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 24시 - 상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암흑 세상의 통로를 걷다 보니 마치 동굴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간간히 어디서인가 흐느낌과 비명이 들려와 흡사 지하 감옥 같기도 했다. 요여능은 장안성의 암흑 세상에 발을 디뎠다는 생각에 극도로 긴장했다. 장안성의 암흑 세상은 피비린내와 탐욕이 가득했다. 이곳은 법도, 도덕과 정의도 통하지 않는, 아수라도처럼 잔혹한 세상이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자는 가장 간악한 인간이리라. 이때문에 관부에서도 이곳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p.142~143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던 당나라의 서울이 바로 '장안'이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도시였다. 작가인 마보융은 장안을 가리켜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매력적인 도시, 고전과 현대적 요소를 두루 갖춘 곳'이라고 말한다. 그는 양한 가능성을 품은 이 도시는 창작자가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무대라고 생각했고, ‘천보 3재 원소절, 장안에 큰불이 있었다는 역사서 속 짧은 기록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고대 국제도시를 배경으로 한 대테러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작품은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동양에는 장안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찬란했던 대도시 장안에서 일어난 하루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상권이 600페이지가 넘고, 하권도 500페이지가 넘으니 말이다.

마보융은 역사서에서 기록된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허구의 인물과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함께 등장시켜 개연성 뛰어난 팩션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인종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그곳에 있었던 다채로운 문화와 여러 모습의 가지각색 인생들을 그려내고 있어서인지, 이렇게나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 불린다고 하던데, 그야말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훌륭한 작품이다. 화제의 드라마 <장안십이시진> 원작 소설이기도 하다는데, 책을 읽는 내내 바로 눈 앞에서 장면들이 보여지는 것처럼 생생한 작품이라 영상화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은 요여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갈등했다.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연히 도리에 어긋난 일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프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을 죽이면 백 명을 살릴 수 있어. 한 명을 죽이겠는가, 백 명을 죽게 내버려둘 텐가?  p.202~203

서역의 위협에 대비해 조직된 특수기관 정안사는 장안을 불바다로 만들려는 돌궐의 테러 계획 정보를 입수한다. 하지만 작은 실수로 늑대 전사들의 적장인 조파연을 놓치게 되고, 정안사의 젊은 수장 이필에게 문서관리를 맡고 있는 서빈이 적임자를 추천한다. 만년현 불량수로 9, 무소불위의 전직 수사관이자 현재는 상관을 살해해 사형수 신세인 장소경이었다. 그가 수색과 체포에 관한 한 장안 최고라는 말에 이필은 장소경을 석방해 파격적으로 그를 기용한다. 천재 관료 이필의 지략과 장안 108방을 훤히 꿰뚫고 있는 장소경의 활약으로 돌궐의 테러를 막고 그 배후 세력을 파헤치는 스토리는 대체 어느 부분이 클라이막스인지 모를 정도로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다. 모종의 암살 집단, 장안사 내부의 첩자, 조정의 반대파와 장안 뒷골목의 세력까지 더해지면서 곧 장안성에 닥칠 재앙에 대한 무시무시한 폭풍이 시작된다. 특히나 대화재를 막을 시간이 앞으로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제한 조건이 주는 압박감이 매 페이지마다 더욱 긴박감 넘치는 스릴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는데, 목적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나 의무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장소경과 곁에서 그를 감시하면서 점차 그에게 설득되어 가는 요여능, 그리고 당 조정 최고의 인재인 이필 등 저마다의 대의와 신념, 야망이 혼란의 도시 장안에서 한데 뒤섞이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호색한, 사형수, 오존염라, 여자를 사지에 몰아넣지 않는 군자,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 능력자, 정의로운 협객.. 이 모두가 겨우 몇 시간 동안 장소경이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와 함께 행동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나 한 작품에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던 캐릭터가 있었나 싶게 장소경은 독특한 인물이다. 과연 이들은 24시간 내에 위기의 장안성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에서 만드는 영국 과자
야스다 마리코 지음, 김수정 옮김 / 윌스타일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느긋한 공기를 이곳으로 옮겨다 줄 것 같은 과자를 만들고 싶습니다. 평소 마시는 차에 수제 비스킷을 곁들이고, 친한 친구가 놀러 오는 오후에는 15분이면 오븐에 넣을 수 있는 레몬 드리즐 케이크를 굽습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는 주말에는 커다란 빅토리아 샌드위치를 구워볼까요?    p.2

