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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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어. 나만 혼자 잠들지 못하고 이렇게 깨어 있고. 며칠이고 몇 주고 나 혼자 이렇게 걷고 또 걸으며 떠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

그때 숲이 끝나고 무민의 발 아래로 새로운 골짜기가 펼쳐졌다. 맞은편으로 외로운 산이 보였다. 남쪽으로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는 산줄기가 이제껏 그렇게 외로워 보인 적이 없었다.   P.25

어린 시절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이들은 기온이 떨어지면 동면 준비를 시작해서, 다음 해 봄이 되어 기온이 다시 올라가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고 하는데.. 어린 마음에 사람도 오랜 시간 동안 겨울잠을 자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바깥에 눈은 소복이 쌓여 있고, 하늘은 까맣고, 길에는 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추운 겨울, 따뜻한 집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오붓하게 겨울잠을 어떨까 싶었던 거다. 고요한 집 안 가득, 다가올 봄에 대한 설레이는 기대감으로 모두 한 껏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겨울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나 혼자만 겨울잠에서 깨어 버린다면 어떨까.

 

"엄마! 일어나 보세요! 온 세상이 사라져 버렸어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한 겨울의 무민 골짜기, 무민 가족은 해마다 11월부터 4월까지 겨울잠을 잤다. 가족들은 모두 전나무 잎을 잔뜩 먹었고, 침대 옆에는 이른 봄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무민들이 처음으로 겨울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제껏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 버렸고, 다시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무민은 가족들을 깨우려고 해봤지만, 다들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들은 멈춘 지 오래였고, 따뜻한 어둠 속에서 무민은 끔찍하게도 혼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감자를 키우고,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매사 만사태평인 캐릭터 무민은 사실 소심하고 겁 많은 순둥이였다. 그러니 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 그 긴 계절을 혼자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집 안에 밤과 침엽수림의 냄새가 들어차자, 무민은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걸. 가족들도 가끔은 바람을 쐬어야지.’

무민은 계단 쪽으로 나가 흠뻑 젖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무민이 혼잣말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P.154

이 작품은 토베 얀손이 26년에 걸쳐 출간한무민시리즈 연작소설 여덟 편 중에, 다섯 번째 작품이다.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여름과는 상반되는 겨울의 무민 골짜기의 분위기가 낯설기도 하면서, 신비롭기도 하다. 작가가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인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라 무민의 두려움과 외로움, 책임감을 느끼고 죽음을 경험하는 등 전작보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겨울의 마법을 배워 나가는 무민의 성장기는 놀랍도록 따뜻하다. 사라진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든 무민은 집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난생 처음 겪게 되는 겨울의 세상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잿빛 어둠이 온 골짜기를 뒤덮고 있었고, 모났던 것은 모두 동글동글해졌으며, 생동감 있는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헤치며 힘겹게 강으로 갔고, 앙상한 가지가 잔뜩 뒤엉킨 재스민 덤불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죽어 버렸어. 내가 잠든 동안 온 세상이 죽어 버렸어.'

아빠의 탈의실에 머물며 꽁꽁 언 바다 밑에서 낚시를 하는 투티키, 눈에 잘 띄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녀석들, 스키를 타고 나타난 헤물렌, 추위를 피해 들이닥친 손님들까지 무민은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혹독한 겨울을 헤쳐 나가면서 '누구나 힘든 일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라고. 어쨌든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난생처음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눈이 이렇게 오는구나. 땅에서 자라는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눈 더미에 풀썩 드러누우면서 이제 겨울도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무민이 눈보라와 씨름하고, 하늘이 초록빛으로 변하는 오로라와 바다에서 어둠을 뚫고 다가온다는 얼음 여왕으로 인해 엄청난 추위를 겪으면서 느끼게 되는 겨울의 풍경들은, 요즘 같은 날씨에 정말 시원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마치 한 여름에 겪게 되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말이다. 무민이 등장하는 이야기야 언제 읽어도 좋지만, 특히 이 작품은 8월에 읽기에 정말 좋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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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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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역할을 가진다는 것이 사람을 이토록 빛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한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분들을 보며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p.85~86

