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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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행에는 돈을 넣어두는 금고 외에 별도로 대여금고라는 게 있다. 사람들이 가장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일 수도 있고 말이다. 실제로 시중은행에서는 현금, 유가증권 등 귀중품을 맡길 수 있는 대여금고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1억원 이상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거나, 3억원 이상의 금액을 예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경우는 없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대여금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그리고 있다. 20년 전 겨울, 파산 이후 무덤처럼 잠들어버린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 그리고 그 곳에서 수십 년 간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547번 대여금고. 과연 대여금고와 데드키를 둘러싸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는 1978년에 문을 닫았어. 믿기 힘들겠지만,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한밤중에 모든 문에 쇠사슬을 채웠대. 가구, 머그잔, 그림, 서류들을 몽땅 남겨두고. 그것들은 다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20년 동안 아무도 그것들을 몽땅 털어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누군가가 이곳에 정말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누가 텅 빈 건물에 무장경비원을 두겠어? 누군가가 그것들을 훔쳐 갈까 봐 걱정하는 것이 분명해. 이런 것들을 누가 훔쳐가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p.172~173

 

건축공학기술자 아이리스는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입사 당시 최첨단 구조 디자인 프로젝트에 투입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3개월 동안 서류에 표식이나 끄적거리는 단순한 일만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참이다. 그런데 주초에 부서의 장이자 회사의 공동경영자인 휠러 씨가 그녀를 불러 이번에 특이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는데, 그녀가 현장조사를 포함해서 이 일에 적합할 거라는 동료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말한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칸막이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아이리스는 기뻤지만, 사실 그 일은 업무 시간 외에 초과 근무를 하며 현장 임무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장소는 20년 전에 문을 닫은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였다. 당시 시 정부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을 때, 수많은 사업장이 문을 닫고,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이 은행은 거의 20년 동안이나 건물을 폐쇄한 채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20년 전인 1978년 겨울, 십대 소녀 베아트리스는 나이를 속이고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에 면접을 보러 간다. 그녀는 그곳에 비서로 취직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영화배우처럼 굉장한 미인인 맥스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이모와 단둘이 살고 있는 베아트리스는 어느 날 이모에게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화려한 옷이 가득한 옷장과 편지들이 들어 있는 서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비밀에 대해 제대로 알아내기도 전에 이모가 병원으로 실려 간다. 도리스 이모는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였고, 그 뒤로 베아트리스의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아서 거주할 곳이 없어지고, 도리스 이모가 가지고 있었던 대여금고의 열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맥스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도리스 이모는 무슨 이유로 대여금고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맥스는 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져 버린 것일까.

 

“왜 데드키라고 부르는 거죠?” 아이리스가 끝까지 물었다.

“대여금고가 여러 해 동안 열리지 않고 잠겨 있으면, 우린죽었다고 말해요. 대여금고가 죽으면, 그걸 비우고 다른 대여자를 받아야 하죠. 우린 데드키로 죽어버린 대여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지금은 드릴로 틀에 구멍을 뚫고, 틀 전체를 몽땅 갈아치우지만. 짐작하겠지만, 금전적으로는 엄청난 낭비죠."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p.457~458

 