이 책은 티타임의 나라 영국, 그 본고장의 레시피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달콤한 케이크, 소박한 스콘, 건강에 좋은 오트밀 쿠키 등 영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다양한 레시피들과 각각의 레시피의 유래와 그에 얽힌 사연도 함께 소개되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하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사랑했던 쇼트브레드는 지금이야 일상 속에서 차와 함께 먹는 디저트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비쌌기 때문에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남편 알버트공을 잃고 실의에 빠진 빅토리아 여왕을 위로해준 빅토리아 샌드위치는 영국 스펀지케이크의 기본이다. 평소 차와 함께 곁들이는 건 물론 생일케이크로도 자주 사용되는, 영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하고 또 중요한 케이크라고 한다.

단순하고 꾸밈없는 담백한 맛의 대명사 스콘! 스콘을 잘 만드는 요령은 바로 '마치 영국 할머니가 된 것처럼 다정한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워낙 레시피가 심플하기 때문에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도 구워진 상태가 달라진다는 마법의 디저트가 아닐 수 없다. 플레인 스콘, 프루트 스콘, 체리 스콘, 애플 라운드 스콘, 치즈 스콘, 마마이트 스콘, 크레송 앤 치즈 스콘, 로즈마리 앤 감자 스콘 등... 아마도 역대 가장 다양한 스콘 레시피가 실려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워낙 스콘을 좋아하는 편이라, 다양한 스콘 레시피들을 보고 있자니, 당장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제과점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균일화된 빵과 과자가 아닌, 영국의 소박한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전해주는 진짜 영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레시피들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레시피들이 복잡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단순하지만 손 맛이 필요한, 같은 레시피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맛이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레시피야말로 빵과 과자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너무도 도전하고 싶은 레시피가 아닐까 싶다.

 

뱀의 꼬임에 빠져 금단의 열매를 먹어버린 이브. 가을이면 가지가 휘도록 매달려 있는 새빨간 사과는 이브가 아니어도, 뱀의 유혹이 없어도 먹고 싶어집니다. 살살 녹는 새콤달콤한 사과를 스펀지케이크 밑에 살짝 숨긴, 그야말로 이브의 금단의 푸딩. 한 번 먹으면 계속 손이 가는 멈출 수 없는 맛입니다.   p.107

영국에는 각 가정마다 비스킷 통이 하나씩은 있다고 한다. 가정의 티타임에는 물론, 학교나 직장에서도 머그컵 옆에는 언제나 비스킷이 있을 정도로 영국인들의 비스킷 사랑은 유명하다. 특히나 영국인들은 적셔 먹기 전문가들로, 홍차에 적셔 먹기는 그들만의 독특한 먹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레시피 중에 '초콜릿 기네스 케이크'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름에서 보이듯이 아릴랜드의 흑맥주 기네스가 레시피에 들어가는 케이크이다. 흑맥주와 코코아의 씁쓸한 맛이 기분 좋게 섞여 맛에 깊이를 더하고, 마치 기네스 거품 같은 크림치즈 프로스팅도 정말 잘 어울리는 케이크라고 한다. '맥주 케이크'라니.. 단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한번 궁금해서 먹어보고 싶어질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이 '친절하고 자상한 레시피북'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쪼록 할머니의 레시피 수첩을 떠올려 달라고. 만드는 과정 사진 같은 건 없지만, 오랜 경험으로 익힌 소중한 요령과 가족들에게 사랑받아온 레시피로 채워진 할머니의 요리수첩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단순한 재료로 간단한 레시피를 통해 만드는 베이킹은 따라 하기도 좋고, 읽기에도 수월했다. 대부분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만들고 있는 기본 배합 그대로이라고 하니, 영국의 티타임과 디저트 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에게 너무도 훌륭한 책이 될 것 같다.

