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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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외부인은 경비원을 거쳐야만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거든요. 분명 별일 아닐 거예요.” 마치 이 세상에 나쁜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투였다. 케이트의 아빠가 말했을 법한, 어리석지만 선의에서 비롯된 단언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 누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은 늘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늘 최악의 결론을 도출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 결론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23

런던에 사는 케이트는 보스톤에 사는 육촌 코빈과 6개월간 집을 바꿔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는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공황 상태에 빠진다. 누군가와 서로 집을 바꿔서 지내기로 한 계획 자체가 갑자기 최악의 실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그녀가 택시 안에서 공황 발작과 공포를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집착이 심했던 전남자친구 조지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이으로 인해 불안 장애와 신경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지는 케이트를 찾아와 그녀를 벽장에 가두고는 자살했다. 그녀는 벽장 속에서 이틀이나 지나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고, 그 후로 그녀의 마음은 좁은 벽장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런 케이트였기에 미국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 삶을 살 수 있는 이번 기회는 굉장한 도전이기도 했다. 과연 그녀는 이 낯선 도시에서 신경증과 불안 장애 증상을 극복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원제는 'Her Every Fear'로 국내 번역본 제목인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와는 어떻게 보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의미로 읽힌다. 가끔 이렇게 원제와 전혀 상관 없는 제목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생뚱 맞은 오역인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처럼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반대로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제목은 실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내용 상의 설정인데다 문장 그 자체로도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작품의 타이틀로 전혀 손색이 없거니와, 사실 다 읽고 나면 이 제목이 완벽한 맥거핀의 일종이라는 점 때문에 더 멋지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바로 이 제목 때문에 범인을 유추하는데 커다란 함정이 만들어지고, 초반 스토리의 흐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실제로 꽤 중요한 단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굉장히 센스 있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사귀었고, 둘만의 세상에서 안전했다. 어쨌든 케이트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평생 언제든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살았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데려간 상담소에서 심리치료사가 가장 무서운 것을 세 가지만 말해보라고 하자 케이트는 울음을 터뜨렸다. 낯선 사람, 거미, 가스 유출, 학교 일진, 보이지 않는 세균, 험한 날씨 중에서 세 개만 고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두의 예상대로 불안 장애 진단을 받았고, 또한 공상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진단도 받았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했다.    p.112~113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항상 생각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로맨틱 홀리데이>라는 작품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주는 낯설지만 아득하고 설레이는 공간에 환상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은 L.A에서 잘 나가는 영화예고편 제작회사 사장인 아만다와 영국 전원의 예쁜 오두막집에 살면서 웨딩 칼럼을 연재하는 아이리스. 6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두 여자가 홈 익스체인지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2주의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서로의 집을 바꿔 생활하기로 한다. L.A에 있는 화려하고 최신식의 커다란 집과 영국에 있는 벽난로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한 오두막집이 낯선 공간이라는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새로운 공간이라는 설레이는 느낌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피터 스완슨의 신작에서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나라에 있는 두 사람이 집을 교환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작품에서는 낯선 공간이 주는 무서움과 불편함을 극대화시켜 색다른 공포를 자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오싹함을 안겨 주고 있다.

피터 스완슨은 데뷔작인 <아낌없이 뺏는 사랑>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비밀 가득한 악녀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 같은 선택을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까라는 걸 보여 줬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어차피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라는 살인의 당위성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그려내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었다. 사랑의 다른 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답게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그 동안 옳다고 믿어 왔던 통념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했었다. 이번 작품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에서는 여성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집착, 언어폭력,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 등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그려 내며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 본다. 구성과 플롯, 반전 등 모든 면에서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당장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생하고,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피터 스완슨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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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너를 찾아서
케리 론스데일 지음, 박산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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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혼식 날, 내 약혼자 제임스는 관에 담겨 교회에 도착했다.

나는 오랫동안 제임스가 내게만 짓는 미소를 머금은 채 제단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꿈을 꿔왔다.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매번 설레서 아찔해지곤 했다. 하지만 내 단짝 친구이자 첫사랑이며 유일한 사랑인 그를 향해 걸어가는 대신 나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P.11

이야기는 약혼자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원래 그 날은 에이미와 제임스의 결혼식 날이었다. 결혼식 하객으로 축하를 해주었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젊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그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 결혼식이 너의 장례식으로 바뀐 그 날, 나이 지긋한 어떤 여자가 다가와 에이미에게 말을 건넨다.

