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에티켓 -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모든 것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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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마다 100여 명이 죽습니다. 시간당 거의 6,500명이 죽습니다. 하루에 15만 명이 죽습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저 사망자들입니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것, 그의 죽음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의 역설입니다. 죽음이란 건 완전히 일상적인 과정이고, 그래서 세상에 그보다 더 보편적인 현상도 없습니다. 탄생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우연히 선택된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p.93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고, 나이를 먹은 만큼 노화한 육체는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나이가 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고,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커다랗게만 보였던 부모님이 늙어가며 작아지고, 나 또한 나이를 먹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란 내가 상상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게다가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거나, 큰 병을 앓게 되면서 생의 유한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면 그때 체감되는 현실이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고 만다.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굉장히 독특한 경험을 안겨준다. 누구나 겪을 죽음의 모든 과정을 간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죽음의 단계들을 매우 면밀하게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사실 죽어간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 직전의 시간과 죽음 뒤의 시간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조금은 편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 그리고 당신이라는 화법으로 독자를 죽음의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점 때문에 더욱 오싹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당신은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라며 호흡이 멈추는 과정을 설명하고, 당신은 관 속에 누워 있다. 라며 장례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설명하는 식이라 감정적으로 너무 몰입하게 되면 울컥하게 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 될 지도 모른다. 죽음이 찾아 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던 1장이 지나고, 마침내 죽음이 찾아온 2장이 되면 각기 다른 네 명의 죽음의 과정이 실화로 전개된다. 양로원 8층에 있는 늙은 할머니의 시신, 도시 변두리 대체의학 병동에 있는 어린 아이의 시신, 건설 현장 철조물 아래에 있는 청년의 시신, 그리고 가족들에 둘러싸인 채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당신의 시신. 할머니는 저녁에 눈을 감았는데 다음 날 아침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어린아이는 더 이상 암을 이겨 내지 못하고 죽었다. 청년은 인생샷을 한 방 찍겠다며 건물 난간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저자는 이들이 겪게 되는 죽음의 단계를 놀라울 정도로 담백하고, 침착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 당신의 관. 유족들은 당신이 죽었다는 가장 강력한 상징들 중 하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관에 들어가는 나사들은 관 뚜껑 내부에 스테이플러로 고정된 플라스틱 봉지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아무도 관 뚜껑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모두의 시선은 비어 있는 관 안으로 쏠립니다. 그 공간이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 벽이 얼마나 좁은지. 그들은 관 안에 시신을 위한 베개를 먼저 집어넣습니다. 건강했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당신이 얼굴을 비비며 이용했던 당신의 낡은 베개. 이제부터 그들은 당신을 자리에 눕힐 거라고 설명합니다.    p.137

저자는 '인간이 죽으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죽음은 언제 시작되고, 어떤 경과로 진행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직접 장례 절차를 겪어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더구나 내가 살아있는 인간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고 난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이란 결코 없다. 내가 죽고 나면 그 뒷처리는 남겨진 이들의 몫이고, 나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죽고 나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사후경직이 일어나는 과정, 알몸 상태로 이루어지는 검안.. 그렇게 한 인간이 죽고 새로운 망자가 탄생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바꿔 버린다. 생전에 무엇을 소유했든, 어떤 인간관계를 맺었든 모든 것이 끝나 버렸고, 어떤 권리나 의무 등도 모두 사라진다. 가족들이 진행하게 되는 장례절차는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다. 그 동안 당신은 죽어서 관 안에 누워 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이 책은 시신이 화장되는 과정에 이르고, 남겨진 이들의 삶까지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당신 없이 1년이 지나간 뒤의 시간을 지나, 4년 혹은 5년 등의 세월이 흐르고 당신은 과거가 되어 버린다.

 