초여름의 도쿄, 좌석 열두 개짜리 작은 공간에 한 레스토랑이 오픈했다. 주문을 틀릴 수도 있다는 이상한 레스토랑. 햄버그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정작 나온 것은 만두, 손님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갔다가, 주문을 받으러 온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손님에게 물을 두 잔씩 가져다 드리는 일은 다반사에, 샐러드에 스푼이 나가고 뜨거운 커피에 빨대를 내는 일도 종종 있다. 한마디로 너무나 정신이 없고 산만한 레스토랑이다. 이유는 바로 '이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는 스태프들이 모두 치매나 인지 장애를 앓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문한 음식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화를 내는 손님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실수를 이해하며, 즐기는 분위기라고 할까.

NHK 방송국 PD인 저자는, 어쩌다 취재를 가게 된 간병 시설에서 예정된 메뉴가 아닌 엉뚱한 음식을 대접받는 경험을 한 후, 치매 어르신들로 스태프를 꾸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본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조금 불편하고 당황스럽더라도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가치관이 퍼져 나간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치뤄졌고, 전 세계 150여 개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개인과 기업, 단체로부터 참여와 기부 문의가 쏟아지는 등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고령화 시대, 노인 문제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물론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많은 것을 잃었다지만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 사회와 이어져 있다. 이어져 있어서 좋다.

그 사실을 구체적인 형태로 명확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 이곳에 있는 것이다.   p.126

2025,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세가 되는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다. 우리보다 진작에 앞서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현재 약 460만 명이 치매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본 정부는 치매 노인의 간병 책임을 국가가 떠안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사회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치매 노인들을 멀리 떼어놓고 행동을 제한하기보다는 편안하게, 눈치 보지 말고 일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생각했고, 그렇게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기획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레스토랑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뭉클한 식당이기도 했다.

특히나 뭉클했던 것은 직접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일을 하거나, 손님으로 왔던 이들의 경험담을 들려준 부분이었다. 치매에 걸렸지만 다시 한번 일하고 싶어 했던 할머니들의 얼굴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 떠오르는 순간들과 일을 즐기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기는 그 행복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경험을 그들의 머릿속에 기억해 둘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틀림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실수를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그 너그러운 마음과 따뜻한 관용과 소통의 손길이야말로, 고령화나 치매로 인한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말이다. 조금 틀리면 어떤가. 조금 다르면 또 어떤가. 이 프로젝트는 이들이 '치매 환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분명히 각인시킨다. 실수가 잦고, 정상 범위가 아니고,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졌던 치매 환자들을 보통 사람들이랑 별 다를 게 없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그 지점이 너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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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할 말 다하는 사람들의 비밀 - 상처주기도, 상처입기도 싫은 당신을 위한 심리 대화 43
오수향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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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호감을 얻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사람과 유사한 점을 찾아 어필해보자. 영업 사원들이 나이, 종교, 고향, 취미 등이 비슷한 고객들과 계약을 잘 맺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는 비슷한 점을 과하지 않은 정도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다. 추임새처럼 상대의 마지막 말을 자연스럽게 따라 해도 좋고, 공략하고 싶은 상대가 있을 때 그 사람 의상 스타일에 맞춰서 입고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생각보다 말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상대방이 불쾌할 까봐 할 말도 못하고 돌아서거나, 원하는 게 있어도 제대로 표현도 못하거나. 하지만 반대로 웃으면서 할 말 다하는 사람도 있다. 싸우지 않고 부드럽게,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이들은 타고난 걸까? 저자는 과연 그들에게 어떤 비밀이 있을까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 결과 효과 만점의 대화법은 예외 없이 심리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바로 이 책을 통해 심리학에 기초한 대화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의 호감을 얻는 심리 대화법, 틀어진 관계를 바로잡는 심리 대화법, 예스를 끌어내는 심리 대화법, 이성을 사로잡는 심리 대화법, 지갑을 열게 하는 심리 대화법, 성과를 내게 하는 심리 대화법으로 구분되어 있어 각 카테고리 별로 사례들이 충분히 나와 있어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기 쉽도록 구성되어 있다. 너무 술술 읽히고, 흥미진진한데 그 모든 것들이 다 심리학 법칙에서 나온다는 점도 재미있었고, 생각보다 대화법이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성공을 부른다는 점도 놀라웠다. 3초 만에 상대를 끌어들이는 첫인상의 마법,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긍정의 스킨십, 스며들 듯 마음의 벽을 허무는 대화의 기술,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부탁의 기술, 가랑비에 옷 젖듯이 화해하는 법, 무의식중에 예스를 끌어내는 마법의 단어 등등... 각각의 사례들을 읽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져 수긍하게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쏟아내는 사람은 대체로 비호감이다. 남녀 불문, 잘난 척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를 미끼 삼아 툭 던져주는 것은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좋아하고 인정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심리가 있으니 말이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부탁의 기술에서 쓰인 인지부조화 이론이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보다 자신이 친절을 베푼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거였다. 사소한 부탁 하나로 정적 관계에서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변하게 된 벤저민 프랭클린의 실화가 사례로 나왔는데, 너무도 그럴 듯했다. 훗날 프랭클린은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적이 당신을 한번 돕게 되면, 나중에는 더욱더 당신을 돕고 싶어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지 서로 코드가 맞지 않거나, 사소한 일로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는데,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상대에게 다가가 정중한 부탁을 하는 거라고. 뜻밖의 부탁을 하는 순간, 정적이 친구가 되는 아름다운 대 화해의 모드가 실제로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때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대화의 비밀이었다.

