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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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아이들이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하는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이탤리언델리에 가서 갓 구운 롤빵과 커피를 사 마셨다. 집안일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창가의 의자나 보도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와 기쁨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외로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쐐기풀' 중에서, p.260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 <런어웨이>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이지만,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먼저 읽게 된 것은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을 정도로 공감이 되곤 했었다. 특히나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꾸는 걸로 그려져서 여성 독자로서 더 인물에 동화되고, 그들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법한 여자들을 화자로 삼는다. 그녀들의 서사는 흔하디 흔한 일상에 대한 것이지만, 삶 전체를 껴안듯 복잡한 무늬들이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담겨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결혼이 큰 변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마지막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포스트앤드빔' 중에서, p.330

 

대부분이 작품이 여성 캐릭터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남편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피오나와 그랜트는 오십 년간이나 함께한 부부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랜트는 아내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피오나는 남편에게 자신을 요양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그랜트는 결코 장기 입원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냥 한번 시험 삼아 쉬면서 치료할 겸 가보자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새로운 입소자가 처음 삼십 일 동안 어떤 방문도 받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고, 그랜트는 아내를 만날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긴 한 달을 홀로 보내고, 마침내 아내를 만나러 갔지만 피오나는 그랜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요양원에 잠깐 머물렀던 거라 곧 떠나버리고, 피오나는 상실감으로 심하게 앓기 시작한다. 그랜트는 그녀를 위해 그 남자의 아내를 찾아가 그를 다시 요양원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집에 가서 그의 아내에게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는 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아이러니, 갈등과 상처, 그리고 관계와 회한 등이 섬세하지만 담담한 문장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내일 당장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감동을 주고, 위안을 안겨준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이야기 두 편은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표제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미국에서 <미워하고 사랑하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졌었고,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작품은 캐나다에서 <어웨이 프롬 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영화라는 긴 호흡의 서사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을 통해 먼로의 작품이 가진 힘을 만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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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세스 에이징 - 노화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뇌과학의 힘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이은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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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지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뇌를 구성하는 기관마다 나이 드는 속도는 다르다. 어떤 기관이 쇠하는 와중에 오히려 효율과 효과가 증가하는 기관도 있다. 우리가 대중문화 속에서 접하는 기본적인 메시지, 즉 노년은 순전히 쇠퇴하기만 하는 시기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물론 어떤 기능은 분명히 쇠하지만 우리의 건강과 행복, 재치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가장 큰 단일 결정 요인은 우리가 어느 정도 타고나기도 했고 바꾸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는 것, 바로 성격이다.    p.35

 

친구 두 명이 100세까지 산다고 했을 때, 두 사람의 수명은 동일하지만 질병 수명은 무척 다르다. A는 50세에 건강이 서서히 쇠하기 시작해서 80세가 됐을 때 하루 24시간 간병인이 필요했다. 반면 B는 70세에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지만 95세까지는 심각한 건강상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나 평온한 나날을 20년 더 보내고, 질병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기까지 15년 더 행복하게 사는 인생을 선호할 것이다. 인지과학계의 거장 대니얼 레비틴은 이 책에서 '노화에 접근하는 방식을 크게 바꿈으로써 그 균형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기울이고 건강 수명을 늘리기에 늦은 시기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경과학, 심리학, 뇌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뇌와 노후의 관계에 대한 방대한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이 책은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반드시 감퇴하고, 신체적?정서적?인지적으로 둔화된다는 통념과도 같은 편견들을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반박들로 뒤집고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

 

노인들에게 삶을 되돌아보고 가장 행복했던 나이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언제라고 대답할까. 대부분 아무 걱정 없이 즐거웠던 어린 시절 혹은 사회 생활 경력의 정점이었던 젊은 시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72개국에서 조사한 결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가장 많이 꼽히는 연령은 82세였다고 한다. 전혀 예상 밖의 결과라 의외라는 생각부터 드는데, 집단 조사 결과 행복감은 30대 후반에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내다가 54세 이후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정서적?사회경제적으로 만족감을 유지하는 노인들의 사례를 통해 활기와 명민함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는 일이 점점 끔찍하게 느껴지고 있는 이 시기에, 나이를 먹을 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러한 노년의 시기를 열 살 이나 스무 살쯤 높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년을 어떻게 보내고자 하는 지가 중요하다. 때때로 우리는 심장과 폐, 신장, 간이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데도 마음이 쇠락하고 오랫동안 삶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모는 92세이고, 지난 15년 동안 의미 있는 대화를 함께 나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모는 살아 있고 기관계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가 '삶'과 연관 짓는 기쁨이나 자각을 전혀 경험하고 있지 않다. 지금 이모는 건강 수명이 아니라 질병 수명 구간에 속하는 게 확실하다.     p.349

