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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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눈에는 참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고급주택가에 살고 있고 남편은 의사다. 열흘에 한 번씩 비싼 초밥을 시켜 먹고 쇼핑을 가서도 가격표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카트에 담을 수 있다. 그런 생활이 요즘 들어 점점 숨 막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는 모른다. 어쨌든 돌아가고 싶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정말로 내가 있을 곳이 있지는 않을까?     p.89

 

대기업 홍보과에서 근무 하는 서른 넷 마유미는 빨리 결혼을 하고 싶지만, 마음에 딱 맞는 남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20대에는 애인 없이 지낸 시기가 없었을 정도였지만, 그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결혼이라는 티켓만 손에 쥐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게 될 것 같았지만,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큼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 중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대학 한 학년 선배인 도모아키를 만나게 된다.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미남 의사, 하지만 마유미에게 그는 절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였다. 그는 대학 시절 마유미가 아꼈던 후배 A를 성폭행했고, 그 일로 A는 학교를 그만두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랜 만에 만난 도모아키는 당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은 마유미였으며, A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다가 안되니 자신을 유혹해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말한다. 마유미는 그의 고백에 서서히 마음이 흔들리고, 결혼 상대로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결혼 8년 차인 유카리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간호사로 일하다 한 살 연상의 의사였던 남편을 만났고, 결혼 후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고급주택가에 있는 큰 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 출근 후 청소와 빨래, 장을 보고 식사 준비 등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시부모는 손주가 생기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남편은 매일 밤 늦게 집에 들어왔고 작년부터 8개월 째 전혀 아내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유카리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로 말이다. 유카리는 가끔 자신이 남편에게 어떤 존재일까 생각한다. 아내도 아니고, 어머니도 될 수 없고, 그저 동거인 혹은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처럼 느껴지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온종일 청소와 빨래로 시간을 보내고,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을 위해 간단한 야식을 만들어 주는 게 반복되는, 혹은 전부인 결혼생활이 점점 숨 막히게 느껴지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 말이 없었다. 헤어져 달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불륜 관계를 계속 유지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유카리는 무릎 위에 들고 있던 찻잔을 한쪽에 내려놓더니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이대로 남편이랑 사귀어 주세요."
"왜, 왜 이래요? 이러지 말아요."      p.257

 

유카리가 남편의 외도를 눈치챘을 무렵, 마유미도 도모아키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유미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결혼이라는 티켓이 가짜였다는 사실에 분하고 화가 난다. 하지만 이대로 조용히 물러서기에는 너무 억울했고, 그에게 자신을 속인 일에 대해 후회할 만큼의 상처를 안겨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하지만 그의 부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참을 수 없이 궁금했고, 그의 집 근처에서 마침 외출하는 그녀를 미행한다. 그러다 부인인 유카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말지만, 그녀는 뜻밖의 말을 건넨다. 남편과는 지금처럼 사귀어도 전혀 상관없다고, 부탁이니 이대로 남편이랑 관계를 계속 유지해달라고.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걸까. 불륜 상대에게 헤어져 달라가 아니라,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해 달라고 부탁하는 여자라니 어찌 된 일일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재회>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던 요코제키 다이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의 서사를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누군가의 며느리로, 아내로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들의 모습과 업무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지나게 되면 받게 되는 사회적 시선, 애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혹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자신의 소유처럼 대하는 남성들의 모습 등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데이트폭력, 가스라이팅, 결혼과 시집살이, 육아와 불륜... 대체 왜 여성들의 삶은 이리도 험난한 것인지 혀를 내두르게 되는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는 중심 인물인 마유미와 유카리 외에도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가독성을 높여 준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88년이지만, 2020년인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녀들의 서사가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대부분의 여성 독자들에게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작품일 것이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적인 부분에서도 매력적인 작품이고, 현실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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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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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때의 공포와 절망감이 되살아났다. 어쩌면 그대로 불길에 휩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죽는 게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고통은 죽음보다 괴롭다. 지로. 나의 지로. 그 목소리, 그 미소 그리고 그 젊은 육체. 두 번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내 평생 한 번뿐이라고 해도 좋을 연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게 끝을 맺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지로와의 추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p.104~105

 

