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 - 처음과 끝의 계절이 모두 지나도
동그라미(김동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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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오듯 비가 내렸다

가방에 작은 우산 하나 챙겨 다녀야 하는 곳이다. 오늘 비가 내린다면 우산을 꺼내지 않으려 한다. 흠뻑 젖을 때까지 그냥 이대로 비를 맞을 것이다. 가끔은 그렇게 내면을 바깥 세계와 만나게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121

올해는 유독 SNS 작가들의 책이 많이 출간되고, 인기를 끌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인스타그램 몇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누구누구, 혹은 페이스북 몇만 독자들의 뜨거운 공유, 또는 몇만 SNS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 누구 식으로 소개되는 작가의 띠지가 붙어 있는 책들을 숱하게 보아 왔다. 그 중에는 정말 베스트셀러로 오랜 기간 인기를 끌었던 작가들의 책도 있었고, 웬만한 중견 작가도 그 이름값만으로 팔아 치울 수 없는 그러한 판매율을 자랑하는 책도 있었다. 심리학과 관련된 에세이들이 매달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이들 NS 작가들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도 아마 시대적인 흐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개인의 자존감이 낮아지고,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서 위로와 감성의 코드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시대를 지배하는 대중의 욕구, 독자가 원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싶다. SNS를 통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짧은 글의 인기가 높아지게 된 이유도, 이들 작가들의 글들이 깊이 있고, 문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젊고, 감각적이며, 대중의 코드와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성이 충만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딱딱한 종이책을 집어 드는 대신 그들의 몽글몽글한 언어에 기꺼이 손을 내민다. 이번에 만난 책 역시 '70만 팔로워의 새벽을 함께한 작가' 라는 호칭으로 소개되는 SNS스타작가 동그라미의 신작이다.

 

사랑할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할게요

사랑했어요

사랑했나요

 

사랑이 뭔가요?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p.231

사랑과 연애, 이별에 관한 에세이답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부끄러워 꺼내놓지 못했지만 사실 가장 공감 받고 싶었던 사랑의 기쁨, 아픔, 슬픔과 그리움들을 장마다 펼쳐놓는다'는 출판사의 책 소개문구처럼, 그리고 '팔로워의 새벽을 함께' 했다는 호칭처럼 밤에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낮에 읽기에는 어쩐지 오글거리고 글들 투성이니 말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누구나 달라진다. 어떤 작가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 보면 이걸 내가 썼나 싶을 때도 있을 만큼 감성적이라고 말이다. 지나간 사랑이 떠오르는 어느 밤, 추억에 빠져 들고 싶은 멜랑콜리한 그런 밤에 읽기에 딱 좋은 글들이 가득한 책이다. 현재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다면, 혹은 이별의 아픔에 모든 유행가 가사가 내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그럴 때 필요한 책이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랑이 일상이 되기 전의 상황들을 그리고 있다. 사랑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고, 제대로 된 사랑을 아직 해보지 못했다면 배울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사랑을 하고,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는 결혼이라는 단계를 지나 그 사랑이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람이라면.. 사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착하고 따뜻하기만 한 사랑 이야기를 읽기엔, 우리의 삶이 이미 너무 닳고 닳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랜 만에 첫사랑과 순수했던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떠나고 싶은 이들이라면 주저할 것 없다. 이 책이 지나온 사랑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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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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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건 환상일 뿐이라는 게 그의 오랜 철학이었다. 이 세상은 불공평과 차별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다양한 계층으로 나눠진다.

언젠가 반드시 최상층의 인간이 된다, 지배자가 된다…….

그것이 다쿠야의 최종 목표였다.   p.26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에 발표한 초기작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나왔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기작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답게, 3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가독성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공대를 졸업하고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에 다녔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발휘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인공지능에 대한 인한 이슈가 한참 논쟁이 되고 있는 요즘에 읽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이미 30년 전에, 기계화 되어가는 사회를 배경으로 이런 소설을 써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통찰력과 뛰어난 감각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을 하는 다쿠야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성공지향형 인간으로 살아 오고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술에 취해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회사에서 뛰어난 엘리트로 평가 받았고, 최근에는 윗사람도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임원실 직원인 야스코에게 접근해서 전무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 그의 딸인 호시코와 결혼할 기회에 가까워지게 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내연 관계가 된 야스코가 임신 소식을 알리며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게다가 야스코가 관계하던 남자는 다쿠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뜻밖의 호출을 받게 된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세 명, 그들은 야스코의 임신으로 발목을 잡힐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녀를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겁을 먹고, 질투나 할 뿐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대체로 인간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 뿐이다. 지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일이라면 로봇이 훨씬 우수하다.

