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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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p.68~69

 

여행지를 정하고, 숙소와 티켓을 예약하고 현지에서의 계획을 세운 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행 가방을 싸는 일이다.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가져가는 것이 목적이라 옷이든 화장품이든 짐을 가볍게 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고 짐을 챙긴다. 하지만 책을 서너 권 넣고 나면 항상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을 더 넣을까, 아님 이 책을 빼고 이 책을 데려갈까. 그러다 어느 날에는 겨우 2박 3일 일정의 여행인데, 책을 열 권을 챙겨간 적도 있다. 그렇게 책으로 가득 차 돌덩이가 든 것처럼 무거운 가방을 가져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비행기에서 읽을 책, 호텔에서 자기 전에 읽을 책, 현지의 어느 곳을 방문했을 때 그곳과 어울리는 책들도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짐을 챙기다 보면, 이건 사람이 여행을 가는 건지 책이 여행을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이 여행만큼이나 설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 '걷기 여행' 붐을 일으킨 도보여행가이자 한국 대표 여행작가인 김남희 역시 여행 가방의 필수품이자, 삶의 필수품을 '책'으로 꼽는다. 그녀는 말한다. 근사한 집이 없어도, 든든한 통장이 없어도, 다정한 연인이 없어도, 독서와 여행이 가능한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여행과 독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그녀의 여행 역시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된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혹은 여행지에서 습관처럼 펼쳐 든 책들의 이야기가 작가가 머문 그곳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순간들을 담고 있다.

 

 

불빛이 비치는 서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드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슬며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주인의 취향을 가늠해볼 때면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시류에 호응하는 책들 사이에 놓인 비주류의 책이 고집스러운 주인의 취향을 은근히 드러낼 때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중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취향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빼내 손에 들 때면 묻어 있는 먼지조차 사랑스럽다.   p.137


 느릿느릿 흘러가는 치앙마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고요한 언덕의 도시 리스본에서는 리스본을 사랑한 작가의 소설을 골라본다. 불과 얼음의 땅,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이 살아 있는 레이캬비크에서는 범죄 소설이 어울릴 것 같아 평소라면 잘 읽지 않을 장르의 책에도 과감히 손을 뻗어본다. 마음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여행지에서는 독서의 취향조차 넉넉해지곤 하니 말이다. 그리스의 작은 섬 이드라는 어디서건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고양이 섬'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매일 고양이와 함께하는 날들을 보내며 그녀는 후지와라 신야의 책 <인생의 낮잠>을 떠올린다. 네팔 포카라의 호숫가 카페에서 처음 읽었던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끝으로 누르며 한동안 호숫가를 서성이게 만들었고, 브라질의 마나우스까지 들어가 신청한 아마존 투어를 했지만 아마존을 제대로 알지 못해 놓쳐 버린 많은 것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던 건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나무의 노래>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수많은 여행지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등장한다. <그리스인 조르바>, <바닷마을 다이어리>, <섬에 있는 서점>, <인투 더 와일드>, <안나 카레니나>, <작은 것들의 신>, <모스크바의 신사>, <스노우 블라인드> 등등... 많은 책들이 여행과 함께 하고 있다. 서른네 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세보증금과 적금을 빼서 세계 일주를 떠났던 모험 이후,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여행이 매혹적인 이유는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과 후, 우리는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여행을 통해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상 멀리 떠날 수 없을 때는 책 속으로 떠나면 된다.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준비 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점이니 말이다. 숨 막히게 답답한 이 세계를 잠시나마 벗어나 책 안의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다. 여행과 책이라는 환상의 콜라보에 당신을 초대한다. 언젠가는 우리가 여행지에서 책을 든 채 마주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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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를 믿나요? - 2019년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25
제시카 러브 지음, 김지은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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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잘하고 물을 좋아하는 소년 줄리앙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인어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책 속에서만 보았던 인어를 본 소년은 인어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반한다. 그리고 자신도 인어가 되어 바다 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는 것을 상상한다.

 

"할머니는 인어 봤어?"
"그럼, 봤지."

"할머니... 나도 인어인데."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목욕을 하러 가느라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겨진 줄리앙은 커튼과 화분으로 인어 분장을 하며 논다.

 

 

소년이 인어의 모습이 되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무뚝뚝한 할머니는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를 피한다. 남자아이가 자신을 사회가 규정한 남자다운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꾸미고 노는 것을 발견한다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화를 내거나 혼을 낼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다움', '남자다움' 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너무도 당연했고, 사실 그러한 인식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답다'는 규정의 옳고 그름은 대체 누가 판단하는 걸까.

 

"와, 이게 뭐야, 할머니?"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다시 돌아온 할머니는 줄리앙을 혼내는 대신 예쁜 목걸이를 건네 준다.

