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 과도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아름다운 지적 여정
나탈리 크납 지음, 유영미 옮김 / 어크로스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모든 시기는 저만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미래의 결과로 측정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순간들에 삶이 우리에게 예비해준 것을 포착하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맞게 변화시켜서 다시금 내주는가가 중요하다. 아이가 아이인 것은 성공적인 직장인이나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로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는 우리를 밝아지게 한다. 아이들의 웃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황량할까.    p.32

 

과도기란 누구나 겪는 과정이면서,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시기이다. 내가 잘 알던 삶에서 낯선 세계로 발을 내딛을 때,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 변화를 겪게 될 때 우리는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나가야 할 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과도기가 새로움을 동반하는 창조적인 시기'라고 말한다. 이 책은 과도기에 대한 깊은 탐색과 빛나는 통찰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과도기를 보내기 위해 어떤 조건과 전제가 필요할까. 저자는 이 책에서 공간적, 계절적 변화에 대처하는 자연의 능력을 보여주며 그 어떤 어두운 때에도 희망을 품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탄생에서 사춘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겪게 되는 불확실한 시기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의 모든 시기는 바로 그 순간에만 취할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계획이 빗나갈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할 때, 그렇게 인생길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순간, 삶은 새로워진다.

 

 

위기의 시기, 살아 있음을 향한 동경은 고통 또는 공허감으로 느껴지고 때로는 중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통은 우리에게 뭔가가 맞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공허감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준다... 철학자 아리아드네 폰 시라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자아와 욕구를 넘어서는 것들이다"라고 말한다. 공동체, 모험, 열정, 헌신, 용기, 사랑. "그냥 경직된 채 여기서 모든 것이 어떻게 나빠져가고 있는지를 응시하는 대신,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켜내야 한다."     p.341

 

'혼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바로 이런 책을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탈리 크납이라는 저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저자인 나탈리 크납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독일 철학자인데, 현재 독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동안 철학의 역사나 이론, 그 외에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꽤 읽어 왔지만, 이렇게 재미있고, 공감되고, 우아한 철학 책은 처음이다. 철학을 이런 방식으로 소개할 수도 있구나 라는 놀라운 깨달음과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 순간 철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되어 위로 받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에서 과도기적 순간들을 읽어 내고, 존 윌리엄스의 소설《스토너》,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 미하엘 엔데의 《모모》 등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과도기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어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철학적 사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개인적인 변화의 시기와 사회적인 변화의 시기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자 나름의 삶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함께 극복해 나아가야 하는 사회적인 위기 앞에 서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코로나 사태라는 대미문의 팬데믹으로 문명의 근간이 흔들리는 요즘이니 말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불안한 시기들이 우리의 인생에 주는 의미를 깨닫고 이런 시기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시기들을 다른 태도로 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 같은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에 정말 딱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행복과 절망이 종종 서로 한 뼘 거리에 있음'을 알려주는,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과도기를 인생 중에 만나는 시적인 지대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시기를 불안하고, 불안정한 시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은 무척이나 달라질 테니 말이다. 이 책이 '우리 시대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과도기를 창조적 전환기로 만들어내고 싶다면, 정신적 면역력을 키우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미리 결정한 것이 없었고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결정한 것이 없고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 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p.51~52

 

강상호는 1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형 강영호의 유고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열다섯 군데를 소개하는 책을 쓰던 중이었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강상호는 형의 유품들을 정리하다 여러 장의 사진이 분류되어 있는 두툼한 파일북을 발견하고, 형이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강상호는 출판사 직원과 함께 형이 취재한 여행지들을 답사하기로 하고, 그 과정에서 외진 산 속에 있던 천산 수도원을 찾게 된다. 해발 890미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으며, 건물 안에는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긴 복도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둡고 습한 지하방에서 벽에 빼곡히 옮겨진 성경 구절들을 발견한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 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젊은 강사가 천산에서 발견된 벽서를 중세 유럽 책 중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히는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기고문을 신문에 수록한다. 그런데 켈스와 천산의 필사자들은 왜 글자에 장식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혔을까.