이야기는 1978년 베아트리스가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에 근무하던 시절과, 1998년 아이리스가 폐쇄된 건물인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의 설계도 작성을 하는 20년 뒤의 현재가 교차로 진행된다. 은행 비서 베아트리스와 건축기술공학자 아이리스는 서로 같은 공간에서, 1978년과 1998년이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을 통과하며 데드키를 손에 쥔 채 대여금고에 숨겨진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은행은 시가 파산하고 딱 2주 뒤에 문을 닫았고, 당시 직원들은 자신의 책상을 비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열쇠들은 분실되었고, 대여금고는 버려졌으며, 건물에는 20년 동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아이리스는 군청이 건물의 매수를 고민 중이라 해당 건물의 개보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검사를 하고, 측정을 하고, 도면을 그려야 했다. 건물 경비원인 레이먼을 제외하고 15층짜리 고층건물에는 아이리스 혼자, 종일 일을 해야 했다. 그곳에서 아이리스가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의 공포와 숨겨진 비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게 되면서 생기는 긴장감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있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페이지 내내 아이리스와 베아트리스라는 두 인물을 주축으로 심리전이 펼쳐지는데,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빠져 들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2014년 아마존 브레이크스루 미스터리·스릴러 소설 부문 1, 2017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리더의 선택 소설 부문 1위로 채택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은 D. M. 풀리의 데뷔작이다. 저자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구조공학자로 일하면서 버려진 건물을 조사하는 동안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은 대여금고들로 꽉 찬) 지하의 금고실을 발견했고, 그 중 특별해 보이는 한 금고에 얽힌 미스터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는 지금도 건물의 구조 문제를 조사하고 리모델링을 진행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독특한 이력 때문에 이렇게나 방대하고 묵직한 두께의 놀라운 데뷔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금기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이 수십 년의 시간을 넘나 들며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특별한 울림을 안겨 준다. 한 편의 매끈한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매력 만점의 데뷔작이었다. D.M.풀리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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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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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는 아주 잘 어우러진 형태로 공존한다.

영원히 교차할 일이 없는 철길과도 같다. 우리는 그 양족에 바퀴를 얹고 달리고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가가 무당에게 점을 보거나, 현실을 초월해야 할 종교가가 세금을 안 내려고 머리를 쥐어짠다. 인텔리전트 빌딩을 지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고사를 지낸다. 합리의 레일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냉혈한이 되고, 불합리의 레일로 기울어지면 광신도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선가 탈선하게 되어 있다.   p..88~89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적인 초기작인 <용은 잠들다>가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1992년 초판이 출간된 작품으로, 그녀가 1987 '우리 이웃의 범죄'로 데뷔했으니 초기작인 셈이다. 국내에는 2006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 국내에 그녀의 작품이 서너 편 정도만 소개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 읽었다면 이제 미야베 미유키다!'라는 당시 초판의 띠지에 실린 문구가 지금 보니 재미있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넘은 지금은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이 출간되어 있고, 확실하게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이있는 작가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말이다. 초판에 비해 판형이 약간 작아지면서 페이지 수는 오히려 더 두툼해졌다. 하지만 글자 크기라던가 배열 등은 초판보다 가독성이 훨씬 더 좋아졌다. 심플해진 표지 이미지가 독특한 제목의 느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남다른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초자연 미스터리이지만, 생각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다거나 화려한 스케일의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에 가깝게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고 계시는 건가요?"

이나무라 노리오는 조용히 대답했다.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와 제 아내에게는. 그냥 그것이 거기 있는 겁니다."

무심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나무라 노리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p.235

 