"난 제임스 때문에 왔어요. 그의 사고에 대한 정보가 있어요."

 

제임스는 멕시코로 나흘 정도 걸리는 짧은 출장을 갔었다. 고객 접대용 낚시를 하고 저녁을 먹으며 계약에 대한 협상을 한 뒤 돌아올 거라던 그는 몇 주 동안 실종 상태로 있었고, 그러다 그의 시체가 해변으로 밀려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미 관 속에 들어간 그의 장례를 치르고, 검은 영구차가 떠나고 있는데, 웬 낯선 여자가 등장해 제임스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알 수 없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만약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의 얼굴에서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지구 끝까지 찾아보겠죠."   p.203

에이미와 제임스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오며, 단짝 친구에서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한 사이였다. 에이미에게 제임스는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고, 그가 사라진 지금 마치 세상이 끝나 버린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게다가 부모님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물려 받아 인수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재정적인 이유로 부모님은 레스토랑을 처분해 버리고 만다. 보통은 의문의 여자가 등장해 죽은 약혼자가 사실은 죽지 않았다고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러 가는 과정이 주요 플롯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충격적인 첫 장면 이후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제임스 없이,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하는 에이미의 삶에 주목한다. 에이미는 빚더미에 오른 부모님의 레스토랑 대신 자신만의 카페를 개업하고,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그녀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사라진, 혹은 죽은 연인의 행방을 뒤쫓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야 진행되는 스토리이다.

덕분에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는 로맨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임스와 에이미가 어린 시절부터 사랑에 빠지고 함께 했던 순간들이 계속 교차 진행되고, 자신만의 카페를 개업해서 일을 진행시키고, 사진작가 이언을 만나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현재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감정의 결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특히나 반전 이후, 에이미가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은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에이미와 제임스, 그리고 에이미와 이언이 보여주는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들은 잔잔하면서도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놀라우면서도 뭉클하고, 담담하면서도 심금을 울린다. 올 가을, 가슴 한 켠이 빈 듯한 느낌이 들 거나 옆구리가 허전해서 외로울 때, 이들의 지독한 사랑의 여정을 만나 보자. 오글거리지 않는 러브 스토리, 뭉클한 드라마가 있는 미스터리로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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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의 레퀴엠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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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사람을 죽여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전쟁, 사형, 소년 범죄, 형법 제39, 그리고 긴급 피난이다. 미코시바 자신도 소년법의 보호를 받아 형을 면했으니 그 점에서는 도치노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비단 법률에 의한 처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법률에 의해 처벌받지 않은 자도 결국 다른 무언가로 판가름을 받아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미코시바는 범죄자의 변호를 맡는 형편이 되었고, 도치노는 전직 소년원 교관에게 살해되는 처지가 됐다. 둘 다 벌을 받은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쪽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지는 속죄, 다른 한쪽은 한 순간에 끝나 버린 속죄.  p.155

<속죄의 소나타>,<추억의 야상곡>에 이어지는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그 세 번째 작품이다.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 등장할 때부터 그야말로 파격적인 캐릭터였다. 시리즈 주인공이 26년 전 엽기적인 살인으로 시체 배달부라고 불리던 열네 살 소년 살인범이었으니 말이다. 미코시바 레이지는 의료 소년원에 수감되고 겨우 5년 만에 가퇴소했고, 3년 뒤 스물두 살 때 사법고시를 한 번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 자격에 인격이란 항목도 없거니와, 소년원 수감 당시 개명을 했으니 그 동안 그의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잘 나가는 변호사로서 명성을 쌓고 있었다. 물론 그 명성이라는 것이 돈 많고 질 낮은 범법자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호해 주는 대가로 거액의 보상을 요구하는 악질 변호사로 유명한 거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미코시바 레이지는 전작에서 과거가 밝혀져시체 배달부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의 과거를 알게 된 모범적인 기업들이 연이어 고문 계약을 해지하는 바람에, 임대료를 내기 어려워 조금 저렴한 곳으로 사무소도 이전을 해야 했다. 이제 그의 과거 범죄 이력이 만천하에 드러난 덕분에 멀쩡한 의뢰인은 하나 둘 떨어져 나갔고, 지금은 큰손 고객이라고 하면 광역 폭력단 고류회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코시바는 신문에서 의료소년원 시절 교관이었던 이나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나미는 미코시바에게 속죄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범죄자에서 변호사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던 은인이었다. 이나미의 평소 인품이나 성격으로 봐서 기사의 내용대로 그가 단지 화가 나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미코시바는 자처해서 이나미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선다.