게다가 저 녀셕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아...... 늘어선 로봇을 등지고 다쿠야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p.165

이들이 모의한 살인 방법은 시체를 릴레이 하듯 운반하자는 거였다. 공범이 세 명이기 때문에 '릴레이'라는 독특한 트릭을 고안해낸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야스코는 오사카에서 죽이지만, 시체가 발견되는 곳은 약 5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가 된다. 실행 당일, A는 오사카, B는 나고야, C는 도쿄에 있고, 우선 A가 야스코를 죽이고는 시체를 차에 싣고 나고야로 향하면, B A가 두고 간 차를 타고 미리 정해둔 장소로 간다. 그곳에는 C가 와서 기다리고 있고, 차에 시체를 옮긴 후 C는 도쿄로 향하고, B는 나고야로 돌아온다. A, B, C가 공모했다는 사실을 경찰이 모른다면,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알리바이가 구축되는 것이다. 카드 뽑기를 통해서 A, B, C 역할을 정하고 살인 릴레이 주자 두 번째로 다쿠야가 시체를 전달받아 이동을 하는데, 놀랍게도 전달받은 시체는 야스코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도서형 추리소설(트릭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고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서술 방식)의 수작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시체를 바통 삼아 릴레이를 한다는 설정도 기발하고 트릭과 미스터리 또한 정통 추리물로서의 탄탄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었다. 유독 과학을 소재로 한 추리 소설을 많이 써온 히가시노 게이고이기에, 이번에 만난 초기작이 그의 미스터리 세계를 이루는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 남자들을 수단화하는 여성 캐릭터나, 인간보다 로봇을 더 신뢰하며 주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여성 캐릭터 역시 이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러 작품에서 더 발전되고, 변주된 형태로 등장하게 되니 말이다. 그의 최신 작품들만큼이나 뛰어난 트릭과 흥미로운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이번 기회게 꼭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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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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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오셀로와 결혼했다가 파우스트에게 사랑도 받았다가 파리스에게 납치도 당했어요. 어때요? 이쯤이면 제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운 좋은 여자 같지 않아요?"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며 우리 마을의 여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죠." 그녀가 말했다.

"그들 대부분은 그런 흥분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 중에서

블랙 유머와 풍자의 대가인 마크 트웨인의 계승자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반전 작가인 커트 보니것의 단편집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의 장편 소설 <5도살장>이 나오기 한해 전인 1968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는 장편소설에 앞서 초창기 수많은 단편소설들을 집필했고, 그 작품들을 잡지와 출판사에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 작품집에는 당시 보니것이 「코스모폴리탄」, 「플레이보이」 등 현재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대중 잡지에 팔았던 2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2081, 모든 사람이 마침내 평등해졌다.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힘이 세거나 빠르지도 않았다. 이 모든 평등은 '평등을 위한 미국 핸디캡 부여 사령부' 요원들이 부단히 경계한 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능이 평균을 훨씬 웃도는 사람일 경우, 높은 지능을 평균으로 낮추기 위해 정신적 핸디캡을 부여하는 작은 무선 수신기를 귀에 끼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법이었고, 정부의 발신기에서는 약 20초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보내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두뇌를 불공평하게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외모가 잘생긴 사람은 두껍고 어질어질한 렌즈를 끼운 안경을 쓰거나, 눈썹을 밀고, 코와 치아에도 보기 흉한 것들을 씌우고 다녀야 했다. 뭐 이런 이상한 세상이 다 있냐고?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해리슨 버저론' 속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완전히 평등한 미래 사회나 인간이 노화하지 않고 영생하는 미래 세계 등을 배경으로 한 SF 장르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커트 보니것이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는 유머스럽지만 시니컬하고,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대화시켜 어둡지만, 매우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세계이기도 하다.