30년 만의 대형 태풍으로 인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 붓듯이 내리던 날 밤이었다. 잡지사 기자인 고사카는 고향집에 왔다가 가족들과 사소한 말다툼으로 화가 나서 도쿄로 돌아가겠다고 나온 참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날씨에 서둘러 돌아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며 후회하던 차에 길 한복판에서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동차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태풍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몰고 비에 흠뻑 젖은 신지라는 고등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가던 중 도로 한 복판에 맨홀 뚜껑이 열려 있고, 활짝 펼쳐진 우산은 도로 옆으로 흔들리며 굴러가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찾는 어른을 만나게 되는데, 정황상 어린 아이가 누군가 열어놓은 맨홀 뚜껑 때문에 실족사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고사카는 기자로서 초등학생의 실종사건을 취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신지가 맨홀 뚜껑을 열어둔 두 명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은 자신은 물건이나 사람에게 남겨진 어떤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초능력자, 사이킥이라고 고백하면서. 접촉하는 것만으로 마치 플로피디스크에서 정보를 읽어 내듯이 기억을 스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생각을 읽어 내고, 물건에 담겨 있는 주인의 감정이나 기억들을 장면들로 읽어내는 능력자가 등장한다고 하면, 사실 더 화려한 플롯과 스케일 큰 액션이 등장해야 할 것 같지만,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 가진 고뇌와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인 신지가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이들을 지켜보고 판단하는 어른인 잡지사 기자 고사카이다. 이야기는 고사카의 시선으로 진행되며, 그가 신지의 능력에 대해 믿을 지 말지 고민하고, 신지와 같은 능력을 지닌 나오야라는 스무살 청년에 의해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백지 협박 편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주요 플롯이다. 아마도 신지와 나오야가 주인공으로 진행되었다면,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선택한 것은 고사카였고, 그래서 초능력자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출판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행복한 탐정'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고사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동료간의 연애감정과 직장 상하 관계, 그리고 등장인물의 과거사까지 소소하게 드라마가 펼쳐지지만, 그 와중에 일곱 통의 협박 편지가 미스터리로 극에 긴장감을 부여 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 플롯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두 초능력 소년이 후반부로 가면서 특별한 연결 고리가 되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가 생각보다 우리 일상에서 꽤나 많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를 믿는 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믿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미스터리의 진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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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19-01-03 12:0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직업적 특성들로 캐릭터를 만드는 거겠죠?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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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제 한 해가 지났다. 겨우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다. 처음 겪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는 점이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살아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에서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 가야 한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인들을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노인이 된 부모가 보인다. 당신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쳐 노인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그리고 지금 나와 더불어 노인이 될 게 분명한 아내와 노인이 된 우리를 기억해줄 딸아이를 본다.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 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 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p.62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올 해의 마지막 날 손홍규의 산문집을 읽었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라니 제목부터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가로등 아래 놓은 골목을 딸아이와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딸은 묻고 아빠는 답하고, 아빠의 대답에 담긴 질문을 아이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한다. 나도 부모의 입장이라서 '아이가 앞으로 새롭게 발견하게 될 언어들이 벌써부터 그리워'라든가, '아직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말에 뭉클해졌다. 매 순간 부모는 그렇게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걸 깨닫고, 몰랐던 걸 배우고,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한 마리 소를 사랑했던 소년이, 성년이 될 무렵 그 소를 떠나 보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비롯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저자의 어린 시절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주며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라고 물었던 아버지의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부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아마 몇 해전의 나였다면 이 장면에서 이해하고 싶었던 인물은 아버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위암으로 투병하던 고모의 부음을 들었을 무렵의 대학 새내기 시절, 애도와 잔치의 분위기가 뒤섞인 장례 풍습이 서먹했던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속 마르케스 대령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그렇게 저자의 삶 구석구석 문학이 함께 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할머니의 죽음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게 무엇인지를 천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했다고 한다. 지난해 나란히 칠순을 맞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들은 더 애틋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저자의 고백은, 세상 모든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온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항상 어른의 모습이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처음부터 나이든 모습이었을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한때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도 한때 우리처럼 사랑에 설레고, 실패에 좌절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온 걸음마다 이야기를 남겨둔' 우리의 부모들에게 더 말을 건네고,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자식이 부모를 기억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방은 감옥의 혼거방만한 크기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다. 그러나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 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마치 평소에는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던 평행우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낯설고 기이하지만 분명 내가 머문 시공간에 겹쳐진 또 다른 세계.    p.139

이 산문집의 많은 부분을 저자의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으며,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페이지 바깥으로 흘러 넘치고 있다. '한국의 작가들은 살롱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 그 아래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 라는 문장에서 읽히는 그 깊은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책을 덮고도 아릿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이들이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에게나 유독 마음이 기우는 문장'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글들이었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밑줄을 긋게 되고, 페이지를 멈추고 돌아보게 되고, 시간을 들여 행간에 숨어 있는 추억을 찾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가족과 관련되어서는 항상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누군가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또 듣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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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항설백물어 - 상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8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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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스케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그 환상의 섬이 아닌 걸까?