 

 

할머니가 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인어 분장을 한 차림새로 줄리앙은 할머니와 함께 길을 나선다.

 

"인어다." 줄리앙이 속삭였어요.
"그래, 우리 꼬마 인어도 같이 가 볼래?"

 

광장에는 인어 무리가 행진을 하고 있었고, 할머니와 줄리앙은 인어들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생물학적 성별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년의 이야기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지칭 없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년의 숨은 고민을 할머니의 사려 깊은 행동을 통해 감싸 안아주고 있어 매우 섬세하고, 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개성과 자신의 몸을 비롯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웅진 모두의 그림책 25권은 세상이 만들어 둔 관습이나 규칙을 벗어난 길 위에서 자기만의 길을 찾기 위해 나서는 소년 줄리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시카 러브 작가의 첫 그림책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19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2019 에즈라 잭 키츠 상 명예상, 2019 스톤월 북 어워드 대상을 받으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 대한 귀여운 변주이기도 하다. 200년 전의 인어공주에 비해 21세기의 인어공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곧 개봉될 월트 디즈니의 실사판 영화 <인어공주>에서는 주인공 역할에 흑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소년 줄리앙은 할머니의 믿음과 응원으로 오색찬란한 인어들의 행진에 함께 나설 수 있게 된다. 인종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을 떠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예쁜 그림책이었다.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들을 통해 보여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였다. 언젠가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고 아이들의 개성과 가능성, 그리고 꿈을 지지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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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 1
조금산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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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웹툰 인기작 <시동> 단행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마동석, 박정민, 정해인, 염정아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12월 18일 개봉 예정이기도 하다. 조금산 작가는 OCN 드라마 <구해줘>의 원작인『세상 밖으로』, JTBC 드라마 <탁구공>의 원작인『탁구공』이 대표작인데,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작품은 <시동>이 처음이라고 한다. 전체 4권으로 완결되는 단행본이고, 현재는 1,2권이 나왔고, 3,4권은 예약 판매 중이다. 그래서 우선 1권과 2권을 먼저 만나 보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동네 꼬마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 내는 두 주인공 택일과 상필의 모습이다. 이젠 삥 뜯고 애들 때리는 것도 지겹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다닐 생각도, 어디가서 일할 생각도 없는 청춘들이다. 택일의 엄마는 전직 배구선수 출신이라 툭하면 손부터 나가는 성격인데, 아들놈이 하라는 검정고시 준비는 안하고 집에는 며칠 만에 들어오니 싸대기를 날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른이 돼서도 할 수 있는 걸 왜 자꾸 미리 하겠다고 난리 치는 거야."

 

택일은 언제나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떠날 용기도 돈도 없다. 그러다 자신들이 때렸던 꼬맹이들 형이란 놈이 나타나 실컷 얻어 터지고 나니 이 새끼 저 새끼 다 지겹고, 동네도 지긋지긋해서 며칠 바람 좀 쐬다가 오겠다며 무작정 차표를 끊는다. 택일은 그렇게 원주로 향하고 숙식이 제공되는 중국집 장풍에 취직을 하게 되고, 상필은 돈을 벌기 위해 동네 형의 소개로 일수 가방을 손에 들고 다니기 시작한다.

 

 

찌질한 반항아 ‘택일’과 폼생폼사 반항아 ‘상필’은 그렇게 사회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택일은 남다른 포스의 주방장 거석이 형과 가출 소녀이자 복싱이 특기인 경주를 만나게 되고, 상필은 사채업을 하는 사무실을 다니면서 조금씩 어른들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거의 시종일관 맞는 캐릭터인 택일은 엄마에게 싸대기를 맞고, 동네 꼬맹이들의 형에게도 맞고, 장풍반점의 주방장 거석에게도 맞고, 자신보다 어린 소녀 경주에게도 기절할 만큼 맞는다. 불량 학생 내지는 반항아처럼 하고 다니지만, 완벽하게 나쁜 놈이라기엔 어딘가 이프로 부족한 듯한 느낌이라 더 인간적이다. 폼 나게 돈 벌고 싶은 상필은 말 주변이 좋아서 천연덕스럽게 일수 일을 해내지만, 아직은 마냥 소년처럼 보이는 살짝 귀여운 캐릭터이다.

 

 

단행본을 다 읽고 나서 영화 예고편을 봤는데, 배우들과 인물들의 싱크로율이 너무 완벽해서 깜짝 놀랐다.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의 거석이 형과 단발 머리를 한 마동석 배우의 만남은 그야말로 웹툰을 찢고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택일 역의 박정민 배우, 상필 역의 정해인 배우, 그리고 말보다 몸이 앞서는 택일의 엄마 역에 염정아 배우까지... 캐스팅 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인생 뭐 있어? 일단 한번 살아보는 거야!"

