을 바꾼다. 현실이 이러하다 보니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 하얀색 가운을 걸친 기계 부속이 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의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의사뿐 아니라, 사회에서 위험과 책임을 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래서는 안 된다.

과연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특히나 그 일에서 실패라는 것이 너무 쉽고 흔하다면 말이다. 의사들의 임무는 질병과 맞서 싸우고, 과학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모든 인간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들이란 대개 확실치 않고, 터득해야 할 지식은 광대하고 끝이 없으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신속성과 일관성도 요구된다. 만약 치료를 받다가 잘못되면 환자와 가족은 그 일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끔찍한 실수에서 빚어진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사실 이런 일은 지금도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각종 의료 사고를 둘러싼 뉴스의 보도나 소송에 관련된 이야기를 누구나 한 두 개쯤 바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그럴 때 이들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그런데 만약 의사들이 책임을 회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들 안타깝게 보았던 한 병원의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을 알 것이다. 해당 사건 이후로 병원감염 실태가 도마에 올랐다. 오래 전 중국의 사스 바이러스, 몇 년 전 국내의 메르스 사태가 잇었지만, 여전히 의료기관 감염 실태는 집계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아툴 가완디는 이 책에서 19세기 중반의 병원에서 있었던 감염문제를 시작으로 의료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성실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대로 된 의료란 까다로운 진단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모두가 손 씻기를 확실히 실천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어 열악한 환경에서 진행되었던 소아마비 소탕작전, 전장의 군의관들이 기록한 데이터가 불러온 혁신 등 과학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성실함의 가치를 말한다. 그리고 의사들의 도덕적 책무에 관한 논쟁적 이슈와 혁신에 필요한 태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이 책의 '최고보다 더 중요한 최선'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저자의 말처럼 '정답은 없지만, 더 나은 선택은 있다'는 의견에 공감이 간다. 그가 의료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만큼, 그의 글도 그랬던 것 같다. 직업인의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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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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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로니아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 시민은 늘 항상 언제나 국가권력보다 무겁고 소중하며 우선돼야 한다. 오로지 이것만이 아로니아가 존재하는 이유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허투루 여기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나몰라라 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재 이유가 없다. 자격이 없고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마땅하다. 잘라서 말한다. 아로니아 시민은 곧 아로니아 국가 그 자체다.

학교에서는 주입식 교육과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경쟁심이 아니라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가르치고, 의무 교육 기간 외에 외국유학과 개인의 취미나 특기를 위한 교육을 포함해 모든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곳이 있다. 이곳에선 0세부터 모든 시민들에게 매월 시민연금을 지급한다. 아프거나 다치거나 혹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더라도 시민연금으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화석 연류를 이용한 이동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뛰어 다니며, 누구든지 도움 없이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다. 이 나라에는 군대도 없고, 검찰과 경찰은 물론 총도 칼도 없다. 시민을 보호하고 국가를 방위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적 본질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권력 기관이 아예 없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시민들이 모여 광장에서 잔치를 하고, 대통령이 직접 편지로 축하인사를 하며, 이름을 새긴 황금펜던트 목걸이를 목에 걸어준다. '영원히 행복할 의무'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일들이 정말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김대현 작가의 이 작품이다. 바다 한가운데 세워진 작지만 강한 나라, ‘아로니아공화국에서는 상상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을 시민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 그야말로 꿈꾸는 순간에만 가능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국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나 몰라라 하는 국가는 사실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슬프게도 말이다.