누군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 끝은 바로 죽음의 순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한다.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죽어감과 살아감, 그 사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아무도 실제로 겪어 볼 수 없는 죽음의 과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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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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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오만과 편견>은 인간의 속된 욕망과 생활의 논리(짝짓기와 돈!)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훌륭하게 묘파하면서 재기 발랄한 위트와 유머, 경쾌한 현실 풍자와 비판마저 곁들인 수작이다.... 한데 정작 작가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고,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여자가 아닌 소설가의 삶을 살았다. 그녀가 남긴 적지 않은 편수의 소설은 거의 다 구혼을 다루고 있다. 사실상 첫 소설인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처럼 되고 싶은 희망을 슬쩍 내비친 그녀가 실은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못생긴 편이라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 열심히 공부"한 메리에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p.144~145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로 시작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결혼에 이르는 길'을 지배하는 심리적, 사회적 결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열정과 낭만, 결혼 생활의 생리에는 무관심하다. 그리하여 오만이 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긍심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 소설도 끝이 난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녀가 남긴 적지 않은 편수의 소설들은 거의 다 구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허구의 세계인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 알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한번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읽어본 적은 없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이 책은 작가의 사생활을 엿보며 작품의 배경을 읽고, 직접 작품의 줄거리와 캐릭터를 분석하며 고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이드이다. 저자가 어릴 때부터 좋아한 <적과 흑>, <고리오 영감>, <보바리 부인>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시작으로, 문학 이상의 문학을 보여준 작품들인 <오이디푸스 왕>, <신곡>, <파우스트>, <햄릿>,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과 소설 이상의 소설을 보여준 <프랑켄슈타인>, <모비딕>,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로 '생활과 일상이 담긴 세태 소설인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자기만의 방>, <안나 카레니나>, <위대한 개츠비> 등과 성장, 청춘 소설인 <데미안> <삶의 한가운데>, <어린 왕자>, <설국> 등 다양한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소위 바틀비 선언인 "(그것은) 하기 싫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에는 뭔가 달리 하고 싶은 것이 있음이 은근히 전제된다. 어쩌면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면벽 공상')알 수도 있겠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은 바틀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결코 그가 '까다로운/특별한(particular)' 것은 아니다. 실상 그는 필사된 서류를 검토하는 일이나 우편물 도착 여부를 확인하는 잔심부름은 거절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네 통의 긴 문서 필사)은 꾸준히 한다.    p.285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2009 '문지 문화원 사이'에서 세 학기 동안 세계 문학 읽기 강좌를 했고, 2010년 가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네이버 문학 캐스트에 세계 문학을 소개했다. 2012년부터 2015년 까지는 <책앤>에 글을 연재했고, 2016년부터는 서울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소설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고전을 가르치며 그 분야에 관해서는 전문가인 저자가 마음 먹고 쓴 '고전 길잡이' 인 것이다.

세계 문학 읽기, 그 중에서도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고전 문학 읽기란 사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보통은 페이지가 두툼하고,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는 졸리기만 하고,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과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가득해 어렵고 읽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읽기를 한 번쯤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아마도 이 책이 제대로 된 길잡이를 해줄 것 같다. , 이 책에 수록된 80여 편의 고전을 거의 다 읽었다면, 저자의 가이드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고전들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나 놀라운 통찰력을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목록의 80여 편을 아직 읽지 않았거나, 읽을 예정이라면 당신의 고전 입문에 굉장히 흥미로운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명백하다. '우리는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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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만 헤어져요 - 이혼 변호사 최변 일기
최유나 지음, 김현원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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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일을 하면서 나중에 내 아이가 크면 한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은 생겼다. 바로, "잘 싸우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 안 싸우는 사람은 무조건 참기만 하는 사람이라 오히려 좋지 않다. 싸울 때 상대방에게 현명하게 주장을 전달하고 서로 원하는 것을 잘 조율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뭐든 잘 해낼 사람이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더라도 그걸 나쁜 방식으로 표출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결혼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자주 느낀다. 잘 싸우는 것, 정말 중요하다.    p.117

“수십 년을 맞고 살았는데그 인간이 나보고 몸만 나가라네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아이가 내 친자식이 아니래요.”

"저도 일하느라 힘든데, 집안일까지 전부 제 책임이라뇨!"

“시어머니가 부부 관계까지 간섭하세요.”

“제 와이프랑 제 친구 남편이 바람이 났어요.”

 

이 무슨 막장 드라마 속 이야기냐 싶겠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숱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현직 9년 차 이혼 전문 변호사인 최유나 변호사, 일명 최변의 인스타툰 <메리지 레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녀가 직접 다뤘던 사건, 법정에서 방청했던 사건, 다른 이에게 전해 들은 사건 들을 조금씩 각색해 최대한 실화에 가깝게 재구성한 것들이다. <메리지 레드>는 작년 9월 연재를 시작해 순식간에 16만 팔로워를 모으며 인스타툰 최고의 화제작이었고,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심에서 피고의 유책 사유가 인정되어 이혼이 된 것이어서, 2심에서 이혼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피고는 오랜만에 만난 원고에게 눈물을 흘리며 제발 심사숙고해달라고 매달렸다. 많이 늦었다는 것을 피고도 알고 있었다. 1시간의 조정 끝에 피고도 이혼을 받아들였다. 모두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피고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불러봐도 될까, 여보. 나랑 사느라 고생 많았어."