 

영화 '시동'이 '강철비', '신과 함께' 시리즈에 이어 웹툰 원작 영화의 흥행 계보를 이어갈 지도 기대가 된다. 갑갑한 집구석을 떠나고 싶었든, 누군가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쳤든, 남들처럼 폼 나게 살고 싶었든, 주먹보다는 프라이팬을 휘두르고 싶었든 간에.. 그들 모두에게 인생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한 걸음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모두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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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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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나쁘든 하이무라 야마토를 무시할 수 없다. 잊을 수도 없다. 그렇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접적으로 서로 찾는 것이다.
- 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째서 그 사람은 그렇게 되어버렸을까? 대체 그 사람의 어떤 얼굴이, 어떤 말이, 어떤 태도가 그 사람의 진실이었을까?    p.169


삼류 사립대생 마사야는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마사야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만해도 우등생에 반의 영웅으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로 성적이 떨어지고 절망에 빠져 여러 번 휴학 후 결국 퇴학 처분을 받고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수험 자격을 얻었지만, 가고 싶었던 곳에는 전부 떨어지고 간신히 합격한 곳이 신흥 사립대학뿐이었던 거다. 희망하지 않았던 대학 생활이었고, 친구들은 모두 수준 낮은 인간들로 보였으니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사야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것은 24명을 죽인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였다. 이미 사형을 선고 받은 연쇄살인범이 평범한 대학생에게 왜 편지를 보낸 것일까.

 

하이무라 야마토, 그가 24건의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것은 5년 전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입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 고작 9건뿐이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10대 소년소녀로, 적게는 열여섯 살부터 많게는 스물세 살이었다. 만약 그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면, 누구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의 기품 있는 미남자라고 생각할 법한 차분하고 온화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마사야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었던 시기까지 단골이었던 제과점의 주인이기도 했다. 하이무라는 소년소녀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살해한 그 두 손으로 데니쉬와 바게트, 스콘을 구워서 깔끔한 미소로 손님에게 건네주곤 했었다. 마사토는 편지를 받고 그를 면회하러 간다. 하이무라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두 인정하지만, 아홉 번째 살인만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여자는 자신의 타깃과는 다르고, 수법도 다르다며, 그 한 건만큼은 누명을 쓰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마사야에게 자신의 누명을 증명해달라고 말한다.

 

 

"너, 최근에 누군가에게 '사람이 변했다'라는 말 들은 적 없어?"
가나야마가 속삭이듯 물었다.
"모두 그래. 조금씩 그 사람과 닮아가. 영향을 받는 거야. 말버릇도, 몸짓도, 눈매까지도. 나도 그랬어. 그 무렵의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이 됟고 싶다'라고 바랐지."
마사야는 숨을 삼키고 가나야마의 말을 들었다. 들어서는 안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검은 파도가 술렁였다.    p.317


마사야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유난히 친절히 대해주었던 빵집 주인이자,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우등생이었던 모습만을 알고 있는 하이무라의 요청을 수락하기로 한다.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하이무라가 일으킨 사건에 대한 백여 장의 자료를 읽고, 살인과 범죄에 대한 책을 구입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이무라의 주변 인물과 사건 관계인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조사를 이어간다. 하이무라가 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교사, 미취학 아동일 무렵에 자주 맡아서 돌봐주었던 친모의 사촌 언니, 청소년기 하이무라의 보호 관찰을 맡았던 노인, 그와 초등학교, 중학교 9년을 함께 보냈다는 동창, 그의 마지막 양아버지였던 남자, 동네 주민들과 빵집의 단골들, 그와 데이트를 했던 여성들까지... 만나면서 마사야는 생각한다. 각자가 가진 하이무라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다르다고.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이 있었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감싸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매우 똑똑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생아로 태어나 열악한 성장 환경에서 자라야 했고, 책임감도 능력도 없는 어머니 밑에서 주위의 멸시와 괴롭힘에 시달리고, 양아버지에 의한 신체적, 성적 학대까지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생이 불행하다고 해서 모두가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는 핑계는 될 수 없다.

 

연쇄살인범의 인생에 숨은 사건과 진실을 낱낱이 알아가면서, 마사야는 점점 하이무라의 내면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렇게 그에게 서서히 매료되어 어느 순간 문득 자신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게 되는데, 살인은 정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것일까? 이 작품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동기와 심리 상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심리 조작의 기술까지, 시종일관 연쇄살인범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 존재했던 다양한 연쇄살인범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기도 하고, 하이무라가 체포되었을 당시의 심정이나 수감 중인 상태의 마음 등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어 오싹하면서도 충격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연쇄살인범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과정을 통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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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자작 감행 - 밥도 술도 혼자가 최고!
쇼지 사다오 지음, 정영희 옮김 / 시공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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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자카야에서 찌그러져 있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이자카야에 혼자 들어가 다들 즐겁게 왁자지껄 마시는 모습을 어두운 눈초리로 흘깃흘깃 바라본다. ‘괜찮아. 나야 뭐 어차피…’라고 생각하며 기가 살짝 죽은 채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게 즐겁다. 어두운 눈매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몹시 귀엽다. 이런 이상한 취미의 소유자다. 그런데 취미라는 것은 점점 깊은 곳으로 빠지게 마련이므로 ‘이자카야에서 혼자 마신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이자카야에서 대낮부터 마신다’고 하는, 한층 더 과격한 조건에 끌리게 된 것이다.     p.24~25