뉴도자키의 깎아지른 절벽에 뚫린 석굴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동네 사람들도 모르는 수수께끼의 섬이 아니던가? 깊은 안개에 덮여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보이지 않고 불가사의한 해류가 주위를 지키고 있는, 배도 다가가지 않고 새들도 오가지 않는 외딴섬이 아닌가? 모모스케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다.   P.63~64

다다미 열 장 정도 되는 방에 젊은 사내 네 명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밥상이 나와 있지도 않고 술 그릇이 눈에 띄지도 않는, 격식을 차린 자리 같지는 않지만 스스럼없다는 느낌도 없는, 참으로 희한한 회합이다. 이들 네 명은 한문 서적에 정통한 도쿄 경시청의 순사인 겐노신,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괴짜 요지로, 에도 막부 중신의 아들로 서양에도 다녀온 멋쟁이지만 일하지 않고 빈둥대는 쇼마, 검을 배운 호걸로 마을 도장을 하며 순사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는 소베이다. 이들은 모두 오래된 이야기, 기괴한 전설 등에 관심이 많아 누군가에게 들은 진기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참이었다. 이번에 요지로가 붉은 얼굴 에비스, 가라앉은 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겐노신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쇼마와 소베는 문명개화 시대에 그런 비합리적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부정했다. 이들은 결국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에서 의견을 구해 보기로 하고, 그를 찾아 간다.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이란, 여든하고도 몇 살이 된 학처럼 홀쭉하게 여위고 피부가 흰 늙은이이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상민처럼 보이는, 신분이나 직분이 있어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오래 전 번주의 총애를 받아 번에서 공로금까지 받았다고 한다. 요지로가 그 돈을 매달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연으로 현재까지 교류를 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매우 박식했고, 기묘하기 짝이 없는 체험담을 아주 많이 갖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요지로에게 노인이 들려주는 에도 시절 이야기는 정겹고 편안했으며, 겐노신은 순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진기한 이야기나 괴담 종류를 별나게 좋아했기에 노인이 들려주는 각 지방의 괴이한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생김새나 생업과 어울리지 않는 합리주의자인 소베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노인과 의견을 나누는 것이 즐거웠고, 약간 서양 물이 든 쇼마는 노인과 같이 사는 먼 친척 처자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네 명은 소문에 대한 진위나 기이한 전설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노인을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 노인은 바로 기존 항설백물어 시리즈에서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했던 모모스케이다. 귀신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물로 언젠가 백 가지 괴담을 모아 책으로 엮어낼 생각으로 일본 각지를 여행했던 그가 사십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것이다.

 

"마음속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이 보였다......"

"맞습니다.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본 겁니다." 요지로가 대답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보는지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 이도 저도 다 노인이 이야기한 셋쓰의 괴이한 불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이다.   P.290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항설백물어> 2009, <속 항설백물어> 2011년에 나왔었으니 무려 7년 만에 만나게 되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항성백물어> 시리즈는 일본 에도시대 괴담집에 등장하는 설화를 모티프로 인간의 슬프고도 추한 본성을 다채롭게 해석해낸 작품이다. 이번에 출간된 <후 항설백물어> <항설백물어>, <속 항설백물어>에 이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자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고지 3000여 매 분량의 작품이라 상하권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었다. 상권에는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섬에 얽힌 이야기인 '붉은 가오리', 원인 모를 작은 불소동이 벌어지면서 괴이한 불을 둘러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늘불', 그리고 뱀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집안의 무덤 위 사당에서 독사에 물려 사람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는 '상처 입은 뱀' 세 편이 실려 있다. 제 발로 각 지방을 두루 다니며 기기묘묘한 일을 찾아 다니는 삶을 살았던 모모스케가 지금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서 마음 좋은 할아버지처럼 등장하니 어쩐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가 들려주는 고금의 괴담과 기담, 동서의 진기한 이야기들은 전작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극중 노인은 '무슨 일이든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냥 이상하다, 희한하다 하면서 무서워한다면 괴담이 되겠지만, 이는 이러저러한 이치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고 설명할 수 있으면 더는 괴담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항설백물어> 시리즈에 등장하는,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들은 그저 괴담으로 그치지 않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 더욱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했던 <속 항설백물어>에서 6편의 단편이 각각 한 편으로 완결되다가 각 이야기들이 미묘하게 얽히면서 모든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연결되었던 놀라운 구성을 떠올려보자면, 이번 작품 역시 하권까지 함께 읽어야 이야기가 완결될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드디어 출간된 <후 항설백물어> 하권을 바로 이어서 읽어 보려고 한다. 고전 설화를 재해석한 전혀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나보고 싶다면, 모두들 교고쿠 나츠히코의 특별한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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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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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쓰키 나오토를 다시 만났을 때, 그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가을은 이미 지났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코트를 껴입고 있었다.