저자인 심리 대화법 전문가 오수향은예전에는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법, 멋진 한마다로 사람들 시선을 끄는 법 등에 대해 사람들이 조언을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릅니다. ‘팀장님 말투가 너무 기분 나빠요.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까요?’ ‘제가 한 말 때문에 친구가 큰 상처를 받은 거 같습니다." 라는 식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누구나 사회에서, 가정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다 보니 상처를 주기도, 상처를 받기도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말의 내용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같은 말도 상황에 따라,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는 법이니 말이다. 그럴 때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서로가 마음 상하지 않고 왜곡 없이 소통할 수 있을까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할 말 못해서, 또는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끙끙 속앓이를 해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43가지 대화법만으로도 당장의 대화가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고 일의 결과가 달라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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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 뻔한 세상
엘란 마스타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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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여행을 갈 수 있다거나, 쇼핑몰로 곧바로 텔레포트를 할 수 있다거나, 연예인의 자궁에서 커가는 태아를 지켜볼 수 있다거나, 혈장액 속에서 신체를 재생하는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술이 실제로 가능한 세상에서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아낼 수는 없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우리 인간들은 여전히 똑같았다. 우리의 삶이 완전히 실패해 버렸을 때 어떻게 할지 몰라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건 똑같았다.   P.46~47