 

요즘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1인 가구 증가로 인해 혼밥족이 늘어난 것도 있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를 보는 등 혼자서 즐기는 1인 문화 ‘혼족’이 익숙한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독신자나 혼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일상이 된 풍경일 것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50년 장기 연재 중인 관록의 만화가이자 반세기 넘게 혼밥을 실천해 온 달인 쇼지 사다오의 국내 첫 소개작이다. 무려 1987년 1월부터 <주간 아사히>에 연재 중인 <저것도 먹고 싶다. 이것도 먹고 싶다>에서 발췌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박찬일 셰프의 추천평을 보니, 낮술과 아침술을 즐기는 대책 없는 만화가 할배의 책을 힘겹게 번역해서 읽어왔다고 하는데 그만큼 쇼지 사다오의 타고난 입담과 유쾌한 그림은 매혹적이다.

 

쇼지 사다오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50년째 연재 중인 주간지만 두 개인 관록의 작가이다. 그를 담당했던 젊은 편집자들이 줄줄이 정년 퇴직하는 사이, 80대의 노장 만화가는 변함없이 그리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흔들림 없고 성실한 일상 뒤에는 매일의 작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혼밥'과 '혼술'이 있었다.

 

 

말캉말캉한 무가 이에 닿는 식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 식감을 살짝 가로막고 유부의 쫄깃한 식감이 더해진다. 거기에 유부의 기름 맛이 사르르 퍼진다. 그 기름의 맛 또한 무에 적당하게 잘 배어 있다. 무채 유부 된장국을 먹고 있노라면 한 순간 황홀해지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때가 있다. 유부는 '된장국 세계의 중매쟁이'답게 무와 된장을 훌륭하게 묶어주고 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유부의 맛이 다른 것을 압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유부는 물러설 줄 안다. 게다가 그 방식도 훌륭하다. 한 순간 존재감을 드러낸 뒤 '어?' 하는 순간 어딘가로 벌써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p.216

 

이 책에 따르면 고전적인 백반집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정도가 무려 열한 가지나 되는데, 특히나 가게 주인의 항목에 빵 터지고 말았다. 가게 주인은 무뚝둑해야 하고 다소 언짢아 보이고, 약간 삐딱한 느낌이라야 한다나. 게다가 손님이 들어왔을 때 "어서 오세요"같은 인사는 금지고, 손님이 주문을 마쳤을 때도 "알겠습니다"같은 리액션은 금지이고, 복장은 티셔츠에 앞치마 차림인데 앞치마에 얼룩은 필수라고. 하핫. 물론 쇼지 사다오의 매우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어쩐지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맛집의 이미지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아 재미있었다. 그가 자신만의 철학으로 나에게 흡족한 한 끼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굉장히 주관적인 이야기지만,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요리와 가게 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다. 아침 9시부터 영업하는 이자카야에 가서 마음 먹고 '찌그러져서 한잔'을 해보려고 했더니, 곤란하게도 가게 안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밝고 즐거워서 오히려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서 힘이 솟았다는 에피소드도 재미있고, 방송을 보다 유명한 맛집 탐방 리포터가 햅쌀밥을 한 입 먹고는 이런 밥이라면 반찬 같은 것도 필요 없겠다는 소리에 반찬 없이 밥 한 공기에 도전해보는 엉뚱함은 귀엽기도 했다. 굳이 임페리얼 호텔까지 가서 2,625엔이나 하는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굴튀김을 정말 좋아한다며 막 조리가 끝난 굴튀김을 먹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하며 굴의 물컹함에 대한 고찰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 외에도 돈카스 카레를 먹는 올바른 방법이라든가, 살코기보다 비계가 좋은 이유, 감동의 무채 된장국과 무조건 맛이 보장되는 계란프라이 덮밥에 대한 글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식사를 하며 느끼게 되는 기쁨과 다양한 음식에 대한 세세한 묘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쇼지 사다오와 함께 식사를 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잘 읽었다'가 아니라 '잘 먹었다'고 말을 해야 할 듯한 느낌이다. 물론 밥을 먹는 것도 혼자가 최고라고 외치는 쇼지 사다오이지만, 이 책과 함께라면 그의 밥상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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