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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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우드를 증오해왔지만, 그리 강렬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추수 전에 들이닥치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 들판을 뒤덮는 메뚜기 떼 같은 것이었다.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악몽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연의 일부다. 하지만 이제는 우드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를 모두 해치기 위해 악의로 똘똘 뭉친 채 서서히 접근하는 생물체로, 우리 마을 전체를 굽어보며 집어삼킬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생물체로 느껴졌다.   p.287

전부터 <테메레르> 시리즈가 너무 궁금했었는데, 전체 9권으로 완결이 되었기에 그 분량 때문에 선뜻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해당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으로 쓰인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에 <업루티드> 부터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야 겨우 만나보게 되었다. 나오미 노빅이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폴란드의 민담과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는 이 작품은 2016년 네뷸러상 장편부분 수상작이기도 하다.

마법사이자 불사의 존재이기도 한 드래곤은 십 년에 한 번씩 열 일곱 소녀 한 명을 자신의 탑으로 데려간다. 그는 소녀를 십 년 후에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는데, 그때가 되면 소녀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소녀들을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치게 된 지 백 년이 넘었고, 그 동안 드래곤은 '우드'라는 무시무시한 숲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었다. 올해는 주인공 소녀 아그니에슈카가 열일곱이 되는 해였다. 드래곤의 소녀가 될 후보는 총 열한 명이었지만, 다들 아름답고 영리하고 똑똑한 카시아가 선택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소녀였던 카시아는 자신이 떠나게 되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와 항상 함께 지냈던 아그니에슈카는 자신의 친구를 데려갈 드래곤이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의 날이 왔고, 드래곤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카시아가 아닌 아그니에슈카의 손을 낚아채 허공으로 사라진다. 당사자인 아그니에슈카를 비롯해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난 분별력 따위는 원하지 않아요!"

내가 정적을 깨며 크게 외쳤다.

"분별력이 생기는 게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라면요. 사람들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가 뭐가 있나요?"    p.435

이야기의 배경에는 인간의 탐욕을 빨아들이며 폴니아 왕국을 잠식해온 '우드'라는 숲이 있다. 그 숲에 발을 들인 사람 누구도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상태로 나오지 못했다. 눈이 먼 채로 비명을 지르며 나오거나, 온몸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리고 일그러지거나, 미치광이가 되곤 했다. 그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멀쩡한 얼굴로 걸어 나와 살인을 저지르는, 내면이 뭔가 크게 잘못된 사람들이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우드의 저주를 두려워하며 살아 왔다. 아그니에슈카가 드래곤의 탑으로 간지 얼마 뒤, 카시아가 '우드'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거대한 대벌레처럼 생긴 워커가 종종 숲에서 사람들을 채가곤 했는데, 카시아가 물을 길으러 갔을 때 워커 세 놈이 그녀를 데려가고 만 것이다. 카시아의 엄마 웬사가 아그니에슈카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우드로 끌려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설사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염되지 않은 채 나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을테고 말이다. 하지만 아그니에슈카는 카시아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드래곤 몰래 길을 나서고, 무시무시한 저주의 숲 '우드'로 향한다.

67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작품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페이지가 쓱쓱 넘어가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극 초반, 드래곤이 아그니에슈카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그녀가 점차 마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 과정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몰랐던 천방지축, 왈가닥 소녀가 청소와 요리를 할 수 있는 마법부터, 마을에 퍼진 우드의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마법과 그 과정에서 늑대에게 물려 온몸으로 오염이 퍼진 드래곤의 상처를 치유하고 정화하는 마법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마법에 재능을 타고난 천재 소녀가 아무렇게나 툭툭 위기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간단한 마법만 간신히 턱걸이로 배우고 있는 평범한 소녀가 급박한 상황에서 재기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라 누구라도 손에 땀을 쥐고 소녀의 편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융통성 없고 고집 센 마법사 드래곤을 비롯해서 형이 물려받은 왕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폴니아의 둘째 왕자 마렉, 왕실의 제1마법사가 되기 위해 간신 노릇을 일삼는 마법사 팔콘 등 분명하게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지루할 틈 없이 끌고 나가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매력이다.