1심부터 2심까지 오직 이혼만을 외치던 원고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p.268~269

한때 황혼 이혼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뉴스 보도가 많았다. 주로 자식이 성인이 되고 나서 혹은 자녀들을 결혼시킨 뒤에 이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분들에게는 결혼 생활이 어느 순간부터 자식을 키워내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 숙제였던 것이다.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정작 자기 삶은 제대로 돌볼 시간조차 없었던 부모님 세대들의 이야기가 와 닿고, 이해되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최변 역시 변호사가 되고 나서야 요즘 젊은 세대들 대부분은 상상도 못 할 심각한 폭행이나 상습적 외도 등을 모두 자식의 안위를 위해 견디고 덮고 그냥 살아오신 분들이 실제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이혼을 결심하게 된 많은 이들이 갈등의 원인을 "먹고 사느라 바빠서"라고 하는 것도 매우 공감이 되었다. 결혼 전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었지만, 부부가 되고 아이가 생겨 가족이라는 것을 만들고 보니 사랑 같은 감정 따위보다는 오직 서로에 대한 책임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혼 상담을 위해 변호사를 찾는 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한 번쯤 또는 지속적으로 겪는 문제일 것이다.

'둘이 되어 사는 결혼,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되는 이혼, 그 이혼을 돕기도, 막기도 하는 변호사의 이야기는 미혼에게도, 기혼에게도 삶을 헤쳐 나가는 나가는 법을 알려 주고 있다. 다소 자극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결코 웃음을 놓치지 않는 특유의 재치와 귀여운 그림체가 심각한 내용조차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작품이었다. 인스타툰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에피소드 5편과 좀 더 깊은 속마음을 드러낸 에세이 17편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으니, <메리지 레드>의 팬이었다면 단행본으로도 만나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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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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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룰포를 회상하며'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가의 작품이 3백 페이지도 되지 않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처럼 광대하다고 말했다. 과감하게도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놀라운 작품 수를 자랑하는 작가로 자신의 비유를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작품의 광대함과 작품의 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문학계의 오랜 진실을 지적했다. E.M.포스터도 T.S.엘리엇을 이런 식으로 언급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셔우드 앤더슨을, 아이작 싱어는 브루노 슐츠를, 존 업다이크는 보르헤스를 이렇게 언급했다.    p.34

전부터 위화 작가의 산문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궁금했었다. 기존에 에세이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강연을 바탕으로 엮은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 출간되었었고, 이번 작품은 국내 출간되는 네 번째 에세이이다. <허삼관 매혈기>, <인생>, <7> 등 그의 소설들을 흥미롭게 읽어 왔기에 그러한 작품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산문은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문학과 음악을 넘나들며 자신에게 필요한 테크닉을 정신 없이 빨아들였던 청년기 위화를, 오랜 수업시대를 끝내고 이제 막 예술가로서의 자립을 성취한 30대 후반의 위화가 회고하고 있다. 아이작 싱어, 윌리엄 포크너, 루쉰, 카프카, 보르헤스 등 탁월한 작가는 물론, 말러,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 위대한 작곡가까지, 위화 작가가 젊은 시절에 만난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어 흡사 비평집을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너새니얼 호손과 쇼스타코비치는 1804년부터 1864년까지 살았던 미국인과 1906년부터 1975년까지 살았던 러시아인으로, 한 명은 문학 작품을 쓰고 다른 한 명은 음악 작품을 썼다. 완전히 다른 시대에 판이하게 다른 운명을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는 그들 사이에 놓은 한 세기보다 더 멀다. 하지만 내면의 의지를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고집스럽고 빈틈없다. 그런 영혼의 유사성 때문에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때때로 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너새니얼 호손과 쇼스타코비치는 신비한 동일성 덕분에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시간만큼 긴 서술에서 동일한 클라이맥스를 경험했다.    p.287

위화는 '윌리엄 포크너'에 대해서 '타인의 글쓰기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고 말한다. 마치 열여덟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중단편소설을 단숨에 완성한 뒤 옥스퍼드나 멤피스에서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것 같다며, 기교 수준이 아니라 입신의 경지에 이른 서술의 능수능란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 문학이 계승된다는 관점으로 읽어 낸다. 장 폴 사르트르가 카프카를 읽고, 보르헤스가 오스카 와일드를, 알베르 카뮈가 윌리엄 포크너를, 보들레르가 앨런 포를, 유진 오닐이 스트린드베리를, 서머싯 몸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었을 때 역시 문학에서 매우 감동적인 만남의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위화는 이 책의 서문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한꺼번에 연주되는 음표의 활기찬 움직임과 달리, 글자는 한 줄 한 줄 조용하게 배열돼 있어 잠에 빠진 듯 조용하다고. 그런데 독서는 겉으로만 조용해 보이지 사실은 거세게 일렁이는 물결과도 같다'고 말이다. 독자는 누구나 자기만의 경험과 느낌으로 책을 읽기에, 사실 독서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책 속의 상황과 순간, 이야기를 소환하거나 예전에 다른 작품을 읽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위화는 바로 이것이 '독서의 화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풀고 남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이 책에서 자신은 비평가가 아니라 독자 혹은 청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생각할 것이다. 그가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수준은 웬만한 비평가 못지 않게, 날카롭고, 깊이가 있다고. 특히나 후반부에 나오는 음악과 문학의 만남에 이르면, 그야말로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그의 글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을 함께 읽어내는 대목은 정말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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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힘들지? 취직했는데 - 죽을 만큼 원했던 이곳에서 나는 왜 죽을 것 같을까?
원지수 지음 / 인디고(글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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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회사에 간다. 매일 고민을 한다.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질문 하나가 눈꺼풀 위에서, 차창 밖에서, 커피잔 속에서 나를 보며 묻는다.