 

나이가 들면서 뇌에서 도파민이 감소하고 도파민 수용기가 퇴화하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향이 줄어든다고 한다. '마음'이라는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몸'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동기가 줄어든다는 사실은 정말 슬프다. 게다가 이를 가속화하는 것은 신체와 인지 기능에 한계가 생기고, 기억에 관한 문제도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꼭 알츠하이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연스레 노화의 현상 중 하나로 기억력이 나빠질 테니 말이다. 나는 아주 나이를 많이 먹어서도 언제나 책을 읽으면서 생활하고 싶다는 바램이 있는데, 그래서 노년에 시력이 나빠져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례를 듣고 있으면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해지곤 했다. 아마도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도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년기를 위해 어떻게 뇌를 단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노화에 따른 기억력 감퇴는 실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적으며, 감각 체계 쇠퇴를 완화하는 노화의 보상 기전 중 하나로, 경험이 많아질수록 패턴을 알아차리고 향후 결과를 예측하는 기량이 향상된다는 말은 대단히 희망적으로 들렸다.

 

노화를 종말이 아니라 정점으로 여기도록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노화에 대한 편견을 완벽하게 뒤집는 인상적인 의견이었다. 노후가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변화들을 최소화시키고, 80대, 90대에도 새로운 일을 시도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뇌과학적으로 뇌를 어떻게 단련할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노후에 대한 현명한 계획을 한 번 세워봐야 할 것 같다. 노후를 건강하고 지혜롭게 재구성하는 혁명적 방법이 궁금하다면,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년기를 위해 어떻게 정서와 육체의 변화를 다뤄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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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작 사부작 오늘의 드로잉 - 전2권 - 손그림으로 담아내는 소소한 나의 일상
박진영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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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시국이라 봄이 되었지만 계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어느 새 여름을 앞에 두고 있다. 나들이도, 여행도 못하고 집콕 신세인 나날 속에 각자의 취미를 찾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혹시 아직 뭘 해야 할지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책상 위에서 쓱쓱, 이 책과 함께 나만의 힐링 타임을 가져보면 어떨까.

 

도구도 간단하고, 방법은 더 간단해서, 누구라도 색연필만으로 감성 넘치는 그림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연필스케치부터 채색까지, 도구도 단계도 번거롭게만 느껴지는 드로잉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케치 없이 색연필로 그리는 그림은 어떨까.

 

 

이 책은 유성색연필을 사용해 특별한 기술 없이 힘 조절로 편하게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해주는 드로잉 북이다. 유성색연필은 오일로 만든 색연필로 물과 잘 섞이지 않으며 꾸덕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 크레파스와 크레용의 중간 느낌이라고 보면 되는데, 일정한 힘을 주고 종이에 유성색연필로 색칠을 해보면 꾸덕한 질감이 잘 표현된다. 거기에 디테일한 부분은 채색 후 4B 연필로 표현해주면 된다.

 

특히나 이 책이 흥미로운 부분은 '스케치 없이 채색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형태를 머릿속에 그린 후 색연필로 가장 넓은 면을 채색하고, 작은 면들과 선과 점으로 디테일하게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보통은 스케치를 하고 나서 완성이 된 다음에 채색하는 작업이 또 필요하게 마련인데, 그걸 한 방에 끝낼 수 있다니 초보자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저자인 박진영 일러스트레이터는 5년 동안의 산골살이를 마치고 2년 첫 서울로 독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도 작가의 산골 라이프가 가득 담겨 있어 더욱 재미있었다. 계절, 사람, 사랑, 공간으로 4개의 파트를 나눠 '벌써 일 년', 'DEAR MY', 'ONLY YOU', 'LIFE'로 구성했고, 마지막 파트에는 작가가 산골짜기 운주에서 보냈던 5년의 시간을 기록한 짧은 에세이를 일러스트와 함께 담고 있다.

 

마지막 파트에 수록된 '운주 라이프'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산골짜기 운주의 시간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에세이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도시에서 자고 나라서 도시 라이프밖에 모르는 독자로서, 산골짜기에서 생활하는 일상의 풍경이 너무도 근사하게 느껴졌다. 이 부분은 따로 그림 에세이로 출간이 되어도 챙겨서 읽어보고 싶을 만큼, 짧아서 너무 아쉬웠던 대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색연필 드로잉북과 컬러링북, 그리고 7장의 예쁜 엽서로 구성되어 있다. 컬러링북에는 본 책에 수록된 작품 중 20점의 그림을 선별해 담고 있는데, 일종의 밑그림 형태라 아직 그림에 자신이 없는 초보라면 이걸 바탕으로 채색을 하면서 드로잉을 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220g의 도톰한 도화 용지에 깨끗하고 깔끔하게 뜯어지는 제본으로 되어 있어 채색을 다 한 후에는 뜯어서 포스터처럼 바로 활용할 수도 있어 더 좋다.

