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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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에 푹푹 쌓인 잡동사니와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가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그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릴 때, 과연 난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혼다 씨의 작고 둥근 등을 바라보면서, 일본식 주점 현관에서 보앗던 미야자와의 등을 떠올렸다. 미야자와가 지난번 우리 집에 온 날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장마가 끝나고, 벌써 7월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p.47

소노다 히나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을 사고로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랑 단 둘이 살면서 언젠가 할아버지를 병간호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노인요양복지전문학교에서 만난 동창 가이토와 연애를 했지만,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더욱 고독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가이토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 역시 특별히 그를 밀어내지 못하며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모교의 입학 안내 팸플릿을 제작하기 위해 찾아온 광고회사의 미야자와를 만나게 되면서 가이토와 함께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야기는 소노다 히나의 시점에서 시작해 광고회사 사장인 미야자와, 히나의 전 남자친구인 가이토, 그리고 가이토의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온 하타나카의 시점으로 계속 교차 진행된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앞 장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그때 상대가 올랐던 각자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진다. 사랑에 모든 걸 쏟아 부을 만큼 외로운 여자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마냥 집착하는 남자, 사랑 따윈 내 삶에 필요 없다고 여기는 여자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남자,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네 남녀의 이야기는 연애의 여러 모습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어째서 나는 이 바다가 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내 안에도 저 바다의 파도처럼 나와 타인을 갈기갈기 찢어서 갈라놓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깊이 통하고 통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에 대해서 쉽사리 잘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서로 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훨씬 이전부터 어렴풋이 눈치 챘을 것이다. 나 혼자의 세상에서만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것이다.    p.234~235

대담하고 파격적인 장면 묘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제159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작으로 섬세한 문장과 뛰어난 심리묘사로 연애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담고 있다. 아내와 별거 중인 미야자와는 히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살아갈 의미를 되찾지만,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가이토는 히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선 힘을 써서 억지로 그녀를 품고, 상처를 주고,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대놓고 추근대며 접근하는 하타나카를 만나 히나를 잊으려고 한다. 남편과 이혼한 하타나카는 한 달에 한번 남편의 요구로 아이를 만나러 가지만, 모성이라는 게 일절 없어 겨우 그 한 시간이 고역이기만 하다. 정작 자신이 낳은 자식한테는 상냥하게 대하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서는 노인들에게는 상냥하게 대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하는 그녀를 이해하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늙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하는 히나에게 어린 소녀가 묻는다. "사람은 언젠가 죽잖아요. 근데 왜 태어나는 거죠?" 소녀의 순진한 질문에 명쾌하게 대꾸할 수 있는 정답을 가지고 있는 어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 죽게 되어 있는데 왜 태어나는 걸까, 어차피 언젠가 헤어지고 말 거라면 대체 왜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하는 걸까. 사랑의 끝에 쓸쓸함만 남는 거라면, 영원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우리는 왜 갈구하는 것일까. 감각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사랑의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는 연애 소설이지만, 삶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메시지로 첫 장에산다는 것의 애달픔을 마음껏 음미해주세요라고 썼다. 이 책 속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삶을,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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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영어에 입시를 더하다 - EBS 스타강사 혼공샘의 우리 아이 영어 공부법
허준석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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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의도한 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는 부모가 의기소침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는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엄마표 영어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엄마 아빠들은 오랜 시간 끈기 있게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시작점 낮게 잡기!'

'숫자'는 중, 장기 목표이지 시작할 때의 분량이 아니다.    p.39

이 책은 현직 고등학교 영어교사이자 EBS 스타강사로 활동해온 혼공쌤 허준석 선생님의 '엄마표 영어'에 대한 새로운 영어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중.고등학교에서 15, EBS에서 12년을 가르치며 특별한 교육 경험을 쌓았고, 공교육과 사교육 현장에서 체득한 소중한 경험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교 선생님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EBS에서 다양한 강사들을 만나면서 학교 밖의 교육 생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가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 학부모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취학 전부터 초등 고학년까지 영어 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영어도 초등학생 때부터 속칭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런 아이들에게는 공교육 자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부모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사교육 걱정 없이, 아이들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거북이형' 공부법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일반 부모들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도록 천천히 영어 걸음마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자녀의 영어 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든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국의 중, 고등학생들은 '내신 영어' '실제 영어'를 병행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2가지 모두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에 부모는 '내신 영어'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초등학교 때까지 잘 만들어왔던 '실제 영어' 근육이 점점 퇴화한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6년을 보내고 나면 시험 영어만 잘하게 된다.