사람들이 흔히들 미래라는 것을 상상할 때 등장하는 것들. 하늘을 나는 자동차, 로봇 하녀, 음식 캡슐, 순간이동 장치, 제트팩, 호버보드, 무빙워크, 레이저건, 우주여행, 달 기지.. 그런 것들이 전부 다 이루어진 세계. 2016,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토피아 사회가 이 작품의 배경이다. 이들이 놀라움으로 가득찬 첨단 기술 유토피아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1965년 위대한 과학자 라이오넬 구트라이더가 발명한 무한 에너지 덕분이었다. 라이오넬 구트라이더는 그로 인해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할 뿐만 아니라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1년 전, 혁명적인 방법으로 무한하고 강력하면서도 완벽하게 친환경적인 에너지 생산 기술을 발명해, 그야말로 '미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주인공 톰 배런은 천재 과학자인 아버지와 달리 지극히 평범했다. 빅터 배런 박사는 시간 여행 분야에 관한 독보적인 인물로, 곧 엄청난 시간 여행 프로젝트 실험이 계획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헌신적이었던 어머니가 네 달 전에 뜻밖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녀가 남긴 유언과 몇몇 상황들로 인해 톰은 아버지의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뛰어난 인재들만 모여 있는 시간 여행 프로젝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가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프로젝트의 팀장인 페넬로페의 대역으로 각종 훈련을 받으면서 그녀를 몰래 짝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야심만만했던 시간 여행 프로젝트가 무기한 연기되고, 페넬로페가 자살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게 된다. 그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고, 홧김에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1965년 구트라이더 엔진의 초연 현장으로 무작정 향한다. 그리고  그가 잘못한 사소한 행동 하나로 인해 미래의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된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무엇이 바뀌게 된 것일까.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역사가 바뀌었으니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역사를 바꿔놓았는데도 나는 태어났고 지금 멀쩡히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시간의 닻인 것이다. 내가 역사의 흐름을 일그러뜨렸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없어도 되는 역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여기에 내가 존재하도록 만들어준 사건들은 그대로 일어나 평행 세계에서 내가 있던 시간에 나를 갖다 놓은 것이다.  P.202

이 작품은 영화 '왓 이프'의 시나리오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던 시나리오 작가 엘란 마스타이의 첫 번째 소설로, 이미 영화화가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였고, 페이지 터너로서의 뛰어난 몰입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실 SF소설에서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는 그다지 신선하지도, 매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에서 다루었던 평범한 소재 임에도 충분히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굉장히 자세하지만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지는 과학적인 정보들도 흥미로웠고, 시간 여행과 평행 세계를 이어주는 플롯 자체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이야기 자체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사용할 때 대부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가서 뭔가를 변화시켰을 때 그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그러니까 살면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과 달라져버린 미래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 인해 완벽하게 바뀌어진 미래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매우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원래 주인공이 살던 세계가 유토피아라면, 그가 시간 여행을 통해 달라지게 만든 미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였던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시선에서 판단하자면 말이다. 작가가 애초에 상상 속에 존재할 것 같은 미래의 시대를, 아주 먼 시점이 아니라 2016년으로 설정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2016년 현재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세계이지만, 이미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토피아 사회에서 살던 주인공에게는 지금의 세계가 디스토피아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첫 페이지를 여는 주인공의 독백이 '나는 우리가 살 뻔한 세상에서 왔다'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비슷한 소재를 가진 책들을 여러 권 읽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평범한 설정으로 시작했지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점점 더 어디로 튈 지 모르겠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고, '미래'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점도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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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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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에 비하면 스테이크는 갱단 같다. 언뜻 보기에도 악역 느낌이다.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듯하다. 그 속에 큰 금반지도 끼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돈가스는 새하얀 목장갑이 어울릴 만한 좋은 사람 같다.

요전 날, 밤새 일하기에 앞서 주저 없이 돈가스 정식으로 배를 채웠다. 배를 채우다. 이 얼마나 남자다운 말인가. 가게는 이미 정해져 있다. 카운터 자리로만 된 돈가스 정식집이다. 드르륵(격렬하게 미닫이를 여는 소리).  P.30