 

 

따뜻한 그림들로 채워진 7종의 엽서 또한 드로잉할 때 참고로 활용해도 되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거나, 빈 벽에 장식으로 붙여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본 책에 컬러링 북, 거기다 엽서까지 3종 세트로 구성되어 있어 가격 대비 정말 실용성이 뛰어난 책이다.

 

알록 달록한 색감이 보는 것만으로도 비타민처럼 상큼한 제철 과일과 채소들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풍경들도 그리고, 가족, 동네 꼬마들, 강아지, 카페, 시장 등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다. 각각의 테마 앞에 '컬러 가이드'라고 해서 주요 색상들의 정확한 컬러 명을 표기하고 있어 더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색상을 고르느라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사부작사부작'이라는 단어의 뜻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을 가리킨다. 힘 주지 않고 쓱쓱, 대충 그리는 것 같지만 근사한 드로잉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멋진 단어가 있을까 싶다. 사실 단순한 선과 디테일로 표현되는 그림들이 더 그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보며 그저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니, 이번 기회에 그림을 배워보고 싶었던 누구라도 적극 도전해보기를 추천한다.

 

뭔가 그려보고 싶지만 타고난 곰손이라서, 그리다 망쳐버릴 것 같아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스케치 없이 그리는 게 이렇게나 쉽다는 걸 깨닫고 놀라게 될 것이다. 도구가 준비물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이 책과 색연필만 있으면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손그림을 통해서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다. 진정한 취미란 바로 스트레스 해소와 힐링, 그리고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자, 오늘부터 책상 위, 나만의 힐링 타임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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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무루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무루(박서영)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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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것들은 자주 오해받고 소외된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이상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그럴 때의 이상 異常 은 이상 理想 을 조금 닮았다. 두 '이상' 사이의 교집합 속에는 선한 이들이 각자의 보성대로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자유가 있다. 노력의 방향이, 모두가 정상에 속하게 만들기보다는 누구도 어디에도 속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쪽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내 일상에도 많았으면 하고 바랐다.    p.73~74

 

나는 어릴 때보다 오히려 오른이 된 지금 그림책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어린 내가 좋아했던 것은 셜록 홈즈 류의 추리 소설과 당시 유행했던 공포 소설이었기에, 그림이 별로 없고 글씨가 많은 책을 자주 읽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같은 장르의 책들을 좋아하지만, 그림책도 일부러 찾아서 읽는다. 감정과 이야기를 설명하는 대신 바로 보여주는 그림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감정에 닿는다'고 말하는 무루의 말처럼, 글로 묘사하는 대신 단순한 색채와 음영, 비율, 질감 등이 보여주는 '시를 닮은 그림의 언어'가 나는 참 좋다.  그래서 등장 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하고, 페이지 가득 글자들이 빽빽한 책들을 읽다가 잠시 덮어두고, 그림책을 펼치곤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그림책 속 일상에서, 세상 끝까지라도 가보고 싶어지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을 끌어 올려주고 토닥여 주는 위로를 받곤 했다.

 

이 책은 '그림책 읽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저자 무루가 자신의 삶과 그림책을 엮어 내놓은 첫 에세이이다. 블로그와 SNS를 통해 생활과 사색의 기록을 단정히 쌓아오며 ‘무루’라는 이름을 알린 박서영 작가는 '모두가 정상으로 여기는 삶에서 비껴 나 현실보다는 이상을 사는 듯한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현실에 저항하고 판타지를 사랑하며 세상의 언저리에서 재미나게 살아가는 이상주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나는 내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는 것이 무엇을 향해 가는 일인지 조금씩 더 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는 수만큼의 이야기다. 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책등이 바랜 이 낡고 오래된 그림책 속에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해 외로울 때 나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p.174~175

 

이 책 속에서 무루가 읽어주는 그림책들은 내가 이미 읽었거나 알고 있는 작품들보다 모르는 작품들이 더 많았다. 다행히 마지막 페이지에 소개된 그림책 목록이 별도로 수록되어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무루가 어릴 때부터 삶의 시기마다 한 번씩 꺼내 읽었다는 셸 실버스타인의 책들은 꼭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열 살 무렵에 처음 읽었던 책을 스무 살이 되어 다시 꺼내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자신이 알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읽어본 진짜 이야기는 열 살에 읽었던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왜 그랬을까. 책을 읽는 사람이 꼭 자신의 세계만큼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책을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 읽는다면 또 다른 말을 해줄 것이다.