"내가 괴짜라는 건 나도 알아." 그가 말했다. "나를 괴짜로 만드는 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지….. 만약 잉크 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미치광이'가 나를 묘사하기에 족할 유일한 표현이네." 그가 내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어 말하며 책상 등을 켰다. 그가 실눈을 떴다. "내가 어느 정도 미쳤는지 자네가 감이 안 잡힐 것 같으니 미리 대략 알 수 있도록 내가 자고 있어야 하지만 뜬눈으로 지새우는 시간에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말해 주겠네. 나는 어쩌면 내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여자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가 예비 신부를 위한 잡지를 읽고 있던 어느 날, 남자가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린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그들은 서로 못 본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그는 수줍게 말한다. 산책 갈래? 결혼식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아 정신없이 바빴던 여자는 거절하지만, 군대에 있어야 했던 남자는 그녀를 위해 탈영했다고 말한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면서 갑작스럽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남자와 화나고 당황스러운 여자는 그렇게 함께 산책길에 나서게 된다.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 고백은 과연 어떻게 진행될까? 커트 보니것이 그려내는 로맨스는 어떨까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읽어 보시길. 이번 작품집에는 '영원으로의 긴 산책'이라는 이야기 외에도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라는 이야기에서도 소품 같은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굉장히 유쾌하고, 발랄하고, 코믹하기도 하고 귀여운 작품이라 함께 실려 있는 다른 작품들과는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SF, 로맨스 장르의 이야기들 외에도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우주 개발 경쟁, 당시의 정치 상황 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도 있고, 전쟁을 직접 체험한 작가답게 반전 작품들도 있고, 보니것이 기술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도 있어 매우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나왔던 당시는 아직 그의 대표작인 '5도살장'이 나오기 1년 전이지만, 이 단편소설들을 통해 그러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반짝거리는 작가로서의 재능을 만나볼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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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8-12-07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정말 상큼해서, 커트 보니것이라는 이름만큼 표지에 눈이 가네요
 
쓰기의 감각 -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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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창작, 작법에 관한 책은 꽤 많이 읽었던 편이기에, 당연이 이 책도 읽었다고 생각했다.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이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글쓰기 수업>의 개정판이라고 해서 책장을 살펴봤는데,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의 종류만 수십 권이 넘게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책들을 읽어놓고서 하필 이 책을 놓치고 안 읽었다는 걸 알고는, 부랴부랴 개정판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대체 이런 책을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수십 권의 관련 책들 중에 단연코 베스트 5로 손꼽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던 것이다. 왜 이 책을 미국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인생 책으로 손꼽는지, 왜 글쓰기의 고전으로 지난 25년간 한결같이 사랑 받아온 건지 저절로 납득이 되는 그런 책이었다.

 

 

그냥 그 모든 것을 종이에 적기만 하라. 당신이 보다 이성적이고 성숙한 상태에서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그 미친 여섯 페이지에 어쩌면 정말 대단한 어던 것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6페이지 맨 마지막 문단의 맥 마지막 줄에 당신 맘에 꼭 드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너무나 아름답거나 멋져서 그제야 무엇을 써야 할지 또는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감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앞의 다섯 페이지 반을 쓰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다.   p.68

대부분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직접 글을 써보기 전에 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종 글쓰기, 작법에 관한 실용서들, 유명 소설가의 작법서는 항상 스테디셀러가 된다. 하지만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 머리로만 글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몸이 움직이면 머리는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쓰기가 육체적인 노동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글쓰기란 너무도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글쓰기란 생각하는 행위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손을 계속 움직여 써 내려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만으로는 아무런 결과물도 생산할 수 없다. 그래서 글쓰기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폴 오스터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쓰기는 자신에게 육체적인 일이라고, 자신은 단어들이 늘 정신이 아니라 육체에서 나온다고 느낀다고 말이다. 물론 그가 초보 작가이던 시절 글쓰기가 그에게 생존의 문제였던 탓도 있겠지만, 실제로 글쓰기가 시간과 체력의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일단 엉덩이를 붙이고, 정해놓은 시간에 적합한 장소에 앉아서, 정해진 분량을 써야 하는 인내가 기본이니까 말이다.

,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너무도 바쁜 일상 속에서 애당초 글 쓸 시간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해야 할 일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앤 라모트의 이 책은 그에 대한 거의 완벽한 해답을 들려 준다.