 

판타지는 가장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불가능의 문학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현실도피 수단이 바로 판타지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이 작품은 판타지 소설이 줄 수 있는 가장 최상급의 재미를 선사한다. 진부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출하고 싶다면, 소설이란 자고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나오미 노빅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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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 - 전 세계가 열광한 빅히트 아이디어의 비밀
앨런 가넷 지음, 이경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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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케팅 서적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이 책은 창의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대단한 성공을 낳는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침서다. 여러분은 창의적 발상의 역사를 배우고,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 스냅챗과 인스타그램 등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창의적 발상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p.35

 

빅데이터 전문가인 앨런 가넷은 늘 패턴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고, 패턴에 매혹되었으며, 패턴을 찾는 데 열중해왔다고 한다. 현재 그는 낮에는 대형 브랜드 기억들이 그들의 마케팅 데이터 속에 있는 패턴을 찾도록 도와주는 회사를 운영하고, 밤에는 히트한 창작품 속에 숨은 패턴을 찾는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지난 2년 동안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성공한 세계적 거장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고, 많은 이들이 열광한 작품 뒤에는 분명한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그들만의 패턴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히트한 창작품 속에 숨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이 책을 쓰게 된다. 유명 셰프, 베스트셀러 소설가, 최고의 유튜버들을 비롯해 소위 천재 크리에이터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리더들이 보여주는 크리에이티브의 법칙은 어떤 것일까.

폴 매카트니가 꿈속에서 들은 멜로디에서 비롯되어 만들게 된 '예스터데이'의 탄생 비화부터, 창의력에 관한 영감 이론의 화신인 모차르트가 실제 어떤 과정을 거쳐 작곡을 했는지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거쳐, 피카소, 스티브 잡스, J. K. 롤링 등 창의적인 발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스토리에 대한 진짜 현실을 들려 준다. 이들의 뛰어난 업적이 천재들에게 벌어진 마법같은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과학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평범한 그 누구라도 그들이 이룩한 것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창작해내어 엄청난 성공을 맛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천재 크리에이터들만이 가지고 있는 성공의 공식인 '크리에이티브 커브'를 알아보자.

창작의 성공 비결을 파헤치는 연구를 하면서, 나는 분야가 달라도 창작 과정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작가의 기법은 기업가의 수법과 아주 비슷했고, 셰프는 작곡가와 같은 방식으로 계획을 짰다. 그리고 영화 제작자는 벤앤제리스가 새로운 맛을 선보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히트작을 만들었다.

결국 모든 상업적 창작활동은 비슷비슷하다. 특정 시기에 소비자의 취향을 파악하여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이다.   p.292

 

J. K. 롤링은 맨체스터를 출발하여 런던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는데, 열차가 지연되었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갑자기 마법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롤링은 아파트에서 공책에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해리 포터>는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해리 포터>의 성공 사례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영감으로 하룻밤 사이에 대성공을 거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구도를 잡고,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스토리를 계획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5년 동안 창의적 반복 작업에 몰두하여 총 일곱 권의 플롯을 구성한 다음 첫 번째 책을 썼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손에 잡히는 대로 소설을 읽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탐욕스럽게 책을 읽어 왔다. 천재 크리에이터들이 그럿듯, 롤링은 장차 창작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원료를 공급받기 위해 치열할 정도로 소비에 몰두해 왔으며, 연구를 거듭하고, 짜임새 있고 추진력 있게 글을 써나가는 작가였다. 그러니 그녀는 단순히 꿈을 그려가는 작가가 아니라, 엄청나게 노력을 쏟아붓는 야망 있는 기획가였던 것이다.

롤링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몇 해씩 힘들여가며 계획을 짜고, 개요를 만들고, 참고 자료를 모아 끝없는 반복 잡업을 거치고 설계를 해가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크리에이티브 커브 법칙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의 로또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읽고 계획을 짜고 쓰는 데 몇 해를 보낸 그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해리 포터>였다는 것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밝혀내는 패턴과 공식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현실에서 실천해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자기 계발이 필요한 직장인들에게도, 수많은 패턴 속에서 공식을 찾아 내야 하는 마케팅 관련일을 하는 이들에게도, 그 외의 모든 창의성과 상상력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놀랍고도 실용적인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신이 타고난 천재가 아니더라도, 놀랍고 위력적인 영감과 통찰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크리에이티브의 4가지 법칙을 따를 수 있다면, 누구라도 창의적 재능을 터득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평범한 아이디어를 빅히트 아이템으로 바꾸는 과학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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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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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마이제공화국에는 슬픈 노래가 없습니다.