"세상에 태어난 일은 행복한 일이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좋든 싫든 꼼짝없이 한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죠. 저는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쓰레기들이 장악한 국가의 국민으로 길들여진 채 평생 의무를 지고 권리를 찾아다니며 허둥지둥 살아야 한다면 슬프고 불행한 일 아닌가요? 저는 제가 선택한 재밌고 신나는 국가 아로니아를 만들 겁니다. 제가 살고 제 자식들이 살고 또 그 자식들이 살아갈 재밌고 신나는 국가를 직접 만드는 일은 정말로 멋지지 않나요? 이렇게 멋진 일을 하지 않는 건 제 자신에게 죄를 짓는 거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로니아공화국의 대통령인 김강현이다. 재선을 거쳐 다음 달이면 10년 동안의 대통령 일상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된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동급생을 삥 뜯던 동네 꼴통 시절 아버지로부터 죽을 만큼 맞았던 일부터, 합기도 도장에서 만난 누나에게 한 눈에 반해 성당을 다니며 천주교 신자가 되고, 공부를 시작해 대학에 들어가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자 휴학했지만 징병검사 신체 5급으로 판정되어 가지도 못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 시작한 사법시험에 덜컥 합격하게 되는 인생 스토리가 이어진다. 악마라도 변호하는 변호사는 싫었고, 법조문에 얽매여 누군가의 인생을 허접쓰레기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는 판사도 싫었기에, 검사가 되었지만, 결국 권력과 자만으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검찰청을 박차고 나오게 된다. 동네 꼴통이 좀 달라지나 싶었는데, 검사가 되어서도 꼴통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1970년대의 대한민국부터 2038년의 미래 국가 아로니아공화국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군부독재 정권 시대부터 민주화운동 시기를 거쳐 재벌기업 회장과 자식새끼들의 주머니만 불리던 국가부도 위기 상황,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펼쳐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겪어온 과거와 현재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국민이 국가를 버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가볍지만, 진지하게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국가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거침없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재의 국가가 당면한 문제를 넘어 미래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무겁지 않게, 경쾌한 필치로 담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정말 어디 이렇게 국민이 국가 그 자체가 되는 재미있고 신나는 나라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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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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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건만 방석에 파묻혀 잠들어 버린 사람. 그런 인물에게 '주인공'이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심이다.

자라, 고와다. 푹 자라.

주인공이니까 노력해야 한다고 대체 누가 정했어?

 

장난 같은 너구리 가면에 시대착오적인 구제고등학교의 검은 망토 차림을 한 괴인이 교토 거리에 나타났다. 그런 이상한 차림을 한 인물이 꾸물거리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신고를 했고, 교토 경찰은 근면한 시민의 신고로 불이 난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겁먹은 시민을 무시하고 괴인은 묵묵히 사람들을 도와주며 활약했고, 괴인이 좋은 놈이라고 알려지자 인기는 거칠 것 없이 올라갔다. 그렇게 교토에 폼포코 가면이 나타나고 일년쯤 지난 뒤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고와다는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면 뭐든 할 거라는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업무 시간 의 시간에는 가급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으며, 주말이면 주말이면 밤낮없이 깔아 놓은 기숙사 이부자리에 누워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들고,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고와다와 폼포코 가면이 만나게 되었고, 이후 폼포코 가면은 고와다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다그쳤고, 고와다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는 이 부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너구리 괴인과 자신은 게으름을 피우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게으름뱅이 남자의 이상한 실랑이는 계속 되풀이 된다.

게으름 피우느라 바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취미도 없고 애인도 없는 독신인 데다가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 한가한 사람이 말이다. 고와다 못지 않게 그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강요하는 너구리 가면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아침, 교토 기온 축제를 하루 앞둔 전야제의 날이었다. 그저 주말을 빈둥거리며 보내고 싶었을 뿐인 고와다는 본의 아니게 폼포코 가면과 엮여 원치 않는 모험에 발을 디디게 된다. 교토를 둘러싸고 토요일 단 하루에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대소동은 이들 두 캐릭터 외에도 매우 개성이 뚜렷하고 독특하기로는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 함께 한다.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탐정 우라모토와 주말에만 조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대성 다마가와는 주말 탐정이지만 미행에 굉장히 미숙하다. 주말의 일정표를 빽빽하게 만들어 하루를 보내야만 안심하는 커플인 고와다의 직장 선배 온다와 그의 애인인 모모키, 무시무시한 풍모에 겁을 먹게 만드는 고와다의 연구소 소장인 고토 소장, 알파카와 판박이인 모 거대 조직의 수령 5대 등... 하나 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까지 주인공이 움직이지 않아도 모험이라는 이야기가 성사될 수 있는 걸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조금은 긴장감을 가져, 이 게으른 인간아."

"우리는 인간이기에 앞서 게으름뱅이입니다."

"게으름 피울 여유는 없어."