 

 

이것은 '작가라면 진정 어떤 식으로 진실을 말해야 옳은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설적으로 말해, 작가는 궁극적인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지만 그 길의 모든 단계에서 거짓말을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꾸며 낸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진실의 이름으로 꾸며 낸다면, 그때는 진심을 다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면 된다. 당신은 일부는 경험으로부터, 일부는 약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당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당신은 그들에 관해 정확한 진실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p.108

이 책은 미국에서 창작 워크숍이나 학교 수업에서 교재로 널리 활용되는 글쓰기 고전이자, 1994년 출간된 이래 25년째 변함없이 아마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전 세계 16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앤 라모트는 오랫동안 글쓰기 수업을 진행해왔고, 이 책 속에서 수업 당시 학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와 그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경험으로 터득한 모든 노하우와 함께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실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글 쓰는 삶' 자체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잘 쓰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자신감이야말로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빈 문서를 앞에 두고 좌절과 외로움에 세차게 고개 저을 때에도, 앤 라모트는 아직은 책상을 떠나지 말라고 외친다. 그리하여 매일 일정 시간 책상 앞에 버티고 앉으면 뭐라도 쓰게 마련이고, 쓰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나아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하루 종일 쓴 것이 읽고 보니 엉망진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그러면 어떤가. 그냥 하던 대로 계속 밀어붙이고, 커다란 실수와 시행착오를 범하고, 많은 종이를 다 써버리라는 거다.

이렇게 실제로 글을 쓰는 방법과 스킬, 방법과 태도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앤 라모트만이 말해줄 수 있는 삶을 사랑하는 기술도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작품을 출간하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주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라는 그녀의 말처럼 앤 라모트에게 글쓰기론이란 인생론이기도 하다. 진짜 잘 쓴 소설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첫 페이지 다섯 단어만 읽고도 이미 자신이 지면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점심때가 되었는지 일할 시간이 되었는지 따위는 잊고 몽상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 역시 독자들에게 그러한 경험을 안겨준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던 당신이라도, 이 책을 만난다면 뭐라도 쓰게 될테니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 감성에 맞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는 이미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그러니 이 책의 원제(Bird by Bird)처럼, 새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차근차근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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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 - 18세기 산업혁명에서 20세기 민족분쟁까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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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고전, 종교 등 다양한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리즈 중에서도 세계사의 방대한 지식을 알기 쉽게 정리한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와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는 세계사 분야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20년 가까이 사랑 받아왔다. 이 중 근현대사 부분만을 중점적으로 다룬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의 개정판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변화해온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추가하고 더욱 풍부한 시각 자료들이 추가되어 있다고 하니, 18세기 후반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세계사를 파악하고 싶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이 책은 18세기 산업혁명에서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쳐 20세기 민족분쟁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방대한 근현대사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대별 핵심 키워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역사의 큰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18, 19세기의 1부와 20세기의 2부가 전체 10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목차부터 주요 키워드들로 정리가 되어 있어, 눈에 쏙쏙 들어온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빅토리아 시대, 러시아의 남하정책 등의 키워드 만으로도 흐름이 보이는 구성이라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은 물론,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독자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중간 중간 지도와 도표로 정리되어 있어 지루할 틈도 없고, 각 장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칼럼도 흥미롭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어떻게 되는 건지, 싱가포르의 실험은 성공하는 건지, 중국과 대만의 끝없는 전쟁과 남북한의 통일 문제 등 21세기의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 관심 있게 읽었다.

 

저자는 말한다. '현대사'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그러나 현대의 역사는 미로처럼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2,3세대 혹은 여러 세대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라고 말이다. 그는 현대사를 풀어 가는 키워드를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국민국가 시스템, 도시의 팽창, 철도 등의 다양한 인공적 네트워크의 성장, 기술혁신에 의한 기술 체계의 변화, 그것과 상호관계에 있는 사회 시스템의 변모이다. 19,20세기의 역사는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뒤엉켜 여러 가지 마찰을 낳음으로써 많은 사건과 함께 움직여 왔다. 그러니 우리는 잇따라 전개되어 온 각각의 사건을 연결, 평가하고 현재로 이어지는 변화의 방향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의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과거 세계와 현재의 인간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인 셈이다. 특히 현대사는 가까운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편지이자,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미지의 시대를 파악하기 위한 지도이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문화적으로 더 발전하고, 여러 어려운 과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게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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