"세상에는 비현실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어. 마쓰다하고 함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왠지 구원받는 기분이야. 네게 바람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괴로운 일을 잊을 수 있어. 소설이나 만화를 읽었을 때처럼. 그래서 혼조는 너하고 표류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던 거야."   - '염소자리 친구' 중에서, p.115

마쓰다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 2층 창문으로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있어, 마을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도 마쓰다의 집 2층에는 어째선지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마쓰다의 방 베란다에는 매일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데, 가끔은 바람을 타고 다른 물건들도 떨어지곤 했다. 사진이나 잡지, 헌 옷이나 수건, 외국에서 바람에 날려온 듯한 물건까지 섞여 있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 베란다 격자에 걸려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찢어진 신문 조각이 날아왔고, 날짜는 무려 두 달 후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에 발행된 신문이 온 것이다. 신문에 실린 기사 중에 고1 사망 사건의 참고인으로 신문을 받던 고등학생이 경찰서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얼마 뒤 실제 마쓰다의 반에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동급생 친구가 가해자를 죽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모른 척 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죄책감이 든 마쓰다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된 친구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리고 엿새 후에 벌어지게 될 신문 기사에 실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마쓰다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염소자리 친구'는 학교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오쓰이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판타지를 사용해서 풀어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를 다루고 있는 작품 중에 단연코 돋보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외에도 은둔형 외톨이로 살던 인물이 아버지의 유품인 잉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성격이 바뀌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친구들에게 도둑으로 오인 받아 학교생활이 어려워진 인물이 친구가 없어 반에서 고립되어 있는 소년의 도움을 받게 되는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쓰나미로 인해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인물이 술에 절어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죽은 아들의 장난감을 통해서 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트랜스시버'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어디서 만났던가요?”

나는 물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소녀의 눈은 양쪽의 색이 달랐다. 오른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붉은색. 오드아이.

“벌써 잊었어? 네가 나를 죽였잖아.”

소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 놀라운 고백을 듣고 동요하지 않았다.  - 메리 수 죽이기' 중에서, p.202

이 책은 청춘소설에서 호러, SF, 판타지,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작가가 펼치는 다채롭고 환상적인 단편 모음집이다. 전혀 다른 매력의 일곱 편의 단편으로 만들어진 한 권의 환몽 컬렉션인 셈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 현대 문단의 천재 오쓰이치, 청춘·연애소설로 잘 알려진 나카타 에이이치, 괴담 작가로 유명한 야마시로 아사코, 복면작가 에치젠 마타로, 해설을 맡은 아다치 히로타카까지. 사실 이들 다섯 명의 작가 모두 한 사람, 오쓰이치이다.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방식과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다는 설정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엄연히 다섯 작가들의 이력도 책 표지에 실려 있어 당황스러운 책이었다. 이들 다섯 작가들은 오쓰이치의 다섯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창적인 구성과 방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들은, 사실 전혀 정보 없이 읽는다면 모두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개성과 색채가 뚜렷하다. 한 작가에게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츠이치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섬세함과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퓨어 계열'의 화이트 오쓰이치와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는 '다크 계열'의 어두운 블랙 오쓰이치로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거기에 더해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 이 작품집은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오쓰이치의 오쓰이치에 의한 오쓰이치 팬을 위한 압도적인 소설집'이라는 평가가 제격이라는 느낌이 드는 정말 색다르고 매혹적인 작품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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