 

열네 살 소년 후는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는 어둑한 밤, 200년 된 키 큰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해안 초소에 근무하는 박 중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이 밝으면 박 중위가 마을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획한 일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는 품 속에 칼을 움켜쥔 채 사촌 누나 연희의 복수를 하려는 참이다. 박 중위는 온 동네를 떠들고 다니며 연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는데, 정작 연희가 사랑을 받아 주고 나니 그녀를 버렸다. 결국 연희는 괴로워하다 집을 나갔고, 아무도 그녀가 왜 마을을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후는 복수를 위해 박 중위에게 칼을 휘둘렀고, 후의 아버지는 그를 산꼭대기에 있는 천산 수도원으로 대피시킨다. 후는 그곳에서 성경을 읽고 쓰는 일을 몸에 익혔고, 점차 하늘집의 형제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후는 그곳 형제들의 독특한 믿음과 특이한 삶의 태도에 점차 익숙해졌고, 일종의 평안함 같은 것을 느끼며 그들 속으로 섞여 들었다.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난다.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사랑의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조절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사랑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사랑이 무책임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행사된 폭력이 사랑에서 빠져 나왔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리에서 다시 행사된다.    p.125

 

72개의 지하 방으로 이루어진 천산 수도원에서 발견된 엄청난 분량의 벽서와 함께 시작된 이 작품은 다섯 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형의 유고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을 답사하고 벽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이야기, 출간된 책을 읽고 천산 수도원의 벽서를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글을 쓴 차동연의 이야기,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준 장의 이야기, 그 속에 나오는 군사정권의 핵심 한정효의 이야기, 그리고 사촌 누나 연희를 능욕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고 천산 수도원으로 도피하게 되는 후의 이야기. 이렇게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다섯 개의 이야기는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욕망과 권력, 비극과 정치 등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끼어들어, 어떤 영향력을 주는지를 들여다본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해야 하는 순간 (p.321)'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주하게 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견디게 하고, 이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을 넘어서도록 한다. 나는 이승우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종종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 2012년 출간되어 2013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작가가 십 수 년 전부터 구상했던 모티프가 마침내 실현된 작품으로, 욕망과 죄의식?신학과 실존?윤리와 정치 등 이승우 문학의 화두가 집약된 정점이자 정수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묵직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작품인데, 이번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곳'의 부당함이 어쩔 수 없이 불러내는 '저곳' (작가의 말),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 산 자에게로 이어지며 서서히 드러나고, 이들의 '이어 쓰기'가 거듭되는 동안 (작품 해설) 펼쳐지는 신학과 윤리의 세계를 만나 보자. 이승우의 책을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그 한 권은 단연코 <지상의 노래>일 거라는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의 전쟁
이종필 지음 / 비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면 과거를 복원하는 게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지도 몰라요. 쉽지는 않겠지만."
"그게 현실에서 가능하다고요? SF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고요?"
"이론적으로는요. 최근에 물리학자들이 제시한 이론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 우주를 기술하는 기본적인 함수의 개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서도 무한히 많은 정보가 필요하지 않겠죠. 이건 사실 인공 지능 기술 중 '딥러닝'이 왜 그리 성공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아이디어입니다."    p.91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이른 아침, 세종로 사거리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목 없는 시신 하나가 배달된다. 목격자들은 유유히 편대 비행하는 다섯 대의 드론이 동상에 자일을 걸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했다. 게다가 피투성이 시신의 복부에는 촘촘히 박힌 가느다란 핀들이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피해자가 스스로 드론에 매달린 채 머리를 잘라낼 수는 없었을 테니 이건 명백히 살인사건이었다.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시체를 매달다니, 대체 누가, 왜, 어떻게 한 것일까. 시신의 몸에 새겨진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 인공지능 알고리즘 전문가이자 물리학과 교수인 조성환이 등장한다. 그리고 15일, 범죄는 청산되지 못한 아픈 역사로 이어지고, 사건을 풀어내는 중요한 열쇠는 물리학 이론에 있었다.

 

조성환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심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우 속에서 전혀 머뭇거리는 순간 없이 시신을 배달한 드론의 움직임은 제아무리 달인이라고 해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공지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였고, 시신에 남긴 지문과도 같은 흔적인 그림 역시 인간의 작업물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는 가슴부터 복부까지 타카핀이 촘촘히 박힌 그림을 분석한다. 지문 감식 결과 밝혀진 사망자는 국정원에서도 감시하고 있었던 인물로 일본 야쿠자 조직과 관계가 있는 걸로 보였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진에게 야쿠자 자금이 들어갔다는 소문을 토대로 교토 대학교의 고바야시 연구그룹이 물망에 오른다. 일련의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확보를 위해 그들은 최고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황진이’를 보유한 대명대학교 문혜진양자인공지능연구소를 찾아 심층 분석을 의뢰하게 되는데, 사건은 점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홍경수는 말없이 재킷 속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그가 펼친 A4 크기의 종이에는 여인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지켜보던 성환은 깜짝 놀랐다. 현장에 있던 영란과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피해자 이윤철의 가슴에 박힌 그림과 똑같았다.
"기초과학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얘기를 많이들 하시는데, 양자역학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만나면 이렇게 놀라운 일도 가능합니다. 여러분."    p.139