중학교 입시 영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영어 독서 근육을 튼튼히 키우는 일이다.    p.170~171

그렇다면 '엄마표 영어'란 과연 무엇인가. 보통 공교육에서 영어를 배우는 시점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이 시기 '이전'부터 집에서 오디오 자료와 원서를 활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소위 '엄마표 영어'라고 한다. 물론 부모가 직접 가르치거나 함께 영어 공부를 하기 힘든 경우도 있으니, 사교육도 보완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기준 없이 사교육 시스템에 맡겨버린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어떤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토론해서, 부모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그에 맞추어 영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교육이 완성되는 시대는 지났으니 말이다. 학원을 보내야 하는 타이밍, 아이가 영어를 거부할 때 공부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법, 영어 공부의 적기는 언제인가, 그리고 초등학교 전부터 1~2학년, 3~4학년에서 중,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영어 공부의 중요한 키포인트를 짚어주고 있어 매우 실용적인 팁이 되어 주는 책이었다.

엄마표 영어는 사실 초등학교까지가 최적기이고, , 고등학교에는 방목형으로 가되 온 가족이 소통하는 부분적 참여형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이에게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은 아마도 모든 부모들이 절감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시작할지,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서 로드맵을 그려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이의 특성을 고려하고, 비용과 목표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하게 조절해야 할 것이다. 영어 자체를 위한 '인생' 보다 인생을 위한 '영어'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저자의 말이 와 닿았다. 물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느리고, 천천히 가려면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책이 될 것이고, 아이가 없더라도 영어에 대한 거부감 없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 자체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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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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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바다야?"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거든."

입을 꾹 다물고 들을 준비가 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p.52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우리 삶은 어땠을까. 글쎄, 한 번도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낯설고 삭막할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최초의 음악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음악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문명에도 갖가지 형태의 음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고학자들이 찾아 냈으니, 음악이란 우리가 짐작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에서 극중 해야는 선에게 묻는다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어떨 것 같냐고. 그에 대한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럼 난 터벅터벅 걸었을걸?"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싶었다. 극중 해야 역시 흥미가 번진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 난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땐 조금 다르게 걷거든. 예를 들면 '타닷타닷' 이라든가 '퐁퐁퐁' 걷는 거지."

이 한 장면에 이 작품의 특별함이 모두 담겨 있다. 저자가 그 동안 음악을 계속 만들어오던 사람답게 소설에서도 특유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문장에서, 단어에서, 그리고 장면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걸 두려워해. 예를 들면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나, 제시간에 마감하지 못할 업무 따위를."

그녀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였다.

"이런 걸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지. 내가 두려워하던 건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심지어 내 죽음도 여기서는 너무 작은걸."    p.81~82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소설 데뷔작이다. 얼마 전에 발매된 악동뮤지션 정규앨범 <항해>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으로 삶의 가치관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이 소설을 통해 은유적으로 녹여냈다고 한다. 실제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제목이 소설 속 차례의 제목들과 공유되고 있어서, 소설과 노래가 하나로 흐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거센 파도가 부서지는 새파란 바다의 질감이 고스란히 표현된 표지의 이미지부터,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파란색 글씨까지 이 소설은 바다의 푸른빛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극중 앨범 발매를 앞두고 녹음 작업을 하던 선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지금 이곳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작업을 중단하고 1년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고 선의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술 그 자체보다 '모든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단발 머리의 한 여자를 구하게 되면서, 그토록 헤매던 삶의 답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게 된다.

 

귓가에 넘치는 바다, 눈을 감고 느낀다

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항해하는 법을 알아

 

가짜로 살기에는 허상에 가득 찬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짜로 살기엔 아직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던 나, 선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다고 말하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며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 간다. 예술가의 감성과 깊이, 그리고 음악에 대한 고민이 묘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 소설이라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션 이찬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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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투에고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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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구름이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보니 구름도 하늘 밑에 있더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내가 가진 불안과 긴장도 다시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거잖아.    p.51

카카오프렌즈 에세이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은 토끼옷을 입은 단무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무지가 주인공이다. 그 동안 라이언과 전승환, 어피치와 서귤, 튜브와 하상욱이라는 조합에 이어, 무지는 투에고 작가와 만났다. 무지는 그냥 보면 장난기 가득한 토끼처럼 보이지만, 사실 토끼옷을 벗으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단무지이다. 그리고 묵묵히 무지의 뒤를 지켜주는 캐릭터인 콘도 함께 등장한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카카오프렌즈의 캐릭터들이 젊은 작가들과 만나 진행되는 이 시리즈는 툭툭 가볍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페이지 구석구석에서 사랑스럽고, 귀여운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을 안겨 준다.