내용이 슬프더라도 웃으면서 부릅니다. 그것이 루프마이제공화국의 정신입니다.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는데 집 안은 축제 분위기. 마치 철 지난 하지 축제처럼 떠들썩합니다. 마리카의 탄생이 그만큼 멋진 일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으로 가득한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p.41

<츠바키 문구점>의 오가와 이토가 라트비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오가와 이토는 라트비아 여행 일기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발트 3국 중 하나인 이 나라를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라트비아는 미지의 나라일텐데, 오가와 이토는 이 나라를 다녀와서 루프마이제공화국이라는 가상의 나라를 만들고 이야기를 써냈다. 이곳 사람들은 음식이나 수공예품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연 신앙도 아직 남아 있으며, 과거의 생활양식을 지켜나가고 문화를 소중히 여긴다. 오가와 이토는 전작들에서도 소소한 이야기로 뭉클한 기적을 보여줬던 작가인지라, 그녀가 왜 라트비아라는 나라에 매혹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잊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아는 작가이니 말이다.

이야기는 마리카가 태어난 어느 추운 겨울 아침에서 시작한다. 마리카가 태어난 날 아침, 할머니는 곧바로 작은 엄지 장갑을 뜨기 시작한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엄지장갑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아름다운 엄지장갑을 끼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털실로 뜬 엄지장갑과 함께 평생을 한다. 태어날 때 받은 엄지장갑이 작아지면, 손 크기에 맞춰 또 다른 엄지장갑을 뜨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도 장갑을 뜨고, 특별한 소망을 담아 장갑을 뜨기도 한다. 이들에게 엄지장갑은 방한용품이고, 축제 때 사람들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특별한 장신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자들이 시집갈 때는 큰 궤짝에 엄지장갑을 가득 채워 혼수로 가져간다고 하고, 여성이 청혼한 남성에게 선물하는 수락의 대답도 역시 장갑이라고. 결혼식용 장갑이 신랑 손에 꼭 맞으면 결혼 생활이 순탄하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니, 이들에게 장갑이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마당 너머로는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그 너머에 치유의 땅이 있습니다. 치유의 땅은 정령들이 사는 신성한 숲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작은 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가면 호수가 나옵니다.

가진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p.101

이 작품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들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마리카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건강한 아이로 성장해, 첫사랑을 만나고,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되어 결혼을 하고, 결혼한 지 5년 만에 국가적 불운을 겪게 된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이 얼음제국에 무력으로 병합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수많은 역경을 겪게 되고, 남편이 강제 연행되면서 그와 생이별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선량한 마음으로 전통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답게, 그들은 힘든 때일수록 더 활짝 웃는다.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고, 슬퍼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니 말이다.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살아간다. 마리카가 일흔 살 되던 해에 기나긴 겨울의 시대가 끝나고,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독립을 되찾아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미소가 잘 어울리는, 경건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박한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힌다. 오가와 이토의 라트비아 여행에 동행한 일러스트레이터 히라사와 마리코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삽화들도 이야기와 잘 어울려서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정을 완성하고 있다. 수제로 만든 흑빵과 소박한 식탁, 숲과 호수에 둘러싸인 곳들의 풍경, 대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엄지장갑과 함께하는 이야기는 추운 겨울 시린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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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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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에 몇 번의 연애가 허락된다 해도 나는 단 한 번으로 끝날 수 있기를 바란다. 방금 전 그 길이 첫 번째 길이었다고 해도 그 다음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런 확고한 생각이 조금 황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길 위에서 어떤 구간이 가장 옳은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사랑도 원래 영감처럼 아슴아슴 떠다녀 붙잡기 힘든 것이다. 영감이 찾아오지 않으면 머릿속은 죽은 바다나 다름없다. 그 바다에 거센 파도가 몰아쳐야만 외로운 세상도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99

 