"인간은 자신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죠." 라고 말하면서 고와다는 절벽 끝에서 겨우 버티는 큰 바위를 힘차게 미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오래 전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유정천 가족>이었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보는 내내 킥킥대며 웃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기 전에 뭉클하고 짠한 뭔가가 가슴에 남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너구리라니. 이 무슨 동화 같은 판타지일까.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치 너구리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마법처럼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너구리며, 텐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들의 다소 황당하고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신작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은 여러 모로 너구리를 소재로 한 <유정천 가족>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인간, 너구리, 텐구라는 세 존재가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만큼, 이번 신작에서 너구리 가면을 쓰고 무리하게 착한 일을 하려는 '폼포코 가면'이라는 정의의 사도 역시 만화처럼 현실감없는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도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모습으로 종횡무진 마구 달려간다고 할까. 기존의 작품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넘어서 망상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인 배경과 캐릭터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이렇게 게으른 주인공은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주인공은 매사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만 하나? 탐정이라면 자고로 길을 헤매고 다녀서는 안 되는 걸까? 우리의 영웅이라면, 정의의 사도니까 게으르면 안 되는 걸까? 작가는 말한다. 누구든 졸릴 때는 자야 한다고. 탐정인데 길을 헤매는 모습에 어이없어 할 수도 있지만, 독자들이여 배려심을 가지라고 말이다. 게으름에 능숙한 사람을 동경하여 이 소설을 썼다는 모리미 도키히코는 이 작품을 통해서 게으름뱅이가 활약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특히나 한국판에서는 특별히 고와다가 활보했던 교토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이 교토의 실재 지명과 장소를 배경으로 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이야기는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기에, 책을 읽을 때마다 교토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당장 교토에 가고 싶다는 마법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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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켜보고 있어 스토리콜렉터 6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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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마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만, 마니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나는 그 애의 사진들 가장자리에 절반만 찍힌 존재, 그 애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사라지는, 시야 가장자리의 그림자다. 그 애의 감은 눈꺼풀 뒤에서 춤을 추는 유령이자 눈을 깜빡일 때 따라 깜빡이는 어둠이다. 이름 없는 수호자, 팡파르도 없이 등장하는 영웅, 그리고 마니라는 교향곡의 지휘자다.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다.

남편 대니얼이 사라진 뒤 벌써 13개월이 지났다. 그동 안 쥐꼬리만 한 저금과 친구들한테 빌린 돈으로 근근이 살아왔지만, 이제는 돈도, 친구들의 호의도 모두 동났다. 집세는 두 달치나 밀렸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처지도 못 된다. 게다가 대니얼에게는 도박으로 날려버린 3만 파운드라는 빚이 있었고, 그의 부채는 고스란히 마니에게 이어진다. 강요에 의한 채무 이행을 위해 마니는 에스코트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이런 인생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돈을 위해 다리를 벌리는 것. 돈 많은 사업가들하고 노닥거리며 그들의 매력에 홀딱 반한 척하는 것. 과연 이게 정말 내 인생일까. 마니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다. 남편의 실종은 그가 죽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내에게 참혹한 현실을 부여한다. 마니는 남편의 은행 계좌에 접속할 수도, 남편의 체육관 회원증을 취소할 수도 없고, 그의 신용카드 연회비도 아직 내고 있으며, 자동 이체도 중지할 수 없고, 이혼도, 애도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의 사망 증서 없이는 보험금을 수령할 수도 없는데, 남겨진 두 아이를 지키며 남편이 빌린 돈을 갚아나가야 하는 현실이란 끔찍하기만 하다.

마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어떻게든 남편의 사망 증서를 받아내 보험금으로 두 아이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의 소지품에서 빨간 앨범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마니의 생일을 위해 그녀의 삶을 거쳐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 선물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상담을 받아온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과 함께 앨범에 담긴 인터뷰를 보게 되는데, 그 속에서 첫 번째 남자 친구로부터 갑작스러운 증오를 마주하고 당황하게 된다.

 

"나는 네가 죽기를 빌었어. 내 소원이었다고. 그리고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야...."

대체 그는 왜 저런 소릴 한 걸까. 마니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미 18년이나 전에 헤어졌던 남자였는데, 그는 대체 왜 마니에게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분노를 표출한 것일까. 그리고 혼란스러운 그녀의 주변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못된 쪽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야."

조가 설명을 기다린다.

"그 여자 주변 사람들은 사라지거나 죽거나 하는 버릇이 있더군. 어쩌면 그 여자가 남편을 죽였을지도 몰라. 어쩌면 퀸도 그 여자가 죽였을지 모르고."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뭔가 구린 냄새가 나."