하루 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쳤던 마음과 온갖 스트레스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기분도 드는 순간이란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달콤한 무스 케잌과 바삭한 크루아상, 뜨끈한 갈비탕과 칼칼한 김치찌개, 시원한 생맥주에 바삭한 군만두.. 뭐라도 좋을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침샘이 고이는 그 음식들을 한 움큼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어. 괜찮아. 라는 마음이 들테니 말이다. 그렇게 음식은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낙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고독한 미식가> <낮의 목욕탕과 술> 등으로 먹는 행위의 즐거움을 재미있게 알려 주었던 구스마 마사유키의 본격 '식욕 자극 에세이'이다. 특별한 음식들이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이라 더욱 와닿고, 아는 맛이라 더 군침이 돌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고기구이, 라면, 돈가스, 샌드위치, 카레라이스, 오니기리, 단팥빵, 튀김덮밥, 메밀국수 등등... 26가지 일상의 음식들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스스로를 매일 먹는 생각만 하는식탐 아재라고 소개할 정도라서, 그가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서 묻어나는 순수한 즐거움이 글에도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식재료가 가장 맛있는 계절.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자신만의 순서, 잘 어울리는 음식 조합, 음식에 얽힌 추억까지... 애정 넘치는 그의 입담에 읽는 내내 군침이 돌고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저자 역시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배가 고파 온다며, 그런 창피스러운 자신의 식탐을 숨김없이 글로 담았다고 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나왔다. , 먹어 보자. 뭐부터 먹을까. 나는 대체로 오징어 먼저. 앞니로 충분히 잘리는 이 부드러움. 통통하니 두껍다. 그리고 밥. 그렇지. 폭신폭신하다. , 맛있다. 다음 보리멸. 이게 또 가볍고 담백하니 기가 막힌다. 매콤한 양념과 튀김옷이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새우. , 이건 탱탱한 게 좋은 새우군. 맛있네. 그래도 딱히 특별 대접하지 않는다. 나는 평등하게 먹어 나간다. 절임채소로 입가심 그리고 된장국 한 모금. 여기서 처음으로 한숨을 돌린다. 무의식중에 앞으로 고꾸라져 있던 허리를 편다. , 행복하다.  P.181

고기구이에는 반드시 흰 쌀밥과 함께 여야 하고, 고깃집에서는 맥주를 무조건 병으로 주문해야 한다. 생맥주잔처럼 무거운 걸 들고는 움직임이 둔해서 고기를 대할 수 없다나. 라면을 먹을 때는 테이블 자리보다는 카운터 자리가 좋고, 돈가스를 맛있게 먹으려면 돈가스 양의 최소 다섯 배 이상의 양배추가 필요하다고 한다. 양배추를 인색하게 아끼는 돈가스집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카레라이스는 본격적으로 먹기 전 후각으로 매콤한 감칠맛을 먼저 느껴보면 좋고, 식은 카레와 뜨거운 밥의 조합은 야식으로도 그만이다. 오니기리는 역시 바깥에서 먹어야 제맛인데, 청명하게 펼쳐진 풍경이 보이는 장소를 찾아 먹으면 더할 나위 없단다. 가끔 나 자신만을 위한 호사를 누리고 싶은 날에는, 무리해서 비싼 장어찬합을 뻔뻔스럽게 먹으러 간다고. 거기다 그런 무리함을 비웃지 않고 정중히 받아들여 주는 것이 장어찬합이라는 음식의 용기가 지닌 도량이라며, 그래서 고급 레스토랑에서와는 달리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굉장히 진지한데 유머러스하고, 마치 음식이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상상의 여지를 주는 풍경이 그려져 마음을 쏙 빼앗기게 만드는 책이다. 솔직하다 못해 거침없는 식탐에 대한 고백이 너무도 절절해서 공감, 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음식에 대한 글 위주로 풀어낸 에세이 형식이지만, 곳곳에 해당 음식의 일러스트가 있고, 각 장마다 네 컷 만화가 수록되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정신 없이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고 난 후 한숨 돌리며 마시는 커피 한 잔, 직장인들에게는 이런 저런 스트레스를 털어낼 수 있는 유일한 낙인 점심, 그리고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저녁까지.. 우리의 일상은 매 순간 먹고, 마시는 행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를 내일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위로와 응원이기도 하고 말이다. 저자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일이야말로 일상 속최고의 힐링이라고 이야기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식탐 만세!!' 다른 걸 조금 양보하고,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먹는 즐거움은 절대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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