남자가 혼자 운영하는 카페에 첫 손님으로 뤄이밍이 온다. 어떤 응대도 주문의 절차도 생략된 작은 카페의 침묵 속에서 뤄이밍은 커피를 마시고, 30분도 안 되어 자리에서 일어선다. 뤄이밍은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앓아 누웠고, 곧 옥상으로 올라가 자살을 시도한다. 경찰과 구급대원이 등장했고 그 상황은 조용히 마무리되지만, 이후 동네 전체가 남자에게 한 목소리로 조용한 분노를 게워 낸다. 평소 살갑게 맞이했던 가게 주인의 태도가 냉랭해지고, 노점상들은 지나가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그가 지나가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남자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현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뤄이밍은 대형 은행의 고위 임원으로 남몰래 선행을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남자와 그의 아내 추쯔는 5년 전 뤄이밍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뤄이밍이 취미로 사진을 가르쳤는데, 추쯔가 그에게 사진을 배웠던 것이다.

남자의 아내 추쯔는 그의 곁을 떠났고, 남자는 바닷가 마을의 황량한 변두리에 와서 홀로 카페를 열었다. 뤄이밍의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경찰이 남자를 찾아와 묻는다. 뤄 선생에게 무슨 원한이 있느냐, 복수를 하러 온 거냐, 뤄 선생은 털끝 하나 건들지 마라 등등... 이 장면으로 미루어 추쯔가 사라진 것이 뤄이밍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어딘지 석연치가 않았다. 떠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녀를 원망하는 것 같지는 않고, 뤄이밍을 찾아가 따지고 분노를 퍼부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찾아온 그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의 카페에 낯선 여자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병세가 걱정스러워 직장에 휴가를 내고 고향에 내려온 뤄바이슈, 그녀는 뤄이밍의 딸이었다.

 

매일 벚나무에 소금물을 부을 때 뤄이밍의 머릿속은 또렷했을 것이다. 벚꽃이 그를 병들게 한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시드는 벚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뤄이밍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욕망의 부추김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p.291

 

아내를 잃은 한 남자, 남편을 떠난 뒤 실종된 여자, 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 남자, 그리고 그의 딸, 이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매우 독특하게 전개된다. 뤄이밍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남자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등장한다. 아빠가 왜 자학증에 걸려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인지, 아빠가 무슨 죄라도 지었다면 속 시원히 말해달라고, 침묵은 아빠에 대한 복수처럼 보이니 침묵하지 말라고. 정말 이상한 것은 남자의 태도이다. 다니던 건축 회사를 그만두고 인적도 드문 해변에 작은 카페를 열고 아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지만, 그 이상의 적극적인 행동은 없다. 아내를 빼앗아간 이에 대한 복수의 마음이나 자신을 버린 아내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는 남자와 뤄바이슈의 대화를 통해 전개되고, 아내인 추쯔와 뤄이밍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한다.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인물의 주변을 묘사해 그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왕딩궈의 방식은 매우 낯설지만 이상하게 슬프다. 게다가 나는 이토록 지독한 사랑의 방식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렇게 치열하지 않은 형태로, 담백하게 쓰여진 사랑 이야기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바로 왕딩궈'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추천 때문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판밍이라는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아마도 서정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처연한 슬픔과 행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생의 의미들 때문일 것이다. 왕딩궈는 이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내가 쓰려고 한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극중 아내를 잃은 남자는 '비극이 희열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뤄바이슈에게 말한다. 추쯔와 뤄이밍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한 남자의 모든 걸 바꿔놓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된 사건의 발단이 그렇게나 작은 일이었다는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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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왔구나
무레 요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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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니 이 순간 남편은 엔도다. 한 시간 후에도 그가 엔도일지는 친정엄마밖에 모른다. 마도카는 엄마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제 안심하고 자도 돼. 내일은 센터에 가는 날이잖아."

", 그러네. 잘 자."

이제껏 거쳐온 다양한 나이의 엄마가 마치 다중인격처럼 몸 속에 함께 살고 있다. 그것들이 돌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p. 95