영국의 과자와 빵은 이웃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소박하고 투박한 경우가 많은데, 그 담백한 맛에 담겨 있는 그것을 참 좋아한다. 영국 과자 전문가인 저자 야스다 마리코는 영국에서 과자 교실을 운영하며 주변의 친구, 단골 레스토랑, 소박한 시골 가정집 등에서 영국 본고장의 레시피를 익혔다고 한다. 진짜 영국의 홈메이드 과자를 맛보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베이킹에 도전해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인과 결과의 경제학 - 넘치는 데이터 속에서 진짜 의미를 찾아내는 법
나카무로 마키코.쓰가와 유스케 지음, 윤지나 옮김 / 리더스북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것보다 받는 것이 낫고, 오랜 시간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적당히 보는 것이 나으며, 입학 점수가 낮은 대학보다는 높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상당한 돈과 시간이 든다. 그런데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통설을 믿고 행동했다가 기대했던 효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돈과 시간까지 버리게 된다면?    p.19

 

건강검진을 받으면 장수할 수 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많이 보면 성적은 떨어진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면 연봉이 높다? 대부분 그렇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과관계' '상관관계'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들은 모두 틀린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한다. '두 개의 사실 중 한쪽이 원인이고 다른 한쪽이 결과'인 상태를 '인과관계가 있다'라고 한다. 한편 '두 사실이 서로 관계는 있지만,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지 않은 것'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과 추론의 근본 개념을 철저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완전 초보자를 위한 입문서이기 때문에 경제학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려운 수식 등도 전혀 사용하지 않아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초콜릿 섭취와 노벨상, 건강검진과 장수, 지구온난화와 해적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사실' 인지, '진실'인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실전에서 써먹으면 한층 똑똑해 보이는수 읽는 센스를 알려주고 있다. 꽤 많은 도표들과 경제학적 통계와 여러 데이터의 수치들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어렵지 않다.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에서 우리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고 반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사실만 보고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해 무조건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거나 무턱대고 건강검진을 받는다면 기대했던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당신의 소중한 돈과 시간만 낭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p.47

 

우리는 디지털 환경에서 생성되는 데이터의 규모가 점점 더 방대해지고 생성 주기도 짧아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방대한 양의 데이터, 즉 빅데이터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데이터는 어디에나 있지만, 그것이 가치 있는 데이터가 되려면 그 정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통계학자 발터 크래머는많은 사람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으로 통계를 들먹인다고 말했다. 엄청난 속도로 방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더라도,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남성 의사가 여성 의사보다 뛰어나다? 공부 잘하는 친구와 사귀면 성적이 오를까? 어린이집을 늘리면 여성 취업률이 올라갈까? 명문대를 졸업하면 연봉이 높을까? 저자는 말한다. 보이는 숫자에 속지 마라. 겉으로 드러난 정보에 속지 마라.

 

 