누구나 한두 가지쯤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나,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란 사실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고, 부끄러워서 피하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무지가 단무지인 자신의 모습을 토끼옷으로 감추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콘은 가장 미스터리한 캐릭터인데, 항상 곁에서 무지를 지켜주는 모습은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곁에 있을 때는 공기처럼 소중함을 모르다가,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누군가의 소중함을 깨닫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무지와 콘은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투영해볼 수 있는 내 모습, 혹은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다.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전제하고 출발해보기로 했어.

그러면 다수가 손을 들었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지.

'우리' '모두' 같은 말로 뭉뚱그려서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어.   p.122

이 책에 수록된 글들 중에 가장 마음이 와 닿았던 것은 바로 기억의 옷장에 관한 대목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걸려 있는 옷의 개수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제법 괜찮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고민이 많은 진지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슬픔에 젖어 우울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줬던 매정한 사람으로..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나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모두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모습이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 내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를 기억하는 것이 그다지 나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진심과 가식과 거짓과 진실이 모두 뒤섞여 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것도 그런대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게 된다면, 세상은 더 심각한 소통 불능으로 아마 대혼란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 마음 속 두 얼굴, 내 속의 서로 다른 ''들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 세상이 나를 바라보고, 누군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스스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있는, 보이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찾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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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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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스톡홀름, 마당이 내다보이는 방에 앉아 한 여성이 글을 쓰고 있다. 사방에 장식이라고는 없는 리넨 천을 널어놓은 아주 작은 주방이다. 둥지, 마음, 내부. 마치 안팎을 뒤집어놓기라도 한 듯, 이 방은 방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차분하고 고요하며 외로운 밤이 되면 그는 글을 쓴다. 어머니의 숨소리와 벽 안쪽 파이프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뚫고 들려온다. 조만간 적대적으로 변하게 될 또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는 밤을 쓴다. 아니면 밤이 그를 쓴다고 해야 할까?   p.249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열여섯 소녀 함므다 좀마는 사진을 움직이는 마법에 푹 빠져든다. 움직이는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에게 이야기 값을 내느라 엄마 몰래 빵을 훔치기도 하고, 상점에서 렌틸콩을 슬쩍하기도 한다. 그녀는 영웅과 자유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을 느낀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일기를 쓰는 중이다. 그곳은 희고 거대한 감옥, 홀로 지내기에는 지옥 같은 곳이다. 노령의 대통령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수심으로 가득하다. 런던 교통국에서는 근무하는 여성 500명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이제부터 수개월에 걸쳐 런던의 모든 버스 및 전차의 여성 안내원들이 직장을 잃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1947 1 1, <타임스>는 영국인들을 향해 더 이상 시계를 믿지 말라고 알린다. 사람들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BBC 방송에 다이얼을 맞춘다. 전기식 시계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전의 영향을 받았고, 기계식 시계는 정기적으로 점검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유럽 전역에 걸쳐 피해가 속출했다. 수십 만 채의 건물이 사라졌고, 소도시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수천 명의 노숙자가 생겼고, 모두들 물과 전기의 제한적인 공급에 대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계를 훔치고, 숨기고, 엉뚱한 곳에 두고, 잃어버린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12, 뉴욕, 시간은 균형을 이루어 흐르지 않는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되돌릴 수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과 같아서, 깨진 조각들은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다. 또한 어떤 시점이 다른 시점보다 더 현재인지를 가리기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내가 한데 모으고 싶은 것은 1947년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모아 맞추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하나로 뭉쳐져야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산산이 조각난 슬픔이다. 폭력에 대한 슬픔, 폭력에 대한 부끄러움, 부끄러움에 대한 슬픔.    p.333

1947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고증과 문학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스웨덴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는 1947년을 오늘의 세계가 태동한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고, 그 한 해 동안의 세계사를 다룬 독특한 르포르타주를 써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사람들은 과거의 비극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냉전의 열기는 점점 타오르고, 미국은 CIA를 창설하고, 소련은 핵 보유국이 된다. 파리에서 디올은 뉴룩을 선보여 세계 패션계를 뒤집어놓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 2의 성>을 썼고, 조지 오웰은 죽음을 앞둔 채 <1984>를 탈고한다. 프리모 레비는 숱한 거절 끝에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만난다. 빌리 홀리데이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동시에 마약 투약 혐의로 수감된다. 최초의 컴퓨터버그가 발견된다.

이처럼 1947년은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빠르게 벌어졌던, 역사의 또렷한 단층을 만들어낸 시기였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선별하고 재배치해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역사를 현재로 가져온다. 1년 열두 달, 154개의 시공간, 220명 이상의 등장인물로 1947년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혁을 재구성했다는 것도 뛰어나지만, 문장이 유려하고 매력적이어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이다. 게다가 평범한 개인의 역사와 당대를 뒤흔든 사건들이 교차 진행되고, 모두 현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의 동시대성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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