대기업 회장의 비서인 기리유 에리코는 업무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거의 없어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랬던 그녀에게 여덟 살이나 어리고 잘생긴 애인이 생긴다. 에리코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을 만큼 사랑에 푹 빠졌다. 그런데 회랑정이라는 료칸에서 의문의 화재가 일어나 애인이 죽고 만다. 그 날은 이치가하라 집안 사람들이 일 년에 한 차례 갖는 친적들 정기 모임이었다. 에리코도 그날 회랑정에 묵고 있었는데, 자다가 눈을 떠보니 주위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경찰은 그녀의 애인이 그날밤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회랑정에 와서 불을 지른 후 자신도 약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건은 그렇게 애인의 동반자살 시도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에리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고, 동반자살처럼 위장하고 그들 커플을 죽이려 한 사람은 그날 내부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서른 두살인 에리코는 일흔살 노파로 분장해 회랑정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애인을 죽게 한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서. 그날 자신이 모시던 다카아키 회장이 죽고 사십구재를 앞둔 시점에 이치가하라가의 막대한 유산의 행방이 발표되는 유언장 공개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녀가 분장한 노파는 다카아키 회장이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선배의 부인이라 그날 참석자로 지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다시 회랑정에 모인 이들은 반년 전 화재가 일어났던 날 모두 그곳에 묵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날 밤 에리코가 범인일 거라고 의심되는 행동을 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범인을 죽인 또 다른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왜 범인을 죽여야만 했을까? 혹은 범인이 다른 사람이었던 걸까. 과연 에리코는 노파의 모습으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범인을 찾아내고 복수할 수 있을까.

 

 

나는 그를 눈으로 좇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위가 콕콕 쑤시는 것 같았다. 나는 정원을 바라본 채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다키아키 씨의 아들을 찾고 있다는 걸 누군가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와 지로가 죽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문득 기념할 만한 날의 일이 되살아났다. 만약 범인이 뭔가를 꾸몄다면 그것은 그날 이후일 것이다. 나와 지로가 처음 만난 바로 그날.....      p.187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국내에 2008년에 출간되었다, 이번에 두 번째 개정판으로 새로운 표지를 입고 다시 나왔다.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작품이라 친자 확인 시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등 과학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뛰어난 가독성과 놀라운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올해 하반기에 일본에서도 개정판이 출간될 예정이며 중국에서는 소설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가 방영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 넘는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여전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나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가장 논란이 많다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충격적인 결말로도 유명하니, 이번 개정판으로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해 보면 어떨까 싶다.

 

유산상속을 둘러싼 재벌가의 탐욕과 암투, 외모 지상주의, 동반자살, 젊은 여성이 노파로 분장해서 벌이는 복수극까지 자극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 누구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 여성의 복수극이라는 중심 플롯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예상을 벗어나 처연한 미스터리로 향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너무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정된 장소에서 특정 인원들을 대상으로 범인을 색출하려는 미스터리로서의 재미와 한 여성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게 되는 지독한 사랑의 드라마가 안겨주는 감정적인 부분까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의 초기작들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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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와 손잡고 웅진 모두의 그림책 33
전미화 지음 / 웅진주니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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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가 아침 일찍부터 출근을 하고 나면, 오빠와 동생만 집에 남는다. 좋아하는 고등어 반찬으로 아침 밥을 먹는 동생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오늘은 또 무슨 재미있는 놀이를 할까 하는 그런 사랑스러운 표정 말이다.

 

오빠는 어린 여동생의 세수와 양치도 도와주고, 함께 놀러 나간다. 동생이 힘들어 하면 업어 주기도 하는 오빠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오빠와 동생은 신나게 놀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불이 켜져 있어 엄마가 온 거라고 생각한 남매는 집까지 뛰어 간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엄마가 아니었다.

 