이 작품은 <용의자>, <산산이 부서진 남자>, <내 것이었던 소녀>, <미안하다고 말해>에 이은 조 올로클린 시리즈 신작이다. 물리적 세계보다는 감정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상황을 경험하기보다는 이해하는 편이 더 쉽다고 말하는 뛰어난 심리학자이지만, 파킨슨 병이라는 치명적인 친구를 데리고 사는 남자 조 올로클린. 그는 대다수 사람들보다 이해심이 더 많아, 어떤 사건에서든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더 관심을 쏟으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어떨 때는 독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쩐지 그의 생각보다는 다른 이들의 견해에 힘을 보태주고 싶을 만큼 무모해 보이지만, 꾸역꾸역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우직함도 가지고 있다.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답게 아이들 걱정에 잠을 설치고, 누군가 아이들에게 해를 가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달려들 수 있는 과격함도 가지고 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찾아온 파킨슨 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친구에게 시달리면서도 아주 가끔은 그것을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유도 있으며, 하루하루가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때에도 상처 받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고, 누군가를 다치게 한 나쁜 놈을 벌주고 싶어하는 오지랖도 있다. 무엇보다 페이지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들 때문에 여타의 스릴러 장르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당신이 보는 것을 믿지 마라. 기만은 거의 대부분의 스릴러에서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을 공급한다. 범죄소설의 전형적인 거짓말뿐 아니라,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 기만 역시 그 공급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 작품에서 초반부터 독자를 솜씨 좋게 꾀어 남편의 실종 이후 참담한 현실에 내던져진 마니라는 인물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 올로클린이라는 심리학자를 통해서 그녀의 의심스러운 과거에 관한 단서들을 촘촘히 짜 넣는다. 거기다 중간 중간 보여지는 범인으로 추측되는 그의 시점에서 들려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누군가 그녀를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거들을 축적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독자가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선 급작스럽고 잔혹한 결말은 섬뜩하고 오싹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 공포란 것이 현실과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까지 밀어붙이는 심리적 악몽으로 연결된다. 마이클 로보텀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을 결코 방심할 수 없도록 포석을 잘 깔아두어,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무더운 여름에 읽기에 딱 좋은, 잘 만들어진 영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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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7-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 표지가 좀 ㅠ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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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책이 왜 좋은지 몰랐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도 몇 시간씩 고투해야 했고, 시험 때에는 통째로 외워야 했고, 정신을 집중해 낭독을 듣고 또박또박 써내야 했다. 대학 3학년 봄에서 여름까지 소설 전공 강독 수업은 그렇게 지독하게 흘러갔다.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그 책을 펼쳐보리라고, 소설을 쓸 때마다 숨을 쉬듯 함께하리라고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라는 말만큼 뭉클하고, 먹먹한 표현이 또 있을까. 이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안위를 걱정하고, 입장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올 때, 사실 나는 괜찮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 사실 마음으로 먼저 짐작이 되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적이 더 많았다. 매주, 매달 사건이 터지고,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재난과 재앙이 닥쳤던 작년, 그리고 올해를 우리는 견뎌왔다. 함정임 작가는 바닷가 서재에서 추모의 마음으로 애도 일기를 쓰듯, 혀끝에 맴돌던 말들을 여름의 안부로 건넨다. 당신의 여름은 괜찮습니까. 라고.

작가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은 온종일 서재에 머무는데, 그때 창밖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바다와 언덕, 그리고 그들 풍경 속을 들고 나는 구름과 새와 배들이라고 한다. 바다가 보이는 달맞이 언덕의 서재에서 글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니, 글 속에서도 바다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설레인다. 이 책에는 다양한 작가의 사유가 담겨 있는데, '소설가'라는 작가의 일상이 고스란히 보여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녀가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개나, 책 속의 문장들이 옮겨져 있기도 하고, 그녀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창작 수업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던 날의 기록들도 담겨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전부 다른 사유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은 모두 글쓰기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찮지만 고유한 삶의 편린들'은 수십 년 동안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아온 이의 그것이기에 매혹적이다.

현대의 속성은 견고한 것들이 촛농처럼 녹아 내리고, 깃털처럼 부유하는 세계이다. 21세기의 시공간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기에 어떤 것도 고유하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문 지면의 힘은 인터넷 매체 환경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오로지 문학만이 덧없음에 맞서 내가 겨우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때로 아름답다는 것을 되새겨줄 뿐이다.

이 책은 작가정신의 '슬로북'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백민석의 쿠바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박상의 본격 음악 에세이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에 이어 그 세 번째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속도지상주의 시대에느려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누리면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을 꾀할 것을 권하는 것이 '슬로북' 시리즈의 목적이라고 하는데, 느리게 읽는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해서 '마음의 속도'로 읽는 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소설가란 단 한 순간도 쓰지 않으면 사는 데 의미가 없다고 자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작가만의 운명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모든 인간의 속성이되, 대부분 쓰지 않을 뿐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긴긴 여름 끝자락, 폭풍우와 뙤약볕을 견뎌낸 붉은 열매 같은 책들을 통해 충만한 에너지를 얻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책들도 좋고, 살면서 읽어 왔던, 혹은 지나쳐 왔던 책들도 좋을 것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필요한지 말해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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