아빠가 돌아가시고, 간단히 유산 분배를 마친 후 엄마가 느닷없이 사라져 버렸다. 며칠 뒤 연락 온 엄마는 다섯 살 연하인 남자와 살기로 했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당시 스물여덟인 사치와 열여덟의 동생 루리는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엄마도 쉰다섯의 어엿한 어른인데다 자식이라고 해서 엄마의 행동을 제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루리는 스물 여섯에 결혼해 쌍둥이 남매를 낳았고, 사치는 독신으로, 각자 십수 년간의 생활을 영위했다. 이제 마흔 다섯이 된 사치에게 갑작스럽게 엄마가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일흔 살이 된 엄마는 치매에 걸린 상태였고, 아마도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의 상태가 이리 되니 귀찮아져서 내쫓은 것처럼 보였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치매 진단을 받은 늙은 엄마 앞에서 독신여성 사치와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 루리는 고민에 빠진다. 누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지부터, 그런 엄마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고 있는 전업주부 마리는 오랜 만에 참석한 동창생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줄곧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다 일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말에 평소 생활을 돌아본다. 하지만 현실은 외출했다 돌아와도 아무도 저녁식사 준비를 도우려 하지 않으니 혼자 부엌에 틀어박혀 식사를 만드는 신세다. 주부에게 요리란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거의 의지로 하는 것이니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패턴의 일상, 그런데 다음날 시아버지가 조금 이상하다. 뭔가를 찾는 듯 집안을 어지르기 시작하더니, 끼니를 먹어놓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밥은 언제 먹냐고 물으시는 거다. 마리는 분명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상의하지만, 현실을 회피하려는 남편의 반응은 무심하기만 하다. 마리는 개호 인정 접수를 하고 도움을 받고 싶지만, 남편은 줄곧 교직에 있었던 아버지가 치매라는 소리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매일 그런 시아버지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마리였으니, 그녀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뒤죽박죽 불가사의하게 이어지는 이모들의 대화. 서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어떤 기적처럼,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선문답처럼 느껴졌다. 이모들의 발상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듣다 보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진지하게 두 사람의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은 점점 커져간다.

",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마쓰미는 큰 소리로 외치며 전속력을 다해 긴 언덕길을 내려갔다.  p.198

무레 요코는 이 책에서 노인성 치매에 걸리거나 신체적, 정서적으로 쇠약해진 부모를 받아들이게 되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여덟 편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젊은 남자와 다시 시작하겠다며 집을 나간 엄마가 치매에 걸린 상태로 돌아오고, 남편은 모른 척하는 시아버지의 치매 증상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며느리가 등장하고, 혼자 사는 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아 함께 살기로 하지만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증상은 점점 심해가고, 34년간 어머니를 모셔온 큰형 부부가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남편도 자녀도 없는 이모들이 치매에 걸려 간병을 하는 조카의 고민도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 가지만, 치매란 것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어느 날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자식들은 당혹스럽기 마련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에게는 부모님이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자식과 내가 챙겨야 할 아내 혹은 남편이 있고, 회사 업무도 있을 테고 그 밖에 각자의 사정에 따라 책임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년의 부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자식 다 키워서 이제 한숨 돌리나 했더니, 앞으론 부모를 돌봐야 해.'라는 극중 대사처럼, 나름대로 사회에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가정에서 내 자식의 부모 역할을 매일같이 충실하게 하며 살아온 우리이다. 그래서 치매를 피하지 못한 노년의 부모들에 대한 문제는 누구에게나 참 어렵다.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혹은 이제 나도 늙었구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란 살면서 여럿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와닿는 건 늙어버린 부모님을 마주하게 될 때가 아닐까 싶다. 우리 아빠 등이 생각보다 넓지 않았구나, 우리 엄마 음식 맛도 이제 예전 같지 않구나.. 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란 생각보다 서글프다. 이제는 아빠, 엄마의 어린 딸이 아니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뭘 해도 전과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부모의 모습에 슬프기도 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여덟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노쇠해지고, 이상행동을 보이는 부모들 앞에서 대처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부모를 집으로 모셔와 보살피거나, 간병 계획을 세우려는 자식도 있고, 자식들 각자 눈치만 보다 결국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으며, 갑작스러운 부모의 이상행동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병원 진단을 미루는 자식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충분히 있을 법한, 나라도 그럴 수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라 제각각의 모습들 속에서 작은 공감과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문제는 당신에게 지금 찾아온 현재일 수도, 아니면 곧 닥쳐올 미래일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치매와 간병이라는 주제를 생각하자면 너무 답답하고, 슬플 것만 같지만, 무레 요코는 무겁지 않게, 유쾌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 나가고 있다. 분명 현실이 그렇게 담백하고, 명쾌하게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따뜻함과 온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제는 나와 내 부모가 함께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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