세계은행 출신의 교육경제학자가 알려주는 숫자만으론 읽을 수 없는 경제학의 진실은 빅테이더 시대 최소한의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미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이 빅데이터로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바꾸었고 이제 데이터 분석의 다양한 기법은 비즈니스와 정책 모델에 적극 활용되며 그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 미국 대선 당시 빅데이터가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해내며 판도를 뒤집는 전략으로서 진화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빅데이터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수년이 흘렀어도, 일반인에게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일본 출간 당시 2017 베스트 경제서 1위 및 아마존 재팬 경제경영 1위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큼 대중적인 책이기도 해서 빅데이터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파악해보면 어떨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이를 원했는지조차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저도 모르겠어요." 라고 했다가, 문득 알 것 같았어.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게 더 슬프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갖지 못한 것들은 상상으로만 존재하고, 상상 속에선 모든 게 완벽하니까." 이게 바로 내가 마리아노 도나텔로를 생각할 때 드는 느낌이거든.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루비. 넌 무척 현명하구나."   p.195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성추문을 일으킨 전직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가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엄청난 권력남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해 전 분야로 확산된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 운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자신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당시 클린턴은 르윈스키보다 27살이나 연상이었고,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상사였다. 르윈스키는 마흔 네살이 되어서야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이라는 엄청난 권력 차이의 함의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와 클린턴과의 섹스 스캔들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불렸고, 2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 뒤에 따라다닌다.

개브리엘 제빈의 신작 <비바, 제인>은 여러 모로 르윈스키 스캔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실제 이 작품은 '미투(Me too) 열풍'이 거세게 불던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당시 언론에서는 "르윈스키 다시 쓰기"라며 주목했다. 개브리엘 제빈은 "20대 때는 별생각 없이 르윈스키를 '젊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비난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둘 사이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이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라고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유명 정치인과 젊은 여성 인턴의 불륜이라니 뉴스 거리로 딱 좋은 소재 아닌가. 하지만 그 인턴이 당신의 딸이라면 어떨까. 이야기는 하원 의원과의 스캔들 이후 딸에 대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견뎌야 하는 엄마 레이철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나쁜 결말에 도달하고도 남을 만큼, 형편없는 선택을 이미 잔뜩 해버렸다. 그것을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인데, 당신의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당신은 인간이지 <끝없는 게임>의 등장인물이 아니니까.

이 시리즈의 문제점은, 몇 번쯤 나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엄청나게 지루하다는 점이다. 항상 착하게 살고 언제나 올바른 선택만 하면, 이야기가 무척 짧아진다.    p.360

레이철의 딸 아비바 그로스먼은 하원의원 에런 레빈의 인턴으로 일하던 중에 그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은 아비바가 하원의원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혹했고,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달려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여자라고 수군거렸다. 에런의 아내인 엠베스는 그를 용서했고, 티비 뉴스 인터뷰에서 불화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발표했다. 하원의원의 정치 생명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고 그의 일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바는 롤리타 인턴으로, 르윈스키 따라쟁이로, 난잡함의 다양한 유의어로 낙인찍혔다. 학교 측에서는 그녀에게 휴학을 강권했고, 레이철은 학교 교장 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이후 아비바는 졸업 후에 그 어느 곳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아비바게이트는 다른 사건의 이슈에 묻혔지만, 그녀가 이력서를 내는 곳에서는 여전히 구글 검색만으로 그 과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어느 회사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다. ‘선정적 보도’ ‘관음증적 관심’ ‘신상 털기’ ‘낙인찍기’ ‘모욕 주기’ ‘배척’ ‘보호할 가치가 없는 정조 운운등으로 이어지는 성추문 문제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섯 개의 장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섯 명의 여성 화자들이 풀어 나간다. 딸 아비바를 지키고 싶었던 엄마 레이철, 홀로 딸을 키우며 웨딩플래닝 사업을 하는 제인, 그녀의 여덟 살짜리 조숙한 딸 루비, 하원 의원의 아내로 남편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며 살았던 엠베스, 그리고 한때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아비바. 5명의 여성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스캔들 이후에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스캔들 자체보다는 그 후 여성이 겪어야 하는 편견과 차별에 집중하고 있어 자칫 신파로 흘러가거나,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시종일관 유쾌한 톤으로 유머를 잃지 않는다.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이러한 사건 이후로 다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쉽사리 주지 않는다. 과연 성추문에 휩쓸린 여자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가능할까. 세대와 처지가 다른 다섯 여자, 그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여성에게는 좌절의 상황에서재탄생이 결코 쉽지는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바꿔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당신을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작은 도서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2
다니엘라 자글렌카 테라치니 지음, 홍연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웅진 모두의 그림책 12권은 나만의 미니어처 서재를 만들 수 있는 <나의 작은 도서관>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서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원하는 대로 모두 구입할 수 없어서, 혹은 그 많은 책들을 정리할 공간을 마련할 수 없어서 서재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여기, 그런 이들의 로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 있다.