 

이 작품은 물리학자 이종필이 쓴 첫 장편소설로 최신 인공지능 기술과 양자컴퓨팅, 드론 등 근미래를 주도할 기술들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은 훌륭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과학을 소재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은 조금은 워밍업 같은 느낌도 든다. 역사 스릴러로 보기에도 살짝 아쉽고, 그렇다고 과학 이론으로 중무장한 SF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딱딱한 과학적 지식들이 꽤 많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지루할 틈 없이 술술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다.

 

만약 한국에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 질까. 이 작품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이제 우리에게 인공지능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공지능하면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 속 초지능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고, 작가는 훨씬 더 평범하고 지루한, 그러나 꽤 쓸모 있는 녀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오랜 시간 생각해 왔기에 이러한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 과학과 사회 어떤 형태로든 만나고, 대립하고, 이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재미를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놓쳐버린 기회, 한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났고, 그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나는 일하러 갔다.   
-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중에서, p.172

 

십 년 전에 세라는 둔기에 머리를 맞아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치과 의사인 애인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몇 번이나 위협했었다. 그는 세라보다 열다섯 살 정도 어렸는데, 알코올중독자로 자주 그녀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었지만 살해 흉기도,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아 끝내 기소되지 않았다. 청소부인 나는 원래 매주 화요일에 세라의 아들 에디의 집을 청소했는데, 세라가 죽은 후 에디가 그녀의 집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결국 세라의 집을 청소하게 되었다. 침실을 처음으로 청소한 날에는 너무도 끔찍했는데, 그녀의 피가 튀어 굳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다 침대 밑에서 권총과 엽총을 발견하게 된다.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지만, 총을 보자 범인을 총으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나는 청소부가 탐정인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세라와 친구였던 나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작정하고 보니 범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용의자 명단은 계속 늘어났다. 판사, 경찰관에서 유리창닦이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이 용의자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사건 당일 밤에 대한 알리바이가 없으니 용의자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 내가 세라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건 당일에 세라는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해서 애인이 그녀를 위협한다고 말했었다. 비슷한 상황이 너무 많았음에도 그와 헤어지지 않고 끌려 다니는 그녀에게 짜증이 나 있었던 터라 당시 그녀에게 경찰을 부르라는 얘기만 하고 끊었던 것이다. 그때 그녀에게 바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작품인데, 단 9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담고 있는 것들이 풍부해 마치 장편처럼 읽히는 작품이었다.

 

 

오클랜드에서는 날마다 저녁 해가 태평양으로 넘어가면 그건 또다른 하루의 끝을 의미했다.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살아온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직선적 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소설처럼 우화가 되고 불멸성을 얻는다. 담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부는 멕시코 소년. 젖소에 머리를 기대는 테스. 그런 정경은 기억 속에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해는 언제까지나 계속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 '초승달' 중에서, p.350

 

이 책은 <청소부 매뉴얼>로 처음 만났던 루시아 벌린의 두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그녀는 평생 77편의 단편소설을 썼는데, 전작에서 43편이 소개되었고, 이번 신작에서 22편을 만날 수 있다. 루시아 벌린은 200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1년 만에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문학 천재라고 불린다. 무명작가였던 소설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로 사후 20년 만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루시아 벌린의 작품들은 상당수가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해서 네 아들을 부양하는 가운데 밤마다 글을 썼다. 세 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중독, 불안정한 생활 반경,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했던 삶의 경험들이 모두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무엇의 시작이었다, 라거나 그때, 또는 그 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 라고 한다(p.218)' 라는 문장처럼 루시아 벌린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도시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과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공감과 이해를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루시아 벌린 특유의 반짝이는 유머와 통찰력, 담백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해져서 근사한 재미를 안겨 준다. '레이먼드 카버의 근성과 그레이스 페일리의 유머에 루시아 벌린만의 독특한 위트를 더한 기적 같은 일상을 만날 수 있다'는 소개 문구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건져 올린 보석 같은'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루시아 벌린의 작품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체 1~3 세트 - 전3권 (무선)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짝이는 하늘 아래 서 있으니 갑자기 우주가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작아서 혼자만 그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우주는 심장이나 자궁이었고 자욱하게 깔린 붉은빛은 그 안을 채우는 반투명한 혈액이며 그는 혈액 속에 둥둥 떠 있는 듯했다. 불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붉은빛은 심장이나 자궁이 박동하는 것 같았다. 그는 거기에서 인류의 지혜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거대한 존재를 느꼈다.     - 1권, p.145