화사한 색상의 밝고 귀여운 분위기였던 그림이 갑작스레 어둡고 거친 느낌으로 바뀌어 버린다. 크고 무서운 사람들이 또 왔고, 오빠랑 동생은 숨는다는 걸 보니,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는 것 같다. 이들 가족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걸까? 빚이라도 진 걸까? 싶은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알고 보니 <오빠와 손잡고>의 시작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와 이십 몇 년 전, 어느 동네의 철거 현장이었다고 한다. 전미화 작가는 부모에게 방치된 영화 속 네 남매의 일상과 뉴타운이라는 화려한 미래 뒤에 잊혀진 철거민 가족의 현실을 이 그림책 속에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초안이 완성된 것은 10여 년 전이라고 하는데, 현실은 여전히 그림책 속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특히나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불러온 갑작스런 실업과 폐업, 파산 위기 등으로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집에서 쫓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고등어 반찬이 춤을 추고, 꽃들이 인사하고, 나무가 안부를 묻고, 구름이 윙크하는 곳이다. 엄마, 아빠는 우리가 어디에 숨어 있어도 잘 찾아주는 든든한 기둥이고, 더 높은 곳으로, 더 나쁜 환경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잠든 남매만 남겨두고 일하러 가야 하는 부모의 삶도 녹록하지 않고,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오빠는 일찍 철이 들었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라 매일이 버겁기도 하다. 세상이 즐겁고 재미있기만 한 어린 동생은 오빠만 같이 있으면 무서울 게 없지만, 차츰 세상의 무게를 배워나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린이들이 희망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도록, 두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도록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린 남매가 마주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그 작은 온기만큼이나 따뜻한 여운을 남겨주는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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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헝거 게임 시리즈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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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올라누스는 그녀가 헝거 게임의 우승자가 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전략 중에 그녀를 우승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녀의 매력이 그에게 영향을 주어 자신을 성공하게 만들기만을 바랐다. 스폰서들을 위해 노래하라고 권유했던 것조차도 그녀 때문에 자신이 받고 있는 관심을 더 끌고 가 보려는 시도였다... 그가 동물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그녀가 그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그는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그녀의 생명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했다.     p.176

 

‘헝거게임’은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년에 한 번, 12개의 각 구역에서 추첨을 통해 선발된 십대 소년소녀 24명이 벌이는 생존 전쟁이다. 24명의 참가자들이 펼치는 치열하고 무시무시한 생존 전쟁의 전 과정은 24시간 리얼리티 TV쇼로 생중계되어 캐피톨 시민들의 오락거리가 된다. 독재국가 판엠의 피비린내 나는 공포정치를 상징하는 '헝거게임'에 맞서는 평범한 우리의 주인공, 캣니스의 성장기를 보여주는 것이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제이>로 이어지는 '헝거게임' 시리즈 3부작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의 10년 만에 '헝거 게임'시리즈 신작이 출간되었다. 캣니스가 열두 살 여동생 대신 자원하여 참가했던 헝거 게임이 74회 였고, 이번 신작에서 개최되는 헝거 게임은 10회이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64년 전이니, 당연히 캣니스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판엠을 통치한 악랄한 독재자 '코리올라누스 스노우'이다. 물론 18세의 스노우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때 위대했던 스노우 가문의 열여덟 살 후계자인 스노우는 할머니와 사촌 누나와 함께 캐피톨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구역에 사는 인간쓰레기만큼이나 가난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 동안 스노우 가족은 가진 물건 상당수를 팔거나 교환하면서 겨우 버텨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노우는 아카데미에서 최고로 꼽히는 학생이었고, 그는 자신의 경제적인 사정을 세상 모두에게 숨기며 살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위협이 없었다면 별 교훈이 되지 못했을 거야.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그건 벌거벗은 인간성이야. 조공인들 그리고 너도. 문명이 얼마나 빨리 사라졌니. 너의 좋은 매너, 교육, 가족 배경,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것이 눈 깜빡할 사이에 벗겨졌고 넌 너의 본모습을 전부 드러냈어. 곤봉을 가지고 다른 아이를 때려죽이는 아이. 그게 자연 상태의 인간이야.” 
골 박사의 이런 표현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웃으려 했다. "우리가 정말 전부 그렇게 형편없나요?"      p.273~274

 

헝거 게임 제 10회에서는 처음으로 멘터 제도를 시행하기로 한다. 추첨을 통해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스물네 명의 조공인들에게 아카데미에서 가장 똑똑한 졸업한 학생 스물네 명이 각각의 멘터를 정해 주는 것이다. 캐피톨에서는 사람들이 헝거 게임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고, 캐피톨의 젊은이와 구역의 조공인을 짝지어 준다는 점에 사람들은 흥미를 느낀다. 스노우는 헝거 게임에 우승해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갈 계획이었고, 그로 인해 스노우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런데 스노우에게 배정된 조공인은 구역 최하위인 12구역의 루시 그레이 베어드였다. 가장 작은 구역인 12번 구역은 웃음거리였고, 해당 구역 출신 아이들은 헝거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늘 5분 안에 죽었다. 게다가 여자 아이라니 누가봐도 가장 승률이 낮을 거라 예상되는 조공인이었는데, 그녀는 게임의 시작 전부터 캐피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과연 헝거 게임에서는 누가 살아 남아 우승하게 될까. 스노우는 어떻게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고, 경쟁에서 살아남게 될까.