 

고풍스러운 패턴의 아름다운 상자를 열면 아담한 방이 나타난다. 고운 햇살이 드는 창, 고풍스러운 비취색 벽지, 맨발로 걷고 싶어지는 결 좋은 나뭇바닥으로 꾸며진 그곳은 바로 '작은 도서관'이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내가 직접 만들고 꾸미는 대로 나만의 도서관이 된다.

손끝으로 오리고, 접고, 붙이고, 꾸며 완성될 30권의 작은 책 만들기는 여느 DIY들과는 다르게 너무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다. 가위랑 풀만 있으면 되고, 너무 단순한 방법이라 어른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쉽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만 시간은 꽤 걸린다. 무려 30권이나 되는 책을 일일이 자르고, 접고, 붙여서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만드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

 

30권의 책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샤를 페로의 <빨간 모자>,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 에드워드 리어의 <올빼미와 고양이>, 루이스 캐럴의 <재버워키> 등 명작 동화와 <식물 도감>, <열두 별자리>, <세계지도>, <상상의 동물 사전>, <조류 도감> 등의 흥미로운 정보들이 담겨 있는 책, 그리고 열 권의 나만의 책이다. 

 

<내가 쓴 이기한 이야기>, <작고 소중한 나의 보물들>, <내가 쓴 모험 이야기>, <나의 일주일>, <나만의 무늬 그리기 책>, <우리 가족 앨범> 등 내용이 비어 있어서 직접 이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재미있는 사진을 잘라 붙여서 완성할 수 있는 나만의 책들이 있어 더욱 흥미로운 서재가 완성된다.

완성된 미니어처 책들은 생각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게다가 미니어처라고 해서 내지를 대충 만들지 않고, 각각 표지에 맞는 고급스러운 패턴의 속지와 본문의 내용들 또한 실제로 읽을 수 있는 크기의 글자와 내용에 맞는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세계지도 이미지도 멋졌고,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린 일러스트도 굉장히 멋지다.

 

짜잔. 그렇게 해서 완성된 나만의 작은 도서관이다. 핑크색 상자를 열고 바닥에 세우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도서관이 나타난다. 게다가 대부분의 미니어처들이 만들때는 재미있고, 완성하면 뿌듯하지만, 막상 보관이 애매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보관 방법도 훌륭하다. 독서가 끝나면 상자를 다시 눕혀서 만든 책과 책꽂이를 넣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태 그대로 상자 채로 책처럼 책꽂이에 세워서 보관도 가능하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언제든 펼쳐서 볼 수 있는 나만의 도서관이라는 비밀 공간이 생긴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이,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책을 수집하게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란 얘기다. 나 역시 나날이 늘어나 네 벽을 완전히 둘러 방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책꽂이들의 틈새에서 매일 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은 책들이 자가증식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들이 늘어나고 있어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나의 서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물론 책등의 컬러 별로, 시리즈 별로, 출판사 별로.. 보기 좋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완벽한 서재의 모습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뒤죽박죽 바닥까지 쌓여 있는 책들의 숲이지만 말이다.

 

<나의 작은 도서관>은 책 한 권이 주는 수만 가지의 즐거움을 감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처럼 책을 수집하고, 읽고, 책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만의 비밀 서재를 만들어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추천한다. 내 손으로 직접 책을 짓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이 체험은 읽기의 대상을 넘어 감각의 대상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확장시켜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