 

당신은 인생에서 중대한 이변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인생을 단숨에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지는 일 말이다. 세상에는 변화무쌍한 요소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에 그런 이변이 아직 없었다면, 그 삶은 일종의 우연이다. 하지만 행운도 결국에는 끝나는 법이다.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삼체>는 중국 과학 소설의 3대 천왕이라 불리는 류츠신의 작품으로 아시아 최초로 휴고상을 수상했다. 중국 과학 소설이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것이 <삼체> 1권이 소개되었던 2013년이었다. 그리고 2권이 출간된 것은 2016년, 대망의 3권이 2019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분량 또한 전체 3권을 합하면 거의 이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페이지라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 개정되어 나온 리커버 세트는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고급스럽고, 아름답다. 기존 버전에서 다소 복잡했던 표지 이미지가 이번 개정판에서는 아주 심플하게 디자인되어 인상적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은 것이 지구 삼체 운동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인류 외부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했다. 인류 문명은 자기 내부에 강력한 분열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1권, p.357

 

1권에서는 과학자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줄줄이 자살하고, 환경 보호론자들의 활동이 지나치게 왕성해지기 시작하고, 과학 연구 기관과 학술계 범죄가 급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런데 범죄 동기가 모두 이상하다. 돈이나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고 정치적 배경도 없고, 그저 단순한 파괴였던 것이다. 신소재를 연구하는 과학자 왕먀오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경찰과 군인을 통해 현재 과학계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을 조사하던 중 삼체라는 가상현실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세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기이한 “삼체 세계”는 기온이 온화하고 태양 운동이 규칙적인 항세기와 하루에도 혹한과 폭염이 번갈아 휘몰아치는 난세기가 불규칙하게 교차하면서 문명이 멸망하고, 또 새로 시작하고 있었고, 가상현실로만 치부했던 그것이 진짜 현실 세계와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규모가 커진다.

 

 

 

 

지구 삼체 운동은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가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의 힘을 빌려 인류 사회를 강제적으로 감독하고 개조해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인류는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의 힘을 빌려 인류 사회를 강제적으로 감독하고 개조해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핏 사이비 종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지극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지식들로 중무장되어 있어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합리적인 결론처럼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발전하는 과학문명이 정작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불러온다면 정말 아이러니 아닐까. 류츠신 역시 여기에 주목한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에도 전체 생태계에서 볼 때 사악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극중 예원제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충제 사용은 그저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적어도 중립적인 행위일지라도,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문화 대혁명과 별 차이가 없다'고. 그것이 세계에 끼치는 폐해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라고 말이다.

 

1960년대 문화 대혁명부터 시작해 텐안먼 사태, 양탄 공정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쳐 수백 년 후 외계 함대와의 마지막 전쟁까지 이어지는 '지구의 과거' 3부작 시리즈인 <삼체>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의례히 SF라는 장르를 떠올렸을 때 상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엄청난 역사 속의 정보가 흘러 넘치는 기이한 가상현실 게임부터, 웬만한 스릴러 뺨치게 숨 막히는 군사 첩보전도 있고, 천체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매우 리얼한 자료들에 현대사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격정이 휘몰아치는 시대적인 배경에다 너무도 설득력 있는 외계 문명 탐사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하게 아우르고 있으니 말이다. 류츠신은 작가의 말에서 "과학소설이 다른 환상문학과 다른 점은 그것이 진실과 가늘게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과학소설이 현대의 신화이지 동화가 아닌 것이다" 라고 했다. 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이 작품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SF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소설'이라고 평가 받는 작품의 진면목을 만나 보자!

 

덧. 알라딘에서 <삼체> 개정판 세트 구매시 <삼체>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받을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세련된 텀블러도 받고, 멋진 표지로 옷을 갈아입은 양장본 박스 세트로 소장하면 더 좋을 것 같다!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07046&start=pbann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