 

 

“근데 말이지. 내가 생각하기에 범죄에 동기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이 자식을 죽여 버릴까같은 생각은 누구든 한 번쯤은 떠올리지. 하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영혼의 형태가 정해지네.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아도 실제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인 인간은 악인이야. 재판관 앞에서 변명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에게는 할 수 없지. 그래서 도치노를 죽인 난 벌을 받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짐승으로 남을 거야."  p.399

이나미는 자신을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코시바는 이나미가 저지른 사건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고, 살해된 피해자가 10년 전 선박 사고 당시 여성에게서 구명조끼를 빼앗아 살아남은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그는 형법 37조의 '긴급 피난'이라는 항목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긴급 피난에 의해심판 받지 않는 죄인인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나미는 오래 전 법무 교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원생들에게 너희가 범한 죄는 반드시 속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며, 자신 또한 벌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처벌받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변호사는 의뢰인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일이다. 그야말로 악덕 변호사가 최악의 의뢰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시리즈가 이어지는 내내 최강이지만 최악의 변호사인,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한 번 악인은 영원히 악인인가,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가. 이나미는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미코시바에게속죄의 의미를 알려준 이나미는 살인혐의로 기소되는 걸까? 법으로 심판 받지 않은 죄는 법 이외의 것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정의와 악, 죄와 벌, 그리고 속죄라는 것의 의미에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전쟁, 형법 제39, 소년 범죄, 긴급 피난, 사형 등.. 살인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에 주목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1편과 2편에서 소년 범죄를, 3편에서 긴급 피난에 대해 다루었으니, 이어지는 다음 시리즈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탄탄한 구성과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빠른 전개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작가이다. 48세의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해서, 그 후 7년간 이야기를 28편이나 써내는 왕성한 집필 속도를 보자면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오르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 만큼이나 믿고 보는 작가가 된 나카야마 시치리의 모든 작품들이 국내에 출간되기를 고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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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읽는 시간 - 죽음 안의 삶을 향한 과학적 시선
빈센트 디 마이오 외 지음, 윤정숙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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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경찰과 강도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쉽게 오해하고, 두려워하며, 증오에 빠지고, 자신의 이익에 흥분하며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일을 찾는 모순된 인간일 뿐이다. 세상은 지저분한 곳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의 일부로서 때로는 잘못된 이유로 옳은 일을 하기도 한다.

또는 옳은 이유로 나쁜 일을 하거나.   p.134

사람들은 대개 죽은 사람들의 사연에 관심이 많다. 그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어떤 동기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죽음이 찾아 오기 전 그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법의학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많다. 법의학자들을 허구적으로 그린 방송이나 영화, 소설 등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그런 관심은 더욱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법의학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들이 어떤 끔찍한 냄새와 비극 속에서 매일을 보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책에서는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실제 범죄사건에서 벌어지는 매우 현실적이고 놀라운 법의학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법의학자가 하는 일은 누군가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란 질병이나 부상을 의미하고, 죽음의 방식이란 자연사, 사고사, 자살, 타살 등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끈 네 가지 일반적인 방법을 일컫는다. 문제는 다섯 번째 방식이다. 바로 '의문사'. 그리고 법의학자들의 결정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교도소에 보낼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편견 없이 사실에 기초한 과학적 결론으로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무죄를 밝혀낼 수도, 혹은 용의자를 드러내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들은 5,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돈, 섹스, 권력에 움직인다. 어떤 사람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사악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선하기만 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물 위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며 바다로 가다가 선과도 마주치고 악과도 마주힌다.