 

기존 '헝거 게임' 시리즈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번에 나온 프리퀄 작품 역시 놓치지 말고 봐야 할 것이다. 혁명의 상징이었던 노래하는 새 모킹제이에 담긴 의미와 헝거 게임이 초창기부터 어떻게 변화하고 유지되어 가게 되는 지 그 과정과 그 이면에 숨겨진 배경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랄한 행동을 하던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고, 그가 악인이 되어 가는 근본 원인부터 과정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작품도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고, 원작 작가인 수잔 콜린스가 제작으로 참여한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만나게 될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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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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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해 보면 시가코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어차피 심술궂은 여자 중에 똑똑한 여자는 없다. 심술은 바보가 부리는 짓이다. 겉으로만 똑똑한 척하는 그런 여자가. 그런 여자는 자기가 똑똑한 척하는 바보라는 걸 모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소문과 험담을 퍼뜨리는 일만을 삶의 보람으로 삼는다. 사실, 남자들도 오십보백보일지 모르지만.     p.47

 

모토무라 시가코는 대형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베테랑 편집자이다. 서른 다섯 살인 그녀는 결혼도 안 했고, 남자와 동거해본 적도 없이, 쭉 독신으로 살아왔다. 회사 안팎에서는 실력 있는 편집자 혹은 남자를 능가하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녀를 노처녀라고 뒷담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남자에게 교태부리는 멍청한 매춘부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모든 여성스러운 것, 귀여운 것 등 지성적이지 못한 것들을 혐오했다. 게다가 그녀는 동년배나 연하의 남자에게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으니, 결혼과 멀어지게 된 것이 의외도 아닌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의 소개로 젊은 신인 작가인 스기조노 신이치를 만나게 된다. 잘생기고, 세련된 도시 남자 같은 분위기의 그에게 반한 시가코는 그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그리고 몇 달 후, 시가코는 신이치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데, 그녀를 직접 만나 소개를 받고는 너무도 실망한다. 그녀가 시가코보다 한참 어리고 아주 평범한, 내세울 만한 장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고, 시시해 보이는 그녀가 신이치의 아내라니 분노의 감정과 함께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과연 그녀의 살의는 어떻게 진행될지, 이야기는 예상했던 지점과 의외의 순간들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표제작인 '살인은 여자의 일'은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깜짝 반전을 보여 주며 이 단편집의 서두를 연다.

 

 

"인간은 뭘 해도 괜찮아요. 범죄 말고는. 범죄도 그 사람이 벌 받을 각오가 돼 있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죽을 만큼 사랑할 때도 있고, 그런 사랑을 잃을 때도 있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정말 바보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그때그때 다른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쓸데없는 참견도 말고."      p.210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미스터리들은 대부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현실에 만족하거나 행복해 보이는 인물이 없다는 점이 애잔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유부남 작가에게 반해 그의 아내를 보자마자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베테랑 편집자, 남편의 불륜 상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는 시인의 아내,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늙은 재즈 가수, 일 년에 한 두 번, 남편과 아기가 잠든 밤 젊은 남자와 일탈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여자, 부모 없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에 시달리다 살인을 저지른 열여섯 소녀, 백화점 보안요원에게 반해 계획을 다 망쳐 버린 여자 도둑 등등.. 섬세하고도 섬뜩한 여자들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오래 전에 <변호 측 증인>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고이즈미 기미코의 단편 여덟 편을 모은 책이다. 사실 파격적이고, 매우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보여줬던 것에 비해 국내에는 계속 작품이 소개되지 않았던 작가였는데, 정말 오랜 만에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가웠다. 사실 <변호 측 증인>이라는 작품이 현지에서 46년 만에 복간되어 20만 부를 돌파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것이 2009년이었고, 바로 2년 뒤에 국내에 소개되었었는데 그 이후로는 작품을 만날 수 없어 아쉬웠던 작가이기도 하다. 고이즈미 기미코는 단편 미스터리에 대해 '아주 적은 매수라는 엄격한 조건 아래서 장편이 방대한 문장으로 묘사하는 무언가를 순간적인 섬광처럼 도려내서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유일하게 만날 수 있었던 그녀의 장편 미스터리 <변호 측 증인>과 이 작품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단편 미스터리 특유의 매력을 느껴 보고 싶다면, 그리고 <변호 측 증인>을 썼던 작가의 색다른 모습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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