왜 한때는 분명 죽을 만큼 간절히 원했던 곳에서, 이렇게 죽을 것 같은지.   p.20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공부하고, 착실하게 스펙을 쌓고, 죽도록 준비해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원하던 '직장인'이 되었는데, 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팍팍하기만 한 걸까? 분명 원하는 일을 찾으려 고민했고, 꿈이란 걸 찾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힘든 것일까. 매일 밥 먹듯이 야근하고, 출근하는 길에 벌써 퇴근하고 싶고, 영혼을 어디론가 출장 보낸 채 정신 없이 그저 하루를 살다 보니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죽을 만큼 간절히 원했던 곳에서, 죽을 것처럼 힘든 걸까.

저자는 영업사원 3년을 하다가 정체성의 대혼란 끝에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이직을 했고, 모은 돈을 다 털어 떠났던 늦깍이 유학을 다녀와서도 여전히 직장인으로 10년째 생존 중이다. 이 책에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해봤을 경험, 생각, 고민들이 "이건 내 얘긴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웃픈 에피소드가 되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일찍 일어나, 엄청난 출근길을 뚫고, 엄청나지 않은 일들을 하러 간다' 오늘도 여전히 출근이라는 문 뒤에 이어지는 오늘의 무게가 당신을 짓누르고, 직장에서 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더나다운 직장인이 되고 싶다고 믿는다면 이 책을 통해서 공감하고, 위로 받으며 힘을 좀 내보면 어떨까. 직장인이 되기 위해 성실하게 공부하고 스펙을 쌓은 성실한 노력파로 꽤 괜찮은 직장인이었지만, 딱 죽을 것 같은데도 때려치우지도 못하겠고,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지만 워라밸은 물 건너간 지 오래고, 함께 일하고 있는 상사나 선배를 보면 나도 저렇게 될까 봐 겁난다는 생각이 들었던 저자의 고민들이란 나의 이야기이기도, 그리고 당신의 사정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평범한 우리들을 화나게 하는 이유는 많다.

세상이 팍팍해서, 나란 존재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만의 번뇌'가 뻗쳐서 등등. 쉽게 말하면 못살겠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향한 시선을 뾰족하게 갈고 있는 사이, 우린 스스로를 그 누구도 안아주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안길 수 없는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p.174

최근 한참 뉴스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 중에 모 국회의원의 뇌물수수 혐의와 딸 취업 청탁 등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학벌과 재력 등이 뒷받침 되어도 이렇게 뒷거래를 해야 할만큼 소위 대기업에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니, 소위 아무런 스펙도 없는 평범한 이들의 취업 전쟁이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졸이든 대졸이든 우리는 그렇게 죽을 만큼 간절히 어딘가에 취업하기를 바라고, 그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직장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애쓰며 간 직장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죽을 것처럼 힘든 것일까. 출근하는 길에 벌써 퇴근이 하고 싶고, 이직하고 싶지만 남들 시선이 두렵고,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가 생기기도 하며, 직장 내 인간관계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매일 아침 회사에 갈까 말까 고민하고, 쉬고 싶지만 막상 그만 두면 앞날이 걱정되고,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 버티고, 잦은 야근으로 지쳐 이직과 퇴사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위로해주고, 응원해 준다. 특히나 매 챕터 마다 핸드폰 메모장에 주요 내용을 정리해 두어 현실감 있게 와 닿았던 것 같다. 나도 이럴 때 그런 마음이었는데, 나도 저럴 때 이런 글을 끄적였는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 말이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는,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당신이 사표를 쓰기 전에 써 두어야 할 것, 퇴사한 그 애는 꽃길만 걷고 있을까, '더 좋은 회사'란 있는 걸까,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라는 거로 있어? 등등 저자가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선택하고 후회하며 단단해진 3년의 기록들은 특별하지 않아서 더 공감되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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