난 괴물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놀랍다. 그들은 그저 칼이 잘 드는지 보고 싶어서 자신들의 목을 베어버릴 사람들이 저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p.185

이 책은 2017 에드거상범죄 실화부문 최종 후보작에 올랐을 만큼, 실제 범죄사건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법의학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저자는 병리학자이자 의학박사로 국제적인 총상 전문가인 빈센트 디 마이오와 베테랑 범죄 작가 론 프랜셀이다. 법의학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환경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법의학자가 된 저자. 그가 수많은 범죄 현장에서 목격하고 느낀 점들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방식은 마치 한 편의 스릴 넘치는 범죄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생생하다. 미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직관적인 법의병리학자라 평가 받는 그가 내부인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법의학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토대로 하기에, 그 어떤 소설보다 더욱 놀랍고 흥미롭기도 하다.

저자는 45년간 법의병리학자로 일하면서 9,000건 이상의 부검을 했고 2 5,000건 이상의 죽음을 조사했으며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의문사에 대해 자문해왔다. 그는 이 책에서 진실이 은폐되는 의문의 죽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법의학자의 수가 여전히 부족한 현실과 그 이유 등 현대 법의학 체계의 문제점도 함께 제기하고 있다. 오랜 과정을 거치고,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그 긴 시간 동안의 어려움과 검시관의 평균 연봉은 나머지 의료 분야에 비해 턱없이 낮고, 불규칙적인 근무시간에, 감정적인 트라우마와 질병에의 위험 등... 의사 면허가 있는 법의병리학자를 매년 많이 배출할 수 없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법의병리학자를 과도하게 미화하고, 첨단 기술을 동원한 과학수사가 모든 범죄를 해결할 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이 책이 멋진 점은 바로 이렇게 고스란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멋지게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범죄사건과 현장, 그리고 부검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리얼한 이야기들이 법의학이 진실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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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 허난설헌 시선집
나태주 옮김, 혜강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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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녀가 살던 시기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체계 안에서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했다. 사대부가의 여인으로서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 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녀의 시를 만나 보았다.

이 책에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애신의 마음을 노래한 허난설헌의 <연밥 따기 노래>도 수록되어 있고,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허난설헌의 작품을 고르고 오늘의 말로 옮긴 아름다운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는 집이 장간리 마을에 있어

장간리 길을 오가며 살았었지요.

꽃가지 꺾어 님에게 묻기도 했었죠.

내가 더 예쁜가요, 꽃이 더 예쁜가요?   -P.32 장간리의 노래. 중에서

허난설헌은 생전에 자신의 시집 한 권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녀가 죽은 지 1년 뒤에 동생 허균이 엮어낸 <난설헌집>에 기초하여 그대로 묶지 않고, 마음의 결을 따라 노래하듯 구성하였다.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한시이지만, 나태주 시인의 소담한 문체로 풀어내어 기존의 허난설헌 시집에 비해 조금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허난설헌의 시들은 조선 명문가 여인네의 시로 보기에는 너무도 자유분방하고 호방하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자식을 잃은 여인의 불행과 통곡을 담고 있기도 하고, 양반의 삶과는 너무도 다른 장사꾼의 삶을 읊기도 한다. 때로는 출정하는 병사들의 기백을 노래하기도 하고, 규방 여인들의 기다림을 그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계절의 냄새까지 나는 듯한 풍경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를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P.155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 중에서

책의 후반부에는 한시 원문이 수록되어 있어 이해를 돕고 있으며, 각각의 시 마다 그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더욱 정취가 있다. 마치 한 폭의 시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은은한 꽃송이들과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은 허난설헌의 시를 더욱 오롯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허난설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고, 어렵게 출산한 아이를 잃고 비통의 나락에 빠지기도 했으며, 그녀 역시 이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자신이 지은 시를 모두 불살라 달라는 유언까지 남기고 말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그녀의 시들을, 오랜 시간이 흘러 여전히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인 것 같다. 조선 여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스며 들어 있는 시들이,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가슴이 저릿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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