 

비혼, 여성, 프리랜서, 집사, 채식지향주의자, 그림책 읽는 어른… 저자인 무루를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우리는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으로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거기서 벗어난 비혼자, 동성애자, 다문화 가족, 미혼모와 미혼부 등은 자연히 정상 밖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이 책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선을 긋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가장자리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낯선 것을 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마음'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은 더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 사실이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할머니가 되는 날을 조금은 설레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기왕이면 재미있고 신기하고 이상하고 궁금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무루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나 역시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과 현명함을 동반한 귀여운 할머니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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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도에서 넘어지며 인생을 배웠다 - 넘어져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법
캐런 리날디 지음, 박여진 옮김 / 갤리온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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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겪은 험난한 파도들은 내가 서핑에, 인생에 그리고 생존에 얼마나 미숙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드러내주었다. 나는 그 파도를 통해 세 가지 답을 얻었다. 약함을 받아들이기, 감사하기 그리고 전혀 쿨해지지 않기. 이 세 가지 모두 내가 정말 못하는 일이다. 특히 쿨해지지 않기는 정말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일상을 살아가게 하고, 나를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게 한다.    p.132

 

누구나 처음은 엉망이다. 그럴 수 있다. 처음부터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하는 일을 완벽하게 잘할 수 없다. 시도해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만두면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연습 끝에 잘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자신이 못하는 게 분명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5일도 아니고, 50일도 아니고, 5년이라니, 그 무슨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시간이란 말인가. 그 정도쯤 해봤으면 이건 나랑 맞지 않는다고 포기해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의 시간이다. 그런데 여기, 첫 서핑 수업을 받은 후 파도를 잡기까지 무려 5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람이 있다. 파도의 페이스를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을 때까지, 실제로 서핑을 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한다면, 누구나 미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는 그 5년이라는 시간이 실패와 깨달음으로 충만한 나날이었다고, 절대 공허한 시간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퍼콜린스 편집장이자 20년간 에디터로 살아온 저자는 마흔 살에 처음 서핑에 도전하고, 17년간 고군분투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17년간 노력했지만 뛰어난 서퍼가 되지도 못했으며, 그것이 돈을 벌게 해주는 일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무모하고, 터무니없이 보이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저자가 17년간 서핑을 통해 배운 것은, 인내심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 문제에 직면하는 법 등 인생에 대한 태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살면서 정말 하고 싶은 못하는 일을 찾아 보라고.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못하는 일을 하기 위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잘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바쁜 세상에, 일부로 못하는 일을 찾아서 무수한 시도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라니 대체 무슨 이유일까 궁금해졌다.

 

 

일어났던 모든 일 중에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을 이 상태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모든 순간은 '그 순간' 바로 전에 일어난 순간에 달려 있다. 마지막 한순간도 '그 순간' 전의 순간에 달려 있다. 이것이 무한히 반복되고, 현재의 순간에서는 무한히 긴 과거와 무한히 긴 미래가 다르다.   p.220

 

이 책은 저자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한 편의 칼럼에서 출발했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성공담이 아닌, 끝없이 패들링을 하고 파도를 타기 위해 일어나지만 물에 빠지는 순간이 대부분인 형편없는 서핑 실력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은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공감과 지지를 받았고, 10만 회 이상 공유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못하는 일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이 책에는 서핑에 대한 고군분투기 말고도 저자가 겪어 온 수많은 많은 실패담들과 살면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마주한 순간들이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회사에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는 통보와 함께 걱정한 적도 없던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살면서 걱정조차 해본 적 없는 암 진단과 그 이후에 이어진 일련의 시간들은 저자에게도 만만치 않았다. 다섯 번의 외과수술과 일곱 달에 걸친 화학요법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고, 정신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듯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 험난한 과정을 간신히 버텼고, 그리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본 것이 언제인지,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새로운 일을 시도한 게 언제인지 떠올려 보자. 특히나 자신이 형편없이 못하는 일에 도전해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해본 적이 언제인지 말이다. 저자는 서핑을 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힘들게 번 돈을 아낌없이 서핑에 투자했다. 그리고 여전히 서핑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서핑을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의지,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다시 시작하고 나아지려는 의지 말이다. 이 책은 놀라운 성공담을 들려주지도, 어떤 분야에 통달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가 '형편없이 못하는 일에 끝없이 도전'하게 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어제보다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못하는 일을 아주 오래 하다 보면, 조금은 덜 못하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 뭉클하게 와 닿았던 책이었다. 못하는 일을 하면 그 불편함이 아름다운 무언가로 바뀐다는 걸, 나도 경험해보고 싶어 졌다. 나는 이 책을 덮고 '새로운 못할 거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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